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 쿠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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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럽 리그와 NBA에서 뛰었던 크로아티아 출신의 전 농구 선수. 포지션은 포워드였지만 6-10(208cm)라는 장신에도 슈팅 능력과 뛰어난 볼 핸들링과 패싱 등 공격력이 매우 출중했던 선수였다.
유럽에서 뛰었을 때에는 유럽 최고의 선수로 이름을 날렸으며 시카고 불스와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등의 팀에서 뛰며 식스 맨으로 활약했다.
2. 선수 시절
2.1. 유럽 리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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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코치는 1985년 유고슬라브 리그의 유고플라스티카 스필트에 입단한다. 신인 때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쿠코치는 1987년 유고슬라비아 농구 국가대표로 출전한 세계주니어 선수권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거머쥔다.
이 때부터 본격적인 전성기를 맞기 시작한 쿠코치는 1988년 팀의 유고슬라브 리그 우승의 주역으로 활약하고 1988년 서울 올림픽에도 유고슬라비아 국가대표로 출전해서 은메달을 따는 데 기여한다.
1989년에는 팀의 유로리그 우승과 유고슬라브 리그 2연패, 유로바스켓 우승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또한 이 활약으로 쿠코치는 크로아티아 올해의 스포츠맨에 선정되었다.
1990년, 쿠코치는 팀이 유로리그 2연패를 달성하는 데 주역으로 맹활약하며 유로리그 파이널 MVP에 선정된다. 또한 유고슬라브 컵 우승, 유고슬라브 리그 3연패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이런 맹활약으로 FIBA에서 개최한 세계선수권 챔피언십에 크로아티아 농구 국가대표로 출전해 팀의 우승을 이끌으며 대회 MVP로 선정되었으며, 미스터 유로파 올해의 선수상과 유로스카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고 전년도에 이은 크로아티아 올해의 스포츠맨에 선정되는 등 최고의 해를 보낸다. 전부터 쿠코치의 활약을 눈여겨보던 시카고 불스는 이 해 드래프트에서 쿠코치를 지명했고, 1992-1993 시즌이 끝나면 불스에 데뷔시키는 조건 하에 쿠코치와 계약에 성공했다.
1991년, 쿠코치는 팀의 유고슬라브 리그 우승 4연패, 유고슬라브 컵 2연패에 기여하고 유로바스켓 우승과 유로리그 3연패에 주역으로 활약하며 유로바스켓 MVP와 유로리그 파이널 MVP에 선정되었다. 미스터 유로파 올해의 선수상,유로스카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다. 또한 3년연속으로 크로아티아 올해의 스포츠맨에 선정되고, FIBA에서 선정한 올해의 베스트 선수 50인에 선정되었다. 쿠코치는 이 시즌 도중 이탈리아 리그의 트레비소 SPA로 이적했다.
1992년, 쿠코치는 팀의 이탈리아 리그 우승을 이끌었고, 유고슬라비아의 해체 이후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크로아티아 국가대표로 출전해 은메달을 따냈다.[3] 비록 은메달이었지만 쿠코치는 NBA 스카우트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때 드림팀은 올림픽 본무대 8경기에서 평균 43점차로 압승을 거뒀는데, 점수차가 35점차 이내로 난 경기는 단 두번이었고 둘 다 상대가 크로아티아였다. 또한 결승전에서 32점차는 드림팀을 상대로 한 최소 점수차였다. 즉, 쿠코치가 이끄는 크로아티아는 '''그나마''' 드림팀을 괴롭혔던 유일한 팀이었다. 참고로 아비다스 사보니스란 또 다른 유럽 레전드가 이끌던 리투아니아는 드림팀에게 4강에서 53점차로 뭉개졌다. 이후 미스터 유로파 올해의 선수상도 수상했다.
하지만 쿠코치 본인에게 드림팀과의 상대는 결고 좋지만은 않은 추억이다. 쿠코치를 결승에서 상대한 찰스 바클리와 칼 말론은 각각 그저 "유럽 내에서만 최고의 선수다. 별로 대단한 실력이 아니었다"며 쿠코치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는데 바로 그의 상대가 그 당시 최고의 수비수이며 NBA 역사를 놓고봐도 역대급 수비수들로 여겨지는 마이클 조던과 스카티 피펜. 이들의 분노를 사게된 계기는 공교롭게도 그가 조던과 피펜의 친정팀인 불스의 단장 제리 크라우스의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이었다.
스카티 피펜 문서에도 잘 나와있지만 그는 확실히 조던의 조력자로 올라왔음에도 불구하고 크라우스 단장은 첫 계약을 근거로 그에게 걸맞는 대우를 해주지 않았고, 오히려 외부에 관심을 돌려 쿠코치를 엄청나게 높이 평가하면서 그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드림팀 다큐멘터리에서는 좋게 표현해서 조던이 "그냥 사랑받는 아들들이 아버지가 다른 집 자식을 더 좋아하는것에 질투가 났다" 정도로 포장했지만 이때 조던과 피펜의 분노는 상당해서 쿠코치를 묵사발 만들기로 한 것.[4] 옆에서 지켜보던 캡틴 매직 존슨은 조던과 피펜이 서로 쿠코치를 맡겠다고 다퉜고, 그들의 눈에는 살기가 돌았다고 회술한다.
