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청

 

'''위의 역대 지도자'''
건국

'''초대 묘청'''

2대 조광
'''법호'''
'''묘청(妙淸)'''
정심(淨心)
'''고려 관작'''
'''법계'''
삼중대통(三重大統)[1]
'''직위'''
지누각원사(知漏刻院事)[2]
'''연호'''
천개(天開)
'''활동지'''
서경
'''생몰년'''
? ~ 1135
1. 소개
2. 생애
2.1. 서경 천도 운동
3. 평가
4. 기타
5. 같이보기

[clearfix]

1. 소개


고려시대승려. 일반적으로는 묘청이라는 법명이 유명하지만, 뒷날에 법명을 '정심(淨心)'으로 고쳤다.
고려사절요에는 역사에 부상하기 이전의 경력에 대해 "묘청은 서경승(西京僧)[3]이다." 라고만 설명하고 다른 기록이 없어서, 외모, 출신, 본명, 인종을 만나기 전의 행적 등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고려사에 "천문관원(日者) 백수한이 묘청을 스승이라 불렀다.", "묘청은 음양가의 비술을 들먹이며 뭇 사람을 현혹했다" 하는 등의 묘사를 봐서는 도참, 예언 등의 활동을 한 승려로 추측된다.

2. 생애



2.1. 서경 천도 운동


서경 전투는 곧 낭·불 양가 대 유가의 싸움이며, 국풍파 대 한학파의 싸움이며, 진취 사상 대 보수 사상의 싸움이니, 묘청은 곧 전자의 대표요,김부식은 후자의 대표였던 것이다. 이 전쟁에서 묘청 등이 패하고, 김부식이 승리하였으므로 조선 역사가 사대적, 보수적, 속박적인 유교 사상에 정복되었으니, 이 전쟁을 어찌 '''일천년래 제일 대사건이라 하지 아니하랴.'''

--

- 신채호, 조선사 연구초에서 발췌.

서경 출신으로 인종 때 왕실 고문 자리까지 올랐다. 이때는 북방의 금나라요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기세를 이어 송나라까지 강남으로 쫓아버리면서 새로이 중원의 패권을 잠식하는 시기였는데 묘청은 강성한 금나라에 맞서 대항하자는 명분으로 개경은 지덕이 쇠하였으므로 수도서경으로 옮기자고 주장하였다. 아마도 묘청은 대외적 명분 외에도, 개경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김부식 일파를 몰아내려는 의도도 있었던 듯하다. 이 때문에 묘청이 살아있는 동안 개경 세력과 서경 세력은 매번 충돌했다.
참고로 "서경=평양", "중경=왕경=개경=송악(송도)=개성", "동경=경주시", "남경=양주=한양=서울"이다.
묘청은 인종이 천도에 동의하게 하려고 이런저런 준비를 많이 했다. 기록에 따르면 대동강 근처에 기름을 넣은 떡을 준비하고 인종을 대동강 가로 모시고 나오면서 대동강에 도착할 때에 맞춰 사람들로 하여금 기름떡을 대동강의 적절한 위치에 던져 가라앉혔다고 한다. 떡에서 새어 나온 기름이 물에 떠 햇살을 받고 반짝이자 묘청은 인종에게 '대동강에 잠든 을 토해 대동강 물에 상서로운 기운이 깃든 것'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서기가 비치니 서경은 천기가 가득한 땅이라고 허위 광고를 한 것이다. 반대 세력이 의심하여 강물을 살짝 떠보니 기름기가 느껴져, 잠수부를 동원해 자맥질하게 해보니 떡이 발견되어 들통났다.
묘청이 주청하여 1129년에 대화궁(大華宮)이 완공되자 인종과 함께 보러 갔다. 묘청은 그때 김부식과 이런저런 논쟁을 벌이다가 저 산을 보라고 했다. 거기에는 별이 매우 낮게 떠 있었는데 묘청은 저걸 보고 남극성이라며 상서로운 징조라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사실은 그냥 높이 매달아 놓은 등불이었다.[4]
인종도 한때 서경 천도 제안에 솔깃해서 서경에 자주 행차하고 임원역(林原驛) 근처에 대화궁을 지었지만 이런저런 악재가 일어났다. 벼락이 떨어진 일도 있었는데 김부식은 그토록 좋은 곳이라면 무엇 때문에 벼락이 떨어지냐?라며 까댔다. 유학자로서 괴력난신을 말하지 않는 김부식이 이런 말을 했으니 서경 길지설을 비꼬는 의미이다.
고려사를 보면 뭔가 어리버리한 인상도 준다. 서경 중흥사에 큰 화재가 났는데 누군가가 묘청에게 "네가 임금께 서경에 행차하시기를 청한 건 재앙을 진정시키기 위함인데 왜 이런 재난이 발생한 것이냐?"이라고 묻자 묘청은 얼굴을 붉히며 대답을 못하다가 한참 뒤 주먹을 쥐고 얼굴을 들고 "만약 주상께서 개경에 계셨으면 재난이 이보다 컸을텐데 다행히 서경에 오셔서 재앙이 밖에서 일어났으니 주상의 몸이 편안했던 것이다!"라고 말했고 묘청을 믿는 사람들은 함께 "이런데 어찌 믿지 않겠는가?"라고 호응했다.
그리고 인종이 서경으로 행차하다가 금암역(金巖驛)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폭풍우가 불어서 행차가 길을 잃어 에 빠지기도 하고 나무나 돌부리에 부딪혔으며 그날 밤에는 진눈깨비까지 내리고 추워지는 바람에 말과 낙타의 피해가 컸다. 이를 본 묘청은 '내가 이 날에 바람과 비가 있을 줄 알고 비와 바람의 신에게 주상께서 길에 있으니 비바람을 일으키지 말라고 했더니 이미 승낙해 놓고 이처럼 약속을 어기니[5] 실로 가증스럽다!'라며 하늘을 탓했다고 한다.

