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 비

 


'''KBS 1TV 대하드라마''' '''
王과 妃
'''
[image]
<colbgcolor=#cc9966> '''국내등급'''
<color=#373a3c> '''15세 이상 시청 가능'''
'''방송 시간'''
토요일, 일요일 밤 9시 45분
'''방송 기간'''
1998년 6월 6일 ~ 2000년 3월 26일
'''방송 횟수'''
186부작
'''방송사'''

'''장르'''
대하사극
'''제작'''
자체제작
'''연출'''
김종선, 김용수 → 윤용훈, 윤창범
'''음악'''
김동성
'''극본'''
정하연
'''출연자'''
임동진, 채시라, 최종원, 한혜숙, 조경환, 안재모, 정태우
'''해설'''
이강식
1. 개요
2. 비판
3. 극중 인물 묘사의 특이점
4. 캐스팅
5. 오프닝
6. 이야기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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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용상은 하나 뿐입니다. 결코 둘이 될 수가 없지요."'''

1화 중 인수대비의 대사. 도원군 부인이었던 시절에 도원군에게 한 말.

용의 눈물의 후속작으로 1998년 6월 6일 ~ 2000년 3월 26일까지 KBS 1TV에서 방영한 186부작의 대하사극.
문종 사후부터 세조를 지나 연산군의 사망까지를 다루었으며, 전작에서는 이성계이방원이라는 확실한 주인공이 있었지만, 이 작품은 뚜렷한 주인공 없이 시대에 따라 얽히고 설키는 정치적 권모술수와 암투를 그려내고 있다.
전작 한명회 신봉승 원작과 그리고 장녹수 내용과 토대로 장면의 작품이다.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조선시대판 격동 50년'''이라 할 만한 작품으로, 문종의 승하(1452년)에서 중종반정(1506년)까지 대략 50년이 다루어졌다. 다만 단종 사후 9년, 공혜왕후 사후 3년, 폐비 윤씨 사사 후 12년, 무오사화 이후 6년 등, 중간중간에 건너뛰는 구간이 있어 실질적으로 다루어지는 기간은 30년 정도 된다.
극이 진행됨에 따라 주인공이 수시로 바뀌긴 하지만, 극 전체를 보면 인수대비가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드라마 첫 회부터 종영을 3회 앞둔 183회까지 등장하며, 승하한 이후 남은 3회에도 연산군의 회상 등으로 계속 나온다. 인수대비는 50년 동안 유력한 대군의 며느리, 세자빈, 대비, 대왕대비 등의 칭호를 가지고 권력의 중심에 있었으며, 인수대비가 한 발 물러나 있던 기간은 작중에서도 거의 건너뛰기 때문에 항상 주역으로 등장하게 된 것. 용의 눈물 종방연 당시 드라마 소개에서도 세조 역을 맡은 임동진이 왕과 비에서 비에 해당하는 사람은 인수대비라고 했으니 이러한 부분을 미리 밝혀두고 시작한 셈이며, 이러한 이유에서인지 드라마 오프닝에서는 남자 주인공이자 초 ~ 중반부의 주인공인 세조 역의 임동진 다음에 세조의 정비인 정희왕후, 중신들을 밀어내고 인수대비 역의 채시라가 나왔으며 세조 승하 이후에는 아예 가장 먼저 나오게 되었다.
극작가인 정하연은 이전에도 장녹수 등의 인물을 주연으로 비슷한 시대를 그린 사극을 쓴 경험이 있으며, 따라서 에피소드나 등장인물이 일부 겹치는 부분도 있었다.

