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습

 



[image]
'''김시습
金時習
'''
'''출생'''
1435년(세종 17년)
조선 한성부
'''사망'''
1493년(성종 24년)
충청도 홍산현 무량사
'''본관'''
강릉 김씨
'''자'''
열경(悅卿)
'''호'''
매월당(梅月堂), 청한자(淸寒子), 동봉(東峰)
벽산청은(碧山淸隱), 췌세옹(贅世翁)
'''시호'''
청간(淸簡)
'''법명'''
설잠(雪岑)
1. 일생
2. 기타
3.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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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생


芳草襲芒屨(방 초 습 망 구 꽃다운 향기가 신에 스미고

新晴風景涼(신 청 풍 경 량 맑게 갠 풍경 시원하기도 하여라

野花蜂唼蘂(야 화 봉 삽 예 들꽃마다 벌이 날아와 꽃술을 물고

肥蕨雨添香(비 궐 우 첨 향 살진 고사리 비가 적셔 향기를 더하네

望遠山河壯(망 원 산 하 장 멀리 바라보니 산하는 웅장하고

登高意氣昻(등 고 의 기 앙 산성 따라 높이 오르니 의기는 드높구나

莫辭終夕眺(막 사 종 석 조 사양치 말고 저녁 동안 바라보시게

明日是南方(명 일 시 남 방 내일이면 곧 남방으로 떠날 터이니

유산성(遊山城)[1]

조선 전기 세종 시대부터 성종 시대의 인물.
한성부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 잠시 강원도 강릉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그 후 다시 한성으로 돌아와서 성장하였다.
어릴 적부터 매우 명민하여 태어난 지 8개월에 글뜻을 알았다고 하고, 만 3세에 이런 를 지어 어른들을 놀라게 하였다고 한다.

桃紅柳綠三春暮(도 홍 유 록 삼 춘 모 복사꽃은 붉고 버들은 푸르러 삼월은 이미 저물었네.

珠貫靑針松葉露(주 관 청 침 송 엽 로 푸른 침으로 구슬을 꿰니 솔잎의 이슬이네.

소문을 듣고 당시 정승인 허조가 찾아와 "내가 늙었으니 늙을 노(老)를 넣어 지어보라" 청하자,

老木開花心不老(노 목 개 화 심 불 노 늙은 나무에 꽃피니 마음은 늙지 않았네.

라고 지어 허조를 놀라게 하였다고도 한다.
5세에 이미 중용대학을 익혔다고 하며, 이에 세종이 친히 다섯살 난 아이를 불러 시를 짓게 하였다. 시험을 맡은 박이창(朴以昌)이 병풍에 그려진 강변에 접한 정자와 배를 가리키며 지어보라 하자,

小亭舟宅何人在(소 정 주 댁 하 인 재 작은 정자, 배 매인 집에는 누가 사는가?

라는 시를 썼다. 박이창의 호가 소정주(小亭舟)인데, 김시습이 이를 알고 시를 지었는지 아니면 시습을 시험한 후 박이창이 이 시를 마음에 들어해 호를 지었는지는 불분명하다. 만약 전자라면 놀라울 따름이다
감탄한 박이창이

童子之學 白鶴舞靑空之末(동 자 지 학 백 학 무 청 공 지 말 동자[2]

의 학문이 마치 백학이 하늘 끝에서 춤추는 듯하다.

라고 스스로 시를 지은 다음 댓구를 지어보라 하자 시습은,

成王之德 黃龍飜碧海之中(성 왕 지 덕 황 룡 번 벽 해 지 중 어진 임금[3]

의 덕이 마치 황룡이 푸른 바다를 뒤엎는 듯하다.

