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

 


1. 소개
2. 생애
3. 기타


1. 소개


如君忠義(여 군 충 의, 古今罕聞(고 금 한 문, 爲國忘身(위 국 망 신, 有死猶生(유 사 유 생

'''그대와 같은 충의야말로 고금에 드물었으니, 나라를 위해 던진 그 몸은 죽었어도 살아 있는 것과 같다.'''

人生必有死(인 생 필 유 사, 死生必有命(사 생 필 유 명, 爲人一死(위 인 일 사, 固不足惜(고 부 족 석, 君獨可傷者(군 독 가 상 자

'''인생에는 반드시 죽음이 있고, 죽고 삶은 하늘에 달렸으니, 사람으로써 한번 죽음에 아쉬워 할 이유가 없으나, 오직 그대에 관련해서는 마음이 아프도다.'''

-이순신이 정운의 영전에 올린 제문인 제증참판정운문(祭贈參判鄭運文) 중에서

정운(鄭運)
1543년 ~ 1592년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창진(昌辰). 시호는 충장(忠壯). 전라도 영암군 옥천종면(현 해남군 옥천면) 대산리[1] 출신.# 아버지는 훈련원참군 정응정(鄭應禎)이다.

2. 생애


1570년 (선조 3년)에 28세로 무과에 급제한 뒤 훈련원 봉사, 금갑도수군권관(金甲島水軍權管), 거산찰방(居山察訪)을 거쳐 웅천 현감 등을 지냈으나 성격이 강직하고 정의를 지켰기 때문에 미움을 받아 몇 해 동안 벼슬을 하지 못하였다. 이후 제주판관(濟州判官) 때 목사(牧使)와의 불화로 파직되었다가 1591년 (선조 24년) 녹도(鹿島) 만호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수군 절도사 이순신(李舜臣)의 선봉장이 되어 옥포 해전, 당포 해전, 한산도 대첩 등 여러 해전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부산포 해전에서 적을 추격하던 도중 적탄에 맞아 전사하였으며 사후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대조총에 맞아 몸을 관통당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27년 4월 17일 을축조에 “이순신(李舜臣) 진중의 정운(鄭雲)이라는 사람이 그 대포를 맞고 죽었는데 참나무 방패 3개를 관통하고도 쌀 2석을 또 뚫고 지나 정운의 몸을 관통한 다음 선장(船藏)으로 들어갔다고 하였습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영암의 충절사(忠節祠), 고흥의 쌍충사(雙忠祠)에 제향되었다. 이대원 장군·정운 제독 추모제

3. 기타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안승훈이 연기했는데 인물의 성격이 심각하게 왜곡되었다.
작 중 한정[2]으로 맹장인 원균을 닮는 것이 목표인 인물로, 이순신이 정읍 현감이었던 시절부터 생포한 일본인 첩자를 처리하는 문제로 갈등을 빚었다. 원균이 파직된 전라 좌수사 자리에 이순신이 부임하자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극력 반발했으며, 진중을 한 바퀴 순시한 이순신이 권준과 자신을 제외한 제장들 전원을 압송하여 태형을 가하자 다시금 크게 반발했다.[3] 이후로도 전라 좌수영의 피를 토하는 듯한 극악의 선상 적응 훈련에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육상전을 벌일 것을 주장했으나, 전에 포로로 잡혀있던 왜군 첩자들과 녹도군 가운데 정예들이 벌인 경합에서 녹도군이 완패하자 이렇다할 반박을 하지 못했다.[4]
47회에서는 정운이 화통군에서 잠시 화포사격을 지도해본 경험이 있어서 화포의 훈련과 운용을 맡았는데 병졸들이 순서를 까먹자 상의탈의를 시키고 화포를 어깨에 짊어진 상태에서 해안구보와 장전순서 암기를 시켰고, 49회에서는 시간을 제대로 못맞춘 군사들에게 곤장을 때렸다. 이것 때문인지 병졸 1명이 화약폭발 사고로 사망해도 훈련을 재개한다는 말에 격분한 포수들이 무기를 탈취하고 집단탈영을 감행했다가 결국 주동자 2명이 참형당해 군문에 목이 걸리게 되었고, 나머지는 곤장 80대를 맞았다.
이후로도 옥포 해전에서 원거리에서 포격을 가한다는 이순신의 방침을 무시하고 돌격을 지시하는 원균을 따랐다가 곤장을 맞기도 하는 등 이순신과 계속해서 마찰을 빚으나, 이순신이 지휘하는 전라 좌수군이 승리를 거듭하고 원균 휘하 경상 우수군은 패전을 거듭하면서 점차 이순신에게 기우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모습이 결정적으로 그려진 것이 사천 해전 직후 총탄을 맞은 이순신을 치료해 주는 모습.
하지만 부산포 해전에서 좌수군의 장수들 중 가장 먼저 리타이어하게 되는데, 판옥선의 선체 위에 일본군의 폭탄이 날아오자 부하들을 밀치고 자신이 폭탄을 끌어안고 폭발한 것.[5] 정운이 전사한 후 시신이 운구될 때 이순신이 직접 지은 제증참판정운문의 일부가 인용된다. 또한, 정운이 생전에 혁혁한 전과를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조정에서 그를 공신록에도 올리지 않았음에 의문을 제기했다.