2. 비판


작가가 조선왕조실록을 거의 그대로 복붙하다시피하여 쓴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덕분에 드라마에서 계유정난이 상당히 긍정적으로 묘사되어 방영 당시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1] 김종서 또한 상당한 악역으로 나오며, 계유정난의 주인공 세조는 선역으로 나온다.[2] 하지만 한편으로 의외로 세조의 최측근들인 한명회홍윤성, 양녕대군은 미화없이 악역으로 묘사하는 점이 아이러니. 바로 얼마전에 같은 방송사에서 방영되었던 한명회와 이 점이 가장 대조되기도 한다.
보다 문학적으로 평하자면, 기본적으로 영웅적인 주인공에게도 결함이나 약점 같은 것이 있고, 그로 인해 결국 몰락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고대 그리스의 비극 이래 오랫동안 내려온 줄거리이며, 정하연은 현대 한국의 드라마 작가들 중에서 이러한 분위기의 작품을 집필하는 데, 가장 뛰어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 줄거리에 맞추어 보면 수양대군이라는 주인공은 즉위라는 영웅적인 성취를 이루지만, '자식처럼 아끼던 조카의 왕위를 탈취했다.'는 결함을 동시에 안게 된다. 그리고 수양대군은 권력의 비정함으로 인해 망가져 가는데, 이러한 전개를 선택한 작가의 의도는 '권력의 무서움과 권력으로 인해 초래되는 인간성의 황폐화' 를 보여준다는 것이어다.
극 초반부에는 나약하게 묘사되지만, 강한 권력의지와 아들에게 그 권력을 대물림하려는 욕망을 드러내는 문종은 수양대군과 구체적인 이유는 다르지만, 역시 권력으로 인해 황폐해진 인간의 내면을 드러내보인다. 하다못해 이 드라마는 김종서를 너무 지나치게 폄하를 하였는데 문종의 국상 기간동안 자신의 부하들을 풀어 민가를 감시하게 하고 문종을 향해 곡을 하는 백성을 향해 신나게 두들겨패기까지 한(...) 말도 안 되는 내용까지 썼다. 그 이유가 충격적인데 "새 임금이 즉위하셨는데 이미 죽은 왕에게 곡을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느냐"였다. 한마디로 김종서는 권력에 눈이 먼 간신으로 몰아세우고 조선왕조의 왕실 법도에 대해서도 왜곡이 아주 심한 내용이다. 물론, 이러한 기록은 실록에 없으며, 작가 자신이 창작해낸 것이다.
드라마 극초반부터 권력에 강한 관심을 드러냈고, 의경세자 사망과 함께 사저로 내쫓기자 절망했다가, 결국 성종을 왕위에 올리며 권력을 향해 무한전진했던 주인공 인수대비 역시 연산군에 의해 못 볼 꼴 다보고 허망하게 사망. 죽은 후에도 후궁의 예로 장사지내지는 등 푸대접을 받는데 이 역시 권력의 무상함을 표현한다. 그리고 세조와 더불어 이 드라마의 또 다른 주인공인 인수대비의 경우, 자신의 시아버지가 극 중에서 지나치게 미화된 것과 정반대로 실제 역사보다 훨씬 더 냉혹하고 잔인하게 묘사된다. 극 중 인수대비는 왕위와는 거리가 먼 종친의 군부인 시절부터 왕비가 되고자하는 자신의의 욕망을 거리낌없이 드러내며 시아버지의 측근들을 모아놓고 하루빨리 시아버지가 단종으로부터 옥새를 받아야 한다고 누구보다 강하게 어필하고, 자신의 권력유지에 있어 조금이라도 방해가 된다면 설사 친가족이라도 거리낌없이 제거한다. 드라마 막판에 이 사람이 등장하기 전까지 인수대비는 그야말로 이 드라마의 거의 최종보스급 존재감을 과시하는 편.
