정충신

 


'''정충신
鄭忠信'''

[image]
정충신 영정[1]
성명
정충신(鄭忠信)
시호
충무공(忠武公)
봉호
금남군(錦南君)[2]
자(字)
가행(可行)

만운(晚雲)
출생
1576년 조선 전라도 나주목
사망
1636년 6월 6일
본관
금성[3]
1. 소개
2. 생애
3. 기타
4. 작품 속의 모습
5. 관련 문서


1. 소개


조선 중기의 무인. 천민으로 태어나 조선 역사상 가장 끔찍했던 임진왜란에서 살아남으며 충무공의 칭호를 받고 인생 역전을 한 인물이다. 저서로는 시집, 스승 이항복과 함께 유배 기록을 다룬 백사북천일록, 당대의 충신 최명길 등과의 군사 대담을 실은 만운집, 금남집이 있다.[4]
전형적인 야전 참모 스타일. 국경 지대에서 첩보와 외교 방면으로 뛰어났다. 광해군 시절 적극적으로 명 - 청을 오가며 각 세력의 동향을 꿰뚫어서 보고했다. 후금(청)과는 화친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본심으로는 방비해야 함을 환기시키고 장수들을 살피며 충언을 아끼지 않았다. 광해군 시절부터 그가 없으면 업무가 중단될 정도로 유능했으며, 인조 시절에는 '그를 조금만 더 중용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표하는 사관들의 평가가 있다.
재미있는 점은, 일개 병사로 군 생활을 시작했음에도, '''권율이나 이항복 같은 위인들에게 사랑받는 제자'''가 되었단 것이며, 보편적으로 존경을 받는 대표적인 지장이자 덕장이었다. 특히 장년기에 떨친 명성을 보면, 일반병에서 출세한 인물이라고는 믿기 어렵다. 몇 가지 저서를 남겼음은 물론이고, 무술에도 능했으며 천문, 지리, 점술, 의술에 대한 지식도 해박했다고 한다.

2. 생애



2.1. 출생


1576년 전라도 광주목에서 태어났다. 어린시절까지는 천민으로 지내왔기 때문에 글을 배우지 못했다고 한다. 친부 계통의 조상이 어땠든지 간에, 모계혈통 때문에 미천한 태생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선 다음과 같은 근거가 있다.
  • 아버지가 아전이라는 기록은 정충신 사후 작성된 행장(다만 가족/친인적이나 지인이 작성하기에 부풀려서 쓰기에 유의.)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도 아전이 고작이었다.
  • 기록 전체를 보자면 경우에 따라서는 정충신은 조부 대부터 대대로 병졸이었다고 하기도 한다.
  • 또 정충신이 권율의 보고서를 국왕 선조에게 바치고 면천되었으며, 이후 관직에 오른 과정도 기록이 확실하지 않다. 일각에서는 광주부에 예속된 심부름꾼이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전이라는 벼슬로 면천을 시켜주고, 다음 해 무과 급제자 명단에 포함시켜 벼슬을 주었을 가능성을 주장하기도 한다. 과거 급제자는 조부의 이름까지는 당연히 기재하여야 하는데, 당장 조부의 이름조차 무엇인지 기록이 전혀 없는 상황이고, 뜬금없이 7대조 할아버지의 이름만 기록되어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록에서 정충신이 선조에게 장계를 전달하고, 그대로 이항복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다고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이 시점에 아전 벼슬(?)을 주었을 가능성은 낮다. 이항복의 밑에 있었다는 것은 어쨌거나 중앙으로 진출했다는 얘기인데, 과연 지방 관리인 아전으로 만들었을까? 일단 인조실록 14년 정충신의 졸기에서는 출신이 아전이라고 기록되어 있기는 하지만, 여기에서는 '광주 아전'이었다.
  • 정충신이 권율 휘하였을 당시 그 신분에 대한 기록은 일반 병사에서 지인(知人)까지 다양하다. 후대 기록이라 좀 신빙성은 떨어진다.
17세 때 당시 광주목사였던 권율의 휘하에 들어가 권율의 노복(奴僕) 역할을 맡아왔다. 일반병이었지만, 민첩하고 영리해서 권율에게 총애받았다.

