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리 크라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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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NBA 올해의 경영자상'''
스탠 카스텐

'''제리 크라우스'''

제리 콜란젤로
'''1996년 NBA 올해의 경영자상'''
제리 웨스트

'''제리 크라우스'''

밥 배스
1. 개요
2. 불스 이전
3. 불스 시절
4. 평가
5. 말년
6. 참고 자료


1. 개요


1939년 4월 6일 ~ 2017년 3월 21일
미국의 농구행정가 및 스카우터이자, NBA 역사상 유일한 비 농구인 프런트. 불스 왕조의 설계자였다.

2. 불스 이전


1939년에 일리노이시카고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시절에 야구 포수로 활약했고, 브래들리 대학교를 졸업하기까지 농구의 '농'자도 모르는 시절을 보냈다.
그러던 그가 대학을 졸업하고 1964년경에 볼티모어 불리츠(현 워싱턴 위저즈)의 스카우터로 근무하며 농구와 인연을 맺기 시작했고, 자동차를 타고 일일이 미 전역을 돌아다니며 우수선수 스카웃에 나섰으며, 한 번 찍은 선수는 끈질기게 영입을 한다는 근성도 지녔다. 입문 첫 해 얼 먼로를 영입하는 데 공헌했고, 뒤이어 1967년에는 노스다코타 대학교 출신인 필 잭슨을 지명하자고 주장했는데, 잭슨이 다닌 대학이 듣보잡이라 2~3라운드 정도는 지명될 것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크라우스는 잭슨을 놓지 않았으나, 불리츠보다 지명 순위가 2계단 앞섰던 뉴욕 닉스레드 홀즈먼 감독은 결국 필 잭슨을 지명하여 영입시켰다.[1][2]
이후 그는 1970년대 내내 LA 레이커스, 피닉스 선즈,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시카고 불스 등지에서 스카우트직을 전전했다. 특히 불스 스카우트 시절인 1970년 NBA 드래프트 당시 딕 모타 감독과 마찰을 겪었는데, 당시 딕 모타는 UTEP(텍사스 대학교 엘패소 캠퍼스) 출신인 네이트 아치발드를 지명하길 원했고, 크라우스는 뉴멕시코 주립대학교 출신인 지미 콜린스를 원했는데, 결국 크라우스의 의견이 관철되어 지미 콜린스는 불스에서 뛰게 되었으나, 콜린스는 1972년까지 겨우 612분만을 뛰고 소리없이 사라졌고,[3] 그 댓가로 크라우스는 결국 피닉스 선즈로 떠나야만 했다.(그 중에는 모타 감독의 압력도 한몫 했다.)
1980년대 초부터 MLB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스카우터로 근무했고, 제리 라인스도프 구단주가 1985년에 시카고 불스를 매입하면서 크라우스를 단장으로 영입한다.

3. 불스 시절


1985년에 로드 쏜(Rod Thorn) 단장의 후임으로 부임한 크라우스는 1985년 찰스 오클리를 영입하며 존 팩슨을 샌안토니오 스퍼스에서 사왔고, 1987년에 스카티 피펜호레이스 그랜트를 영입하고 1988년에 뉴욕 닉스로부터 빌 카트라이트를 영입했고, 1989년에는 아이오와 대학교 출신인 BJ 암스트롱 등을 영입하는 등 강팀으로써의 초석을 다졌고, 1990/91 시즌에는 마이클 조던-피펜-그랜트-팩슨-카트라이트로 라인업을 꾸려 첫 우승을 달성했고, 이후 1992년, 1993년에 첫 3연패를 달성한다.
그러나 1993년에 마이클 조던이 첫번째로 은퇴하고 토니 쿠코치 영입 이후 피펜과의 갈등 등으로 인해 잠시 구단이 침체기를 겪었다. 다만 조던이 없던 시즌에도 55승을 하는 등 그가 설계한 팀은 결코 조던 원맨 팀이 아니었다. 이후 조던이 돌아온 후, 또 다시 1996년과 1997, 1998년에 3연패를 달성했지만, 결국 필 잭슨의 재계약 실패로 갈등이 생겨 잭슨은 조던, 피펜과 함께 팀을 떠났다.
이후 불스는 하위권으로 굴러떨어져 1999년에 엘튼 브랜드를 지명하여 리빌딩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결국 2001년에 브랜드를 타이슨 챈들러[4]-에디 커리와 맞바꾸는 실책을 벌이고 2003년에 불스 단장직에서 은퇴한다.