요약하자면, 이 드라마는 역사적 기록을 '''취사선택'''하여 주제의식을 표현할 수 있는 인물상을 표현한 것이다.
초반 시청률이 부진했던 원인은 크게 두 가지였는데, 그 중 하나는 극의 내적 요소에 있었고, 다른 하나는 고증 차원이었다. 먼저 문종을 중심으로 한 조정 내신들의 대사는 드라마가 아닌 연극 대사에 가까웠으며, 극의 분위기 또한 진중하다 못해 음침하기까지 하다. 게다가 화끈한 면모를 보일 것으로 기대되었던 주인공 수양대군은 너무 선하고 잔뜩 미화된 모습으로 그려진 데다가, 문종을 만나고 집으로 돌아온 후에 아내의 품에 안겨 울 정도로 정세를 살피는 능력이 없는 것으로 묘사된다. 다시 말해 극초반부에 극의 한 축은 너무 음침하고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도 못하겠고, 주인공으로 설정된 캐릭터는 계유정난을 일으키기 전까지 가만히 앉아서 눈물이나 찔찔 짜는 것 말고는 하는 게 없다.
한편 상술했듯이 고증도 뛰어나다고 말하기 어려운데, 무엇보다 세조를 지나치게 미화했기 때문이다. 특히 세조가 승하할 때 '세조가 세종대왕의 가장 뛰어난 아들임을 부인할 수 없다.' 라고까지 평하는 행각을 벌였으며, '경국대전 편찬', '호패법[3]', '중국의 속국이 아닌 자주국 지향' 등 세조의 행적을 찬양하는 나레이션이 나온다. 조카의 왕위를 찬탈했다는 치명적인 도덕적 결함으로 인해 악업이 더 커서 가려진다며 비판하기도 했지만, 나레이션을 아무리 들어 봐도 공정한 평가라고 느끼기는 어렵다. 이를 의식한 모양인지 1화부터 "세자(문종)의 인품과 능력이 어찌 수양만 못하겠습니까. 다만 병약한 게 마음에 걸립니다"라고 양녕대군의 입을 빌려 문종의 능력이 세조보다 낮지 않음을 밝히긴 했으나 그 뒤의 전개와 묘사를 보면 다 부질없어 보일 정도로 세조 미화가 강하다.[4]
사실 미화가 지나치다고 비판받은 것이지, 세조를 맡은 임동진의 열연은 매우 뛰어났다. 특히 111회, 최후를 앞둔 장면에서는 꿈에서 단종이 나와 같이 가자고 해서 따라갔더니 나오는 곳이 단종이 묻힌 곳. 그 앞에서 단종이 울면서 춥다고 꺼내 달라고 하자, '''"홍위야! 내 조카가 이런 곳에 묻혀 있었단 말이냐! 내가 꺼내주마! 조금만 기다리거라!"'''하고 울부짖으면서 무덤을 파헤지는 장면은 온 몸에 소름이 돋을 지경. 그 밖에 단종 전문 배우 정태우는 아마도 생애 마지막으로 맡게 된 단종 역을 훌륭하게 소화해냈고, 이 드라마로 대상 수상의 영광을 누린 채시라의 열연 역시 뛰어났다.[5] 노회하면서도 능글맞은 한명회 역을 맡은 배우 최종원도 빼놓을 수 없으며, 왕실지상주의자 양녕대군을 맡은 신구의 연기나 근엄하면서도 왕실의 풍파에 회의를 느끼는 중견 배우 한혜숙의 모습도 괜찮은 편.