2.2. 임진왜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권율의 장계를 평안도 의주에 피신 중인 선조에게 찾아가서 전했다. 참고로 '''정충신 말고는 아무도 자원하는 인물이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 당연하지만 당시 광주에서 의주까지 가려면 '''충청도에서 평양까지 이르는 일본군 점령지를 혼자서 돌파해야 했다.''' 이때 어명에 따라 '''면천'''(免賤)이 내려져서 평민으로 승격되었고, 이후 권율의 사위인 백사 이항복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학문을 이수하고, 후에 무과 시험에서 병과로 급제하여 무관으로 임명되어 양반까지 신분이 승격되었다.

정충신(鄭忠信)이라는 자가 있어 나이 17세에 징병에 응모하여 최원(崔遠)을 따라 강화에 이르렀다. 일찍이 왜인들의 목을 베고 이어서 서장(書狀)을 가지고 왔다. 그 얼굴이 매우 아름답고 말이 유창하였는데 극히 조리가 있어서 사람들이 모두 사랑하였고, 그 중에서도 이자상(이항복)이 특히 심하였다. 그래서 그와 같은 이불에서 자고, 길 갈 때에도 꼭 동행하고 앉을 때에도 꼭 붙어 있었다. 그에게 과거 보기를 권하여 마침내 무과에 합격하니, 사람들이 그를 이 판서(李判書)의 별실(別室)이라고 하였다.

- 『기재사초』 임진잡사

미천한 계급에서 역사적인 명장에게 사랑받는 심복이 되었다가, 전쟁 도중에 피신한 왕의 명령으로 신분이 상승되어서, 유명한 대학자의 제자로 들어가는 등, 뭔가 '''양판소 주인공'''의 설정으로 보이지만 '''이게 실제 인물에 대한 기록이다'''. 당시 시점으로 봐도 워낙 소설 주인공 같았는지, 스승님들처럼 야담이나 설화도 만들어졌다. 이후에도, 죽을 때까지 이름에 걸맞은 삶을 살았다.

2.3. 광해군 시절


1602년 조선 사신 자격으로 명나라를 방문하였으며, 압록강을 건너 여진족의 동태와 정세를 파악하는 역할을 하였다가, 1608년 조산보 만호직에 임명되어 무관으로 활동했다. 1618년 스승인 백사 이항복인목대비 폐비론에 반대 입장을 밝히는데, 제자로서 같은 입장을 따르면서 스승을 따라 유배를 떠나기도 하였다. 이때 이항복과의 유배 기록 백사북천일록을 남긴다.
특히 이 무렵의 오성은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한 상황이었다. 의학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중풍에 걸리면 웬만한 사람은 문병도 오지 않는다고[5]할만큼 치명적인 질환인데, 유배지까지 따라와 스승을 간병했던 것.
사르후 패배 후 다시 등용되어 만포 첨사가 되어 국경 수비를 맡았고, 1621년 8월 광해군의 명으로 금나라에 다녀왔다. 조정 대신들의 반대로 국서를 보낼 수 없게되자 국서없이 광해군의 뜻을 전하러 간 것이다.
정충신이 요양성에 도착했지만 누르하치는 만날 수 없었다. 대신 억류된 강홍립 등을 만나고 팔기군의 규모와 깃발의 형태 등도 염탐하여 보고했다.
'''까놓고 말해서, 광해군의 외교는 정부가 아니라, 광해군의 명을 받은 정충신을 위시한 북방 장교들이 진행했다.''' 현대 미디어에서의 과장과는 달리, 광해군 시대에는 국운을 걸 정도로 외교에 열성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왜란으로 더 이상 적극적인 견제가 힘들어진 반동으로 첩보와 외교에 힘써 광해군-인조의 외교 정책을 만들어 낸 선조 시절과 광해군의 난정과 후금의 강성으로 운신의 폭이 극히 좁아진 인조 시기에 열성적이었다. 인조 시기 서인 세력이 고려 때도 금과 송을 함께 섬겼는데 화친 못할게 뭐냐고 하고, 인조는 가도의 모문룡 잔당이 밖으로 나와 평안도 땅을 위협할지도 모른다며 토벌을 논의하던 것과 달리 광해군 시대의 북인 세력은 오랑캐와 싸우자며 헛소리를 하다가, 정작 사르후 전투에서 처발리자 우리 탓이 아니라는 변명을 외교랍시고 진행하던 수준이었다. 그리고 대놓고 북인을 밀어주며 타 당파를 배제해 이런 정국을 만든게 광해군이다. 외교적 안목 부분은 광해군이 뛰어나지만 내치가 엉망이라 정작 자기 정책 지지해줄 인원은 싹 몰아내놓아 소 끌리듯 끌려다니는 상황을 초래했다. 그 탓에 광해군은 정부가 아니라 정충신 등을 중심으로 외교를 진행해야 했고, 홍타이지를 포섭하려 하거나 홍타이지와 따이샨을 이간질시켜서 후금 후계자 구도에 내분을 일으키려는 공작 시도나 후금의 내부 군사정보 등을 빼내는 첩보 활동 등을 벌여야 했다.[6]
그나마 현실적인 외교 활동으로 정력적인 모습을 보인 인물들은 윤휘, 이경전, 이민성, 황중윤 같은 당색이 약한 실무 관료들과 정충신 같이 변방에서 직접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는 무장들이었다. 그는 최전방의 무관이면서도 상당한 지식인이었으며, 외교와 첩보에도 밝았기 때문에, 광해군 시절에는 명 - 청 세력의 동향을 조정에 알리는데 공헌했다.