4. 평가


'''시카고 불스 왕조의 설계자 이자 파괴자'''
크라우스의 안목은 불스 왕조를 만든 원동력이었다. 불스 왕조를 만들면서 거의 모두 실제 가치에 비해 적은 대가를 치르고 데려왔다. 당시 평범한 후보가드이던 팩슨을 주워와 주전으로 세우고, 피펜은 NAIA 센트럴 아칸소라는 지잡대 듣보잡 선수였음에도 드래프트 픽업까지 해가며 지명했고,[5] 빌 카트라이트를 얻기 위해 찰스 오클리를 트레이드하고 호레이스 그랜트를 신인드래프트에서 데려오는 과감한 결단을 내린 게 신의 한수가 되었다. 문제아 로드맨을 거의 공짜로 데려온 것도, 심지어 토니 쿠코치를 알아보고 크로아티아에서 92년 NBA로 데려온 것도 그였다.[6]
문제는 누구를 데려오든 마찰이 생겼다. 찰스 오클리와 막역하게 지내던 조던이 크라우스에게 반감을 갖게 된 계기도 크라우스의 오클리 트레이드 결정이었고, 92년 토니 쿠코치를 데려올 때 피펜과 연봉 협상을 후순위로 미루면서 피펜의 연봉을 깎으려한다는 오해도 샀다. 그 탓에 크로아티아 대표팀이던 쿠코치는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 드림팀과 붙으면서 조던, 피펜 듀오에게 가루가 되게 짓밟혔다.
특히 피펜은 거의 원수가 됐다. 92년 트레이드 협상, 1994~1997년까지 네 차례 트레이드 대상으로 거론됐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마이클 조던이 잠시 리그를 떠나있던 1994/95 시즌 득점에서 블락까지 모두 1위를 하면서 팀 멱살을 잡고 끌고가는 활약이었지만 연봉 서열은 여전히 5등이었다. 1997년 10월 기준 피펜의 연봉은 고작 3백만 불에 리그 전체 122위였다. 물론 이건 피펜이 그렇게 계약한 탓이지만. 97-98시즌을 앞두고 피펜은 크라우스와 부딪쳤는데, 지난 플레이오프에서 발을 다쳤던 피펜은 수술을 받아야 했고 그렇게 되면 2~3개월은 쉬어야 했다. 그런데 이때 크라우스가 여름 자선 경기에 참가해 발 부상을 악화시킨다면 법적 조치를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자 피펜은 크라우스가 자신을 마치 개인 재산 다루듯이 한다며 분노했다. 결국 피펜은 보란듯이 자선 경기 참가를 강행했고, 발 수술은 훈련 캠프 시작 전으로 미뤘다.[7]