결국 전반에는 피펜이, 후반에는 조던이 전담마크한 쿠코치는 영혼까지 탈탈 털리며 부진했고 심지어 지켜보던 동료들도 "야, 쟤네 너한테 왜 그러냐?"고 물었다고 한다. 영문을 알리가 없는 쿠코치는 "글쎄...... 이게 미국 농구인가보지."라고 답했다고....... 경기 내내 좌절감을 겪는 쿠코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NBA 역사에 수비수로서도 역대급으로 회자되는 2인이 작정하고 덤비는데 무엇을 해볼수 있다는 말인가? 올림픽에서 미국을 상대로 거둔 쿠코치의 성적은 두 경기동안 20점 6리바운드 14 어시스트 2스틸 4블럭 10 턴오버다. 다소 평범해 보이긴 하는 성적이지만 진짜 피펜과 조던이 이를 갈았던 첫 경기에서 쿠코치의 성적은 처참했다. 조던, 피펜과의 첫 경기에서 쿠코치는 4득점 1 리바운드, 5 어시스트, 2스틸 4블럭 그리고 7턴오버(!)였으며 심지어 야투율은 11개를 던져 2개만 성공시켰다.
1993년에는 팀의 이탈리아 컵 우승을 이끌었다. 또한 유로리그 파이널 MVP에 선정되었다. 1992-93 시즌이 끝나자 쿠코치는 예정대로 미국 NBA의 시카고 불스에 입단했다. 하지만 정작 마이클 조던과 스카티 피펜은 별로 쿠코치의 입단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당시 결승에서 쿠코치의 크로아티아를 개발살낸 기억도 있고, 아무리 잘해봤자 NBA 레벨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2. NBA
2.2.1. 시카고 불스
쿠코치가 입단할 당시 NBA는 유럽 선수들의 가능성에 대해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당시 NBA와 다른 리그들은 기술차 이상으로 어마어마한 피지컬 차이가 있었고, 이 점이 적나라하게 드러난게 바로 1992년 올림픽. 그러나 유러피안들 중에서도 아비다스 사보니스, 블라디 디박, 드라젠 페트로비치 등 주목받는 선수들이 있었으며, 이 중 디박은 어린 나이에 NBA로 넘어가 좋은 활약을 보였고, 사보니스는 당시 소련, 이후 동유럽의 상황 때문에 1990년대 중반에 몸이 망가져서 NBA로 오게 되지만 농구 전설과 전문가들로부터 엄청난 기대를 받았다.
그전에도 유럽 출신 NBA 선수들은 있었지만, "NBA 스타"라고 불릴만한 위상을 처음으로 갖게 된 선수는 디박과 페트로비치였다. 특히 페트로비치는 1992, 93년에 연속으로 20점을 넘기고 93년엔 올 NBA 써드팀에 오르며 슈퍼스타에 근접한 위상을 가졌지만, 안타깝게 사고로 인해 29세 나이로 요절하게 된다.
한편 시카고 불스의 GM 제리 크라우스는 쿠코치가 어렸을때부터 그에게 주목을 했다. 크라우스는 선수를 볼때 뚜렷한 취향(큰 손, 긴팔, 뛰어난 기동력, 높은 농구 이해도)이 있었는데 이 모든 걸 완벽히 충족하는 쿠코치에게 쏙 반해버린 것. 크라우스는 쿠코치가 유럽 최정상급 선수 반열에 오른 1990년에 2라운드 픽으로 그를 선점했지만 쿠코치는 NBA행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그러나 크라우스, 그리고 불스 구단주 제리 라인스도프는 계속 쿠코치를 노렸고 심지어 90-91시즌에는 쿠코치가 언제든 합류할 수 있게 샐러리캡 여유분을 1백만 달러 이상 비워두느라 벤치스코어러 보강 포기 및 여러 어그로를 끌어 선수들의 원성을 샀다. 심지어 시즌 중 구단주와 GM이 쿠코치 경기를 보러 유럽으로 넘어가 주전 스몰포워드인 스카티 피펜의 어그로를 끌 정도.[5] 결국 쿠코치는 불스행을 결심하게 된다.
불스에 입단한 쿠코치는 1993-94시즌 직전 아버지의 죽음로 인해 돌연 은퇴를 선언한 조던의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해 입단 첫 해인 93-94 시즌부터 팀의 주축 선수로 뛰었다.
처음에는 수비도 평균 이하였고, 늘 볼을 오래 소유했을뿐만이 아니라 종종 트라이앵글 오펜스에서도 헤메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쿠코치는 팀에 적응을 하기 시작했고 그해 NBA 올 루키 세컨드 팀에 포함되었으며 시즌 평균 10.9득점을 기록한다. 물론 유럽에서 뛰었을때에 비하면 초라한 성적이었지만, 그래도 플레이스타일이 다른 NBA에 어느정도 적응이 되었다고 평가받았다.