2.4. 이괄의 난


인조반정 때도 묵묵히 최전방에서 업무를 수행했다. 인조 정권이 친명배금을 했던 것은 집권의 명분으로 내세운 탓에 속으로는 명나라가 망해가고 있고 떨어지는 편이 낫다는 것을 알고 상당수의 신료들도 현실을 깨닫고 명과 거리를 두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하지만 그놈의 집권 명분으로 내세운 탓에 겉으로 완전히 부정할 수 없던 지경에 이른 것이었다. 인조 정권이 후금에 바짝 날을 세운건 아무리 길게 잡아도 즉위 3년차를 넘기지 않는다. 그리고 이건 1626년 2월 후금이 영원성에서 명군 원숭환에게 패퇴하며 세력이 위축되며 조선이 한결 우호적으로 변한 국제정세를 반영한 결과였다. 이런 낙관적인 기류는 후금군이 조선군의 거점을 무시하고 수도를 노리고 직공할 때를 대비해 열심히 육성한 전략기동군이 수도로 칼끝을 돌린 이괄의 난으로 산산조각난다.
이괄의 난이 발발하자, 이괄이랑 친하다는 이유로 조정으로부터 의심을 받는다. 당시 정충신의 입지는 참으로 위태로웠다. 조정에서는 반란자로 의심하는 상황이었고, 임지에 남아있으면 반란군 세력에게 포위당해서 죽임을 당하거나 포섭될 것이 자명했다. 결국, 정충신은 성을 버리고 '''탈출'''하여 도원수 장만에게로 가서 고발당했다(...).
하지만 반란 초기, 정충신은 황해도로 후퇴한 도원수의 명을 수행하여 평안도를 오가면서 군무를 돕거나, 청나라의 위협이 도사리는 평안도의 거점을 포섭하는 핵심 임무를 맡았다. 결국 이괄이 움직이자 '''남이흥'''[7]과 함께 황주에서 맞섰으나 패배한다. 이괄은 평안도의 3만 군세 중에서도 1만 2천을 넘는 대병력을 거느렸지만, 정충신은 다른 임무를 맡았다가 싸운 것이었기에, 다른 파견 임무를 맡았던 장수들에게 합류하여 싸웠다.[8]
이후에는 병사들의 질적인 차이 때문에 이괄의 진격을 따라잡지 못했다. 하지만 반란군에서 낙오하거나 사로잡은 이들을 포섭하고 이괄의 진격로를 수습하면서 추격을 계속한다. 이괄이 한양에 다다르자 (야사에 따르면) '이괄이 어가를 추격(=인조를 사로잡으면)하면 상책이요, 한양에 남으면 하책이다'라는 말을 남긴다. 결국 이괄은 한양에 남았고, 정충신의 말대로 이괄은 몰락하기 시작한다.
