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카트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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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스에서의 현역 시절.
'''이름'''
제임스 윌리엄 "빌" 카트라이트
(James William "Bill" Cartwright)
'''생년월일'''
1957년 7월 30일 (66세)
'''출신학교'''
샌프란시스코 대학교
'''신장'''
216cm (7' 1")
'''체중'''
111kg (245 Ibs)
'''포지션'''
센터
'''드래프트'''
1979년 1라운드 3순위
뉴욕 닉스 지명
'''역대 소속팀'''
뉴욕 닉스 (1979-1988)
시카고 불스 (1988-1994)
시애틀 슈퍼소닉스 (1994-1995)
'''역대 등번호'''
25번 (뉴욕)
24번 (시카고, 시애틀)
'''지도자 경력'''
시카고 불스 어시스턴트 코치 (1996-2001)
시카고 불스 감독 (2001-2003)
뉴저지 네츠 어시스턴트 코치 (2004-2008)
피닉스 선즈 어시스턴트 코치 (2008-2012)
오사카 에벳사 감독 (2013)
멕시코 남자 농구대표팀 감독 (2014-2015)
'''수상내역'''
'''선수'''
NBA 챔피언 3회 (1991-1993)
NBA 올스타 (1980)
NBA All-Rookie First Team (1980)
WCC Player of the Year (1977-1979)
Consensus second-team All-American 2회 (1977, 1979)
'''지도자'''
NBA 챔피언 3회 (1996-1998)
1. 개요
2. 선수 경력
3. 지도자로써
4. 조던과의 관계


1. 개요


前 NBA 농구선수. 前 지도자.