조던의 어두운 면을 파헤친 샘 스미스 기자의 <Jordan rules>에 의하면 팩슨은 그의 친구 에드 닐리가 피닉스 선즈와 70만 달러에 계약하자 크라우스가 "자넨 저 정도 액수 기대하지 말게"라고 말했는데, 당연하지만 이 망언을 들은 팩슨은 변호사를 통해 크라우스와 어떤 대화도 거부한다고 했으며,[8] 그랜트에게도 80만 달러, 잭슨에겐 (90년대 후반에) 백만달러 이상 주지 않겠다고 해 욕을 사서 먹었다. 심지어 성격 좋기로 소문났던 그랜트와도 마찰이 있었으면 말 다한 것. 97-98시즌 개막 직전까지 선수들 대다수의 다음 시즌이 불투명했고 로드맨은 개막 직전에야 싸인했다.
그뿐만 아니라 크라우스는 <Jordan rules>에 대해 분통을 터뜨렸고,[9] 샘 스미스에게 자료를 제공한 내부자를 색출하는 일에 집착했다. 곧 그는 불스의 내부정보를 유출한 사람이 자니 바흐 코치라고 여겼다. 필 잭슨은 적극적으로 그를 옹호했지만 크라우스를 말리지 못했고 결국 자니는 시카고 불스를 떠나 샬럿 호네츠의 코치로 이적해야 했다. 이 사건 이후 필 잭슨과 제리 크라우스 단장은 엇나가기 시작했고,[10] 1996-1997 시즌 중반 필 잭슨 본인의 계약문제로 끝내 원수지간이 되었다. 결국 구단주인 제리 라인스드로프가 비행기를 타고 몬태나로 가 필 잭슨을 직접 만난 끝에 서로가 만족할 만한 1년 재계약을 했지만 크라우스는 1997-1998 시즌 개막 직전 자신의 사무실로 잭슨을 불러 '82승 0패를 해도 당신은 끝이야!'라며 노골적으로 필 잭슨을 적대했다.[11]
조던은 대놓고 그의 더러운 식사매너를 비꼬며 크럼(crumb,부스러기)라고 크라우스를 불렀다. 못생기고 볼품없는 외모도 공개적으로 놀렸으니 정말 대놓고 조롱한 셈. 다만 크라우스는 조던에게 연봉 3천만달러의 계약을 안겼는데, 이는 당시 조던을 제외한 불스 선수 전원의 연봉을 합한 것보다 높은 액수였다.
최종 오퍼라고 해놓고 몇번이나 말을 바꿔 선수들에게 신뢰를 잃었다. 1라운드 지명이 확실시되는 수비 스페셜리스트 댄 멀리에게 "3라운드에 지명해줄테니 다친 척 하라"고 하거나, 다른 팀 GM에게 "신인 계약에 쓰는 돈 아끼는 셈치고 지명권 그냥 달라"고 하는 등 손해를 안보려는 방식은 반감을 샀다. 결국 초창기 원맨팀에 지친 조던이 노스캐롤라이나 선배 월터 데이비스를 계속 요구했으나, 크라우스는 영입하겠다고 말만 해서 조던의 분노를 샀다.
그는 불스 왕조를 이룩한 데 대해 계속 '조직의 힘', '시스템의 힘'을 힘주어 강조하면서 스타 선수들의 공을 깎으려 한다는 비난을 들었다. 평소 성품이 완고하고 소심했으며, 감독을 단장 밑으로 밖에 보지 않는 거만한 태도로 일관했다. 1998년 명장 필 잭슨을 내친 덕분에 은퇴할 명분을 찾던 조던에게 큰 구실을 줬다. 그 뒤 불스 왕조는 바로 무너지고 20년이 넘어가도록 우승을 못하고 있으며, 후임인 존 팩슨 부사장과 가 포먼 단장도 지미 버틀러를 트레이드로 보내는 등 이해할 수 없는 무브로 부진하고 있다.[12]