마탄 전투가 끝나고 4일 후, 정충신은 남이흥과 함께 2천명의 병력으로 야밤에 숨어들어서 이괄군을 도발한다. 이에 낚인 반란군은 전 병력을 동원해서 안현에 세운 정충신의 진지를 공격하지만, 고춧가루와 함께 돌풍이 몰아치는 와중에도 "한명련이 죽고, 이괄은 패했다!"라고 소리쳤던 남이흥의 기지 덕분에, 병사들이 탈주하면서 지휘권이 와해되고 한양을 점령한지 2일 만에 대패했다. 남이흥의 진지가 박살나는 와중에도, 정충신군의 진지는 굳건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여러모로 이 승리는 행주대첩과 비슷하게 분석되기도 한다.[9]
이후, 이괄이 도망치자 남이흥과 함께 궁지에 몰린 쥐는 잡으면 안 된다고 극구 말려서 이괄이 자멸하도록 내버려둔다. 애초에 2천명 밖에 안되는 병력으로 1만을 몰아냈으니 쫓을 방법도 없었다. 어쨌든 반역자인 이괄의 친우였음에도, 그를 제압한 공로로 조정에서도 인정받게 된다.
이괄의 난 1달 후 인조는 안주목사 정충신과 연안부사 남이흥을 불러들여 후금에 대해서 묻고, 정충신은 후금의 군사가 압도적으로 강력하다고 하며 야전에서는 후금의 기병에 상대가 안되니 성을 이용한 수비전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괄의 난에 의해 6000명~7000명이던 안주성의 수비 병력도 2000명 밖에 남지 않았고, 3000명~4000명은 되어야 안주성을 지킬 군사력이 된다고 주장했다. 남이흥 역시 올해에는 남쪽에서 군사를 징발하지 않아 군사가 터무니 없이 적다고 말했다.[10]
인조는 군사가 적은 것은 상관없고, 장수가 중요하다고 하며 나가서 싸우지 않으면 뭔 소용이냐고 따지다가 후금의 군사력의 규모를 묻는데 정충신은 대략 9만에 말도 명마로 1만 필이 있다고 답했다. 하지만 영조대나 가서야 겨우 회복된 서북방위 전력이라 인조로서도 적은 오랑캐고, 열심히 싸우면 된다는 정도의 원론적인 답밖에 해줄 수 없었고 무장들도 답답해 하는 것말곤 할 말이 없었다.

'''정충신 : 군사가 없는데 장수가 훌륭해도 누구와 싸우라고? 10만의 군사를 뽑아서 1년, 2년 훈련시키면 요동도 함락시키겠다.'''

'''남이흥 : 내가 무능한 놈이지만 군사 수만이 있으면 공을 세우겠다.'''

『인조실록』 5권, 인조 2년 3월 14일 무진 1번째 기사. 연안부사 남이흥, 안주목사 정충신과 함께 오랑캐의 방어 등에 대해 의논하다.