3. 극중 인물 묘사의 특이점


세조와 단종의 관계가 대단히 각별한 것으로 묘사된다. 36화에서는 종친부에서 숙직하며 책 읽다 자는 수양에게 단종이 웃으면서 호피를 덮어주는 모습이 나오고, 숙부가 깨기를 기다리다 잠든 단종에게 수양이 다시 호피를 덮어주는 모습과 함께 문종이 수양에게 단종을 보필해줄 것을 약속하는 내용의 회상 신이 나온다. 그리고 수양이 단종을 업어서 대전으로 모시며, 그 와중에 단종이 깨는데 서로 나누는 대화가 숙부와 조카가 아니라 부자지간이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정겹다. 이 작품만 보고 있으면 두 사람은 사이 좋게 지내고자 하는데 이들을 지지하는 세력이 서로 난리라 비극이 일어난 것처럼 보일 정도다.
세조의 장자 도원군과 단종의 죽음의 순서가 뒤바뀌지 않고 제대로 나온 드라마이기도 하다.[6] 세자가 된 도원군이 사경을 헤매자 세조는 문종의 사당에 가서 제발 아들을 살려달라고 비는데, 결국 도원군은 그대로 죽고 만다. 세조가 이에 빡쳐서 "형님내 아들을 죽였으니 나도 형님 아들을 가만두지 않겠다."며 결국 단종에게 사약을 내리게 하는 전개로 이어지는 것을 보면 야사에 전해지는 현덕왕후와 세조의 관계를 어느 정도 담으려고 한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세조를 지나 성종 때의 인수대비 - 폐비 윤씨의 갈등이 심화되며 시청률이 올라가더니, 안재모가 연산군으로 열연한 마지막 부분은 시청률 톱 10에 들었고, 다른 부분들도 역덕후들이나 사극 매니아들에게는 정통 사극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는 수작. 결국 최고 시청률 44.3%를 찍었다.
중종반정이 일어나서 연산군이 폐위될 때 연산군이 웃으며 춤을 추는 등 미치광이처럼 묘사한 것도 볼 만 하며, 강화도로 유배를 간 뒤의 비참한 몰골을 비추면서 나레이션으로 권력을 내려놓은 그가 평범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고 표현했다.
연산군이 사망하고 나서 그가 쓴 '용서'라는 글씨들이 휘날리는 가운데 드라마가 끝이 나는데, 마지막 나레이션에 문제가 있다. 연산군이 폭군이라는 것이 '승자의 기록' 이라고 운운한 것이 그것인데, 정작 작중에서는 연산군일기를 충실히 따라가며 일부 장면에서는 실록의 내용을 그대로 가져다 썼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였는데 끝맺음을 이리 한 것은 의아한 일. 더군다나 말 그대로 승자의 기록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단종실록이나 세조실록의 내용은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놓고 연산군일기만 승자 운운한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같은 작가가 수년 전에 썼던 '장녹수' 에서는 연산군은 폭군이 확실하나 그의 행적 중 일부는 과장되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는 정도로 평했었는데, 이 때보다도 시각이 후퇴한 셈이다[7]
물론 극중 연산군은 타 드라마에서 묘사된 연산군보다 훨씬 사이코스럽게 묘사되며 그만큼 연산군이 놓는 깽판도 상당히 수위가 높게 묘사되는 것도 사실이다.[8] 그나마 드라마가 방영되었던 시기가 2000년이라서 망정이지, 요즘같은 2020년대에 지상파 드라마에서 저렇게 묘사되었다면 방통위에서 빼박 제동을 놓았을 것이다. 실제로 드라마가 한참 방영되었던 당시에도 극 중 묘사가 잔인하고 고어하다고 비판이 꽤 나왔을 정도였으니...
그러나 문제는 극 자체가 알게모르게 이런 금수 같은 연산군의 행동에 당위성을 실제 이상으로 부여해주려고 한다는 점이다. ‘왕과 비’ 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흔히 부정적으로 알려진 인물이 ‘사실은 이런 이유가 있었어’ 라는 식으로 재해석해서 대중의 관심과 지적 허영을 자극하는 게 유행이었고, 피 묻은 적삼 같은 스토리성 좋은 소재에 흑화 같은 요소가 매력적인 것도 있어서 이 부분을 제대로 묘사하는 사극은 사실상 없는 수준이다. 원래 손자와 사이가 나쁘지 않았던 인수대비는 지나치게 냉혹하고 강포하게 묘사되어 연산군을 어릴 적부터 기죽이고 즉위 후에도 사사건건 꼬장을 피우는 심술궂은 노인으로 나온다. 연산군이 나어린 시절부터 모친의 죽음을 어느정도 알고 있었고 즉위 초기에 윤씨의 일로 밥을 한 끼 굶고 몇 년이 지나도록 별 일이 없었다는 묘사는 찾아볼 수가 없고, 적삼 보고 급빡쳐서 타락하는 전개는 자극적이기에 거의 반드시 들어간다. 귀인 정씨와 엄씨가 폐비를 참소했다는 것이 연산군의 일방적인 주장이었다는 점이나, 윤씨가 손톱 자국 냈다가 쫓겨났다는 건 야사에 등장하는 설에 불과하고 실제로 왕에 대한 온갖 막말과 히스테리가 심각하고 고쳐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옹호여론조차 커버칠 수 없을 정도였다는 점 등도 조명해 주지 않는다. 중전의 패악질에 질려 버려서 누구보다 폐비와 훗날의 사사를 적극적으로 추진한 것도 다름아닌 성종 본인이었고 인수대비는 거기 결정적으로 관여하진 않았다는 면에서도 왜곡이다. 많은 면에서 폐비 윤씨와 연산군에게 유리한 쪽의 연출이 들어간 것이다. 이런 은근한 실드적 배경묘사를 등에 업고 연산군은 온갖 잔인한 악행을 펼치면서도 툭하면 ‘이는 내 어머니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뭘 하고 있었느냐’ ‘우리 어머니가 무슨 죄를 지어서 죽이기까지 했느냐’ 등 자기 행동을 당연하고 정당하다는 양 지껄여대기 일쑤. 때문에 현재까지도 왕과비를 비롯한 연산군의 갑자사화 당시 폭정을 그린 사극 영상의 댓글에서는 저럴만 했다, 나라도 저러겠다는 이상한 감정론과 연산군 옹호, 동조가 많이 보이고 있다. 연산의 잔혹함과 광기 등은 충실히 묘사됐지만 그럼에도 ‘총명했지만 어머니의 억울한 죽음에 충격 받고 타락해 버린 비운의 왕’ 같은 과분한 이미지를 뒤집어썼다는 점에선 세조에 버금가는 미화를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말의 용서 씬이나 승자의 기록 드립도 이같은 연출의 일환인 셈.

