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 잭슨
1. 개요
미국의 농구인으로, 2017년 6월까지 뉴욕 닉스 구단의 사장을 지냈다. 지금은 현장에서 완전히 은퇴했지만 여전히 명장 감독으로 추앙받고 있는 농구인이며, 총 '''13번의 파이널 진출과 11번의 우승''', 이중 '''세 번의 3-peat 달성'''이라는 금자탑을 쌓았다. NBA를 거쳐간 수많은 감독들 중에서 가장 많은 우승 반지를 거머쥐었다.[3] 별명으로는 젠마스터. 정작 본인은 이 별명을 부담스러워 한다고 한다. [4] 하지만 이것은 모두 시카고 불스와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코치였을때로 한정. 뉴욕 닉스 사장으로선 전혀 다른 의미로 이름을 휘날리고 있다. 뉴욕 닉스 팬들에게는 금지어 수준. 커리어를 요약하자면 '''평범한 선수, 최고의 명장, 최악의 경영자'''.
2. 선수 시절
2.1. 아마추어 시절
윌리스턴 고등학교에서 농구선수로 뛰면서 노스다코타 주 챔피언전 결승에서 팀의 우승에 큰 공헌을 세웠다. 노스다코타 대학교에 막 부임한 빌 피치 감독은 필 잭슨의 인상적인 활약에 감명을 받고 직접 영입했다. 필 잭슨은 빌 피치 감독의 전술에 잘 녹아들어 대학팀의 핵심멤버가 되었다. 특히 203cm의 키에 긴 윙스팬으로 루즈볼을 잡느라 항상 넘어져 '대걸레'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대학교 3학년 때 경기당 21.8 득점에 12,9리바운드를 기록했으며, 팀 내 최초의 올 아메리칸으로 선정되었고, 4학년 때도 인상적인 활약을 펼쳐 또다시 올아메리칸에 선정됐다.
드래프트 당시 여러 팀이 노렸는데, 볼티모어 불리츠(현 워싱턴 위저즈)의 스카우트 책임자인 제리 크라우스[5] 를 비롯해 ABA의 미네소타 머스키스에서도 잭슨을 노렸지만, 최종적으로 뉴욕 닉스가 2라운드 17순위로 지명했다.
2.2. 프로선수 시절
뉴욕 닉스에 입단한 후, 1968년 올 루키 퍼스트 팀에 오른 것을 빼고 워낙 쟁쟁한 뉴욕 닉스의 멤버들 때문에 주로 식스맨 역할을 맡았지만 알토란 같은 역할을 해 농구 팬들에게 사랑받았다. 1970년[6] 과 1973년에 선수로서 우승을 경험했다.
1977~1978 시즌을 마치고 뉴욕 닉스는 뉴저지 네츠로 잭슨을 트레이드했다. 잭슨은 뉴저지 네츠에서 두 시즌을 뛴 후 은퇴하며 13년 동안 12시즌을 소화하며 807경기에 출장해 평균 17.6분의 출장시간과 6.7득점, 4.3리바운드의 기록을 남겼다.
3. 감독 및 경영자 커리어
3.1. 시카고 불스
1978년부터 뉴저지 네츠의 선수 겸 코치로 시작하여 은퇴 이후인 1981년까지 코치로 근무하다 1982년에 CBA팀인 Albany Patroons와 푸에르토리코의 프로농구 리그인 BSN에서 코치 생활을 했다. CBA에서는 1984년 팀을 챔피언에 올려놓는 등, 코치 경력이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놀라운 지휘 능력을 보여 주었다. 그런 잭슨의 소문은 시카고 불스의 단장이었던 제리 크라우스의 귀에 들어가게 되고, 잭슨은 불스의 어시스턴트 코치로 고용된다.
그곳에서 '''트라이앵글 오펜스'''의 창시자인 텍스 윈터와 재회한다. 과거 70년대에 잭슨이 선수이던 시절, 당시 휴스턴 로키츠의 감독이던 텍스 윈터를 만난 적이 있는데, 잭슨은 당시에 이미 윈터의 저서인 "트라이앵글 오펜스"를 다 읽고 의문점을 물어봤다고 한다. 트라이앵글 오펜스는 그 당시 획기적이었으나 프로에서 철저히 실패한 전술이었다. 그 창시자이자 지도자 생활을 마무리하는 단계이던 노감독, 그리고 이에 대해 관심을 보이던 영특한 젊은 선수가 훗날 코치 신분으로 재회하게 된 것. 그 후 잭슨과 윈터는 섬머리그에서 이 트라이앵글 오펜스를 시험해보았다. 처음에는 윈터가 주로 작전지시를 하다가 나중에는 필 잭슨이 직접 작전지시를 할 수 있을 정도까지 되었다. 나중에 윈터가 당시 시카고 불스 감독이었던 덕 콜린스와의 의견대립으로 그만두려고 하자 제리 크라우스 단장은 윈터를 달랬으며, '''오히려 덕 콜린스를 해고하고 필 잭슨을 감독으로 승격시켰다.''' 당시 잭슨의 나이 44세였다.
그 계기는 해당 시즌 경기중 덕 콜린스가 경기 초반 심판에게 격하게 항의하다가 벤치 테크니컬 파울로 퇴장당한 일이었다.[7] 이 경우 벤치에도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콜린스는 경기장을 떠나야 했고, 수석코치이던 필 잭슨이 대신 감독의 역할을 수행했는데, 이 한 경기에서 누가 봐도 큰 차이가 났던 것이다. 선수들마저 "마치 우리에서 풀려난 듯한 기분이었다"라고 표현할 정도였으니.. 불스가 덕 콜린스를 버리고 필 잭슨을 선택하게 된 데는 이 경기의 영향도 컸다.[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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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슨은 섬머 리그 때 써먹어서 재미를 봤던 트라이앵글 오펜스를 이제 실전에 사용하기로 했다. 하지만 마이클 조던은 이에 불만을 나타났다. 오랫동안 자신을 위주로 한 전술에 익숙했던 조던으로서는 자신의 역할이 줄어드는 것에 반발했던 것이다. [10] 덕 콜린스는 "하루에 한가지 전술"이라고 할 정도로 다양한 전술을 사용하던 감독이었지만, 이 모든 전술의 중심에 조던이 있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로 인해 조던은 포인트가드까지 하며 온갖 역할을 했지만, 조던 개인적으로 어마어마한 활약을 한 것과 별개로 한 명에게만 의존하는 팀전술에는 한계가 있었다. 잭슨은 그런 조던을 '''"이 전술에 잘만 적응하면 네가 원하는 우승도 할 수 있고 너는 더 위대한 선수가 될 수 있다."'''라고 설득했고, 조던이 이를 수긍했다. 그리고 막상 적용해 보니 자신에게 오는 부담이 다소 줄어든 것에 만족스러웠다고 한다.
감독으로 시작하는 첫 시즌인 1989-1990 시즌에 55승 27패를 기록하면서 초보 감독으로서는 훌륭한 성적을 찍어내면서 팀을 컨퍼런스 파이널까지 올렸지만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에게 패했다. 그러나 다음 시즌인 1990-1991 시즌에 디트로이트를 4전 전승으로 압승을 거두었고 파이널에서는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까지 4승 1패로 완승을 거두서 첫 우승반지를 끼었다. 그후 1991-1992 시즌과 1992-1993 시즌에도 우승을 차지하면서 3년 연속 우승반지를 끼면서 명장의 반열에 올랐다.
마이클 조던의 1차 은퇴 때는 팀을 여전히 강팀으로 유지시키기는 하였으나, 그 이상은 필 잭슨에게도 무리였다. 1993-94시즌 당시에는 조던을 제외한 대부분의 멤버들 [11] 이 맹활약하며 무려 55승이나 거두는 등 잘나갔다. 그러나 닉스와의 플레이오프 당시 잭슨이 동점 상황에서 마지막 슛을 크로아티아 출신의 토니 쿠코치에게 맡기자 빡친 스카티 피펜이 출전을 거부하면서 삐걱대기 시작했다. [12] 1994-1995 시즌에는 골밑의 기둥인 그랜트가 올랜도 매직으로 이적하고 팀의 공동주장이자 정신적 지주였던 빌 카트라이트가 떠나는 등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아예 플레이오프 진출도 장담할 수 없을 정도였지만, 조던의 귀환 덕에 팀은 안정을 조금씩 되찾았다.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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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1996 시즌에는 데니스 로드먼의 합류로 로스터가 새롭게 정비되었다. 당시 시즌 전에는 우려가 많았다. 조던은 오랜 공백기가 있었고, 피펜은 여전히 구단과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로드먼은 당시 누구나 알아주는 문제아였다. 이들을 하나로 묶어내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그 해 시카고 불스는 NBA 역대 최고 성적인 72승 10패를 기록하면서 우려를 나타냈던 많은 전문가를 할말 없게 만들었고, 조던-피펜-로드먼의 삼각 편대로 다시 한 번 트라이앵글 오펜스를 완벽하게 구축한 잭슨은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당연히 우승했다. 그리고 또 한 번의 3연패를 기록했다.
그러나 시즌이 끝난 후 여름마다 조던, 피펜, 로드먼의 이적설과 맞물려 잭슨도 팀을 떠난다는 루머가 많이 나왔다.
특히 잭슨과 피펜은 재계약에 난항을 겪었는데, 당시 단장이었던 제리 크라우스는 "팀을 만드는 것은 어디까지나 단장의 역할이고, 감독은 그 밑에 있는 것"이란 생각이 굳건했고, 한때 "내 밑에 있는 감독은 절대 연봉 백만달러 이상 줄 수 없다"고 공언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영향력이 점점 커지는 잭슨, 특히 조던의 입김으로 인해 크라우스는 결국 그에게 결국 거액의 연봉을 안겨주고 만다. 하지만 두 사람간의 갈등은 점점 심해져, 1997년 크라우스 딸의 결혼식에 모든 불스의 어시스턴트 코치들은 초대되었음에도 잭슨 감독만 초대되지 않는 사태가 벌어진다. 급기야 1997-98시즌을 앞두고 크라우스는 잭슨에게 1년간 계약한 다음 [14] "불스가 우승해도 잭슨과는 재계약 안한다"고 못을 박아버린다. 이에 빡친 잭슨이 "그럼 상대편을 응원하겠소"라고 대답하자 크라우스는 "82승 0패를 해도 상관없어. 당신은 씨x 끝이야(I don't care if it's 82-and-0 this year, you're fucking gone)"[15] 라고 시원하게 질러버린다. 잭슨이 떠날게 거의 확실해지자 예전부터 "잭슨 아니면 안 뛴다"고 공언한 조던, 그리고 연봉에 불만을 갖고 있던 피펜의 잔류가능성이 극히 희미해졌고, 이 셋이 떠나면 굳이 불스에 있을 이유도 없는 로드맨의 이적 가능성도 커졌다.