두 명장의 직언에 인조는 술과 안주, 그리고 표범 가죽을 하사였으나 당장 도와줄 여력은 없었다. 남이흥은 부족한 병력으로 정묘호란 당시 장렬하게 싸우다가 결국 성이 함락되었을 때 불을 지르고 그 불에 뛰어들며 "조정 때문에 군사 훈련 한 번 못해본 것이 억울하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정충신과 남이흥이 주장은 광해군 때의 6~7000명의 절반인 3~4000명 정도로 복구시켜야한다는 것이었다.[11] 당장 인조는 즉위해서 했던 것이 민심을 얻기 위해서 남쪽에서 병력을 징발해 북방 지역에 배치하던 광해군의 행동을 그만둔 것인데 인조실록에 따르면 '''무려 5~6년간이나 이런 행동이 지속되었다고 하며''',[12] 심지어 도성 내의 군사까지도 뽑아서 북방에 배치해서 광해군에게 도성 수비할 병력도 없다면서 북방에 여진족을 대비해 군사 배치를 과하게 하는 행위를 그만두라는 말이 나왔을 정도였다. 당장 저 때 남이흥도 '''금년에''' 군사를 징발하지 않아서 병력부족이라는 얘기를 꺼낸다. 그리고 인조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6~7000명에 달하던 군세가 배치되어있던게 '''불과 얼마전의 이야기였다.'''[13]
조선의 경제력으로 중앙군과 서북군을 한꺼번에 재건하는건 무리였다. 비용도 비용이지만 노비 문제, 사족층의 군역부담이라는 사회경제 문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단기간에 개선할 수도 없었다. 결국 인조 정권은 중앙군 강화에 주력한다. 훈련도감을 받칠 중앙군으로 호위청과 어영청을 신설하고, 경기 일대 병력을 재편하여 총융청까지 신설한 결과 즉위초 6천 선이었던 수도권 방위병력을 정묘호란 직전에는 2만 5천까지 늘리는데 성공했다.
그렇지만 인조 4년에 5천명을 추가로 배치하고, 정충신과 남이흥은 안주성을 방어할 것을 주장하며 광해군 때의 절반을 복구하자는 의견은 결국 5천명의 예비대가 있음에도 들어주지 않았는데 그 이유로 인조측은 이 때 모문룡을 경계하면서 '''모문룡이 후금에게 공을 세운게 없으니 그냥 투항할리 없을테고 그렇다면 필시 우리 나라를 도모해 보려는 마음을 가질 것이니 그 점이 더욱 염려된다고 발언한다.''' 이렇게 후금에 대한 방어보다 모문룡에 대한 경계를 우선시한 탓에[14] 정묘호란이 얼마 지나지 않아 벌어졌을 때 남이흥은 위에 설명하듯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자결해야했다.[15]
설상가상으로 정충신의 운신도 자유롭지 못했다. 인조 초기 주로 북인들이 주도한 굵직한 반란이 이괄의 난 외에도 유몽인, 박홍구, 유효립 등 줄줄이 이어지는데 이때 역적들 문초해보면 단골로 튀어나오는 이름이 인조 숙부 인성군과 이괄, 기자헌, 그리고 정충신이었다. 그러니까 '''역적들 문초만 했다하면 정충신이 가담하기로 했다는 진술이 쏟아졌다.'''
이는 첫째 무신이라서 군사력을 동원할 수 있었기 때문이고, 둘째 인조 정권 실세 특히 김류하고 선이 전혀 안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김신국, 정온, 윤휘,[16] 이경전, 남이공 같은 북인 실무관료들이 김류의 지지 아래 인조 정권에 연착륙했는데 이쪽은 그런게 전혀 없어서 역모고변에 이름은 단골로 나오는데 보호해줄 사람이 인조밖에 없었다. 인조는 정충신은 아무리 이름이 자주 나와도 고신 한번 하지 않고 연루시키지 않았지만 핵심 요직에 박아놓을 수는 없었다. 조선은 왕이 다 하는 나라가 아니다. 위에 언급된 1등공신 김류 낙하산 타고 내려온 관료들도 서인쪽 시선이 마냥 곱지 않아서 일부는 중앙에서 빼서 북방으로 보내야 했다. 하물며 아무 줄도 없는 정충신이야.

2.5. 정묘호란과 최후


관직 재직 중에 와병(臥病) 하기도 하였으나, 1627년 정묘호란이 발생하자 부원수에 임명되었다. 정묘호란 때는 무난하게 수비를 했으나, 이괄이 입힌 피해를 복구하지 못해서 활약을 하지는 못했다.
위안이 있다면, 이후의 병자호란에 비하면 조선군은 후방으로 물러났을 뿐, 이괄의 상처가 남은 상태에서도 상당수의 주력군을 보존했다는 거다. 또한, 물자도 넉넉하게 비축한 상황이었다. 죽기 전의 마지막 전쟁에서도 부원수로서 노력했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정충신과 같은 연배로서 함께 활약한 남이흥은 안주성에서 장렬하게 전사했다.
1633년 조선청나라와 단교하는 것에 반대하였다가 충청도 당진으로 귀양을 가기도 하였다. 물론 관례대로 금방 석방되어서 포도대장, 경상도 병마 절제사를 역임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 병세 악화로 관직에서 은퇴하여 와병했다가 그 해 5월, 6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인조는 그럭저럭 대했으며 병을 돌봐주고 슬퍼했다는 기록이 있다.