4. 캐스팅


용의 눈물에 출연한 배우가 적지 않게 재등장했으며, 그 외에도 김갑수(권람), 신구(양녕대군), 최종원(한명회), 여운계(폐비 윤씨의 어머니 신씨), 김성령(폐비 윤씨), 조경환(김종서), 한혜숙(정희왕후), 김형일(홍윤성) 등의 실력파 중견 배우들이 다수 투입되었다.
  • 세조(수양대군): 임동진
  • 인수대비 한씨: 채시라
  • 단종: 정태우
  • 한명회: 최종원
  • 연산군: 안재모[9]
  • 세종: 송재호[10]
  • 문종: 전무송
  • 양녕대군: 신구
  • 정희왕후 윤씨: 한혜숙
  • 신숙주: 이정길
  • 권람: 김갑수
  • 안평대군: 정성모
  • 성삼문: 박진성[11]
  • 정순왕후 송씨: 김민정
  • 월산대군: 송호섭
  • 성종: 이진우
  • 폐비 윤씨: 김성령
  • 성승 : 김성겸
  • 지봉 황보인 : 이신재
  • 성준 : 박영지
  • 홍윤성 : 김형일
  • 신수근 : 최상훈
  • 박팽년 : 김하균
  • 한치형 : 김종결
  • 노포당 류순 : 민지환
  • 양정 : 손호균
  • 임사홍: 임혁[12]
자세한 출연진은 왕과 비/캐스팅 참조

5. 오프닝



왕과 비 오프닝. 전작인 용의 눈물과 같은 테마곡을 사용하였다.

