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와트

 


<color=black> '''제임스 와트
James Watt'''

<colcolor=black><colbgcolor=black> '''이름'''
제임스 와트
James Watt
'''출생'''
1736년 1월 30일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렌프루셔 그리녹[1]
'''사망'''
1819년 8월 25일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버밍엄 핸즈워스
'''국적'''
[image] 스코틀랜드, [image] 영국
'''직업'''
발명가, 기계공학자
'''학력'''
글래스고 대학교
'''종교'''
스코틀랜드 장로교
1. 개요
2. 생애
3. 업적
4. 기타
5. 외부 링크


1. 개요


영국발명가이자 공학자. 후술할 그의 공로 덕분에 영국인들에게는 이삼바드 킹덤 브루넬과 함께 산업 혁명의 대부로 칭송받고 있다.

2. 생애


  • 1736년 1월 19일 - 스코틀랜드 그리녹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조선공이었고, 어머니는 교양 계급에서 태어났으며, 두 분 모두 장로회 신도였다. 그러나 제임스 와트가 열여덟 살 때에 어머니는 돌아가셨으며, 더불어서 아버지의 건강도 나빠지기 시작했다.
  • 1755년 - 그리녹 문법학교(Greenock Grammar School)를 졸업한 뒤, 런던으로 넘어가 기계공 일을 배웠고, 1757년에는 글래스고 대학교에 들어가 작업실을 차렸다. 1763년에는 투시화법기(透視畵法器)을 만들었다.
  • 1764년 - 사촌인 마거릿 밀러(Margaret Miller)와 결혼했다.
  • 1767년 ~ 1774년 - 사이에는 운하 측량사로 활동했다.
  • 1769년 - 지인인 존 로벅(John Roebuck)의 도움으로 증기기관에 대한 특허권을 냈다. 사업가 매튜 볼턴(Matthew Boulton)은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에 관심을 가졌으며, 존 로벅의 자금 사정이 안 좋아지자 특허권을 인수하고, 1775년 증기기관 제조 기업인 '볼턴 & 와트(Boulton & Watt)'를 설립했다.
  • 이후로도 유성기어장치(epicyclic gearing)의 회전 기관, 압력계 등의 많은 발명품들을 만들다가 1819년 8월 25일, 버밍엄에서 사망했다. 향년 83세.

3. 업적


증기기관을 개량하여 실용화해 널리 보급시킨 것으로 유명하다.[2] T. 뉴코멘의 대기압 기관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증기기관의 개량에 성공했고, 사업가 매튜 볼턴과 함께 그것을 영국 곳곳에 전파하였다고 한다. 특히 물을 가열하는 보일러와 증기를 냉각시키는 응축기를 따로 분리하여 증기기관의 열효율과 속도를 획기적으로 올린 개량과 조속기를 달아 회전수를 일정하게 유지시키는 개량, 그리고 압력밸브를 달아 안전성을 향상시키는 개량을 하였다. 특히 와트가 발명한 원심력을 이용한 회전 조속기는 원시적 형태의 자동제어의 시초로 현대에 이르기까지 널리 쓰였다. 흔히 몇 와트(W)할 때 단위가 이 분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다. 영국과학진흥협회에서 제임스 와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와트'를 일률과 동력 단위로 채택했다. 이후 1960년 도량형 총회에서 정식 단위로 채택됐다고 한다. 좀 웃기는 것은 제임스 와트 자신이 만들어낸 일률의 단위는 와트가 아니라 마력이었단 점.
증기기관의 개량은 훗날 자동차 등 많은 기계류들의 시초가 되었던 만큼 큰 업적이라고 볼 수 있다.
증기기관의 개량뿐만 아니라, 증기기관의 힘을 나타내는 마력의 개념을 만들고, 인쇄용 잉크도 발명하였고, 또한 의 화학 성분까지 증명해냈다![3] 이를 통해 제임스 와트는 기계공학 뿐만 아니라 화학자연과학 쪽에서도 능통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시에 습식 복사기를 만들어 20세기 초까지 유용하게 쓰였다. 이런 복사기가 유일하게 남은 곳이 강릉에 위치한 에디슨 박물관이다.

4. 기타


  • 스코틀랜드 인버클라이드의 행정 중심지인 그리녹에는 와트의 업적을 기린 '제임스 와트 대학교'가 있다.
  • 사업 파트너였던 매튜 볼턴과 함께 영국 파운드 스털링 F시리즈(6차)의 50 파운드 지폐의 초상화로 선정되었다.
  • 90년대 몇몇 국내 책자에선 증기 기관차를 세계 최초로 만든 리처드 트레비딕(1771~1833)을 시기하여 조폭을 동원해 구타하는 막장 쓰레기라고 써대기도 했는데 이것에 대한 증거도 없거니와 출처 불명이다....제임스 와트에 대한 무고를 저지른 셈. 트레비딕이 만든 증기기관차는 선로가 기관차의 무게를 지탱 못해서 깨지는 문제점을 해결하지 못해서 상용화에는 실패했다. 이후 트레비딕은 남미로 가서 다양한 프로젝트에 도전했지만 모두 실패했고, 파산하여 거지 꼴이 되어 조국에 돌아가지 못했다. 1831년에서야 남미에 철도 설치 일로 온 조지 스티븐슨이 그에 대해 알게되어 영국가는 차비를 제공했다. 영국으로 돌아갔지만 트레비딕은 1833년에 비참히 세상을 떠나고 만다.
  • 프랑스 화학자 라부아지에와 연이 있었다. 제임스 와트가 독일 과학자와 연구를 하면서 길이와 부피에 대한 단위가 일치하지 않아 고초를 겪고 있던 차에, 라부아지에에게 십진법 기반의 통일된 단위 체계를 연구할 것을 제안한다. 라부아지에는 선뜻 와트의 요청을 받아들여 1788년경 청동으로 만들어진 9개의 실린더로 연구를 진행하는데, 이 연구가 미터법(metric system)의 시초가 된다.

5. 외부 링크


[1] 현재는 인버클라이드(Inverclyde)주 소속이다.[2] 흔히 제임스 와트가 증기기관을 발명했다고 아는 사람이 많은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동세대의 뉴커먼도 증기기관을 개발했으며, 이들보다 머나먼 세대인 그리스의 천재 공학자인 헤론도 증기의 힘에 대해서 박식했다.[3] 물의 화학적 조성을 밝혀낸 것은 헨리 캐번디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