그러나 쿠코치에 대한 기대는 "적응" 정도가 아니었기에 실망스럽다는 반응이 많았다. 사실 쿠코치는 큰 키 덕분에 착각하기 쉽지만 엄연히 따지면 쿠코치가 선호하는 포지션은 '가드' 내지는 포워드다. 덕분에 쿠코치를 맨투맨 수비에서 활용법에 에로사항이 꽃피는데,(다만 지역방어 하에선 엄청나게 빛날 선수) 맨투맨에서 그나마 잘 활용하기 위해서는 스몰포워드 수비를 맡기고 공격에서 프리롤을 줘야하는데, 시카고는 다들 알다시피 스몰포워드에 레전드 스카티 피펜이 있고 공격에서는 트라이앵글 오펜스를 운영하는 팀이다. 트라이앵글에서 보통 PG는 역할이 극히 제한되며 심지어 마이클 조던조차 어느 정도 제약을 받았다.[6] 또한 피펜이 아무리 1번에서 5번까지 막을 수 있어도 진짜로 파워포워드를 경기 내내 막는건 무리이자 재능낭비이므로(피펜은 기본적으로 외곽 수비수다) 쿠코치를 배려해 피펜을 4번으로 기용할 수도 없는 노릇. 결국 쿠코치는 어울리지도 않는 파워포워드를 봐야했고, 한번도 해보지 않은 골밑수비에서 당연히 재앙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다. 밑에도 나오지만 불스에서 쿠코치는 자기가 가진 재능에 비해 극히 일부인 득점 지원만을 주로 보였다. 그가 유럽 최고의 '''가드'''(실제로 가드라고 표기됐다.) 겸 포워드 중 하나였단 걸 생각하면 아쉬운 부분. 쿠코치와 쌍벽을 이룬 드라젠 페트로비치는 비록 올스타는 못됐지만 그보다 더 빡센 올 NBA 서드팀(전체 NBA 가드 중 6위 내에 들어야 함)에 뽑히며 슈퍼스타로 성장중이었다는 걸(이듬해에 교통사고로 요절)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사실 쿠코치는 스페셜리스트가 아니라 다재다능함이 빛나는 선수로 슈팅/돌파/리딩/리바운드 등 모든 분야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이는 만능형 선수였다. 실제로 그가 NBA로 넘어오기 전 베네통 트레비소에서 남긴 기록을 보면 이탈리아 리그에서 득점 5위 어시스트 2위 스틸 6위 삼점슛 성공률 4위 등 다양한 부문에서 상위권에 이름을 올렸고, 1991년 피바 유러피언 챔피언쉽에서는 이미 NBA에서 주전급 센터로 활약하던 블라디 디박이나 NBA에서 한때 평균 20점 10리바운드 가까이 올렸던 디노 라자 등을 제치고 평균 19점으로 득점 1위에 올랐었다. 또한 수비도 특급은 아니었지만 나쁜 편은 아니었다. 그런데 억지로 파워포워드로 출장하게 된 NBA에서는 수비가 완전 구멍 수준이 되었고, 트라이앵글 오펜스 때문에 리딩도 공격롤도 제약을 받아서 공격에선 그냥 캐치 앤슛밖에 할게 없게 되었다. 다양한 방법으로 득점과 리딩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선수를 차포 다 떼고 슛만 시킨 꼴. 이러니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다.
다음 해인 1994-95시즌, 쿠코치는 1경기를 제외하고 시즌 전경기에 출전해 팀내 2옵션을 맡아 시즌 평균 15.7득점을 기록했다. 또한 시즌 후반 조던이 돌아오면서 쿠코치는 자신이 오랫동안 존경하던 조던과 같이 경기를 뛰게 되었다.
1995-96시즌, 마이클 조던의 복귀와 데니스 로드맨의 영입으로 쿠코치는 식스 맨 역할을 맡아 조던, 피펜에 이은 제 3의 공격 옵션으로 활약하며 시즌 평균 13.1득점을 기록하며 팀내 득점 3위에 오른다.[7] 이 해 식스맨으로 맹활약한 쿠코치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NBA 올해의 식스맨 상을 수상했으며 소속팀인 불스는 72승 10패로 NBA 역사상 한 시즌 최다승 기록을 세우며 우승했다.
1997-98시즌 쿠코치는 시즌 평균 13.3득점을 기록하며 조던과 피펜에 이은 제 3의 공격옵션이자 식스맨으로 활약한다. 그러나 이 시즌을 마지막으로 조던의 은퇴, 피펜이 휴스턴 로키츠로 이적, 로드맨의 팀 이탈, 그리고 필 잭슨 감독의 사직 등으로 불스의 에이스 역할을 맡게 되었다.
1998-99시즌, 마지막 춤사위가 끝난 후 불스 왕조의 주역들이 사라지자 드디어 제리 크라우스의 구상대로 불스의 에이스 자리는 쿠코치에게 넘어왔다. 쿠코치는 이 해에 시즌 평균 37.6분, 평균 18.8득점을 기록하며 외로운 에이스로 활약했다. 하지만 조던도, 피펜도, 필도 없는 불스는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고 이렇게 혼자 고군분투하던 쿠코치는 99-00 시즌 불스가 팀 재정비에 나서면서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로 이적했다.