이와 같은 잡음 속에 1997-1998 시즌은 언론도, 팬들도 "이게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시작 전에 선수들에게 나눠준 팀 다이어리 표지에는 아예 ''''The Last Dance''''라고 박혀 있었다. 결국 두번째 그 시즌을 우승으로 이끌며 3-peat을 달성하며, 조던은 은퇴, 피펜, 로드맨은 이적했고, 잭슨도 "다시는 감독직에 앉지 않겠다"며 어느 팀과도 계약하지 않고 1년동안 백수로 살게 된다.
3.2.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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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2000 시즌을 시작하기 전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는 샤킬 오닐, 코비 브라이언트, 엘든 캠벨, 로버트 오리, 에디 존스 등의 좋은 로스터를 보유하고도 지난 시즌 들어 감독이 두 번 바뀐 채 플레이오프에서 샌안토니오 스퍼스에게 4전 전패로 처발리거나, 그 이전에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존 스탁턴, 칼 말론이 이끄는 유타 재즈에 덜미를 잡혀 탈락하는 등 강팀이라고 하기에는 2% 부족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과거 쇼타임 레이커스의 부활을 꿈꾸던 레이커스 구단은 조바심이 났고, 급기야 야인생활을 하던 필 잭슨을 영입했다. 잭슨은 이에 응하면서, 텍스 윈터와 프랭크 햄블렌, 짐 클레몬스를 포함한 자신들의 코치진도 같이 데려왔다. 그는 에디 존스와 엘든 캠벨을 샬럿 호네츠에 넘기고 시카고 불스의 후반기 3연패 멤버였던 론 하퍼와 쇼타임 레이커스 시대의 멤버였던 노장 A.C 그린을 영입해 로스터에 깊이를 더했다.
시카고 불스 때처럼 레이커스에서도 잭슨은 트라이앵글 오펜스를 접목시켰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무엇보다도 레이커스의 트라이앵글 오펜스의 성공비결은 바로 샤킬 오닐의 존재덕분이었다. 당시 오닐은 압도적이라 할만큼의 리그 최고의 센터. 시카고 불스 시절 1기~2기 트라이앵글 오펜스에서의 센터의 역할은 몸빵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지만, 원래 트라이앵글 오펜스는 포스트업에 능한 센터와 윙맨들의 조화로 만들어내는 전술이기 때문에 오히려 레이커스의 트라이앵글 오펜스가 원조에 더 가까운 형태였다. 레이커스 트라이앵글의 중심이 된 오닐은 몸빵은 기본옵션으로 달고 있을뿐만 아니라, BQ도 엄청나고 골밑에서는 가히 상대가 없었다. 트라이앵글 중심축에 수비가 몰리게되면, 다른 선수들의 활동반경은 넓어지게 되는데, 유기적인 움직임과 약속된 플레이가 많은 트라이앵글 오펜스에 샤킬 오닐의 존재는 이 전술에 날개를 달아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샤킬 오닐도 이 전술을 통해서 더 무서운 선수가 되었고, 인터뷰에서 '''"필 잭슨 감독님만이 날 코치할수 있다!"'''이라고 할 정도.
또 하나 다른 점은 레이커스에서는 조던 역할을 할 수 있는 선수는 있었지만, 피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선수는 없었다. 결국 이 두 선수가 하던 역할을 코비 브라이언트가 맡았다. 백코트에서의 득점과 볼 배급과 게임리딩, 상대 백코트 에이스를 전담수비하는 것이 그것이다. 사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브라이언트는 수비에 구멍이었지만, 농덕후답게 죽자고 연습해 비약적으로 수비능력을 상승시켰다. 위에 언급한 역할도 훌륭히 수행해서 잭슨으로부터 '''"재능면에서는 조던보다 낫다."'''라고 할 정도이다. [16]
레이커스는 99-00부터 01-02시즌까지 3연속으로 우승했다. 특히나 00-01시즌 플레이오프에서는 1라운드부터 파이널까지 단 1패만 기록하고 나머지를 이기고 우승하는 최종보스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단 필 잭슨 본인은 레이커스에 있는 기간동안 좀 많이 머리가 아팠을것 같다. 오닐과 코비 사이에 1인자를 두고 벌인 알력다툼처럼 시카고 불스때보다는 통제하기 어려웠던 팀 분위기등이 그랬다. 그리고 구단관계자의 현장개입을 싫어하기로 유명한 그 성향때문에 끼어들기 좋아하는 버스 일가가 운영하는 구단 높으신 분들과도 어느정도 마찰도 있었다. 그후 02-03시즌에 파이널 진출 실패, 03-04 시즌에는 칼 말론, 게리 페이튼이 합류한 이른바 '''전당포 라인업'''으로도 파이널에서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에게 패하면서 그는 팀과 재계약하지 않고 윈터, 클레몬스 코치와 함께 다시 야인모드로 돌아갔다. [17][18]
하지만 04-05 시즌. 오닐과의 파워게임에서 사실상 승리한 코비를 위주로 시작한 레이커스가 34승 48패로 퍼시픽 디비전 공동 최하위를 기록하는 등 실패로 끝나자, 다급해진 레이커스 프런트는 다시 가족들과 함께 뉴질랜드 여행을 하고 있던 필 잭슨을 불러들였다. [19] 그는 코비 위주의 팀 편성에 동의하여 취임 기자회견에서 팀을 3년안에 우승시키겠다고 공언했다. 다만 동반자 텍스 윈터는 코치가 아닌 고문으로 돌아왔고, 그를 도울 코치진도 햄블덴, 커트 램비스, 카림 압둘 자바 등으로 재편됐다.[20]
처음 두 시즌은 그저 중위권팀 정도의 전력이었고, 잭슨 본인도 감독경력중 가장 나쁜 성적을 기록하는등의 시련도 있었지만, 07-08시즌 레이커스의 단장 미치 컵책이 과감한 트레이드로 멤피스 그리즐리스의 올스타이자 스페인 국대 주전 센터 파우 가솔을 영입하면서 코비 브라이언트-파우 가솔-앤드류 바이넘(+라마 오돔)이라는 강력한 인사이드를 중심으로 한 트라이앵글 오펜스 4기를 구성해 팀은 단숨에 우승후보권 팀으로 돌아왔다. 비록 파이널에서 보스턴 셀틱스에게 패했지만 다음시즌에 올랜도를 꺾고 우승했으며, 09-10시즌에는 보스턴을 다시 파이널에서 만나서 우승, 08년도 파이널에서의 패배를 설욕했다. 잭슨은 11번째 우승을 하면서 명실상부한 명장으로 다시 칭송받았다. 그러나 위풍당당하게 쓰리핏을 노리던 10-11시즌, 댈러스 매버릭스에게 충격의 4전 전패[21] 를 당해 서부 컨퍼런스 준결승전에서 탈락하게 되자, 잭슨은 미련없이 코치 3명과 함께 지도자 일선에서 은퇴했다.
그러다가 12-13시즌 마이크 브라운이 중도 경질되자 다시 복귀설이 돌았는데, 레이커스의 선택은 마이크 댄토니였다. 이를 두고 구단주 짐 버스가 상술했듯 수뇌부의 현장개입을 싫어하는 잭슨을 꺼리지 않느냐는 카더라가 돌기도 했다. 물론, 구단주 일가의 잭슨에 대한 호불호 이전에 이미 10-11시즌부터 잭슨은 건강이 매우 안좋은 상황이였고, 사실상 감독을 할 수 없는 몸 상태였다는 게 더 맞을 것이다.
2013년 4월에는 샤킬 오닐의 레이커스 영구결번식에 참석했는데, 오닐이 감사한 사람들을 열거하면서 필 잭슨을 호명하자, 레이커스 팬들이 '''We want Phil !!!'''을 연호했다. 잭슨이 레이커스 프랜차이즈에 있어서 어떤 감독인지 여실히 나타내는 부분.
그런데...
3.3. 뉴욕 닉스
http://bleacherreport.com/articles/1984758-new-york-knicks-reportedly-contacted-phil-jackson-about-head-coaching-position
2013~2014년 시즌 후 최악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뉴욕 닉스가 현역 시절에 닉스에서 뛰었던 필 잭슨과 접촉을 시도했다. 여러 번의 고사 끝에 2014년 3월, 그는 연봉 1천200만 달러에 계약 기간 5년으로 사장직을 받았다.
http://sports.media.daum.net/sports/basketvolley/newsview?newsId=20140319065704845
뉴욕 닉스의 사장이 된 이후 팀 재건의 시작은 자신의 트라이앵글 오펜스를 이해하는 사람을 모으는 것으로, 그 시작은 2014년에 오클라호마시티 썬더에서 막 은퇴한 제자 데릭 피셔를 감독으로, 코치에 수하 짐 클레몬스와 커트 램비스를 선임한 것. 5년 2500만 달러라는 지도자 경력 전혀 없는 선수에게 거액을 안겼다는 점에서, 건강때문에 감독자리에 앉을 수 없는 사정상 자신의 트라이앵글 오펜스를 그대로 접목시킨뒤 피셔에게 컨트롤 타워를 맡기고 자신이 팀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22] 선수 구성에 있어서는 팀의 코어인 멜로에게 5년 124m과 트레이드 거부권까지 얹어주며 잔류시키는데 성공했고 나머지는 대부분 롤플레이어들로 채웠다. 목표는 플옵 진출이라고 밝혔지만 사실상 리빌딩의 첫 시즌이라 성적은 크게 기대하기 어려웠던 상황.