3. 기타


광주광역시 구도심의 주요 도로인 금남로는 정충신의 군호 금남군에서 따온 것이다. 그 밖에도 청렴한 성격이나 지장으로서 명망이 높았다. 심지어 야담에는 몇 가지 전설이 전해진다. 스승이었던 이항복, 권율 같은 걸물들처럼 탄생설화까지도 존재한다. '''야담과 전설에서는''' 만주의 호족들의 추장들에게 식견을 설파하는 장면도 나온다. 생전에 안습한 일을 많이 겪었음을 생각해보면 그나마 위안거리일지도...
결과적으로, 정충신에게 주어진 충무공이라는 시호는 당대의 지식인들이 내린 평가이다.[17] 결과 만능주의가 판치는 현대인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면도 있지만, 평생 동안 전쟁터를 구르며 다방면으로 조국에 이바지했던 면모를 보면, 그는 이순신, 김시민처럼 유명한 장수들과는 다른 개성을 지닌 '''충무공'''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부원수의 직책을 가지고도 워낙 청렴하게 지내어 셋방살이를 전전한 기록이 있다. 이후 숙종 대에 이르러서[18]는 가세가 몹시 기울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에 숙종, 영조, 정조 재위기에 이르러 정충신의 사당을 세우고 후손들을 승진시키라는 명령을 내린다.
몇 가지 설화가 있는데 그 중에 일단 두 개만 소개한다.

하루는 정충신이 공부를 하고 있는데, 이항복의 사위가 장기를 두자고 졸라댄다. 이 사위는 장인이 양반이 아닌 정충신을 아끼는 걸 보고 질투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장기를 하면서 '''"그냥 하면 재미 없으니까 3번 둬서 지는 사람이 목 날아가는 걸로 하자"'''는 내기를 걸었다. 정충신이 거절하면 졸장부라고 놀릴 의도였는데, 정충신은 내기를 받아들였고, 장기에서 이겼다. 사위가 튀려고 하자 정충신이 잡아다 칼을 잡으며 말하길 '''"사나이가 말을 물려서는 안 되지만, 나는 이 집에 신세를 지고 있으니 목을 치진 않겠소"'''라며 목 대신 상투를 잘랐다. 사위가 이를 이항복에게 고자질하자 이항복은 정충신을 불러다가 '''"목을 자르기로 했으면 잘라야지 왜 안 잘랐냐!"'''며 호되게 호통을 쳤다. 그러면서 '''"저 녀석을 도원수 감이라고 생각해서 데려왔더니 부원수 감밖에 안 되는군"'''라며 실망했다고. 실제 정충신은 부원수까지 밖에 오르지 못했다.[19]

사르후 전투에서 명과 조선군이 패하자 뒷수습을 위해 정충신이 사신 행렬에 끼여 후금으로 갔다. 후금 쪽 장수가 "조선은 우리를 어떻게 보느냐?"고 묻자 정충신은 "대도(大盜)로 봅니다"라고 태연히 대답했다. 후금 장수가 우릴 도적떼로 보냐며 벌컥 화를 내자, 정충신은 '''"천하를 훔치려는 자들을 더러 대도라고 하지 뭐라고 하나?"'''고 하자 그제서야 기분이 좋았던지 후금 장수도 껄껄 웃었다. 정충신은 조선으로 돌아오면서 후금의 힘이 커지고 있으니 큰일이라며 한탄했는데, 이는 훗날 현실이 되었다.