2.2.2. 그 이후
필라델피아로 이적한 쿠코치는 시즌 전 앨런 아이버슨과 함께 팀의 주축으로 활약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하지만 쿠코치는 아이버슨과 시너지 효과를 내지 못했을 뿐만이 아니라 불스 시절보다 성적이 더 떨어졌다. 이후 쿠코치는 저니맨이 됐다. 애틀랜타 호크스로 이적했다가 밀워키 벅스로 갔다. 부상으로 2006년 현역 은퇴를 선언한다.
3. 은퇴 후
은퇴 후 미국에 정착한 쿠코치는 골퍼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고 2011년 크로아티아 전국 아마추어 챔피언십에서 우승하기도 했다. 그는 현재 고문직으로 시카고 불스에서 일하고 있다. 아들인 마린 쿠코치는 고등학교에서 농구를 했으며 펜실베니아 대학교에 진학했고, 딸 스텔라 쿠코치는 마이애미 대학교에서 배구를 하고 있다고 한다.
4. 플레이스타일
NBA 기준으로도 센터급 신장인 6-11(211cm)의 장신임에도 불구하고 포지션은 SF다. 그것도 래리 버드나 줄리어스 어빙, 찰스 바클리(데뷔 초기에는 스몰포워드로 뛰었다) 같이 골대 근처에서 많이 뛰며 골밑 플레이 위주의 SF가 아니라 르브론 제임스나 스카티 피펜처럼 외곽에서 주로 뛰면서 게임리딩도 같이 하는 포인트 포워드에 가까웠다.
그가 실질적인 전성기를 달렸던 1990년대 초중반까지 유럽에서 뛰던 모습, 그리고 드림팀을 92 올림픽에서 상대할 때 경기 모습을 보면 쿠코치는 포인트가드처럼 볼을 운반하고 게임 리딩을 했다. 무엇보다 그는 7피트에 가까운 키에도 실제로 가드로 분류되었다.[8] 그가 NBA로 처음 올 당시 그의 가장 큰 장점은 패스 능력이었으며 이때문에 "웨이터" "백인 매직 존슨"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불스 합류 초기에 고생했던 이유 중 하나가 그를 파워포워드로 기용했기 때문인데, 키는 센터만큼 커도 몸무게가 가볍고, 무엇보다 한번도 골밑 요원으로 뛴 적이 없는 선수를 파워포워드로 쓰니 잘 뛸리가 없다. 1994년 당시 시카고 트리뷴의 유명 기자 샘 스미스는 당시 올스타급으로 성장하던 BJ암스트롱을 트래이드하고 토니 쿠코치를 주전 포인트가드로 올리자면서 포인트가드가 쿠코치의 재능을 가장 살릴 수 있는 포지션이라고 지적한 적이 있다. [9]
7푸터를 PG로 쓰자는게 무리수로 보이지만 엄연히 현실성 있는 제안이었다. 사실 BJ가 1994년 당시 올스타에 선정이 되고 최전성기를 누리긴 했지만, 엄밀히 따지면 BJ는 당시 높은 인기와 시카고 왕조에 대해 애정이 깊었던 팬들의 몰표로 선정이 되었을 뿐 올스타급과는 거리가 먼 선수였다. (올스타 주전은 팬투표로 선정되기 때문에 실력과 상관없이 선정된다. 1998년 당시 팀에서 후보였음에도 올스타로 뽑힌 코비 브라이언트가 대표적인 예) 수비도 별로 강하지 않은 PG가 14.8점 3.9어시스트에 리딩도 사실상 거의 하지 않는다면 견적이 나온다. (그의 주 역할은 스카티 피펜에 이은 보조리딩 -이것도 원래는 조던이 하던 것- 및 외곽지원이었다.) 어차피 수비가 별로 좋지도 않고 리딩도 하지 않는 BJ를 주전으로 세우느니 그냥 트래이드시켜서 BJ보다 리딩력이 뛰어난 쿠코치를 세우자는 것. 이렇게 되면 PG를 슈팅가드이던 론 하퍼가 (실제로 2차 3연패 당시 이렇게 주로 매치업했다), 상대 SG나 SF를 스카티 피펜이 막고 (피펜은 역대 최고 수준의 수비수였지만, 작고 재빠른 PG들에겐 약했다. 대신 마크 잭슨같이 느린 PG에겐 재앙을 선사했다.), 토니 쿠코치는 스몰포워드에 매치업되면 된다. 사실 쿠코치는 키가 워낙 커서 6-7,6-8 언저리인 대부분의 스몰포워드를 따라가긴 어려웠지만 어차피 파워포워드들은 힘이 약해 더 막기 힘들었기 때문에 그에게 가장 잘 맞는 수비 매치업은 스몰포워드였다. 실제로 룩 롱리의 부상 등으로 그가 센터로 주전출장할때 그의 매치업은 스몰포워드였고, 피펜이 파워포워드를, 로드맨이 센터를 맡았다.