그리고 맞이한 첫 시즌인 14-15시즌, 아무리 트라이앵글 오펜스를 닉스에 접목시키려 했다지만 뉴욕 닉스의 시즌 최종성적은 17승 65패....닉스 프랜차이즈 역사상 최악의 성적이다. 닉스가 최악의 성적을 찍은것엔 무리하게 트라이앵글 오펜스를 강요한 것에도 큰 원인이 있다는게 중론이라 필 잭슨의 책임은 피할 수 없는 상황. 이 와중에 필 잭슨은 포인트 가드의 역할이 지나치게 커지고 있는 현 상황이 맘에 들지 않는다는 인터뷰를 했다가 까이기도 하고[23] 급기야 플레이오프 도중 3점 의존도가 높은 팀들이 부진하자 '아이 씐나'하는 트윗을 올렸다가 '3점 의존도 낮은 댁의 팀은 대체 몇등이유?' 소리만 잔뜩 들어야 했다(...)[24]
15/16 시즌, 61경기를 치룬 시점에서 25승 36패를 하며 작년에 비해서는 좀 나아진 모습을 보였지만, 같은 디비전에 역대급 탱킹 시즌(...)을 보내고 있는 필라델피아가 있어서 이 역시 그리 좋게만은 볼 수 없는 상황.
16/17 시즌은 부진한 카멜로 앤서니를 트레이드하려고 언론플레이를 연발, 카멜로 앤서니는 또 이에 맞받아치면서, 뉴욕 닉스 자체가 둘로 갈라져 망가져버리고 있다. 정말 어이없는 사실은 그렇게 내보내지못해 안달인 멜로에게 최고액 계약을 안겨주며 팀에 잔류시킨 사람이 바로 잭슨 본인이라는 점.[25] 트라이앵글은 여전히 고집하고 있는 중(...) 뉴욕 닉스의 2번의 우승 모두를 선수시절에 경험한 필 잭슨이 이렇게 팀을 망가뜨리는 것도 아이러니하다.
16/17 시즌을 끝으로 잭슨은 닉스 팬들, NBA 선수들, 취재진들, 하여간 머리 달린 사람들한테는 미움을 한몸에 받고 있다. 잘나가던 팀 분위기를 언플로 망치고, 거의 일년동안 뉴욕 기자들한테 코빼기도 안보이더니 시즌 끝난 하루 뒤 기자회견을 드디어 가지고 멜로, 포르징기스, 호나섹을 대차게 깐다. 멜로와 호나섹은 둘째치고 도대체 왜 포르징기스를 까냐라는 의견이 대부분. 리그 선수들과 스타들의 큰형같은 멜로를 헌 걸레짝처럼 대한 짓은 포르징기스 뿐만이 아니라 타 팀들 스타들과 멜로를 우상으로 여기고 있는 젊은 유망주 선수들, NBPA (NBA 선수 대표단, 여담으로 멜로는 여기 부회장이다!) 까지 나서서 비판한 행동인데, 잭슨은 다 씹고 팀의 미래 포르징기스까지 깠다. 3점을 쏘면 비겁한 식으로 득점한다거나, 아직은 팀을 이끌만한 인재는 아니다 , 라고 리그 전체에게 ㅇㅇ 쟤네는 뭘 해도 안됨 이라는 인식을 처박아 놨다. 누가보면 자기 팀 까려고 뉴욕온줄. 긴말없이 잭슨은 무조건 뉴욕에서 없어져야 될 존재가 되어있다. 이젠 포르징기스가 잭슨과의 기싸움까지 해야 할 기세.
2017년 드래프트 하루 전날 닉스 역사상 가장 거대한 병크를 터트릴 징조를 보이고 있다. '''크리스탑스 포르징기스를 트레이드 하고 싶다라고 한 것.''' 이유가 참 골때리는게, 시즌이 끝나고 모든 선수들이 사장과 가지는 결산미팅 같은게 있는데, 포르징기스가 이걸 쌩까버린것. 포르징기스의 입장에선 정말 쌩깔만 했다. 큰형같은 멜로를 팀 내 암같은 존재로 만들어 내쫓아버리려하고, 뭐라도 해볼려는 코치는 허수아비로 만들어버리고, 자신이 잘 하는 3점이나 픽앤롤은 하지 말라 하고, 팀 내 뭐 하나 해볼려하면 잭슨이 나와서 다 망치는데 누가 그 사장이랑 만나고 싶을까? 그런데 잭슨은 포르징기스가 이걸 안왔다고 노발대발 한 것. 기자가 포르징기스 트레이드 소문에 대해서 물어보자 '우리는 포르징기스를 사랑하지만 팀에게 가장 중요한 미래를 생각해야 한다. 감독생활중 한번도 나랑 이 미팅을 안 한 선수는 없었다' 라는 말도 안되는 개소리를 해대면서 포르징기스를 트레이드 하고 싶다는 말을 한다. 50년 어린 아이한테 자존심 상처 받아서 팀에 미래를 팔아버리려는 노망든 사장의 몸부림. 닉스 팬들은 정말 무슨 죄를 졌는지...사장으로서 유일하게 잘한게 포르징기스를 뽑는거였는데 그거마저 버리려고하는 절망적인 상황. 닉스 팬들 분위기는 포르징기스가 트레이드 된다면 다른 팀의 팬이 되거나 대규모 시위를 해서 트레이드를 막던 하던가 둘중에 하나쪽으로 가는듯. 말이 필요없이 잭슨은 닉스 역사상 최악의 사장이 되가고 있다 결국 6월 27일자로 임기가 만료되었고, 사장 자리에서 물러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26] [27]
4. 능력에 대한 구설수
13번의 파이널 진출과 11번의 우승등으로 명장으로 불려도 손색이 없는 감독 커리어를 쌓았지만 몇몇팬들은 그를 명장으로 부르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 지금까지 맡았던 팀은 모두 전임자들이 전력을 보존해놓고 간 강팀이었고,
- 트라이앵글 오펜스는 코치 텍스 윈터의 작품이며 그는 그것을 윈터의 조언에 맞게 사용만 했을 뿐이며
- 조던, 피펜, 로드먼, 오닐, 코비, 가솔 등 함께해온 선수들이 워낙에 넘사벽급이라는 것.
그러나 레드 아워벡의 해당 멘트는 2000년대 초반이었고 잭슨의 커리어는 12년이었다. 이후 잭슨은 레이커스를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재건하며 2연패를 이뤄냈다. 레이커스 시절 3연패까지만 해도 잭슨의 능력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이들이 있었지만, 플옵에 겨우 진출하던 팀을 기본부터 다져서 챔피언팀으로 만든 이후 이러한 논쟁은 사라졌다. "경영자 필 잭슨"에 대해서는 안 좋은 의견이 많지만 그의 11번째 우승을 기점으로 "감독 필 잭슨"의 능력을 진지하게 폄훼하는 전문가는 없다.
실제로 외국팬덤에서 논란은 "필 잭슨이 명장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필 잭슨이 역대 최고의 감독이냐 아니냐"가 주를 이루며, 아워벡과 잭슨 중 누가 더 뛰어나냐는 논쟁은 단골메뉴다.
5. 감독능력 및 전문가들의 평가
잭슨은 기술보다 심리적인 면에서 지도를 하는 거에 능하다고 여겨지는데, 이기주의적인 팀 선수들을 컨트롤해내는 데 능한 모습을 보인다. 보통 팬들은 '''"약팀을 혹독하게 조련해서 강팀으로 만들고 마침내 우승한다!"'''[28] 라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에 그런 공식에 한참이나 어긋난 잭슨에게 거부감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그 공식에만 어긋난 것일뿐이지 잭슨은 충분히 명장감독이다. 전형적인 올드스쿨형으로 선수들을 혹독하게 조련하는 래리 브라운과는 감독성향은 달라도 그가 브라운과 같으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그리고 많이들 간과되는 부분인데 05-06, 06-07 두 시즌동안 코비를 빼고 별볼일없던 로스터를 플레이오프까지 끌고 갔으며, 2007-08시즌 당시엔 앤드류 바이넘이 부상으로 빠지기 전까지 한때 서부 1위로 이끌기도 했다. [29] 이걸 전부 코비의 공으로 돌리는 팬들이 많은데, 코비가 이끌던 04-05시즌 레이커스가 플옵탈락한걸 기억하자(물론 부상으로 인한 결장이 많긴 했다) 그리고 이걸 떠나서 래리 브라운같은 감독이 안습로스터인 팀을 플옵으로 이끌면 칭송하면서 필 잭슨이 똑같은 일을 하면 그 팀의 에이스 덕이라고 하는건 앞뒤가 안 맞는다. 아무리 코비가 있었어도 05-06레이커스는 스무쉬 파커, 콰미 브라운, 크리스 밈 따위가 주전으로 나오던 팀이다.[30] 또한 가솔이라는 굴러들어온 복이 있었다고는 하나 09,10시즌 2연속 우승을 한 팀은 분명 잭슨이 토대부터 닦은 팀이며 이 팀의 에이스 코비는 잭슨 휘하에서 슈퍼스타로 성장한 인물이다. 심지어 94시즌에 조던의 공백에도 55승이나 거두며 준우승팀 닉스를 7차전까지 끌고 갔는데 이것도 오롯히 스카티 피펜의 공으로 돌리는 사람들이 많다(...). 2대1로 뒤지던 4차전에서 루키 토니 쿠코치(물론 쿠코치는 25세의 젊은 나이에도 유럽에서 풍부한 경력을 쌓아 마냥 애송이는 아니었지만)에게 마지막 샷을 맡긴 승부사가 누군지 생각해보자.
감독으로 맡았던 팀인 시카고 불스와 레이커스는 분명 강팀이었지만, 우승후보권이라기보단 도전자 수준의 팀이었고, 잭슨이 감독을 맡게되어서야 우승컵을 들어올릴수 있었다. 그리고 한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다면 그는 시카고 불스에서 감독을 맡은 첫 시즌부터 55승을 거두었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첫 시즌부터 이런 성적을 내기는 힘들다. 물론 스티브 커 감독이 부임 첫 시즌인 2014-15시즌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가 무려 67승이나 거뒀고, 바로 다음 해 역대급 팀을 만들었다는 예시를 통해 반문할 수도 있다.[31] 하지만 이건 스티브 커가 예외적으로 잘한 거고, 첫 해부터 팀을 저런 성적으로 이끄는 건 굉장히 드문 일이 맞다.