6. 이야기거리


조선의 국왕이 가장 많이 등장한 사극으로, 세종부터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 중종에 이르기까지 8명이 등장한다.
원래 제목은 '바람의 생애' 였으나 일본 NHK 대하드라마 중 '꽃의 생애' 와 비슷하다는 이유로 '왕조의 계단' 으로 바뀌었으며, 이것도 너무 추상적이라는 이유로 지금의 것으로 낙착되었다.
1997년 외환 위기 시기다 보니 1분 촬영에 160만원을 들여서 비판받기도 했으며, 오프닝 테마곡을 새로 만든 것이 아니라 용의 눈물의 테마곡을 그대로 가져다 썼다[13]. 막판에 연산군이 깽판을 치며 피를 부르는 장면에선 망나니의 칼질과 함께 땅을 구르는 머리라든가 부관참시, 거열형 등 지상파에서 방영하기에는 약간 무리가 있는 장면들도 여과 없이 방영되었는데, 연산군이 철퇴로 자신들의 계모들을 직접 내려치는가 하면 연산군에게 모욕을 주자 아예 갈퀴 같은 것으로 얼굴을 쳐 살점이 너덜한 장면이 나온다.
당초 99년 12월 말 끝낼 예정이었으나 후속작 태조 왕건의 담당 PD로 낙점된 김재형에 대한 검찰 수사로 인해 촬영에 차질을 빚게 되자[14] 2000년 3월 막을 내렸으며, 이 과정에서 <왕과 비>는 담당 PD 김종선이 <태조 왕건> 연출자로 발령되어 하차하는 대신 윤용훈 연출로 변경됐다. 이 과정에서 성종의 즉위에서 막을 내리려던 계획을 바꾸어 폐비 윤씨와 연산군이 등장하는 등 186회까지 연장되었지만 오히려 시청률이 크게 상승하기 시작했고, 최고 시청률인 44.3%를 달성한 것도 이 때였다. 보통 드라마들이 인기 때문에 무리하게 연장했다가 시청률이 오히려 떨어지는 경우가 많은 걸 생각하면 특이한 사례. 막판에 시청률로 히트를 친 만큼 드라마 종방 이후 종방연을 KBS 방송사홀에서 개최하기도 했다. 자사 드라마들 중 대중적으로 주목도나 시청률이 높았던 히트작 드라마들의 종방연의 경우 직접 사장까지 같이 참석하면서 KBS 방송사홀에서 열어주는 KBS의 관례를 생각하면 방송사 내에서도 나름 히트작으로 대우해준 듯 하다.[15]
중종반정으로 끝을 맺었는데, 이 드라마가 끝나고 11개월 후 옆 동네에서는 중종반정이 첫 장면으로 나오는 여인천하가 방영된다. 여인천하가 KBS에서 나왔더라면 KBS판 조선왕조 5백년이 완성되었을지 모를 일. 게다가 실제로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었던 채시라는 여인천하의 주역 중 하나로 캐스팅 제의를 받은 적이 있었으나 당시 임신 중이었던 탓에 고사했다.
2011년 12월, 종합편성채널로 개국한 JTBC가 개국특집으로 편성한 드라마 인수대비는 사실상 왕과 비 리메이크 버전이라는 평도 받는다. 채시라가 그대로 인수대비로 출연하는 데다가 주요 장면의 구성이 본작과 매우 유사하고 극작가도 같기 때문.
용의 눈물때 처럼 아직 세트장이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이라 실제 서울의 고궁인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에서 주로 촬영되었는데, 경복궁만이 주로 나왔던 전작 때와 달리 창덕궁, 창경궁도 화면에 나온다는 건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하지만 창덕궁에서 촬영할 당시 인정전 뜰에 LPG 가스통을 설치해놓고 야간 횃불 촬영을 하는 무리수를 두기도 했는데, 화재가 나는 일은 없었지만 수많은 시민 단체로부터 비난을 받고 국회 국정 감사에서까지 질타를 받을 정도였다.[16] 결국 이 때를 기점으로 고궁에서 촬영을 하는 것이 문화재를 훼손하는 일이라는 이유로 점차 기피되기 시작했고, 문화재청에서도 촬영 허가를 쉽게 내주지 않기 시작했다. 이에 2010년대부터는 세트장이 적극 활용되기 시작하나, 워낙 수준이 떨어지는 촬영장이 많은지라 고궁에서 다시 사극이 촬영되기를 바라는 목소리도 있다.
배경 음악 중에서는 한명회나 용의 눈물 등에서 나왔던 것을 재사용하는 경우도 많은데, 굳이 본작 뿐 아니라 태조 왕건이나 명성황후 등 이 당시 KBS 사극이 전반적으로 공유하던 특징이다.