물론 로드맨과 매치업이 어려울 정도의 장신이 상대라면, 쿠코치가 센터 수비를 맡았다. (대표적으로 223cm에 달하는 인디애나의 릭 스미츠) 즉, 위와 같이 변칙 수비 매치업을 하면 헬프 수비가 뛰어난 피펜과 하퍼의 존재 덕분에 수비가 커버가 되고, 공격에서 BJ와 대등한 수준의 외곽슛, 더 뛰어난 득점력과 리딩력을 갖고 있는 쿠코치가 BJ를 대체하게 된다면 오히려 파괴력이 더 뛰어난 라인업이 된다. 기본적으로 쿠코치는 BJ보다 재능이 더 뛰어난 선수고 공격에서 많은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선수이기 때문.
실제로 제리 크라우스는 쿠코치를 드래프트해놓고 미국에 데려오려고 열심히 설득하던 1990년대 초반부터 그를 주전 포인트가드로 쓰겠다고 공언했고, 이로 인해 당시 주전 포인트가드이던 존 팩슨, BJ 암스트롱의 어그로를 끌었다. 1990-91시즌 당시 팩슨은 고작 33만불의 연봉을 받아, 리그에서 돈을 가장 적게 받는 주전 가드였다. 게다가 팩슨은 시즌 내내 푸대접받아 감독 필 잭슨이 대놓고 제리 크라우스에게 "그러는 당신은 존 팩슨을 공정하게 대했나요?"라고 비꼬기도 하고, 팩슨의 친구 에드 닐리가 피닉스 선즈와 70만 달러에 계약하자 크라우스가 "자넨 저 정도 액수 기대하지 말게"라고 할 정도였다. 당연하지만 이 망언을 들은 팩슨은 크게 분노해 변호사를 통해 크라우스더러 다신 말 걸지 말라고 할 정도. 팩슨은 시즌 중후반까지 이적을 결심했지만 우승 이후 높아진 그의 가치(아이러니하게 그에게 오퍼를 한 팀 중엔 원 소속팀인 스퍼스도 있었다)+우승 멤버를 유지하고픈 잭슨 감독의 의지까지 해 연간 백만달러 이상으로 3년 재계약을 하게 된다. 이는 카트라이트도 마찬가지인데, 그나마 크라우스와 얘기를 나누는 몇 안되는 사이였건 카트라이트조차 협상 기간동안 그가 보여준 태도에 단단히 실망하게 된다.
마이클 조던과 호레이스 그랜트가 빠진 1994-95 시즌부터는 피펜에 이어 팀내 No.2 옵션이었고 1994-95 시즌 도중 조던이 합류한 뒤에는 팀내 No.3 옵션이긴 했지만 중거리 슛이 기복이 매우 심했던 피펜에 비해 가끔 피펜을 제치고 No.2 옵션을 맡는 경우도 있었다. 공격력보다 수비력이 너무 약했기 때문에 1995-96 시즌 시작전 로드맨의 합류 이후에는 스타팅 멤버에서 제외되어 매경기 25-30분 정도 출장하는 식스맨으로 활약해서 조던/피펜 둘중 하나가 게임에서 빠지는 경우에는 2옵션 및 제한적인 게임 메이킹 롤을 맡기도 했다. 시카고 불스가 쓰는 트라이앵글 오펜스는 포인트가드의 역할이 제한적인 팀이라[10] 쿠코치는 벤치 득점원의 역할을 해야했다. 이때 그는 주로 포인트가드 론 하퍼[11] 와 센터 룩 롱리의 교체선수 역할을 했고, 워낙 다재다능한 선수라 이 둘뿐 아니라 불스 주전 중 누가 빠져도 대체 순위 1순위였다. 즉, 로드맨이 빠지면 주전 파워포워드, 피펜이 빠지면 주전 스몰포워드였다. 유일하게 그가 대체하지 않은 불스의 주전 선수는 조던이었는데, 이때 조던은 쿠코치와 함께 뛰는 기간 내내 단 한 경기도 결장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물론 스몰포워드가 아닌 다른 포지션으로 뛸 때는 수비 면에서 엄청난 마이너스 요소가 되었다. 롱리를 대체할 때도 실력으로 따지면 쿠코치가 훨씬 위였지만 그는 센터가 아니었기 때문에 불스 골밑의 무게가 크게 약해지곤 했다.
아무튼 진짜로 가드처럼 뛰었던 유럽과 달리 NBA에서 그는 패스능력은 특급인 팀내 2-3의 득점원 정도로 제한적인 역할을 맡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천재성을 살려 폭발적인 득점으로 팀을 이끈 적도 있지만, NBA 커리어만 놓고 보면 그는 알토란 같은 활약을 해주긴 하지만 냉정하게 말하면 그냥 평범한 롤플레이어였다.