함께 해온 선수들이 리그 역사상 다시 없을 실력만큼 쪼잔한 농구황제, 그분과 상호객체였던 세계 최고의 2인자, 리그 역사상 최고의 문제아, 자칭 Most Dominent Ever, 리그 역사상 가장 지독한 농덕후, 자비 세계 평화란 이름을 가진 리그 최악의 돌아이 등등 선수들 면모하나하나가 심상치 않았지만, 잭슨은 이들을 팀이라는 하나의 공통체로 묶어서 우승으로 이끌었다. 특히 개개인의 어마무시한 이름값 답게, 잭슨은 커리어 내내 슈퍼스타들간의 구설수[32] 가 끊이지 않았다. 시카고 불스 시절에는 데니스 로드먼이 시즌 도중 대놓고 파티를 열어 팀 분위기를 다운시킨적이 있으며, 이는 현재에도 최소 5경기 이상의 출전 정지 철퇴가 내려지는 중징계다.[33] 여기에 농구 황제와 영혼의 콤비였던 스코티 피펜조차 시카고 불스 시절 적은 연봉에 대해 공개적인 불만을 토로한 적이 있으며, 레이커스 시절에는 그 유명한 샤킬 오닐과 코비 브라이언트의 알력 싸움으로 인해 한 때 심리 치료사까지 동원됐을 정도로 심각한 수순에 이르렀다. 코비는 2003-04시즌 도중 성폭행 스캔들로 1년간 법원을 오가면서 이 기간 동안 극심한 성적 추락을 겪기도 했으며, 결국 잭슨은 PO에 나서지 못한 2004-05시즌을 끝으로 사퇴하기까지 했다. 그 뿐만 아니라 다시 돌아온 2007-08시즌에 조차 코비가 필 잭슨의 트라이앵글 오펜스에 대해 공개적으로 불만을 토로하며 트레이트 요구를 했었다. NBA 역사상 그 어느 감독들도 이 정도로 많은 슈퍼스타간의 갈등을 겪은 사례는 찾기 힘들다.
하지만 잭슨은 선수가 코트 위에서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코트밖에서 뭘하든지 간섭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러한 선수들간의 갈등과 악재를 봉합하여 성적 향상을 위한 또 다른 방편으로 삼는 영리함을 선보였다. 또한 선수빨이라는 단어가 무색하게 선수들에게 끊임없이 동기부여를 해주면서 선수들의 성장을 도와주기도 한다. 그래서 잭슨은 그런지 몰라도 선수들과 불화도 별로 없었다. 다만 코비 브라이언트의 경우는 자신의 자서전을 통해서 '''도저히 제어할수 없는 선수'''라고 표현하긴 했지만.[34] NBA역사에 그만큼 '''슈퍼스타들을 컨트롤할 수 있는 명장'''은 그 외엔 얼마 없을 것이다. 특히 90년대 이후처럼 슈퍼스타 한명이 팀과 리그 전체에 끼치는 영향이 막대한 NBA에서 슈퍼스타들을 고분고분하게 만들수 있는 카리스마는 아무나 갖는게 아니다.
또한 그는 자신이 맡은 팀의 선수들이 농구만 바라보고 사는걸 원하지 않았다. 늘 인생을 되돌아보길 원했다. 또 다른감독들과는 달리, 선수들에게 그 선수성향에 맞는 책을 하나씩 선물로 주면서 '''독후감을 써오라고''' 하기도 한다.
작전의 경우, 분명 트라이앵글 오펜스는 그의 작품은 아니다. 그러나 작전타임때 늘 작전지시를 하는건 그다. 그리고 벤치에서 앉아있는 모습만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실제로는 다른 감독들처럼 일어나서 고함을 치기도 한다. 한창때는 서있는 모습이 더 많았다. 그리고 늘 박빙의 승부이고 경기종료가 얼마남지 않은 상황에서 그는 비장의 수를 준비해서 꺼내든다. 물론 실패할 때도 있지만 그건 어느감독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감독 생활을 빅 마켓에서 시작하고 끝냄으로써 지원을 가감없이 받았고, 감독 생활 초기부터 유능한 코치진을 구성하는 행운을 누렸으며, 특히 선수단을 장악하는 능력에 뛰어났던, 유능하면서 행운까지 따라주었던 감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걸 다 떠나서 프로 최고의 목표는 우승이다. 선수빨 운운하기 전에 디트로이트에게 계속 물먹던 조던이 그가 와서야 우승하고, 결승에도 오른적이 없는 오닐-코비의 레이커스가 잭슨이 부임한 첫 해 우승하고, 소속팀을 한두 차례도 아닌 무려 11회나 우승시킨 감독이 명장이 아니란 건 무리가 크다. 1960년대에 그야말로 독주를 한 셀틱스의 감독 레드 아워벡조차 9회 우승에 그친다. NCAA에서 최다 우승한 전설 존 우든은 10회 우승이다. 게다가 필 잭슨은 짧은 커리어를 가진 감독도 아닌데 (통산 승수 5위) 통산 승률이 1위이다.
다른 걸 다 떠나서 실력만큼 자존심이 강하기로 유명한 선수들인 마이클 조던과 샤킬 오닐이 "잭슨 외에 다른 감독 밑에선 뛰지 않겠다"고 공언한 것만 봐도[35] 그가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ESPN의 애널리스트이자 워싱턴 포스트에서 스포츠 기자였던 마이크 윌본은 잭슨이 은퇴할 당시 스포츠 모든 감독을 통틀어서 최고의 감독 중 하나라고 평했으며, 그와 어께를 나란히 할 감독은 레드 아워백 외에 NFL의 빈스 롬바르디, 스코티 보우먼 정도가 있을 거라고 평했다.
사실 감독 능력에 대한 구설수는 팬들 사이에서나 있는 거지, '''전문가들 사이에서 그는 이미 위대한 감독으로 인정받고 있다.'''
잭슨의 감독 능력에 대한 폄훼의 대부분은 NBA식 감독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다. 잭슨은 "위대한 관리자이자 리더"이지 "위대한 전술가"는 아니다. 실제로 전술적 능력의 대부분은 텍스 윈터를 위시한 코칭 스태프에게 위임된다. 그러나 NBA에서는 학생 스포츠나 KBL처럼 감독의 권위가 절대적인 곳이 아니다. NBA에서 감독과 선수는 수직적 관계가 아니고, 감독은 팀을 이끌어나가는 리더의 위치에 가깝다. 이러한 점 때문에 전설적인 대학 감독들은 한사코 프로에서 감독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인디애나 대학의 바비 나이트와 마이크 슈셉스키가 있으며, 대학 명장인 릭 파티노 역시 프로에서 잠깐 감독생활을 했다가 처참하게 실패한 적이 있다.
물론 프로에서도 제리 슬로언이나 래리 브라운처럼 자신만의 방식을 고집하는 감독들이 있다. 그러나 과거에는 몰라도 선수들의 입김이 강해지기 시작한 90년대 중반 이후부터 이런 스타일의 감독들은 자아(ego)가 강한 슈퍼스타들과 충돌해왔다. 이들이 칼말론&존 스탁턴, 레지 밀러,앨런 아이버슨과 오래 공존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의 농구철학과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슬로언은 신세대 스타인 데론 윌리엄스와 극도로 갈등을 겪다가 결국 짤린 적이 있다. 또한 래리 브라운 역시 고집불통인 스테판 마베리 등이 있는 뉴욕 닉스에서 감독생활을 할 당시 명성에 어울리지 않는 처참한 성적을 거둔 바 있다.
잭슨이 위대한 관리자라는 점이 여기서 드러나는 것이다. 마이클 조던이나 샤킬 오닐 역시 감독하기 쉬운 스타일이 아니다. 잭슨 이전에 조던을 감독했던 이들은 조던의 영향력에 흔들렸으며 오닐 역시 잭슨 이전의 감독들을 대놓고 무시했다. 대학이나 KBL과 달리 NBA에서는 이런 선수들을 감독이 "제어"할 정도의 권위가 없다. 그러나 잭슨은 우격다짐으로 이들이 자기 방식을 따라오게 하지 않고 '''이들이 스스로 성찰을 해 잭슨 자신의 방식을 스스로 받아들이게 했다.''' 잭슨의 자서전 Sacred Hoops에 보면 그가 조던과 트라이앵글 오펜스의 필요성에 대해 오랫동안 얘기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또한 오닐 역시 은퇴 이후 잭슨에 대해 "내 생애 처음으로 감독이 내게 와서 '네가 위대해지기 위해 해야할 일은 이것들이다'라고 말해주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즉, 그는 위대한 선수들이 자기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주는데 능했던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인해 조던과 오닐은 자기만 잘하는게 아니라 진정 뛰어난 팀플레이어로 거듭났고 팀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코비 브라이언트가 리더로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05-06시즌, 즉 오닐과 잭슨 없이 한 시즌 홀로서기를 시도했다 처절히 실패하고 잭슨이 복귀한 바로 그 시즌부터이다.이런 성공이 한 두번이면 우연일 수도 있다. 그러나 '''11번이나 운이 따를 수 있을까?'''