[1] 단종 실록은 실록 편찬 당시 찬탈의 주역들이 쓴 것이라 앞뒤가 맞지 않거나, 세조에 대한 미화로 가득차서 오늘날 반드시 교차검증과 다른 사료와 같이 읽어야 하는 실록이다. 애당초 원 제목 자체가 노산군일기다.[2] 그래도 작가에게 최소한의 균형 감각은 있었는지 김종서가 살해당한 후 나오는 나레이션은 "김종서, 그는 만고의 충신이다."로 마무리되며, 생전의 묘사도 충성심 하나만큼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표현된다. 다만 문종이 수양 앞에서는 김종서를 의심하고 김종서 앞에서는 수양을 의심하는 태도를 보이고 이후에도 김종서의 캐릭터가 전형적인 '충신 명재상'과는 거리가 멀어 눈에 잘 안 보일 뿐. 완성된 살생부를 살피던 수양대군도 김종서의 충성심은 의심할 필요가 없다는 뉘앙스의 촌평을 남겼다.[3] 그러나 당시 백성들에게는 악법으로 취급되었다.[4] 결과적으로 FM스러운 3년상을 치르고 과로하다 건강을 헤쳐 단명하긴 했지만, 문종은 생전에 풍채도 당당하고 능력이나 인품 면에서 흠잡을 것이 없는 뛰어난 인물이었다. 어린 나이에 세자로 책봉되었으며 세종 말년 7년간은 대리청정하며 사실상 왕노릇을 하였고, 그 기간동안 업적도 화려했다. 세자 시절 그는 3살 어린 동생 '''따위'''와 비교될 일이 전혀 없는 확고부동한 후계자였다. "수양만 못하겠는가"는 애초에 수양의 능력이 세자보다 최소한 못하진 않다는 전제를 깔고 하는 얘기인데, 정통성이건 능력이건 비교도 되지 않는 세자를, 그리 눈에 띄지도 않는 왕자 중 하나에 불과한 수양대군과 저렇게 비교를 했을 리가 없다.[5] 40대의 경우 인수대비하면 이효정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30대부턴 채시라를 꼽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실제로 채시라는 15년 후 JTBC에서 제작한 인수대비에서 또 다시 인수대비 역으로 좋은 연기를 선보인다.[6] 세조를 미화하지 않고 잘 표현한 공주의 남자조차도 잘못 묘사했다.[7] 다만 작중에서는 폐비 윤씨를 사사하는 일을 주도한 인수대비에게 1차적인 책임이 있었다는 식으로 몰아가기는 했지만 연산군의 폭정도 충분히 묘사했는데, 그래 놓고서 이런 나레이션을 띄우니 더욱 어색하다.[8] 연산군이 미쳐 날뛰며 칼을 휘두르면서 (이미 죽은) 인수대비의 환상을 보고 복부를 '''칼로 찌르며'''(실제론 그 자리에 있던 엉뚱한 사람이 칼맞고 죽었다) 미친 듯 광소하며 "내가 할머니를 죽였습니다! 할머니를 죽인 천하의 불효자가 됐습니다!"라고 울부짖는 장면은 충격적이다. 물론 인수대비는 이미 고인이긴 했지만, 환상이나마 본인의 친할머니를 죽이려고 칼을 찌르고, 그녀가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모습을 보며 웃는 모습은 가감없는 사이코 그 자체다.[9] 이전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는 젊었을 시절의 세종대왕 역을 맡았다.[10] 이전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 민제 역을 맡았다. 이 드라마에서 성종대 인물 홍응도 맡아 1인2역.[11] 이전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 황희 역을 맡았다.[12] 이전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 하륜 역을 맡았다.[13] 본작이 기획된 이유도 용의 눈물의 후속작으로 박정희 시대나 삼별초를 배경으로 한 사극을 제작려고 했는데 복장과 세트를 새로 제작할 여력이 되지 않았던지라 이전에 썼던 세트와 복장을 재활용할 수 있는 조선 초기 사극이 채택된 것이었다.[14] 96년 8월부터 98년 5월까지 용의 눈물 촬영 당시 조연급 탤런트들로부터 금품을 받았다는 이유 탓인지 99년 8월 19일 배임수재 혐의로 불구속 기소되었고 결국 <태조 왕건> 연출 명단에서 손을 떼야 했으며 99년 11월 26일 서울지검으로부터 징역 2년, 추징금 1612만원이 구형되었고 김재형 PD는 그 이후 타방송사로 처음 옮겨 연출했던 SBS 여인천하로 재기에 성공했다[15] 전작 용의 눈물도 마찬가지로 종방연을 KBS에서 개최했고 당시 국회 문광위 소속이었던 국회의원들도 용의 눈물의 종방연에 참석하기도 했다.[16] 이 당시 KBS는 지금보다 공영 방송 성격이 훨씬 강했던 방송국이었기 때문에 특히 수신료로 제작되던 대하드라마의 경우 국감에서 제작 과정에 대해 국회의원들이 짚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후속작인 태조 왕건의 경우도 강신성일 당시 한나라당 의원로부터 제작비가 너무 많이 지출되었다고 지적을 받은 적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