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철
'''"종철이를 살려내라"'''
박종철 열사가 고문으로 사망한 후 학생운동의 구호이다.
'''"종철아! 잘 가그래이.... 아버지는 아무 할 말이 없대이...."'''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가 아들이 사망한 이후 한 말.[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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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민주운동가, 학생운동가이자 민주 열사(烈士).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언어학과에 재학 중이던 1987년 1월 14일, 자정경 하숙집에서 치안본부 대공분실 수사관 6명에게 연행되어 물고문을 받다가 치사했다.
2. 생애와 성품
1964년 4월 1일 부산시 서구 아미동에서 아버지 박정기와 어머니 정차순의 2남 1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형제로는 형 박종부와 누나 박은숙이 있다.
부산 혜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재수해서 1984년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언어학과에 입학하였다.
고교 시절 단짝이었으며 함께 서울대 84학번으로 재수해 입학한 김치하의 말에 따르면, "얼굴이 하얗게 뽀얗고 피부가 맨들맨들한데 두꺼운 안경을 낀, 그 당시로서는 귀티 나는 친구"다고 한다. 더불어 회고하기를 "아주 성실하고 차분한 사람이었으며, 한번 자리에 앉으면 진득하게 공부하는 친구였다. 다정다감한 성격으로, 가족들뿐 아니라 친구들에게도 종종 마음이 담긴 편지를 보내곤 했다"고 한다.
또 다른 친구 최인호 역시 그의 첫인상에 대해 "외모나 인상이 순진하고 해맑은 모범생 스타일이었다", "동기들보다 정치의식이 상당히 높았다"고 설명했다.1987년 1월 14일 이후 31년, 박종철을 기억하는 두 친구의 이야기
대학 생활 동안 동아리 활동과 농촌 활동(농활) 등을 통해 사회의 모순에 눈을 떴다. 1985년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농성 사건 당시 농성지원 가두시위로 닷새간의 구류를 살았고, 여름방학에는 공활(위장취업)을 하기도 했다. 1986년 노학연대 투쟁에 활동하던 중 1986년 4월 1일 청계피복노조 합법화 요구 가두시위로 구속되어, 과거 전력으로 인해 7월 15일 징역 10개월을 선고받고 출소했다. 다음은 박종철이 옥중에서 부모님께 쓴 편지들 중 하나.
아버지, 어머니.
더운 날씨에 비는 오지 않고, 높은 하늘은 틀린 일기예보를 조롱이나 하는 듯이 연일 쨍쨍 내리쬐는군요.
꽤 더운 편이지만 그럭저럭 견딜 만 합니다. 이렇게 더운 날씨에 비치 파라솔 밑에서 선글라스 끼고 한가하게 피서 즐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잘 먹고 잘 놀아서 피둥피둥 찐 살을 빼느라고 사우나탕, 헬스클럽 다니면서 땀 흘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삼복더위에 라면으로 끼니 때우며 먼지와 기름 냄새로 가득찬 무더운 작업장에서 묵묵히 땀 흘리며 일하는 노동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노동자들에 비하면 저는 신선 놀음입니다.
가족들의 그런 태도는 여기 갇혀 있는 저에게는 진정으로 위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딴 가족들은 면회 오면 어떻게든 꿋꿋하게 지낼 수 있도록 용기를 복돋아 주고 바깥 소식들을 전해주고들 하는데, 허구헌날 판사님 앞에 고개 숙여라, 판사가 무슨 내 할아버지라도 됩니까.
저들이 비록 나의 신체는 구속을 시켰지만, 나의 사상과 신념은 결코 구속시키지 못합니다. 저를 포함한 수많은 노동자, 학생들이 구속되어 있는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입니까.
누가 우리를 구속시켰습니까. 저들을 미워합시다. 그리고 저들이 저들 편한 대로만 만들어 놓은 이 땅의 부당한 사회구조를 미워합시다. 악한 것을 악하다고 말할 용기가 없다면 마음 속으로 진실하게 믿는 용기가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제가 구속되어 있는 사실을 왜 쉬쉬합니까. 한 명에게라도 더 이러한 부당한 현실을 알리십시오. 내가 왜 구속되었는가를, 저들의 폭력성을, 우리들의 정당성을 사회적으로 고발하십시오. 그럴 용기가 없으면 마음 속으로나마 바깥에서 오늘도 열심히 싸우고 있는 우리 친구들과 저처럼 싸우다 갇혀 있는 친구, 선배들에게 힘찬 격려의 박수라도 쳐 주십시오.
엄마 아버지의 막내아들은 결코 나약한 인간이 아닙니다.
이만 줄입니다.
2.1.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출소 이후에도 학생운동에 적극 참여하며 언어학과 3학년으로 학생회장 직분을 맡았던 박종철은, 1987년 1월 14일 자정 경 하숙집에서 치안본부 대공분실 수사관 6명에게 연행되어 물고문을 받다 사망했다. 이에 경찰은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라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거짓말을 늘어놓아 많은 사람들의 분노를 샀다.[5]
3. 추모
1997년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에 추모비와 흉상이 건립되었고, 2004년에는 혜광고등학교에도 추모비가 건립되었다. 본래 혜광고 교정에도 흉상을 세우려 했지만, 혜광고에서 반대하여 추모비 만으로 타협했다고 한다.
1989년 박종철과 함께 학생운동을 했던 동아리 선후배들이 주축이 되어 '박종철출판사'를 설립했다. 관련 기사 박종철출판사 페이스북 최인호(영어 강사) 항목 참고.
2001년 2월 26일, 서울대학교에서는 박종철 열사에게 명예 졸업장 및 학사학위증을 수여했다.
2018년 1월 13일, 관악구 대학동 대학5길에 박종철 열사를 기리는 '박종철 거리'가 조성되었다. 신림동 대학5길에 오늘 '박종철거리' 조성된다
2018년 3월 20일, 문무일 검찰총장이 요양원에 있던 박종철의 아버지(89)를 만나 31년 만에 물고문치사 사건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현직 검찰총장이 과거사에 대해 직접 사과한 것은 처음 있는 일. # 이후 아버지는 검찰의 사과를 받은 지 4달 뒤, 2018년 7월 28일 아들 곁으로 떠났다.
박종철의 묘소는 유골을 산골하였기에 가묘이며 실제로는 아버지만 안장되어 있다. 1987년 1월 16일 아침에 벽제화장장(현 서울시립승화원)에서 화장 후 임진강에 산골하였기 때문이다. 1989년 초혼장을 치룬 후 산골한 곳의 흙을 관에 담아서 가묘를 만들었다. 경기도 남양주시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6] 에 이 가묘가 있다.
4. 기타
- 생전 종교가 불교였던 걸로 추정된다. 대공분실에 친형 박종부와 스님이 추모하러 같이 온것도 그렇고, 자기 사후 31년만에 아버지가 별세하자 아버지 장례식장에 스님들이 모인 걸 보면 불교가 거의 확실하다.
- 자이언트 53화에서 나온다. 그의 죽음 이후 이강모의 형 이성모는 조필연과 전두환 정권도 끝이라고 말한다.
- 2019년 7월 3일 인터넷 쇼핑몰 무신사가 자사의 발목양말을 소개하는 카드뉴스 형식의 인스타그램 광고에서 "속건성. 책상을 탁쳤더니 억하고 말라서"라는 문구를 넣어 논란이 벌어졌다. 결국 무신사는 인스타그램에 게시한 광고를 삭제하고 사과문을 게시했고, 박종철기념사업회에 후원금을 지급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