5. 말년


불스를 떠난 이후 그는 본업인 야구로 돌아가 뉴욕 양키스의 스카우트를 역임했다. 2005년에 뉴욕 메츠의 스카우트를, 2010년에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스카우트를 지냈고 2011년에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스카우트 부문 특별고문으로 추대됐다. 2017년 3월 21일 지병이던 골수염으로 타계했다.

6. 참고 자료


  • I LOVE NBA - 손대범 저/김민석 그림. 루키. 2004. p70~81.
  • Jordan Rules - 샘 스미스 저
  • 필 잭슨의 일레븐 링즈 - 필 잭슨 저

[1] 그러나 크라우스는 1987년에야 필 잭슨을 시카고 불스의 어시스턴트 코치로 임명함으로써 약속을 지킬 수 있었다.[2] 크라우스는 아주 확고한 취향이 있었는데 손이 크고, 팔이 길고, 다재다능하며 이해력이 뛰어난 선수들을 매우 선호했다. 잭슨 역시 여기에 딱 맞는 선수로 그는 스타급은 아니었지만 닉스의 벤치 선수로 알토란 같은 역할을 해주며 팀의 2회 우승에 공헌했다. 크라우스의 취향에 맞는 선수들은 그 외에 토니 쿠코치, 스카티 피펜 등이 있는데 그가 피펜을 얼마나 욕심냈는지는 항목 참조.[3] 반면 네이트 아치발드는 전체 19위로 신시내티 로열스에 들어가 14년 동안 NBA에서 선수생활을 하면서 명예의 전당에 입성할 정도로 화려한 선수시절을 보냈다. NBA역사상 최초로 득점과 어시스트에서 리그 1위를 한게 바로 네이트 '타이니" 아치볼드였다. 크라우스를 위한 변명이라면 아치볼드는 훗날 앨런 아이버슨과 마찬가지로 단신 스코어러라 정통 농구의 시각으로 보면 다소 리스크가 있는 픽이었다. 물론 그럼에도 그 엄청난 재능을 무시해선 안됐다. 게다가 아이버슨과 달리 아치볼드는 리딩가드로서도 팀플레이어로도 뛰어났다.[4] 물론 나중에 챈들러는 각성했지만, 이건 챈들러가 시카고를 떠난 후의 일이었다.[5] 크라우스는 피펜의 플레이를 보자마자 몸에 스파크가 올 정도로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드래프트 날까지 피펜에게 상위 지명을 약속할테니 다른 팀의 눈에 안띄게 태업해도 좋다. 아니 하라고 몰래 주문까지 했다. 그런데 크라우스의 행동을 보고는 눈치를 챘는지 몇몇팀이 피펜을 관찰하러 왔고, 크라우스는 결국 당일 8순위였던 픽을 5순위까지 올려서 피펜을 지명했다. 드래프트 당일의 반응은 피펜? WHO? 그 자체.[6] 토니 쿠코치는 93 시즌부터 2000년까지 불스에서 뛰었다.[7] 피펜은 1998년 1월 10일 골든 스테이트 워리어스와의 경기 때 선수 명단에 다시 올랐다.[8] 팩슨은 시즌 중후반까지 이적을 결심했지만 우승 이후 높아진 그의 가치 (아이러니하게 그에게 오퍼를 한 팀 중엔 원 소속팀인 스퍼스도 있었다)+우승멤버를 유지하고픈 잭슨 감독의 의지까지 해 연간 백만달러 이상으로 3년 재계약을 하게 된다. 할 필요도 없는 말을 해서 욕을 사서 먹은 셈이다.[9] 사실 이때 민감한 내용인 빌 카트라이트와 조던의 갈등관계도 이 책에서 폭로했지만, 이미 지난 일이고 우승할 당시 그 갈등은 완전히 봉합된 상태였기에 조던과 카트라이트 모두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10] 그 외에도 선수들을 대하는 것에 두 사람의 차이가 컸던 것도 있었다. 필 잭슨은 어떤 경우에도 팀원들의 자율성과 사생활을 지켜줘야 한다는 지론이 있었지만 크라우스는 조직에 대한 장악력을 가지는 것에 집착했다. 문제는 크라우스의 의사 전달 방식이 좋지 못해 선수들과 대화를 할 때 진실성이 결여되거나 심할 경우 한 입으로 두말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는 고스란히 선수단의 불만을 불러왔다.[11] 얼마나 잭슨과 크라우스의 대립이 심했냐면, 1997년 크라우스의 딸이 결혼식을 올릴 당시 모든 불스의 어시스턴트 코치들은 초대되었음에도 크라우스가 잭슨 감독만 초대하지 않았다. 사임 후 잭슨은 "둘 사이엔 어떤 하자가 없다"고 했으나, 크라우스는 잭슨이 유나이티드 센터를 찾아와도 반겨주지 않을 정도로 그를 냉대했다.[12] 사실 이렇게 퉁치면 곤란하다. 크라우스 단장 체제에서 불스는 6년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하며 부진했지만, 존 팩슨 체제에서 플레이오프에 복귀하며 리빌딩에 성공했다는 평을 들었고, 2010년대 초반에는 정규시즌 전체1위도 하고 MVP도 배출하는 등 동부의 강호로 군림했었다. 그러나 로즈의 장기 부상 등으로 팀이 흔들리다가 에이스가 빠져나가고 팀이 점점 하락세에 접어든 것. 2010년대 후반부터는 확실히 부진하고 있는게 맞다. 팩슨이 GM~부사장으로 부임하면서 팀 전체의 방향을 잡던 04~05시즌부터 19-20시즌까지 불스는 16시즌동안 11번 플레이오프 진출, 전체 1위 두번, 컨퍼런스 결승 진출 1번, 2라운드 진출 3번을 기록했는데 간단히 "부진하고 있다"고 퉁칠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