가장 큰 이유는 위에 언급된 수비력. 지역방어가 허용되던 유럽과 달리 당시 NBA는 맨투맨 수비만 가능했는데 (2001년에 지역방어 재도입), 스몰포워드를 막기에는 키가 너무 커서 반응 속도가 느리고, 파워포워드를 막기엔 힘이 약했던 쿠코치는 특히 수비를 중시하는 불스에서 뛸 자리가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그는 체중을 늘려서 파워를 늘리고자 했는데, 이 덕분에 그는 NBA 포워드들과 그나마 매치업할 수 있었지만 그의 가장 큰 장점이었던 순발력을 많이 잃었다. 시카고 시절에도 다른 백인 7푸터들과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빠르긴 했지만, 가드처럼 뛰던 유럽 시절에 비할바는 아니었다. 쿠코치가 불스 왕조의 일원으로 인기도 얻고 돈도 많이 벌긴 했지만, 그의 재능을 생각하면 매우 아쉬운 업적을 남긴 셈인데, 만약 수비를 중시하던 불스보다 달리는 농구, 스몰 라인업을 추구하는 다른 팀(예를 들어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즈)에 입단했다면 주전으로서 훨씬 더 위력적인 선수가 되었을 수도 있다.
가정일 뿐이지만 쿠코치가 만약 그의 약한 수비력을 가려줄 수 있는 지역방어가 재도입된 2000년대 NBA에서 뛰었다면, 슈퍼스타급으로 성장했을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2004년 당시 강력한 MVP 후보였던 새크라멘토 킹스의 페자 스토야코비치 역시 약한 수비력, 장신에도 빈약한 파워, 뛰어난 슈팅력을 지닌 스몰포워드로 쿠코치와 유사했지만 지역방어 덕분에 그의 단점이 가려져서 슈퍼스타급 활약을 펼쳤다. 오히려 쿠코치는 여기에 특급 패싱력까지 갖췄으니 성공했을 가능성이 크다. 케니 스미스가 언급한 "8, 90년대 당시 평범했을 선수들이 지금 슈퍼스타다"는 것도 이와 일맥상통한다. 현재는 시스템이 중시되고 수비의 비중이 예전보다 덜해 수비가 약한 선수들이 예전만큼 타격을 입지 않는 경우가 많다. 현재와 같은 스페셜리스트들은 살아남기 힘들었고, 커처럼 3점이 주무기인 선수들도 기본적인 포인트가드로서 리딩력과 볼 핸들링은 갖췄었기 때문. 이 때문에 쿠코치처럼 잘하는데 수비를 못해서 한계에 부딪힌 선수들이 현재엔 활용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를 토대로 이전 농구가 우월하다고 한 스미스의 주장은 반쪽짜리 억지다. 반대로 당시에 맞는 농구를 했지만 현재에 오면 묻힐 선수들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당시 피지컬한 맨투맨 수비수들. 플래그런트 파울 제도가 1990-91시즌에 강화되자마자 바로 전력이 급감했던 피스톤즈는 현재 시스템에서 '''거의 수비가 불가능하다'''. 로테이션이 그리 뛰어난 편은 아니고 헷지 수비가 뛰어나지 않았전 당대의 떡대들, 릭 마혼, 찰스 오클리 등은 3점 라인 밖까지 수비 범위를 늘려야 하는 현대 농구에서 이름을 빛낼 수가 없다. 일단 당시 팀들은 수비 범위가 현재보다 현저히 좁기 때문에 근본적으로이 문제가 크다. 결국 각 시대별로 장단점이 있기 때문에 '''어느 한 시대가 일방적으로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다.''' 물론 어느 시대에 가도 잘할 조던이나 르브론, 하킴이나 팀 던컨, 매직과 버드 등등 스타들도 많지만 당연히 2000년대 전용 슈퍼스타들, 8,90년대 전용 슈퍼스타들도 폄훼될 이유가 없다. 이들은 각자 시대에 맞춰 적응한 선수들일 뿐이다.
만약 그가 수비보다 공격이 강조되고 있는 2010년대에 NBA에 진출했으면 실제로 포인트가드를 분류됐을 확률이 매우 높다. 쿠코치가 가진 스킬셋은 아무리 따져봐도 가드에 맞는 것들 뿐인데, 맨투맨 시절엔 매치업 상의 문제 때문에 포워드로 뛰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2010년에는 맨투맨 수비의 중요성이 적어짐에 따라 1 대 1 수비가 약한 선수들도 공격이 뛰어나다면 제약없이 뛰는 것이 가능하다. 반면 팀 수비가 중요해졌기 때문에 활발한 로테이션과 스위치, 커버 수비 등이 필요한데, 당시 쿠코치는 농구 이해도가 높아 이런 로테이션 수비는 괜찮게 한 편이다. 즉, 2010년대 농구에서 쿠코치의 수비력은 그리 큰 핸디캡이 되지 않는다.