2. 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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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졸업과 동시에 1979년 NBA 드래프트 1라운드에서 전체 3순위로 뉴욕 닉스를 지명한 카트라이트의 전성기는 아이러니하게 커리어 초창기였다. 그는 루키시즌 올스타에 뽑히며, 2년차때까지 2년 연속 평균 20점 이상을 기록했다. 5년차 시즌까지 화려하진 않아도 14~17점 정도 올려주던 주전 센터로 활약하던 그는 85-86시즌 중 심한 발 부상을 당하며 2경기 출장에 그친다. 이후 1985년 드래프트에서 1순위로 지명한 패트릭 유잉이 입단, 부상으로 인한 기량 하락으로 벤치플레이어 신세가 된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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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6월 27일에는 찰스 오클리와의 트레이드 형식으로 시카고 불스로 이적하였다. 당시 불스에는 마이클 조던, 스카티 피펜, 호레이스 그랜트가 있었으며, 카트라이트는 윌 퍼듀를 제치고 닉스시절에 잃은 주전자리를 되찾았지만, 찰스 오클리와 트레이드 되었다는 사실때문에 조던의 불신임을 받아 팀내 적응이 쉽지 않았고, 때마침 바뀐 불스의 트라이앵글 시스템 적응 역시나 쉽지 않아서, 변형된 트라이앵글 시스템을 채택해 원래 링커역할인 4/5번 자리인 꼭지점을 조던이 차지하면서 전성기 시절과 상당히 달라진 수비 위주의 롤플레이어 역할로 불스 커리어를 시작하게 된다. 어쨌든 베테랑 카트라이트는 이전까지 불스를 가로막던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의 악명높은 센터 빌 레임비어를 상대로 어려움을 겪던 불스의 골밑을 지켜냈고, 배드 보이스를 꺾고 진출한 1991년 NBA 결승전에서는 서부 컨퍼런스 챔피언인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를 누르고 생애 처음으로 NBA 챔피언을 달성했다. 그 후 92년93년에 3년 연속으로 NBA 챔피언에 등극했다. 한편 마이클 조던이 92-93시즌 끝으로 은퇴한 이후에는 플레이오프에서 뉴욕 닉스에게 패하고 말았다.
조던이 은퇴한 시즌에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조던의 훌륭한 파트너로 활약해온 스카티 피펜이 뉴욕과의 포스트시즌 제3경기 종료 상황에서 자신이 아닌 토니 쿠코치에게 마지막 슛을 쏘라는 작전이 나오자 피펜은 이에 불복해 아예 경기에 들어가는 걸 거부했다. 쿠코치가 득점에 성공해 시카고가 승리했지만, 이때 팀의 베테랑 리더였던 카트라이트는 경기가 끝나고 락커룸에서 피펜을 찾아가 분노의 눈물을 흘리며 피펜을 대차게 깠다고 한다. 후에 피펜은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 후회는 없지만, 왜 카트라이트가 그렇게 반응했는지는 자신도 충분히 이해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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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95시즌에는 FA 신분을 거쳐 시애틀 슈퍼소닉스로 이적을 하여 29경기를 출전하였고, 시즌이 끝난 뒤 현역 은퇴를 선언하였다.
슈팅모션, 특히 자유투 쏠때 모션이 매우 특이했는데 공을 정면에서 올리지 않고 사이드로 삐딱하게 올려서 쏜다. 자유투할때는 삐딱하게 올라간다음 잠깐 멈췄다 쐈다. 이렇게 희한한 폼에도 불구하고 당대 센터 기준으로 점퍼가 있는 편이었으며 자유투는 커리어 통산 77%, 8할을 넘긴 적이 두번 있을 정도로 센터로선 정상급이었다.
조던이 제왕적이고 동료들을 극한까지 몰아세우는 리더였다면, 공동주장인 카트라이트는 동료들을 부드럽게 보듬어주는 리더였다. 말도 조용조용하고 성격도 온화해서 큰형같은 리더쉽을 보여준 선수. 참고로 이런 인격자를 열받게 해서 선빵 날리게 한 선수가 바로 그 유명한 빌 레임비어. 카트라이트는 80년대 선수치고 싸움을 많이 하진 않았는데 얼마 안되는 싸움 상대 중 레임비어와 아이재아 토마스, 그리고 데니스 로드맨이 있었다. 배드보이즈가 얼마나 악명높았는지 알 수 있는 부분.
다만 이런 인격자적인 면모에 어울리지 않는 면이 있었는데 바로 팔꿈치. 덩치가 크고 움직임이 굼뜬 카트라이트는 리바운드 경합이나 수비 도중에 팔꿈치로 '''의도치않게''' 다른 선수들을 가격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90-91시즌 도중 하킴 올라주원을 실수로 가격해 그가 실려나가게 만들 정도. 결국 하킴은 몇경기 결장해야했다. 그러나 칼 말론처럼 고의로 그러는 더티플레이어는 아니었는데, 평상시 행동도 그렇고 그는 상대 선수 뿐 아니라 '''동료들'''까지 실수로 가격하곤 했기 때문이다.[2] 하킴 사건 이후 휴스턴 로키츠는 빡쳐서 리그 사무국에 정식 항의를 했고, 사무국은 카트라이트에게 보호대를 찰 것을 권고했으나 카트라이트는 자신의 경기리듬을 방해한다며 거부했다. 결국 커리어 내내 문제가 되긴 했지만 말론처럼 상습범도 아니고 고의라고 보기도 어려운지라 욕을 많이 먹지는 않았다.

3. 지도자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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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에서 물러난 카트라이트는 시카고 불스의 어시스턴트 코치에 취임하여, 1996년부터 1998년에 선수 이후 처음으로 3연패를 달성하였다. 그러나 암흑기로 간 1998-99시즌에는 새롭게 취임한 팀 플로이드 감독 밑에서 지휘하게 되지만 모두 최하위로 머무르게 되어 2001-02시즌 도중에 퇴임하여 감독으로 승격하였다.[3] 그러나 취임 이후에는 최하위에 머무르기만 하고 2003-04시즌 중반에 경질을 당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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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5시즌부터 뉴저지 네츠의 어시스턴트 코치에 취임이 확정되어 2008년까지 로렌스 프랭크 감독 밑에서 지휘했다.