2.2. 묘청의 난과 최후




3. 평가



단재 신채호가 매우 높게 산 인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 이것은 잘못 알려진 것이다. 신채호는 묘청이 주도한 북벌론이 자주적이라며 높게 평가하면서도 묘청 자체는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신채호는 북벌론의 주요 인물인 윤언이정지상을 높게 평가했으며 둘 중에서도 서경 천도를 지지한 정지상이 아닌 반대쪽이었던 윤언이[6]를 더더욱 높게 평가하였다. 묘청에 대한 신채호의 평가는 실제로는 혹평이었는데 조선사 연구초에서 '광망'(미칠 광, 망령될 망)하다는 표현을 하였다. 즉 그가 섣불리 난을 일으켰다가 윤언이, 정지상 등 자주 정신을 지향하는 인물들이 제거당하게 만들었고 이게 조선 사대주의의 원인이 되었다고 평한 것이다.
현대 사학자들의 평가는 정지상의 광대. 서경파 인물인 정지상이 서경 천도를 밀어붙이기 위해서 나말여초도선 같은 성인의 이미지를 덧붙여 내세운 얼굴마담에 불과했을 뿐이다. 묘청의 난 자체가 묘청의 이름만을 빌렸을 뿐 사실상 서경의 난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거란, 여진과의 전쟁이 일단락되어 북벌이 종결된데다 고려의 역사 계승 의식 자체가 고구려 계승 의식에서 신라 말부터 대두한 삼한일통 의식으로 옮겨가면서 북벌 정책과 고구려 계승 의식에 힘입어 올라갔던 서경의 위상 자체가 바닥을 쳤고 '분사제도'도 유명무실해졌는데 이런 상황을 타개하고자 서경 세력이 내세운 얼굴마담이 묘청이라는 설이다. 묘청의 난이라고는 하지만 묘청은 난이 시작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제거되었으며 그럼에도 서경 반란군은 와해되지 않고 해를 넘겨 지속되었음이 이를 방증한다. 반란 자체가 묘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면 묘청의 사망과 함께 난이 쉽게 끝났을 것이다.
물론 묘청 본인도 자신이 광대 노릇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리야 없었겠지만 서경 천도의 가능성만 믿고서 밀어붙였는데 결국 인종이 천도를 거부하자 분노한 나머지 폭주해버린 것이라는 견해다. 다른 서경파 인물들은 묘청이 폭주할 줄은 몰랐던 모양인데 개경에 그대로 남아있었던 데다가 누구보다도 묘청의 목을 쳐야 한다고 앞장서서 진언했다. 서경천도운동 당시 찬성파는 한 일파가 아니었고 한 풀 꺾였던 서경 세력, 친왕 세력, 신흥 관료 등이 기득권층인 개경의 문벌귀족과 대립한다는 하나의 목적으로만 뭉쳤던 잡탕이었다. 그 중 서경 세력 내의 과격파인 묘청이 폭주를 했으니 다른 분파들은 저런 또라이랑 엮여서 사형당하기 싫었던만큼 묘청과의 관계성을 부정하고자 애썼던 것이었다.[7] 사실 왕인 인종도 주동자만 주살(죄를 물어 죽임)하고 나머지는 살려주라고 일렀기 때문에 이들에게 희망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결국 김부식 등 개경파 인물들에게 선참후계(先斬後啓; 먼저 베고 나서 아룀) 식으로 처단당하고 말았다.
현대 북한의 역사 교육 과정에서는 남한에 비해서 매우 중요하게 가르치고 있다. 물론 레퍼토리는 뻔하다. 김부식과 개경 귀족들에게 사대주의 프레임을 씌우고 서경 세력에게 자주적이고 주체적이라는 프레임을 가져다 붙이는 식. 지금의 북한 수도인 서경(평양특별시)으로 천도를 주장했기에 더더욱 강조한다.