쿠코치가 2010년대에 PG로서 속공 농구를 지휘한다고 가정해보자. 국제 대회에서 드림팀을 상대로 볼운반을 할 정도의 볼핸들링 능력을 지닌[12] 쿠코치가 하프코트를 넘는 동시에 stop-and-pop 3점을 던지거나 스스로 돌파, 7피트에 달하는 큰 키와 넓은 시야로 동료를 찾아 패스를 찔러주는 게 모두 가능하다. 쿠코치는 큰 키와 좋은 손목감각으로 골밑마무리 역시 뛰어난 선수였으며, 왼손잡이임에도 양손으로 마무리가 능했다. 풀업 점퍼, 캐치앤 슛 모두 뛰어난 선수라 하프코트 지공에서 활용도도 높으며, 체격에 비해 상당히 민첩해 풀업 상태에서 돌파도 가능하다. 다만 선호하지도 않고 몸도 가벼워 포스트업 공격을 거의 하지 않는 선수긴 하지만, 지역방어로 빅맨에 대한 더블팀이 용이한 현대 농구에선 큰 단점도 아니다. 즉, 수비 매치업에서 핸디캡이 많이 커버가 되는 2010년대에는 벤 시몬스같은 선수처럼 초대형 PG로, 그야말로 날개돋힌 듯 활약할 수 있었던 선수가 바로 쿠코치인 것이다. 물론 쿠코치는 시몬스만큼의 운동능력도 파워도 없으며, 골밑존재감도 훨씬 미미하다. 그러나 반대로 그는 뛰어난 외곽슛이 있어 막기가 더 까다로운 선수이다. 슛이 안 되는 선수들에 대한 새깅 디펜스 때문에 얼마나 많은 스타들이 슈퍼스타 문턱에서 무너졌는지 생각해보면, 쿠코치처럼 중장거리 슛과 골밑 마무리가 자유자재로 된다는 것만 해도 엄청난 강점이다.
게다가 파워나 점프력 면에서 딸리는 것 뿐이지 몸이 가볍던 전성기 기준이라면 스피드에서는 시몬스에게 밀리지 않는다. 굳이 비유하자면 당시는 기술 뿐 아니라 몸과 몸이 부딫히며 피지컬 승부도 중요했던 시기라면, 선수 간의 컨택이 예전에 비해 줄어들게 룰이 개정된 현재는 피지컬의 비중보다 기술의 비중이 늘어 테크니션인 쿠코치에게 더 유리한 환경인 것. 당시와 달리 육체적으로 괴롭히며 수비하는게 더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1998년에 데뷔해 2020년까지 뛴 빈스 카터는 "당시에 비해 현재(인터뷰 당시는 2017년)는 득점하는 건 더 쉽지만, 손을 쓰지 않고 수비해야하기 때문에 (수비는) 더 까다롭다"고 설명했다. 미국 선수들에 비해 피지컬이 비교적 약한 유럽 선수들이 2000년대 들어 활개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진 않다. 물론 전세계적으로 실력이 어느 정도 평준화된게 가장 크긴 하지만.
5. 여담
불스 입단 당시에 쿠코치는 자신을 인정하지 않았던 피펜과 갈등이 있었는데, 이것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 1993-94시즌 닉스와의 컨퍼런스 준결승 4차전. 당시 스코어가 102 대 102로 팽팽히 맞서던 상황에서 1.8초가 남은 상황이었다. 필 잭슨 감독은 쿠코치에게 마지막 슛을 맡겼고 이에 피펜은 펄쩍 뛰며 경기 출전을 거부했다. 하지만 그러든 말든 쿠코치는 슛을 성공시키며 불스는 4차전 승리를 가져갔다. 후에 잭슨 감독은 피펜에게 가장 실망했던 순간이라고 말했다.[13]
그러나 쿠코치와 피펜은 이후 1998년까지 함께 뛰면서 관계가 회복된다. 실제로 쿠코치는 불스 입단 당시 조던과 함께 뛸 기회를 잃어버렸다는(조던은 쿠코치 입단 직전에 은퇴하고 야구하러 갔다) 것에 대해 실망할 정도로 조던빠였지만,[14] 이후 3연패 기간동안 자신이 가장 많은 도움을 받은 동료로 피펜을 꼽기에 이른다. 실제로 강압적인 리더쉽을 가진 조던과 달리, 피펜의 리더쉽은 다른 동료들을 묵묵히 서포트해주는 것이었다.
사실 이 갈등은 스코티 피펜 항목에도 일부 서술되어있지만, 진짜 원인은 쿠코치를 영입한 제리 크라우스 당시 단장에 있다. 크라우스는 피펜을 드래프트에서 지명할때는 필사적이었지만, 피펜이 조던의 밑에서 리그 최고의 스몰포워드로 성장한 이후 피펜이 그에 걸맞는 고액연봉을 요구하자 돈 몇푼 아끼려고 정을 떼버리고, 피펜을 트레이드해버리려고 피펜 대체자로 쿠코치를 영입한 것이다. 실제로 피펜은 쿠코치 영입이후 롤이 겹치는 등 여러가지 이유로 불만을 표시하며 트레이드를 요청했고, 트레이드 성사 직전까지 간적도 있다. 하지만 불스 왕조 위기의 순간 조던이 돌아오면서 피펜을 지킬 것을 요구했다. 피펜도 조던의 지원에 잠시 불만표출을 접었고 자연스럽게 교통정리가 되면서 쿠코치가 식스맨으로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원래 공격에 장점이 있던 장신 3번 플레이어를 큰 키로 몸빵수비만 시키다보니 원래도 약했던 수비문제가 더욱 악화되면서 한때 선수들이 뽑는 리그 최악의 수비수에 매번 꼽히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반지 3개를 얻긴 했지만 쿠코치 개인으로써는 다소 아쉬운 커리어인 셈.