또한 그는 단순히 위대한 관리자일 뿐 아니라, 조던이나 오닐같은 선수들이 진심으로 자신을 존중하고 따를 수 있게 하는 막강한 카리스마와 흔들리지 않는 정신을 가진 리더였다. 물론 전술적 면에서 그는 래리 브라운같은 감독들보다 쳐진다. 그러나 브라운 역시 잭슨이 갖고 있는 동기부여나 리더쉽은 갖고 있지 못한다. 즉, 선수단 장악능력은 잭슨이 앞서는 것이다. 만약 브라운과 잭슨이 대학이나 KBL의 감독이었으면 브라운이 단연 더 뛰어난 감독으로 평가받았을 것이다. 왜냐면 그런 무대에서 감독의 선수단 장악력은 먹고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NBA에서는 선수가 한 구단 전체, 더 나아가서 리그 전체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을 수도 있다. 연봉만 봐도 알 수 있는데, 선수들은 올스타급이 안되더라도 웬만한 스타급은 천만불을 쉽게 넘기지만 감독이 천만불을 넘기려면 정말 역대급 명장이어야 한다. 실제로 르브론 제임스같은 슈퍼스타는 대놓고 감독의 지시를 무시하고 다른 지시를 한 적도 있으며, 제임스보다 훨씬 영향력이 적은 제이슨 키드나 데론 윌리엄스도 간접적으로 감독을 잘리게 만든 적이 있다. 그렇기에 NBA에서 선수단을 완전히 장악하고, 이들에게 동기부여를 하는 능력은 극소수의 감독들만이 갖고 있는 능력이고 이 점에서 필 잭슨은 역대 최고라고 할만하다. 즉, 브라운같은 "전통적 의미의 명장"들이 갖고 있는 능력만큼이나 잭슨이 갖고 있는 능력은 NBA에서 중요하고, 이 때문에 필 잭슨은 브라운이나 슬로언과 다른 스타일로 역대 최고 수준의 명장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핵심은 2010년대 중반 이후 슈퍼팀 결성을 바탕으로 더 이상 약체팀을 조련하여 강호로 만든다는 것 하나만으로는 명장이 되기 힘들어졌다는 것이다. NBA 대표적인 변방이었던 토론토 랩터스를 6년 동안 평균 64.1%의 승률을 기록하고, 2017-18시즌에는 59승 23패로 구단 역사상 최고의 성적을 거두는 등 토론토를 리그의 대표적인 강팀으로 만들었지만, 2015-18시즌 PO에서 3년 동안 끝내 동부 컨퍼런스의 지배자를 넘지 못해 경질된 드웨인 케이시 감독[36] 이 대표적인 사례다. 최근 NBA 감독들은 이전처럼 선수를 휘어잡거나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선수단 관리, 그리고 변화무쌍한 임기응변 능력이 가장 중요한 덕목이 되고 있다. 2010년대 이후 스타파워가 매우 강해진 탓에 자신 스타일이 강한 감독과의 마찰이 잦고, 결국 좋은 성적을 내고도 불명예 퇴진을 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37] 이런 점에서 잭슨 감독은 현대 농구에서 오히려 재평가받아도 무방하다. 현대 농구에서 전술적 역량이나 카리스마 보다는 원활한 선수단 관리가 더욱 중요해진 상황이기 때문이다.
6. 경영자로서 부정적인 평가 및 꼰대기질
상술했듯, 최근 뉴욕 닉스에 둥지를 튼 필 잭슨은 있는 욕 없는 욕 다 얻어먹고 있는 상황이다. 팀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트라이앵글 오펜스를 정착시키려고 한 것이 주된 실패 요인으로 꼽히며, 또한 유연하지 못하고 고집이 센 보수적 인물이라 현대 트렌드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는 비판도 있다. 다른 강팀들이 잭슨이 현업을 떠나있는 동안 잭슨의 트라이앵글 오펜스를 넘기위해 전세계의 재능과 지략을 모으고 연구하고 훈련해 2020년에 가까운 최첨단 농구를 할동안 10년전의 옛날 농구를 하고 있는 것.
모든 팀들이 좋은 포인트 가드를 찾아 헤매고 있을 때 필 잭슨은 콧방귀만 뀌었으며, 포인트 가드 뿐만 아니라 3점 슛을 완전 혐오하기 때문에 팀을 나락으로 밀어넣고 있는 상황이다.[38] 현재 상황은, 이러나 저러나 선수들에게 공을 많이 돌릴 것만을 강요하며 트라이앵글 오펜스만 완성하면 좋은 팀이 될 거라고 하고 있지만 과연...?
그의 3점 혐오증은 요즘도 그대로여서, 최근 미친듯한 활약을 보이고 있는 스테판 커리를 두고, '''드래프트 당시''' 비교대상이었다는 크리스 잭슨(마흐무드 압둘 라우프)스탯과 비교하며 '스테판 커리 같은 선수가 처음이라고? 크리스 잭슨처럼 짧고 훌륭한 성적을 낸 선수가 있잖아'같은 얘길 했다가 여기저기에서 융단폭격을 받고 있다. 애초에 커리같은 선수는 반짝하고 끝날 거라는 뜻의 꼰대스러운 발언인 데다가, 크리스 잭슨은 평득 20점은 물론 3점 40%도 해본 적이 없는 선수이다. 커뮤니티에서는 닉스나 어떻게 해 보라고 욕 먹는 중. 2월 29일자(현지시각) 트위터를 통해 해당 발언은 스타일을 비교한 것일 뿐 MVP급 선수와 비교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링크
결국 2017년 오프시즌에 닉스에서 해고되면서 최악의 경영자로 남게 되었다. 고령과 건강문제로 인해 명예회복할 만큼 다시 경영자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을 확률도 희박.
종합하자면 선수로서는 평범한 롤플레이어, 감독으로서는 최고의 명장, 구단 경영자로서는 최악이라는 극과 극을 달리는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39]
7. 그는 왜 닉스에서 실패했는가?
사실 트라이앵글 오펜스 항목에도 나와있지만 잭슨은 감독시절, 과거에 에이스 마이클 조던의 반대에도 불과하고 당시 NBA무대에선 한 번도 위력이 검증된 적이 없던 전술이었던 트라이앵글 오펜스를 과감히 도입하는 모험을 할 정도로 진보적이던 사람이었다. 그는 독서와 명상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스스로 생각을 많이 할 뿐더러 선수들에게도 매시즌 책을 한권씩 나눠주고 스스로에 대해 통찰할 것을 조언하는 사람이었고, 선수 각자 자율적인 행동을 중시하던 사람이었다. 문제는 그런 잭슨도 자신의 너무나 거대한 성공에 도취되었는지 꼰대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트라이앵글 오펜스는 분명히 좋은 전술이지만 활용하기가 극히 까다로운 전술이다. 일단 이론 자체는 간단하지만 끊임없이 움직이고 스크린을 서고 볼을 돌리는 등 상황 판단이 좋아야 한다. 따라서 구성원들의 전술 이해도도 상당히 높아야 하며 팀 케미스트리도 좋고, 선수 전원이 공격욕심을 버려야 한다.[40]
두 번째로 결정적인 이유인데, 트라이앵글은 '''굉장히 낡은 전술이다.''' 아무리 좋은 전술이라도 농구 트렌드 자체가 변화하는데 이것만 붙들고 있을 수는 없다. 트라이앵글은 무려 '''1922년생인''' 텍스 윈터가 '''50년대에''' 대학감독하고 있을때 완성한 전술로서, 이걸 설명하는 책인 "Triple-Post Offense"를 1962년에 냈고, 70년대에 필 잭슨 본인이 NBA에서 '''선수생활''' 할 때 이 책을 감명깊게 읽고 당시 휴스턴 로키츠에서 감독하고 있던 윈터를 찾아가 질문을 했을 정도이다. 윈터가 책을 펴낼 당시 농구로 말할 것 같으면 3점 슛조차 생겨나기 전이고, 윈터보다 고작 한살 많은 "점핑" 조 펄크스가[41] 점프슛을 대중화시킨지 고작 10년 좀 넘게 지난 시점이고, 페인트 존의 폭은 지금보다 훨씬 좁아 자유투서클까지 포함한 Key 부분이 진짜 열쇠모양이었고, '''카림 압둘 자바가 아직 중학생이었다!'''
물론 잭슨이 1989년에 감독으로 데뷔할 당시 고인돌 시절 완성된 이 오래된 전술을 바로 도입한 것은 아니다. 당연히 89년엔 60년대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공격과 수비 전술이 발달이 되었고, 무엇보다 수비범위가 늘어났기 때문에 공간을 활용하는 이 전술도 여기에 맞춰서 변형되었다. 이 점을 위해 잭슨은 당시 이미 불스의 어시스턴트 코치로 재직중이던 텍스 윈터 본인과[42] 머리를 맞대어 이 전술을 당시 농구에 맞게 만들었다. 대표적인 변화가 바로 윈터 시절에 존재하지 않던 3점 슛의 존재인데, 트라이앵글 오펜스는 기본적으로 3점 슛 라인 안에서 공간을 만들어내 오픈찬스를 만드는 전술이지만 선수들의 향상된 운동능력과 슛거리를 감안해 볼핸들러가 아닌 오프 가드의 활동범위를 3점 슛 범위까지 늘려 3점기회를 만들어냈다. 이 역할로 엄청난 혜택을 본 선수가 바로 불스 오기 전까진 별볼일 없는 후보였던 존 팩슨이다.[43]
어쨌거나 잭슨의 이 실험적인 시도는 대박을 터뜨려 당시 과도한 득점부담에 시달리던 조던의 어깨를 가볍게 하고 동료들의 참여를 늘리는 한편, 체력부담에서 벗어난 조던이 더욱 무서워지는 효과를 얻었다. 또한 트라이앵글 오펜스를 더욱 살릴 수 있는 강력한 빅맨 샤킬 오닐과 볼핸들러 역할과 슬래셔 역할을 해줄 코비 브라이언트, 오닐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포스트맨 역할을 충실히 해준 파우 가솔과 앤드류 바이넘 등과 함께 잭슨은 전무후무한 11번의 우승을 해낸다. 이는 부인할 수 없는 잭슨의 빛나는 성과이다.