라고 답하여 박이창을 거듭 놀라게 하였다고 한다.[4]
이에 흡족한 세종은 비단 50필을 상으로 주었는데 단, 이 비단을 모두 홀로 가지고 집으로 가라는 명하였다. 과연 이걸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가 궁금했던 모양인데 '별 거 아닌 거'라는 투로 즉석으로 비단을 서로 묶어서 엄청 길게 하곤 그냥 그것을 질질 끌면서 가버렸다고 한다. [5]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계유정난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소식을 듣고 보던 책들을 모두 모아 불사른 뒤 스스로 머리를 깎고 '설잠'이라는 법명으로 산사를 떠나 전국 각지를 유랑하였다고 한다. 방랑 생활을 하면서 많은 시를 남겼다.
벼슬길에 뜻이 없었는지 과거에도 응시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른 기록에선 17살에 과거에 응시했다가 불합격되는 통에 너무 오만하였음을 뉘우치고 절에 들어가 열심히 공부하던 도중에 찬탈 소식에 울분을 토하며 머리를 밀고 승려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1456년 성삼문이 극형에 처해졌을 때 한밤 중에 시체를 수습해 몰래 서울 아차고개 남쪽에 묻고 장사지냈다고 한다.
양녕대군이 수재라고 하여 세조에게 그를 천거했으나 떠도는 승려로 살아가면서 벼슬자리를 모두 거부했다고도 한다. 하루는 억지로라도 끌고 간다며 포졸들이 들이닥치자 달아나더니만 논밭에 거름을 주기 위해 만든 똥통에 스스로 빠져서 "자, 이런데도 날 주상에게 데려갈 테냐? 가봐야 네놈들 목만 날아갈 텐데?"라며 비웃었고, 포졸들은 미쳤다고 그냥 가버렸다고 한다. 당대에 설법으로 이름이 높아 세조가 그 설법을 듣고자 재물도 준다고 하고 어명을 어기면 참수할 것이라 협박까지 했음에도 "그러면 죽여 보시오"라며 거침없이 대들었다. 죽여봐야 설법을 못 들으니 세조가 고민 끝에 효령대군에게 부탁하여 효령이 손수 와서 설득하자 딱 1번 가서 세조에게 가서 설법을 했다고 한다.
하루는 길을 가는데 신숙주[6]가 마침 가마를 타고 가고 있기에 "이놈! 선왕의 신신당부를 어긴 이 못난 놈!"이라고 호통을 치자 신숙주는 아무 말도 없이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다고 한다. 그밖에도 서거정과도 우연히 만났는데 신숙주와 달리 이 사람은 오래전부터 수양을 모시던 사람인지라 김시습도 이 사람은 호통치지 않고 정답게 이야기를 하였으나 그 말투는 서로를 은근히 비꼬는 비수였다고 전해진다. 후에 서거정도 그를 천거하고자 세조에게 건의했으나 결국 그도 포기했다고 한다. 그나마 세조가 죽고 벼슬을 지내기도 했으나 워낙에 떠돌아 다닌 게 오래되어서 잘 맞지도 않았다. 게다가 현실과 이론의 차이 및 온갖 부조리에 치를 떨며 오래가지 않아 때려치우고 다시 야인으로 돌아와 지냈다고 한다.
많은 저술을 하기도 했는데, '''조선 최초의 한문 소설이라 일컬어지는 금오신화의 저자'''이기도 하다. '금오'는 경주 남산의 봉우리 금오봉을 말하는데, 금오신화를 이 산에 있던 용장사에서 스님으로 7년 동안 머무를 때 썼기 때문이다.
문학인으로서는 남효온, 송익필과 더불어 산림삼걸(山林三傑)로 불린다. 이는 조선 중기에 활동한 문인 남용익(南龍翼)이 『호곡시화』를 편찬하며 명명한 것이다.
이후 잠시 머리카락을 기르고 고기를 먹으며 혼인하여 대를 이으려 했으나, 아내가 일찍 죽고 실의에 빠져 다시 머리를 깎고 입산했다. 그 후 떠돌아 다니다가 무량사[7]에서 숨을 거두었는데, 유언으로 화장하지 말고 묻어달라고 당부한 후 사망했다. 몇 년 후 절에서 다시 파보니 시신이 살아 있는 것과 같아 사람들은 부처라 여겨 화장 후 나온 사리를 봉안했다. 사리는 부여군 무량사 부도에 봉안되어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비바람으로 부도가 훼손되자 부여박물관(현 국립부여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었다. 이후 불교계에서 사리를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려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이를 받아들여서 2017년 9월 무량사로 돌아갔다.
생존 당시에는 야인 생활을 했기 때문에 정사조선왕조실록에 처음 그의 이름이 언급되는 시기는 김시습이 죽은 뒤 한참 뒤인 중종 시기였다. 그래서 김시습의 일화는 정사보다는 주로 야사가 출처이다.
정조대에 남효온과 함께 이조판서로 추증되는데 당시에 이미 자손이 끊겼다는 언급이 실록에 있다.#
2013년 2월에는 김시습이 그린 자화상을 송시열의 제자 김수증이 모사한 중모본이 TV쇼 진품명품에 나와 감정가 '''3억 원'''을 기록했다.
김시습은 한명회가 청춘부사직(靑春扶社稷) 백수와강호(白首臥江湖)라는 시를 짓자 이를 고친 개작시를 짓기도 했는데 靑春亡社稷(청춘망사직) 白首汚江湖(백수오강호)로 바꿔버린 것이다.
본디 '청춘부사직 백수와강호'는 '젊어서는 사직#s-2을 보필하고 늙어서는 강호에 은거한다'는 뜻으로, 사대부가 꿈꾸는 생애를 표현한다. 한명회는 '''젊을 때에는 열심히 나라를 위해 일하고 늙으면 은퇴해서 유유자적해야지'''라는 포부 겸 자화자찬을 담아 이 시를 쓴 것인데, 김시습은 이를 '청춘망사직 백수오강호'로 바꾸어 '''젊어서는 사직을 망치고 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힌다''', 즉 '''이놈은 가는 곳마다 망치지 않는 게 없다'''라고 대차게 깐 것이다. 즉 한명회가 이러나 저러나 썩어빠진 정치인일 뿐이라고 대놓고 비웃은 것이다.
이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 개작시를 보고 감탄했고 배를 잡고 웃으며 그 시를 읊었다고 한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한명회는 노발대발하며 시를 적은 종이를 찢어 버렸다고 한다.
일생을 한마디로 말하면 '''"재주는 많았으나 세상이 어질지 못해 평생을 미친 것처럼 꾸며 살다 갔다."'''고 할 수 있다.