[1] 유럽에서는 가드 겸 포워드, NBA에서 주 포지션은 스몰포워드였으며, 로드맨 영입 전까지 주전 파워포워드로 출전을 많이 했다. 시카고는 골밑에서 존재감 때문에 그보다 실력이 떨어지는 룩 롱리를 주전 센터로 기용했는데(롱리가 뛰어난 건 아니지만 쿠코치는 외곽에서만 뛰어서 골밑 플레이, 특히 골밑 수비가 거의 없었다), 주전 중 누가 빠지든지 쿠코치가 1순위로 투입되었다. 다만 수비가 약하고 파워가 약했기 때문에 저 키에도 빅맨 수비는 힘들어해 스몰포워드 수비를 주로 맡았다. 론 하퍼가 빠지면 키 때문에 가드 수비가 불가능한 쿠코치 대신 조던과 피펜이 가드 수비를 맡고 쿠코치가 스몰포워드 수비를, 롱리가 빠지면 센터수비를 로드맨이 맡고 쿠코치는 포워드 수비를 맡았다. 다만 릭 스미츠처럼 키가 너무 크고 (224CM) 골밑 공격보다 점프슛 위주인 선수는 쿠코치가 막기도 했다. 어쨌거나 당시 NBA에서 심히 애매한 선수였지만, 현재였다면 포인트포워드로 아주 활개를 쳤을 선수. 자세한 상황은 플레이스타일 항목 참고.[2] 현 KK 스플리트.[3] 금메달을 못 딴 이유는 올림픽 농구 결승전 상대가 드림팀 1기였기 때문이다.[4] 조던은 우리는 쿠코치를 상대하는게 아니고, 크로아티아 선수복을 입은 제리 크라우스를 상대하는거다고 회술했고, 피펜은 쿠코치의 농구 역사에서 가장 기억하기 싫은 최악의 기억으로 남겨주겠다고 이를 갈았다.[5] 당시 쿠코치는 가드 겸 포워드였고, 크라우스는 그를 주전 포인트가드로 쓰겠다고 공언한 상태였지만 맨투맨 수비 비중이 지금보다 높은 90년대 당시 NBA 상황으로는 7피트 장신인 쿠코치가 PG를 하는게 수비 때문에라도 불가능했다. 또한 힘이 약해 빅맨은 무리였고, 미치지 않고서야 조던 자리에 세울리가 없으니 결국 스몰포워드밖에 자리가 없던 것. 실제로 쿠코치는 훗날 스몰포워드로 정착한다.[6] 물론 조던을 트라이앵글 안에서만 활용하는 건 낭비이므로 조던은 일반적인 경우에 비하면 자유롭게 공격할 수 있었다. 특히 다른 선수들의 부진으로 트라이앵글이 힘을 잃을 때 공격의 활로를 뚫은 건 조던의 1 대 1이었다.[7] 이때 쿠코치는 잭슨이 식스맨으로 자신을 지명한 것에 상당히 실망했지만, 잭슨은 식스맨이 그에게 잘 맞는 역할이란 것을 설득했다.[8] http://www.si.com/vault/1992/06/22/126703/mens-basketball-the-toni-award-at-23-toni-kukoc-a-6-ft10-in-guard-is-already-europes-best-player-and-a-prize-coveted-by-the-chicago-bulls 1992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기사인데, "6피트 10인치의 가드인 쿠코치는 이미 유럽 최고의 선수이며 불스가 노리는 상품이다"라고 되어있다.[9] http://articles.chicagotribune.com/1994-11-09/sports/9411160467_1_bulls-toni-kukoc-salary-cap[10] 실제로 이 때문에 2004년 레이커스에서는 당시 아직 스타급 실력을 유지하던 게리 페이튼이 트라이앵글로 인해 급격히 평범한 선수가 된 적이 있다.[11] 하퍼의 원래 포지션은 슈팅가드지만, 불스에서는 PG가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수비력이 뛰어난 그를 PG로 쓰고 실질적인 리딩은 피펜이 메인, 조던이 서브였다.[12] 물론 당시 칼을 갈고 있던 마이클 조던과 스카티 피펜에게 고전했지만, 이들에게 고전하지 않을 선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현대에는 대부분의 슈팅가드가 리딩력을 어느 정도 지녔기 때문에 백코트 파트너와 분담하면 그만이다.[13] 잭슨뿐만 아니라 빌 카트라이트 역시 라커룸에서 분노의 눈물을 흘리며 피펜이 팀원들의 기대를 배신했다고 울분을 토했다.[14] 쿠코치가 불스에 입단한 후 얼마되지 않아서 조던이 은퇴선언을 한 뒤라 조던이 은퇴식 전에 선수들과 마지막으로 작별의 시간을 가졌는데 이때 쿠코치는 너무 상심한 나머지 눈물을 보여 천하의 조던이 당황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