문제는 2010년대 들어 농구가 엄청나게 많이 변했다는 점이다. 3점 슛의 빈도수와 전술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00년대와 비교해도 엄청나게 차이가 나며, 이로 인해 농구에서 중거리슛, 3점 슛, 골밑슛이 차지하는 전술적 중요도 자체가 변했다. 예를 들어 과거 중거리 위주 플레이어였던 마이클 조던이 현재 뛰었다면 낮아진 중거리슛에 대한 기대값과 당시에 비해 헐거워진 수비를 감안해 돌파의 비중이 폭발적으로 증가했을 것이다. 또한 당시 기대값이 낮아 외면했던 3점 슛의 비중을 늘릴 가능성도 있으며, 이로 인해 조던은 돌파로 인한 득점과 자유투가 지금의 제임스 하든 이상으로 엄청나게 많을 것이다. 어쨌거나 포인트는 농구 트렌드가 달라지면 이에 대응하는 전략도 달라져야 한다는 점이다. 또한 선수들의 전반적인 외곽슛 능력 향상으로 최소한의 공격세팅만으로 바로 3점 슛을 쏘거나, 속공때 기습적인 stop-and-pop 3점슈팅에 대한 빈도수도 늘었다. 이로 인해 공격전개 속도가 전반적으로 빨라졌으며, 이는 평균득점의 향상으로 이어졌다.
문제는 트라이앵글 오펜스는 다소 정적인, 비교적 많은 단계를 거치면서 세팅되는 전술이란 점이다. 간략히 설명하면 일단 볼핸들러가 볼을 몰고 와서 외곽의 윙맨에게 패스해주고 코너로 이동하면서 로우포스트에 있는 선수까지 해서 삼각형을 이루면서 이때부터 '''시작'''한다. 따라서 전개방식이 상당히 느리다. 트라이앵글이 가장 활발히 사용되었던 것은 95-96시즌인데 90년대 중후반 NBA는 역사상 가장 공격페이스가 느리고 평균득점이 적었던 시절 중 하나였으므로 이런 전술이 효과적일 수 있었다. 그러나 페이스가 빠른 현대 농구에서 이는 비효율적이다. 또 하나는 기본적으로 트라이앵글은 2점 중거리슛 위주 전술이란 것이다. 조던, 피펜은 물론이고 슛거리가 긴 코비조차도 주득점루트는 2점 중거리슛이었다. 그런데 현대농구에선 2점슛 위주/3점 슛은 보조가 아니라 3점 슛이 주득점루트에 가깝게 쏠 수 있는 선수들이 많이 있다. 또한 과거에 비해 돌파의 난이도가 훨씬 낮다. 외곽슛이 중시되는 현재는 3점라인밖까지 이어질만큼 수비범위가 넓어서 과거보다 골밑의 수비밀도가 낮은데다가 핸드체킹 불가로 외곽선수들에 대한 부담도 적다. 즉, 과거에는 골밑은 수비가 심하고 외곽은 그리 중시되지 않았으니 자연스레 중거리슛이 가장 중요했고, 트라이앵글은 이 위치에서 오픈찬스를 만드는데 특화된 기술이다. 그러나 현재는 오히려 반대다. 골밑돌파는 예전보다 쉬워졌고, 전반적인 슛거리 향상으로 외곽 역시 중시된다. 즉, 원형 그대로의 트라이앵글은 전체적으로 맞지 않는 전술이란 점이다.
이 전술을 그대로 쓰려고 하니 성공할 리가 없다. 문제는 이 전술에 대해 유연한 입장이 아닌, "무조건 트라이앵글을 써야 함"이란 꼰대적인 태도를 유지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감독 데릭 피셔는 트라아앵글을 써야 한다는 전제 하에 채용되었다고 한다.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모험적이고 진취적인 40대의 젊은 감독이 세월이 흘러 과거의 영광에 사로잡혀 변화를 거부하고 부정하는 꼰대 중의 상꼰대가 된 셈이다.
오히려 잭슨의 정신을 계승하는 이는 그의 밑에서 뛰었던 스티브 커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비록 오래된 전술일지라도 끊임없는 볼과 선수의 움직임, 스크린, 공간활용은 시대를 초월한 농구의 기본이다. 부임 초기부터 커의 전술을 보면 트라이앵글과는 다르지만, 볼핸들러와 포스트맨이 움직임과 패스로 공간활용을 해서 오픈찬스를 만드는, 트라이앵글의 원리와 유사한 플레이를 자주 보인다. 물론 이 때 삼각형이 완성될 때까지 기다리기보다는 빠르고 즉각적인 플레이가 이뤄진다. 또한 위에 언급된 특성에 알맞게 커의 "트라이앵글"은 (길쭉한 삼각형이거나 아예 삼각형이 아닐때도 많다) 중거리보다는 골밑 돌파, 3점 기회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현 룰에선 이게 더 효율적인 득점기회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커는 삼각형의 원형에 집착하지 않고 트라이앵글의 원래 목적에 맞는, 그리고 트렌드에 맞는 전술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89년의 젊은 잭슨이 그랬던 것처럼.
8. 여담
잭슨은 전처 준과의 사이에서 5명의 자식이 있고, 7명의 손자가 있다. 지금은 위에 언급한대로 지니 버스와 약혼 했다가 파혼했다.
잭슨의 자녀들 중 벤이라는 아들이 있는데, 이 아이가 '''조던덕후'''다. 밥 먹을 때도 조던 얘기만 하고, 방 안에는 조던 관련 물품이 많았다고 한다. 벤의 소원이 '''조던과 만나기'''였다고. 그래서 잭슨은 어시스턴트 코치로 부임한 날, 조던에게 아들 얘기를 해주었고 조던은 만나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둘은 잠시간의 만남을 가지게 되었는데, 만남이 끝나고 벤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난 이제 뭐하지? 난 이제 내 인생의 목표를 달성했는데..."''' 당시 벤의 나이는 '''10살이었다.''' 흠좀무.
어깨가 농구선수치고도 거의 비정상적으로 넓고 팔이 엄청나게 길다. 당시는 드래프트 전 신체검사란 제도가 없어 정확한 윙스팬이 알려진 바는 없지만, 알려지는 바에 따르면 "6피트 8인치에 불과하지만 윙스팬은 7피트짜리 선수와 같다"라고 한다. 뉴욕타임즈 기사[44] 에 따르면 거의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넓은 어깨 때문에 선수시절 별명이 "코트 걸이"였으며 승용차 뒷좌석에 앉아서 양쪽 앞좌석(!!!) 문을 동시에 열수 있을 정도로 팔이 길었다고 한다. 불스 단장인 제리 크라우스는 팔이 길고 손이 크며 다재다능한 선수들(스카티 피펜, 토니 쿠코치 등)에 집착하는 성향이 있었는데, 이 때문에 그는 잭슨도 눈독 들였으나 닉스가 채갔다고 한다.
젊은 시절엔 깡말랐기 때문에 기이할 정도로 길쭉해보이는 체형이었지만 살이 붙은 중년 이후엔 조던이나 피펜같이 비슷한 키에다 현역인 선수들을 압도하는 등빨을 자랑했다. 90년대만 하더라도 백발의 미중년 포스를 풍겼지만 2000년대 초중반 이후 배가 나오면서 커널 샌더스를 연상케 할 정도로 거대(....)해지셔서 샤킬 오닐과 비교해도 그리 꿀리지 않는 육중한 덩치가 되었다. 다만 워낙 타고난 체격이 좋아서인지 뚱뚱하다기보단 말 그대로 거대한 인상.
역대급 명장임에도 불구하고 "올해의 감독상"을 한 번밖에 받지 못했다는 것도 아이러니하다. 그의 팀은 항상 리그 최상위권에서 놀았지만 그가 감독상을 수상한 건 1995-96시즌 당시 72승 10패를 기록했을 때 뿐이다. 그 다음시즌에 역대 2위(타이) 기록인 69승을 했을때는 중위권 팀이었던 마이애미를 61승으로 이끈 팻 라일리에게 뺏겼고, 레이커스에서의 첫 시즌 당시 무려 67승을 거뒀음에도 무명선수들을 이끌고 플레이오프 진출이라는 돌풍을 일으킨 올랜도 매직의 닥 리버스에게 감독상을 양보해야 했다.[45]
다만 위에 언급된 래리 브라운 역시 긴 경력동안 감독상은 단 한번, 누구나 인정하는 명장인 제리 슬로언은 23년간 유타를 이끌며 단 한번도 상을 못탔다는 걸 생각하면 감독상을 못 탄 걸로 태클을 걸거나 할 필요는 없다. 사실 감독상 자체가 객관적으로 판단할 지표가 적은 만큼 (승-패 기록이나 전 시즌 대비 승수 증가 정도지만, 이건 선수구성에 영향을 많이 받는지라) 논란이 많은 상이기도 하다. 수상한 인물 중에서도 마이크 브라운, 스캇 브룩스, 샘 미첼 등 명장이라고 하기엔 무리인 사람들도 많이 있어서... 실제로 "그렉 포포비치는 세번이나 탔다"면서 잭슨을 폄훼하는 이들도 있지만, 예나 지금이나 "올해의 감독상"은 기준이 애매한 상이고, 역대급 명장 중에서 이 상을 못 탄 이들도 많다. 위에 언급된 슬로언도 그렇고, 척 데일리 역시 이 상을 한번도 못 탄 감독이지만 이들을 명장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이 상을 수상한 횟수가 명장의 잣대가 될 수는 절대 없다는 얘기'''. 만약 그렇다면 데일리나 슬로언은 포포비치의 발끝에도 못 따라온다는 이상한 결론이 나온다.
또한 올해의 감독상 횟수=감독의 능력이라는 논리라면, 스캇 브룩스가 명예의 전당에 오른 슬로언과 데일리보다 더 뛰어나다는(...) 말도 안되는 결론이 나온다. 만약에 감독상을 못 탄 걸로 태클을 건다면 이런 주장에도 할 말이 없어지는 셈. 실제로 전문가들은 감독상을 "해당 시즌의 성공에 대한 인정" 정도로 받아들이지 '''감독능력의 척도로 보지 않는다.''' 게다가 이 상은 정규 시즌 종료 후 주는 상이라 정작 중요한 '''플레이오프에서 성과는 전혀 보지 않는다'''. 일례로 1995년의 경우, 일반적으로 보면 가장 인상적인 성과를 거둔 감독은 당연히 주축 멤버들의 교체란 악재 속에서도 상위권 팀들을 연달아 업셋하고 극적으로 우승을 차지한 휴스턴 로켓츠의 루디 톰자노비치겠지만, 감독상은 정규시즌만 놓고 주는지라 탐자노비치는 고려대상조차 못됐고, 레이커스의 리빌딩을 성공적으로 이끈 델 해리스에게 돌아갔다.