녹도 만호 정운.

정충보국(貞忠報國)이란 검명이 말해주듯, 전장에 나가면 물러섬이 없던 인물이다.

옥포에서 한산, 그가 전사한 부산 해전에 이르기까지 그 세운 전공이 혁혁했으니,

가히 전란을 극복하는데 앞장선 1등 공신이라 할 만했다.

허나, 군왕 선조는 '''그를 공신록에도 올리지 않았다.'''

'''의주 몽진 길을 대행했다는 이유만으로 공신이 된 내관이 스물 네 명'''에 이르렀던 것을 볼 때,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역사는 오늘날까지 그의 충심을 기억하고 있다.

드라마 징비록에서는 조순창이 연기했다. 이순신의 훌륭한 부관 역할을 하였으며, 부산포 해전은 출전 장면과 해전 후의 장면만 묘사되어서 정운의 죽음에 대해 이순신이 슬퍼하는 장면만 나왔다.
정운이 전사한 부산포해전 승전일을 부산시민의 날인 10월5일(음력 9월1일)로 정해 그의 충절을 기리고 있다.
조선 장수들 중 검에 검명을 새겼다고 전해지는 몇 안되는 장수인데 그가 검에 새긴 글자는 다름아닌 정충보국(精忠報國)이다.

[1] 하동 정씨 집성촌이다.[2] 이 드라마 최대 문제점 중 하나로 꼽히는 게 바로 이 원균의 미화라, 원균이 미화된 상태로 드라마를 만들려니 주변인물도 함께 왜곡이 되어 버린 것이다.[3] 다만 극 중에서 태형을 받을 만한 잘못을 저질렀음이 묘사되기는 하며, 벌을 면한 권준의 경우 이순신이 크게 칭찬하는 장면도 있다. 문제는 순시를 나와서 졸병들과 장기만 두고 돌아가 물먹은 정운의 경우.[4] 이렇듯 신임 좌수사와 마찰을 빚는 과정에서 정운을 주목하는 경우도 있으나, 성격이 괄괄한지라 표현이 과격해서 그렇지 동료 제장들을 선동한다거나 하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다. 육상전을 벌이자는 의견도 혼자서 내놓은 것이 아니었으며, 무의공 이순신 같은 경우 한 술 더 떠서 '푸른 철릭이 붉은 철릭을 어떻게 찍어누르느냐' 는 김완의 말에 '곤룡포라면 찍어누르고 남는다' 라고 답하기도 했다.[5] 이때 일본군이 날린 폭탄이 비격진천뢰이기는 했는데, 일본군이 쓰는 대포 자체가 조선군으로부터 노획한 것이라고 작 중에서 묘사되므로 극 중 흐름상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