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포 해전

 

'''이순신의 전투 목록'''
초량목 해전
(1592년 9월 1일)

'''부산포 해전'''
(1592년 9월 1일)

제2차 웅포 해전
(1593년 2월 10일)

'''부산포 해전'''
釜山浦海戰

'''시기'''
1592년 10월 5일 (음력 9월 1일)
'''장소'''
조선 경상도 부산포
'''원인'''
왜군의 해상 퇴각로 차단[1]
'''교전국'''
조선 [image]
일본 [image]
'''지휘관'''
충무공 이순신
원균
이억기
정운
<^|1>지휘관 불명
'''병력'''
판옥선 74 척
협선 92 척
전선 470여 척
병력 8,000여 명
'''피해'''
함대 피해 없음
전사자 6 명
부상자 25 명
전선 128 척 침몰
사상자 불명
'''결과'''
조선 수군의 승리.
'''영향'''
일본의 해상 작전 불가 및 보급난 심화.
1. 개요
2. 꽁꽁 문을 걸어잠근 일본군
3. 이순신의 출전
4. 쑥대밭이 된 부산포
5. 해전의 의의
6. 대중매체에서
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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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592년(선조 25년) 9월 1일 이순신 등의 조선군 수군이 부산포[2]에서 일본군과 싸운 전투.

2. 꽁꽁 문을 걸어잠근 일본군


왜 수군은 한산도에서 참패를 당한 7월 중순 이후 약 1개월간 남해안 일대에서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은 채 침묵을 유지했다.[3]
그러던 중, 8월 중순에 이르러 일본군은 한성에 주둔하고 있던 가토, 기무라, 오카모토 등의 부대를 경상도 지방으로 이동하도록 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일본군은 대부분의 병력을 김해에 집결시키는 한편, 군수 물자를 부산으로 운반하였다.
당시 부산포에서는 하시바 군 주력 부대와 본국에서 증원된 수군 8,000여명이 함선 430여 척을 보유하고 해안 요충지를 지키고 있었다.

3. 이순신의 출전


조선은 일본군의 이런 움직임을 본국으로 철수하려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경상 우도 순찰사 김수가 전라 좌도 수군 절도사 이순신에게 "위로 침범한 적도들이 낮에는 숨고 밤에 행군하여 양산(梁山), 김해강 등지로 잇달아 내려오는데, 짐짝을 가득 실은 것으로 보아 도망치는 낌새가 현저하다." 라고 하여 해상 도주로를 차단해 줄 것을 요청했고, 이순신은 (전라 우수사 이억기, 경상 우수사 원균 (8월 25일 합류)의 함대와 합류하여 판옥선 74척, 협선 92척 등 총 166척으로 통합 대함대를 편성하여 출진하였다.
이순신은 낙동강 하구를 거쳐 9월 1일 부산포로 향하던 중 화준구미·다대포·서평포·절영도·초량목 등지에서 산발적으로 기습을 시도한 적선들을 번번히 물속에 처박으며 총 37척을 격침시키면서 부산포 앞바다에 이르렀다.