9.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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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acred Hoops (1995)
- Eleven Rings: The Soul of Success (국내 정발명: 필 잭슨의 일레븐 링즈, 2013)
10. 감독 성적
[1] 사진에 나온 지니 버스는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의 구단주였던 고 제리 버스(2013년 작고)의 '''딸'''이다. 참고로 두 사람의 나이차는 16살. 물론 두 사람이 처음 만날 당시 버스는 이미 40대였기 때문에 철컹철컹(...)과는 거리가 멀다.[2] 푸에르토리코 프로농구 리그[3] 그리고 NBA를 거쳐간 "개인" 중에 가장 많은 우승반지를 소유한 인물이기도 하다(선수로서 2개, 감독으로서 11개). 두 번째로 많은 우승반지를 소유한 인물은 각각 선수로서 우승 9번, 말년에 선수겸 감독으로 우승 두 번을 차지한 빌 러셀이며, 세번째로 많이 우승한 사람은 선수로서 10번 우승한 러셀의 팀 동료 샘 존스이며, 네 번째로 반지를 많이 가진 사람은 감독으로 9번 우승한 러셀의 감독 레드 아워백이다.[4] Zen master은 말 그대로 불교식 개념은 선(禪)을 가르치는 이를 지칭한다. 필 잭슨 본인은 불교도도 아니고 선이 주는 가르침을 배워서 선수지도 및 삶에 활용했을 뿐인데 이렇게 부르니 부담스러울 수밖에. 비유하자면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가끔 성경을 읽는 사람을 보고 "목사님"이라고 별명을 붙이는 정도? 또한 필 잭슨의 아버지, 어머니 모두 개신교 목사로서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다.[5] 이때 크라우스는 3라운드 전에는 누구도 잭슨을 지명하지 않을 거라 예상했는데, 예측과 달리 뉴욕 닉스가 잭슨을 지명하자 몇 년 동안 그 일로 자책했다고 한다. 훗날 그는 시카고 불스의 단장으로 재임할 때 잭슨을 감독으로 영입해 한을 풀었다.[6] 다만 1970년에는 수술이 필요한 허리부상을 입어 경기에 뛰지 못했다. 그래도 팀 동료들의 배려로 플레이오프 수익을 나눠받았고, 챔피언 반지도 챙겼다.[7] 사실 NBA감독이라면 누구든 항의하다가 테크니컬 파울로 퇴장당할 수 있고 나중에 Zen Master로 유명한 필 잭슨조차도 이런 식으로 퇴장당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콜린스는 상당히 젊고 다혈질인 성격이었기 때문에 시합 중 크게 동요하는 일이 잦았다. 첫 경기 당시에도 너무 긴장해서 씹던 껌이 (본인 표현에 따르면) 가루가 되도록 씹는 걸 보고 조던이 "걱정 마세요. 감독님 첫 경기를 지게 하진 않을 테니까요"라고 다독여준 적이 있고, 샘 스미스의 "Jordan Rules"에 따르면 지나치게 흥분해서 눈물이 나오기 직전까지 간 적도 여러번 있다고 한다. 다만 성격이 유약해서가 아니라 승부욕이 강하고 다혈질이어서 그랬는데, 콜린스는 선수 시절 네번이나 올스타에 선정된 실력자로서 빌 월튼이 언더독 포틀랜드를 우승으로 이끈 77년 파이널 당시에 상대편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에서 줄리어스 어빙에 이은 2옵션으로 여러 번 맹활약을 한 적이 있는 승부사였다. 그러나 이렇듯 흥분을 잘 하는 성격이다보니 젊은 선수들을 다독여주기는 커녕 본인이 더 냉정을 잃는 경우도 있었다. 불스에서 해고된 뒤 해설자로서 몇년간 일하다가 40대 중반이 된 95년에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에 감독으로 부임할 당시부터는 이런 점이 크게 개선이 되었다. 여담으로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와 불스의 양대 싸움꾼들인 릭 마혼과 찰스 오클리가 붙을 당시 콜린스가 마혼에게 덤벼들어 헤드락을 건 적이 있었는데, 마혼의 악명이 그냥 붙은게 아닌지라 바닥에 내동댕이, 2차로 덤벼들자 점수 집계원 테이블에 2차로 내동댕이쳐졌으나, 그 유명한 마혼에게 두려움 없이 덤벼드는 콜린스의 모습이 한동안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8] 이 때문에 덕 콜린스가 무능한 감독으로 묘사되는 것 같지만 이 당시 덕 콜린스는 시카고 불스에서 '''35세에''' 감독으로 데뷔해 3시즌을 보내는 중이었다. 1987~1988 시즌 50승을 거두기도 한 콜린스는 필 잭슨에 의해 밀려난 이후 TNT, NBC 등 농구 해설자와 감독을 오가면서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워싱턴 위저즈,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등지에서 감독생활을 하다가 2013년에는 식서스 고문으로 위촉돼 지도자 일선에서 은퇴했다. 해설자로써는 상당한 커리어를 쌓았으나, 감독으로써는 플레이오프가 간당간당한 중간급 팀만 늘 맡다보니 승률은 그저그런 편이고 무엇보다 감독으로써 필 잭슨의 위상 자체가 넘사벽이 되어서 안습.[9] 참고로 잭슨의 경우 NBA 지도자 커리어는 콜린스보다도 더 짧았는데 코치로서 '''첫번째''' 시즌을 보내던 중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불스가 지도자로서 첫 직장은 아니었다. 콜린스는 대학코치로, 잭슨은 하위리그 CBA감독으로 몇년 재직했다. 이때 경력은 필 잭슨이 좀더 길지만 별 의미는 없는 수준이고 둘다 NBA감독 기준으로는 젊고 경험이 적었다.[10] 트라이앵글 오펜스는 이론적으로 모든 선수들이 동등한 공격기회를 갖는 전략인데, 조던은 와이드 오픈샷도 제대로 못 넣는 동료들과 더블/트리플 팀을 당하면서도 5할 이상의 성공률로 평균 30점은 우습게 넘기던 자신이 동등한 기회를 갖는다는 것이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다.[11] 특히 처음으로 올스타가 된 호레이스 그랜트와 BJ 암스트롱이 잘했고, 조던의 그림자에서 벗어난 스카티 피펜이 MVP후보급 활약을 펼쳤다.[12] 사실 피펜은 슛이 그리 안정적인 선수는 아닌지라 중장거리슈팅력이 뛰어난 쿠코치에게 맡기는게 정답이긴 했다. 그러나 피펜 입장에서는 데뷔 이후 계속 조던의 보조 취급을 받다가 실상부한 에이스로 거듭났는데도 클러치 순간에 무시당한다는 생각에 욱한 것.[13] 5할을 조금 넘기던 팀이 조던 복귀 이후 13승 4패를 기록한다. 이후 샬럿 호네츠를 꺾고 2라운드에 진출하지만 올랜도 매직에게 2승4패로 석패한다.[14] 이것도 제리 라인스도르프 구단주가 직접 개입해서 한 계약이었다.[15] 출처: Playing for Keeps: Michael Jordan and the World He Made.[16] 다만 이건 소속팀 선수를 위한 립서비스일 가능성이 높다. 그가 은퇴 이후 내놓은 자서전에서 두 선수를 직접적으로 비교하면서 마이클 조던이 더 훌륭한 (superior) 리더에 더 카리스마적이고 활발한 인물이며, 수비력도 단연(no question) 더 뛰어나며 득점원으로서도 더 뛰어나다고 밝혔다. 또한 슛이 안 들어갈때 조던은 무리해서 공격하지 않고 다른 방식(수비/패스/스크린 등)으로 팀에 공헌하는데 코비는 슛감이 돌아올때까지 계속해서 슛을 쏜다고 지적했다. 사실 위에서 언급된 "조던과 피펜의 역할을 둘다 했다"는 의미도 걸러 들을 필요가 있는데, 조던은 단순히 외곽에서 득점을 지원한 것이 아니라 가드임에도 트라이앵글의 중심에서 포스트업을 통해 수비를 끌어오는 공격의 시발점 역할을 했다. 근데 레이커스에서 이 역할을 한 것은 샤킬 오닐이었다. 결국 조던의 역할 일부와 피펜의 역할을 맡은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하지만.[17] 코비와의 갈등, 제리 버스 구단주의 간섭과 프런트와의 갈등, 네임드 우대가 결정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 문서 21번 각주에 나오는 '초등학생'이라는 표현이 대표적이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잭슨이 올스타전 당시 "코비가 돌아온다면 나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말했다고 알려졌고, 이를 두고 많은 팬들은 "코비 때문에 떠난게 아니냐"고 추측했다. 또한 잭슨은 당시 연봉 6백만달러를 1천2백만달러로 올려달라고 요구했는데, 이에 대해 레이커스가 난색을 표한 바 있다. 이건 돈 문제도 있지만 사실상 구단수뇌부와의 파워게임. 물론 한 시즌 폭망하고 잭슨을 모셔오면서 코비/구단수뇌부와의 파워게임에서는 사실상 잭슨이 승리한 셈이다. 그가 한때 "통제불가능하다"고 했던 코비 역시 잭슨의 첫 복귀시즌인 05-06시즌부터 보다 팀동료를 챙기고 잭슨의 전략에 잘 따르는 등 더 성숙한 모습을 보이게 된다. 그리고 당시의 페이튼은 빌럽스에게 완전히 공략당한 상태인지라 백업가드 데릭 피셔가 나왔을때 경기력이 더 좋았었다. 