4. 작품 속의 모습


윤승운 화백의 '맹꽁이 서당'을 보아온 세대 중에는 기억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웹툰 오성X한음에서도 막바지에 젊은 시절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이항복의 제자로 무척 똘망똘망하게 묘사되며 박진의 시신을 고니시 유키나가에게서 빼내는 데 있어 재치있는 역할을 담당한다.
네이버 웹툰 칼부림에서 이괄과 대척점인 모습으로 나온다. 영정의 모습과는 조금 다르게 선이 굵은 얼굴로 묘사되어 있는데, 작가의 해석이 첨가된 캐릭터성과 어울리게 하기 위한 각색으로 보인다. 작품이 진행되면서 냉철하고 뛰어난 두뇌뿐 아니라 상당한 무력도 지니고 있는 인물로 묘사된다. 4부 17화에서 김경서의 회상에서 간단히 언급된다.
대체역사소설 이순신의 나라에서는 관군 측 인물로 등장하며, 실제 역사처럼 의롭고 근실한 인물이지만 왕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이순신에 맞서 근왕군을 이끌다가 정원군의 삽질로 선조가 여진족에게 살해된 후에 이순신에게 투항한다. 작품이 끝나는 시점까지 생존.

5. 관련 문서



[1] 전라북도 장수군 금남군 정충신 영정각에 모셔져있다.[2] 광주광역시금남로가 여기서 유래된 이름이다.[3]전라남도 나주시[4] 사학도 외에는 관심이 적겠지만, 정충신이 남긴 저서들은 가치가 높다. 백사북천일록은 그 유명한 이항복이 유배를 당해서 죽을 때까지 제자로서 함께 지내며 남긴 기록이다. 만운록은 같은 이항복의 제자이며, 문충공(文忠公) 시호를 받은 최명길과의 군사 대담을 실은 책이다. 당시 주화파들의 관점에서 조선군을 둘러싼 정세를 논의한 중요한 사료이다.[5] 즉 "당신은 이제 끝났다"는 의미이다. 중풍으로 떨어진 사람에게 같은 사람이 2번 찾아왔다면 덕을 많이 쌓았다는 방증이란 얘기도 있을 정도다.[6] 반대로 인조 정권은 승정원일기가 공개되면서 인조실록이 심하게 짜깁기된 사료이며 실상과 다른 점이 많다는 점이 밝혀지고 있다. 승정원일기와 청측 기록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고 실록에 근거한 한명기의 주장에 반대하는 의견도 생기고 있다. 그리고 인조실록에서도 정묘호란 이전에 모문룡의 침공을 경계하며 모문룡과 전투를 준비하는 말이 나오나 후금에 대해서는 전문가였던 정충신과 남이흥의 주장을 소외시키고 사실상 모문룡만 신경쓰냐고 대비를 소홀히 하고 만다. 심지어 수많은 병사를 징발했지만 이괄의 난이 안겨준 충격으로 인해 다시 수도권을 반란으로 털릴 것을 우려하여 여유병력을 충분히 만들어냈음에도 정충신과 남이흥이 주장한 절반 수준의 복구도 해주지 않았다. 당시 군량 등의 문제가 있던 것은 사실이지만 정충신이 요구했던 것은 군사를 1~2000명만이라도 늘려달라는 것이었지, '''이괄의 난 이전 수준의 복구를 바란 것이 아니었다.'''[7] 충장공 남이흥. 정충신이 지장으로서 이름을 날렸다면, 남이흥은 노련하면서도 격정적인 베테랑이었다. 정묘호란 때 장렬한 자폭으로 유명한 바로 그 영웅이다. 정충신이 전략과 안목에서 뛰어났다면, 남이흥은 기개와 전술에서 뛰어난 모습을 보여줬다. 참고로, 이괄까지 포함한 세 사람은 본래 친했다고 한다.[8] 정충신 - 남이흥의 본래 임무는 도원수가 비우고 떠났던 평양성 재점령 및 수비였다. 이때 받은 병력은 1800명이었다. 반란 초기에는 도원수 장만이 정충신에게 8000 병력을 주겠다는 장계가 있는데, 당시에는 장만조차도 5천 군사가 없었으니 미래의 계획을 논한 문장에 가깝다. 