4. 기타


구미호뎐 7화에서 남지아가 이문서를 검색해 '''이 문서가 나왔다.'''

5. 같이보기


[1] 고려시대엔 승려의 품계인 '법계(法階)'가 있었다. 묘청의 법계인 '삼중대통'은 고려의 고위 법계 '삼중대사(三中大師)'의 오기인 것으로 보인다.[2] 누각원의 장관. 누각원은 서경 분사(分司) 정부의 부서로 개경 중앙 정부의 태사국에 해당된다. 누각원은 물시계를 관리하는 부서로 시간을 계산했다.[3] 서경에서 활동하는 승려.[4] 사실 남극성은 서울에서도 지평선 너머 간신히 보인다. 현대에는 고층 건물과 야간 불빛 때문에 그냥 못 본다. 심지어 조선 시대에도 서울에선 거의 보기 힘들었고 제주도에서나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서울보다 북쪽에 있는 평양 근처에서 그것도 산 위 하늘에서 남극성을 보기는 불가능하다. 정녕 뜨더라도 너무 낮아 산에 가려질 테니까.[5] 원문에는 식언(食言)이라고 표현.[6] 묘청의 난을 진압하는데 종군해 결정적인 책략을 내는 등 서경 천도를 찬성하지는 않았지만 칭제건원(왕을 황제로 선포하고 독자적인 연호를 쓰도록 하는 것)에는 찬성했다.[7] 물론 반역죄는 전근대 시대 어디에서나 인정하는 죽어 마땅한 최악의 죄였기 때문에 굳이 서경파가 잡탕 세력이 아니었더라도 일이 안 풀린답시고 저렇게 미쳐 돌아버린 사람과 함께하다가 처단당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었다. 잡탕이든 한 일파 세력이든 간에 웬만해선 어떻게라도 연루를 피하는 게 일반적이다. 따지고보면 타 서경파 인물들은 보수적인 개경의 기득권 세력을 물리치겠다는 목적 하나로만 묘청과 함께하다가 묘청이 폭주하게 되자 아예 묘청과의 관계를 끊어버기로 한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