4. 쑥대밭이 된 부산포


부산포 앞 바다의 절영도[4] 부근으로 진출한 조선 수군은 부산포 동쪽 산기슭 해안에 일본 수군 선단 사백여 척이 집결해 있는 가운데, 다수의 육군이 해안선에 진지를 구축하여 조선군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음을 탐지하였다.
조선군은 장사진을 펼치면서 종대 대형으로 부산진 포구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조선 수군에 압도된 일본 수군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달아나 육군 병력이 방어하고 있는 해안 진지에 뛰어들어 필사적인 저항을 시도하였다. 이에 조선 수군은 해안 진지에서 저항하는 일본군에게 사격을 가하여 견제하는 가운데, 포구에 방치된 일본군 전함을 향해 각종 총통 사격을 집중하였다.
양 함대의 전선수를 비교하면 약 3대 1의 비율로 조선 수군이 열세였고 지리 조건도 일본군들은 언덕을 의지하여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향하여 공격하지만 조선 수군은 해상에서 완전히 노출되어 공격군에 매우 불리한 여건이었으나, 거듭된 패전으로 일본군이 조선 수군에 겁을 먹고 사기가 떨어졌다는 점이 이런 불리한 면을 보완하였다.
일본군이 사기가 높았다면, 옥포 해전 당시 도도 다카토라한산도 대첩 당시 와키자카 야스하루처럼 전 함대를 동원해서 조선 수군을 공격해왔을 것이다. 그러나 상당수 병력이 해안과 산 언덕에 숨어서 바다로 나오지 않고 조총과 활 그리고 노획 및 보급 등으로 확보한 각종 화포로 공격을 했다는 것은 그들이 해전을 두려워했다는 증거이다. 이미 앞서 소규모 해전에서도 일본군은 조선 수군과 맞닥뜨릴때마다 배를 버리고 섬으로 도망가기 바빴던 것이다. 또한 방어 목적만 두고 보면 예나 지금이나 육상에서 주요 거점을 요새화하여 해상의 적 선박에 대응하는 방식은 상당히 강력한 해상 거부 전략이었다.
부산포 해안에서 적선 100여 척을 격침시키는 등 큰 전과를 올렸고 부산성을 목전에 뒀지만 이순신은 육지로 일본군을 추격하거나 부산성을 탈환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이는 이른바 "단병 접전", 즉 현대어로 표현하자면 "근접 백병전"에서 조선군의 기량이 일본군에 비해 불리했으며[5] 부산까지 항해하는 바람에 병사들도 많이 지친데다, 지금까지 조선 수군이 화력에서 우세했기에 이겼던 것이지 병력에서 우세했던 것은 아니며 일본군과 달리 말이 없었기에[6] 육전을 하기에는 여러 모로 무리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 전투에서 조선 수군의 피해는 녹도 만호 정운을 비롯하여 전사 6인, 부상자 25인이었으며, 전투 후 이순신은 가덕도에 이르러 3도 수군을 해진하고 그날로 귀항하였다. 수치로만 보면 적군에 비해 피해가 거의 없는 수준의 대승이었지만 녹도 만호 정운이 전사한 타격이 컸는데, 전라 좌수군이 지휘관급 인물을 잃은 것은 처음이기도 했거니와 특히나 정운은 평범한 장수가 아니라 조선 수군 제일의 맹장으로 늘 돌격대장을 맡아온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웅포 해전 당시 그가 살아있었다면 그의 활약으로 상륙해 웅포를 점령할 수 있었을 거라는 의견도 있다.

5. 해전의 의의


이 해전으로 일본군의 수군 활동은 잠잠해졌고 조선 수군은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평양에 주둔한 고니시 유키나가가 그대로 평양에 주저 앉아 있다가 조명 연합군에 밀린 것도 이순신에 의해 해상 보급로를 차단당했기 때문이다. 또 호남 역시 일본군의 침입으로부터 안전할 수가 있었다. 이 전훈을 일본군은 진지하게 받아들여 정유재란 때에는 전혀 다른 전략[7]을 세우게 된다.
또한 부산은 임란이 터진 직후 일본군이 점령하면서 일본의 조선 침략 기지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부산이 조선 침략에 있어서 중요한 요지였다는 것이다. 또한 부산은 일본군의 본진이기 때문에 조선군이 쉽사리 쳐들어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 부산포 해전은 '''적의 본진을 바다에서 타격한 전투'''였고, 이로인해 본진도 안전하지 않다는 인식을 심어 주었다.
이 해전의 승리를 기려, 1592년 음력 9월 1일을 양력 10월 5일로 환산하여 부산광역시는 10월 5일을 '시민의 날'로 지정하고 있다.
서양에도 이 전투가 알려져있는지 태평양 전쟁당시 미 해군 태평양 함대 사령관 체스터 니미츠 대장은 일본이 타국과의 전쟁에서 단 한번도 패한 적이 없다는 거짓말을 반박할 때 이순신이 부산항에 있던 일본군 함대를 공격해 타격을 입혀 승리를 거둔 적이 있다고 말한적이 있다.