2. 기타


한국의 도맥 일파에서는 김시습은 중요한 인물로서 여겨지고 있다. 이에 따르면 김시습은 중국의 검선 여동빈천둔검법을 체득하여 후세에 전했다는 일화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는 전설이지만, 그의 저술 중에 내단학 이론을 정리한 게 몇 있는 것은 사실. 부도지가 김시습에 의해 번역되었고, 그 필사본이 보관되고 있었다고 하지만 확인할 수 없다. 김시습의 유명세를 빌린 위서라는게 정설.

3.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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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시습이 상당산성에 다녀가며 지은 시다.[2] 김시습[3] 세종[4] 문장력도 문장력이지만, 한시가 요구하는 까다로운 댓구의 법칙까지 부합한다...!![5] 물론 전설일 뿐이다. 50필이면 적어도 폭은 약 1미터에 길이는 500m 정도 되는데 어린 아이는 물론 성인도 끌고 가기 힘든 길이이다. 호기심 천국에서 직접 실험해 보았는데 폭은 둘째치고 그렇게 묶어 봤자 아이가 다 끌고 가기 너무 힘들어서 가다가 멈추어 쉬고 다시 끌고 가길 반복했다. 어찌저찌 해서 성공은 했지만 아이가 너무 지쳤다. 그나마 실험에선 옆에서 어른들이 따라다녔으니 망정이지 실제로 이걸 혼자 했으면 아동 학대 수준이었다.[6] 정창손이나 정인지라는 얘기도 있다.[7] 당시에는 충청도 홍산군에 위치. 현 충청남도 부여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