이러한 네임드 우대도 우승 실패에 한 몫 했을 것이다.[18] 또한 필 잭슨은 샤크를 마이애미 히트로 트레이드하고 코비와는 재계약을 할 예정이라는 제리 버스 구단주의 통보를 듣고, 샤크를 내보내면 최소 한번은 NBA 우승을 그 팀에 내줄 것이란 이유로 반대했으나, 구단주가 그 모든 걸 감수하고 샤크를 트레이드한 것도 큰 영향을 미쳤다. [19] 이때 필 잭슨은 샤크 트레이드 문제처럼 자신을 소외하는 일이 없도록 보장을 요청했고, 프런트는 받아들였다.[20] 이후 클레몬스는 2006년에 복귀했다.[21] 특히 마지막 4번째 경기에서 레이커스는 매버릭스에게 무려 20개의 3점 슛을 허용하며 약 30점 차이로 처참히 관광당했으며, 패색이 완연한 경기 후반 라마 오돔이 더크 노비츠키에게 노골적으로 팔을 휘둘러 퇴장당했고 연이어 앤드류 바이넘이 누가봐도 분풀이 수준의 더러운 살인 엘보우질을 무려 1피트나 작은 상대팀 선수 바레아에게 작렬하는 비매너의 끝장을 보이고 말았다. 이 때 벤치에서 경기를 지켜보는 필 잭슨의 심경이 표정에 역력히 드러날 정도였다.[22] 이는 사장 팻 라일리-감독 에릭 스폴스트라 체제의 마이애미 히트와 유사한 환경.[23] 필 잭슨이 감독하던 팀의 포인트 가드들은 수비, 오픈 3점같은 극히 한정적 역할만 수행했다.[24] 농구의 기대득점은 자유투-3점 슛-골밑슛-미드 점퍼 순이어서 최근엔 반칙유도와 3점을 주 공격무기로 하는 팀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14-15시즌 MVP 1,2위도 각각 3점왕과 자유투 삥뜯기 달인들인데 14-15시즌 뉴욕 닉스는 3점 비중이 굉장히 낮고 반면 기대득점이 가장 낮은 중거리 점퍼의 비율이 월등히 높은 비효율적인 농구를 했다(...).[25] 닉스 사장에 취임하면서 당면과제의 최 우선순위가 멜로를 잔류시키는 것이라고 선언했고, 실제로 시카고나 휴스턴으로의 이적을 심각하게 고민하던 멜로에게 향후 팀의 청사진을 제시함과 더불어 5년 124m와 트레이드 거부권까지 얹어주며 눌러앉혔다. 멜로도 계약 직후 잭슨 사장의 비전을 신뢰하여 잔류를 택했다는 식으로 말했을 정도였다. 자기가 사장으로 오기 전 이미 저질러진 고액 계약을 똥치우기하는것도 아니고, 자기가 그렇게 애걸복걸하며 트레이드 거부권까지 주며 눌러앉혀놓고는 이제와서 언플로 딴소리나 하는 모습 때문에 언론도 팬들도 모두 잭슨에게 등을 돌리고 말았다.[26] 그리고 후에 포르징기스는 댈러스로 트레이드되었다.[27] 여담으로 포르징기스가 트래이드되기 전 발매된 NBA2k18에서 마이커리어를 하면 당연히 포르징기스가 뉴욕에서 잘 뛰고 있는데, 게임 특성상 미리 녹음한 해설 멘트를 돌려막기하는지라 닉스 소속으로 마이커리어를 진행하면 게임 발매 직전 시즌에 있던 닉스의 불화에 대한 멘트가 몇 경기에 한번씩, 정말 지겹게 많이 나온다. 대표적인 멘트는 객원해설자인 크리스 웨버의 "만약 닉스가 포르징기스 대신 젠마스터를 택했다면 팬들은 폭동을 일으켰을거에요!"[28] 사실 2019-20시즌을 기준으로 했을 때, 이러한 단어가 사실상 무의미하게 됐다. 현대 농구는 우승을 위해 슈퍼팀을 결성하는 팀들이 대다수기에 더 이상 약체에서 우승으로 단박에 상승하는건 불가능에 가깝다. 심지어 선수들이 팀을 갈아엎는 탬퍼링까지 서슴지 않을 정도다. 즉, 플레이오프는 꾸준히 진출할 수 있을지언정, 우승까지는 힘들다. 자세한 내용은 밑에 언급되있으니 참조.[29] 이후 파우 가솔이 합류하며 서부 1위를 재탈환했다.[30] 잘 모르는 사람은 기록을 찾아보자. 따위란 말이 전혀 지나치지 않다.[31] 사실 스티브 커 감독의 능력도 있지만, 이전까지 골든스테이트를 지휘해온 마크 잭슨 감독의 공을 빼놓을 수 없다. 당시 골든스테이트의 선수단은 2012-13, 2013-14시즌에 마크 잭슨 감독이 지휘했던 선수단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잭슨이 구단과의 마찰 끝에 경질되면서, 방송인 출신이던 스티브 커가 감독으로 임명된 것이다. 물론 커 감독의 능력을 폄하하려는 의도는 아니니 오해하지 말자.[32] 여기서 말하는 구설수는 잭슨-슈퍼스타간의 구설수가 아닌, 같은 팀 내에서 선수들이 펼친 불화 및 구설수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레이커스 시절 샤크-코비의 일력싸움.[33] 2020년 현재는 코로나 19로 인해 구단을 이탈하여 외부적 행동을 하는 자체가 금지된다. 필요한 상황에서만 허락받아야 하며, 이후에는 4-10일 정도의 자가격리가 필수다. 현재 시점에서 저러한 행동을 보이다간 막대한 출전 정지 징계가 불가피하다.[34] 사실 이때의 레이커스에 대해, "마이클이 (첫 번째로) 컴백한 뒤 멤버들은 다들 알아서 열심히 뛰었다. 연습도 전쟁이었다. 때문에 나로서는 좀 편한 점도 있었다. 불스가 대학생이라면 (샤킬-코비가 이끈) 레이커스는 초등학생들이었다. 이들의 집중력이 떨어졌기 때문에 내가 선수들 개개인에 좀 더 시간을 할애할 필요성을 느꼈다."라는 인터뷰를 했다.[35] 물론 둘 다 결국 다른 감독 밑에서 뛰긴 했다.[36] 이 때까지 케이시는 재임 7시즌 동안 320승을 거두며 구단 역사상 감독 최다승을 거뒀고, 올해의 감독상 2관왕까지 수상했다. 그럼에도 결국 우승을 못해 경질됐으니 더 말할 필요가 없다.[37] 하나의 예로, 2019-20시즌 도중, 브루클린 네츠의 케니 앳킨스 감독이 자진사퇴했다. 2016-17시즌 부임 이후 암흑기였던 브루클린을 꾸준히 성장시켰음에도 말이다. 이유는 슈퍼스타 카이리 어빙과 케빈 듀란트등의 마찰 때문이다. 즉, 이전처럼 한 팀을 조련하기만 하는 것만으로는 명장이 되기 힘든 현실이다.[38] 그렉 포포비치도 3점 슛은 농구가 아니라며 폄하하는 발언을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3점 슛을 등한시하지는 않는다. 그는 그것이 단순히 자신의 취향일 뿐이라고 말했으며, 올드스쿨 방식일 뿐 3점 슛은 아주 중요하다고 했다. 스퍼스가 우승할 때에도 3점 슛은 아주 강력했으며, 그것을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고 전하기도 했다. 실제 그는 양궁농구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팀을 만든 바 있다.[39] 실제로 선수 시절 명성이 은퇴 이후와 딴 판인 선수들은 많다. 이런 점에서 선수/감독/경영자로서 모두 레전드급이었던 래리 버드가 얼마나 특이한 케이스인지 짐작할 수 있다. (물론 감독시절은 매우 짧기는 했지만 플옵탈락한 중위권 팀을 한 시즌만에 우승후보로 만드는 대단한 성과를 거뒀다.[40] 물론 이는 트라이앵글이 유지되는 한해서 '''이론적으로''' 공정한 기회가 전원에게 돌아간다는 것이다. 실제로는 조던, 오닐, 코비 등 압도적인 공격 재능을 지닌 선수들 위주로 돌아간다. 이 때문에 트라이앵글을 NBA에서 쓸 때는 원형 그대로 쓰기 힘든 것. 선수들간의 기량 차이가 많은 NBA에서 잭슨 외에 성공한 감독이 없는(심지어 창시자 윈터 본인도 NBA에선 실패했다) 결정적인 이유이자, 잭슨이 뛰어난 감독이었다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41] 펄크스는 농구의 역사를 논할때 빠지지 않은 인물로, 초창기 NBA에서 최고의 득점원 중 하나로 활약한 인물이다. 그가 점프슛을 최초로 시도한 선수는 아니지만, 그가 점프슛을 적극활용해 득점기계로 위용을 떨친 다음에야 후배들이 점퍼를 적극 이용하기 시작했다. 뒤집어 말하면 그의 당대까지는 점퍼쏘는 선수가 거의 없었단 소리다. 이런 농구의 조상급 인물과 또래가 바로 윈터 코치인데, 그런 윈터가 30대에 완성한게 트라이앵글이란 소리.[42] 윈터는 1985년부터 불스 코치로 재직중이었으나 덕 칼린스를 포함한 불스 감독들은 이 전술을 거부했다. 근본적으로 선수들에게 공평한 공격기회를 주는 이 전술이, 조던과 나머지 선수들의 능력차이가 어마어마한 불스에 맞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43] 팩슨은 원래 후보였고 88-89시즌만 해도, 마찬가지로 평범한 백업~주전 경계선에 있던 선수인 샘 빈센트가 영입되자 후보로 바로 밀려날 정도로 실력이 없는 선수였다. 오죽하면 팩슨과 빈센트로 실험을 하던 칼린스가 답답했는지 아예 조던을 주전 PG로 쓰기도 했을 정도. 그런데 PG의 리딩력이 중요하지 않은 트라이앵글에서, 외곽슛 능력을 지녀 수비를 분산시켜줄 수 있는 팩슨의 존재가 극대화된 것. 이 점이 가장 잘 드러난게 91 파이널로, 이때 팩슨은 조던과 찰떡궁합을 보이며 적재적소에 패스를 받아 슛을 넣어줬다.[44] http://www.nytimes.com/2013/05/19/magazine/why-basketball-wont-leave-phil-jackson-alone.html?_r=0 [45] 여담이지만 이때 샤킬 오닐은 우승 후 파이널 MVP 수상 소감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진짜 올해의 감독인 필 잭슨'''에게 영광을 바친다"고 언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