6. 대중매체에서



마침내, 임진년 9월 1일 오후 2시.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부산 일본군 본진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부산 해전에서 이순신이 선택한 진형은 장사돌진(長蛇突陣)이었다.

이에 일본군은 지형지물을 최대한 이용, 유리한 위치에 화포를 설치하여 일제 포격을 감행했다.

'''곡사화기는 지대가 높아질수록 그 사거리가 길어진다'''는 특성으로 볼 때,

부산 해전은 이순신의 함대에겐 결코 유리한 싸움이라 볼 수 없었다.

이순신이 장사진을 선택한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육지로부터 가해질 화포 공격에 최대한 노출되지 않을 수 있는 진형이 바로 장사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 만에 이르는 적이 육지로부터 집중포화를 쏟아부었으므로, 이 진형조차도 안전할 수 없었다.


임진년 9월 1일 부산 해전.

이 해전은 옥포, 당포, 한산으로 이어지는 제해권을 장악했던 이순신이 왜군의 심장부인 부산을 공격함으로써

남해안의 제해권이 모두 조선 수군에게 있음을 만천하에 공포한 전투로써의 의의를 갖는다.

이 날 분멸된 왜선의 수 만도 백여 척에 이르니, 실로 장쾌한 대첩이었다 할 것이다.

이 날 전투에서 조선 수군 측은 31명의 전상자를 냈으니,

단 한 명의 전사자도 내지 않았던 옥포 해전에 비한다면 크나큰 피해라 할 것이다.

이 사실만으로도 이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가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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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레이션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78회에서 나왔으며, 해전의 전체적인 흐름을 담기보다는 정운이 전사한 것을 묘사하는 데 치중했다. 총탄에 맞아 전사한 실제와 달리 배에 날아든 포탄으로부터 부하들과 배를 지키기 위해 포탄을 감싸안고 폭사한 걸로 각색했다.[8] 또한 부산포 해전이 있기 전의 과정을 시작으로 조정과 이순신의 갈등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수급을 취하지 않았는데 어찌 승전으로 보느냐는 의견과 전선을 백여척 넘게 격파했으니 승전이라는 의견이 갈린다.[9]

7. 관련 문서



[1] 자세한 사항은 본문을 참조.[2] 지금의 부산광역시 동구 일대[3] 이는 한산대첩의 패배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해전 금지령을 내렸기때문이다.[4] 지금의 부산 광역시 영도구[5] 불멸의 이순신에서도 일본인은 어렸을 때부터 수련을 하기에 단병접전에 강하다고 소개되며, 조선 통신사들의 사행록 중에서도 원중거의 화국지를 비롯해 일본이 검을 잘 만든다는 사실과 함께 이러한 면을 소개한 것이 있다.[6] 육군을 지원하는 등의 예외를 제하면 함선에 말을 실을 필요가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7] 임란 때에는 빨리빨리 치고 올라가는 게 목표였다면, 정란 때에는 한반도 남부를 점거하여 자신들의 영토로 굳히는 것. 그리고 정란 전략은 방어선에 대한 직접적 침공이 아닌, '''치사한(?) 방법으로 이순신부터 꺾어놓는 것'''으로 시작하였다.[8] 한편 이 대목에서 일본군이 비격진천뢰를 쓰니 고증 오류라는 해석도 있는데, 70화에서 와키자카가 도도와 구키에게 조선군 화포를 노획했다며 자랑을 하고, 조선군 포로를 협박해 화포 사용법을 알아내는 장면도 있기 때문에 빼앗은 것을 사용했다고 보면 무리가 없다.[9] 전선은 수군에 있어 기병의 말 처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결정적으로 말없는 기병은 억지로 보병에나 편성 할 수라도 있지 수군은 전함이 없으면 육지에서 손가락이나 빨 수 밖에 없다. 또한 왜군은 제해권이 빼앗겨 더이상 전함을 보충하기가 심히 어렵게 되었다. 전함 한척을 건조하는데는 과거나 현실이나 엄청난 자원이 든다는것을 감안하면 적의 물자를 파괴한 확실한 승전이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