4. 조던과의 관계


국내에 많이 퍼진 이야기로 절친 찰스 오클리와 트레이드되어 불스에 온 카트라이트를 조던이 못살게 굴었다가 있는데 이건 악의적인 해석이 꽤 들어간 이야기다. 조던이 오클리 트레이드에 분노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분노는 카트라이트보다는 구단주와 프런트를 향한 것이었고 합류 초반에 상냥한 성격의 카트라이트가 코트 위에서 전투적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다가도 금방 오해를 풀고 팀원으로 받아들였다. 조던은 승리에 모든 것을 거는 타입의 선수였기 때문에 전쟁같던 연습시간, 제왕같은 성격 때문에 동료들을 빡세게 다루더라도 그것이 불화와 팀 와해로 이어지지 않도록 참을 수 있는 면모도 가지고 있었다.
카트라이트는 그 이후 제왕적인 조던의 리더십의 뒷면에서 팀원들을 보듬어주는 역할을 맡았고 1차 쓰리핏의 멤버로 활약했다. 조던의 안 좋은 면을 폭로하기로 유명했던 그랜트와는 달리 카트라이트는 조던에 대해 불만의사를 내비친 적은 아직 없다.
사실 그랜트와 달리 카트라이트는 조던이 일방적으로 괴롭힐 수 있는 상대가 절대 아니었다. 아무리 조던이 슈퍼스타라도 카트라이트는 6살이나 많고 선배인데다가 팀의 공동주장이었다. 또한 순한 외모와 부드러운 목소리와 반대로 코트 위에서는 전투적으로 경기에 임하는 깡다구가 있는 선수였다. 조던이 그에게 심한 말을 하자 조용히 불러내서 "다시 그딴식으로 얘기하면 두 다리를 부러뜨려버리겠다"고 경고할 정도. 또한 조던도 공격에서 카트라이트의 약점에도[4] 수비에서 그의 공헌도를 인정하고 그에게 의지할 정도로 신뢰하는 동료였다. 한창 성장중이라 거칠게 몰아붙힌 그랜트와는 전혀 경우가 달랐다.
[1] 유잉의 입단으로 바로 백업으로 밀려난게 아니다. 와전된 것 중 하나인데, 유잉의 루키 시즌 당시 카트라이트는 발 부상으로 2경기에 그쳤으나, 부상에서 회복한 이후 그는 '''주전센터로 복귀했으며''' 유잉은 파워포워드로 뛰며 카트라이트-유잉의 트윈타워를 구축했다. 실제로 86-87시즌 당시 패트릭 유잉은 공식적으로 '''파워포워드'''로 분류되었다. https://www.basketball-reference.com/players/e/ewingpa01.html 프로 초창기의 유잉은 기동력이 좋았고 운동능력이 뛰어났고 당시 트렌드는 3점이 중시되지 않아 코트를 좁게 썼기에 그가 PF로 뛰는데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카트라이트의 기량은 이미 상당히 하락한 상태였고, 특히 득점력이 매우 떨어졌다. 결국 카트라이트가 중용된 건 86-87시즌이 마지막이었고, 87-88시즌부터 백업으로 전락하게 된다. 즉, 유잉의 존재로 백업이 된 것이 아니라, 기량하락의 문제로 백업이 된 것.[2] 말론은 누가 봐도 대놓고 후려갈기는 반면 카트라이트는 플레이 도중 사고라는 게 명확했다.[3] 이 당시 스승 필 잭슨이 이끄는 당대 최강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와의 원정경기에서 승리를 거두는 이변을 연출했다.[4] 조던룰즈에 이 상황이 자세히 나오는데, 입단 직후 카트라이트의 굼뜬 움직임이 불만이었던 조던은 총알같은 패스를 준 뒤 카트라이트가 이를 놓치면 답답하다는 제스쳐를 취하곤 했다. 그의 트래이드 상대이던 찰스 오클리는 키는 작지만 움직임이 빠릿빠릿한 선수였기 때문에 수비 리바운드 후 조던에게 재빨리 롱패스를 해서 쉬운 속공득점을 만들기도 하고 골밑에서 기민한 움직임을 보였다. 그런데 굼뜬 카트라이트가 오니 답답한 것. 필 잭슨 감독은 조던과 면담에서 "카트라이트는 빠른 패스는 잡기 힘들어하니 손으로 바로 주기보다는 (공을 보기 쉽게) 얼굴 방향으로 주라"고 조언했고, 이 조언을 조던이 받아들인 이후 패스 과정에서 턴오버가 눈에 띄게 줄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