관군이 너무 적지 않냐는 생각이 들 수도 있는데, 이괄군이 징집한 반란 부대를 빼면 대다수의 북방 병력은 각지에 흩어져 있어서 모으는 데 시간이 걸렸고 이괄군은 한 덩어리로 움직이고 있었다.[9] 하지만 실제로는 이길 가망이 없었다고 한다. 애초에 승자인 정충신 본인이 천운이었다고 언급한다. 그걸 알면서도 싸웠다는 점에서 배짱이 두둑함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야밤에 기습적으로 한성부에 침입하여 언덕을 점령하자는 계책을 낸 것은 정충신이었고, 고춧가루를 준비했다가 역풍이 불 때 휘날리면서 기지를 부린 사람은 남이흥이었다.[10] 광해군 10년때부터 군사들을 징발하기 시작했고, 이는 궁궐공사와 함께 민력을 엄청나게 소모시켰다. 인조가 즉위하고 전략기동군을 편성하기 위해 삼남에서 5천을 추가로 징발했는데 그 군사들이 반란에 동원되어 녹아버렸고 이때는 징발을 멈춘 상태였다. 올해에 징발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것을 뜻하는 것.[11] '''이미 2000명이 있으니 1000명에서 2000명 정도만 추가하자는 것이었다.''' 서북 지역에 대규모 병력 배치나 이괄의 난 이전 수준의 복구도 아니고 그냥 후금의 침공 루트인 안주성에 이전의 절반만이라도 해둬서 후금의 침공을 대비한 방어전이라도 해두자는 것이었다.[12] 심지어 인조 1년부터 해마다 군사 징발로 싸우기도 전에 나라 안이 피폐해진다는 말이 돌 정도로 방비에 투자하고 있었다. 실제로 광해군은 홍타이지에게 편집증적인 경계심을 품고 있었고, 훗날을 보면 내치에는 등신, 외교에는 귀신인 광해군의 안목이 맞았지만 당시 사람들은 이런 행위를 지나친 것이 아니냐고 이해하지 못했다.[13] 또 정충신이 10만 대군을 이 때 운운한 것을 두고 정충신도 행복회로라는 말이 있는데 '''당장 저 때 정충신은 후금이 쳐들어오면 전면전으로 못 막으니 방어전을 해야한다고 주장해서 인조에게 까이던 상황이다.''' 거기다가 이괄의 난이 벌어진지 1개월 밖에 지나지 않은 상태인데 행복회로를 돌리고 있을 상황도 아니다.[14] 이 때 인조는 변란이 벌어진다면 후금이 아닌 모문룡이 먼저일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15] 명나라가 개판인 상황이라는 것을 인조 정권도 사실 이미 이해하고 있었기에 명나라에 속해있다고 해도 모문룡을 신뢰할 수 없는 상황이기는 했다. 하지만 정작 정묘호란이 벌어지기 직전까지 모문룡의 침공만을 우려하다가 후금의 공격에는 상대적으로 매우 소홀하게 대비하여 남이흥과 정충신의 간언대로 하지 않은 실수를 범하고 남이흥이 성과 함께 자결하는 상황을 만들었다.[16] 이쪽은 윤두수의 아들로 성골급(?) 서인이었지만, 광해군의 외교정책에 찬동하여 광해군의 총애를 얻은 탓에 서인 중 과격파들에게 배신자라며 살해위협까지 받았다.[17] 단, 정충신은 최명길과 함께 죽는 날까지 인조 정권에서 깊은 신뢰를 받지 못했다. 서인들은 정충신에게 이괄 토벌의 공으로 1등 공신을 줘놓고도, 심심하면 이괄과의 친분을 물고 늘어지며 그를 한직에 잡아놓았다.[18] 숙종 10년 3월 11일 정축 3번째 기사[19] 이는 사실과 다른 야사인데, 정충신은 애초부터 출신 계급이 낮고 군인 생활을 해서 최명길과 장만 정도를 제외하면 서인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이처럼 붕당적인 색채가 적은 점은 그 출신 태생과 함께 높은 지위에 올라가지 못한 족쇄로서 작용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