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량개원
廢兩改元
1933년 4월 5일 국민정부가 기존에 통용되던 은량을 폐기하고 은원만 통용되도록 실행한 화폐개혁.
청나라 때까지만 해도 중국은 화폐에 관해서 자유방임적인 정책을 취했고 자율적으로 주조된 은량의 통용을 허용했다. 하지만 1890년 외국의 금융을 참조하여 광서제 치세 때 광동총독 장지동이 처음으로 은원(은화)을 주조했고 이후 각 성에서 은원을 재조하기 시작하면서 근대적인 은화제도가 도입되었다. 선통제 치세에 이르면서 청나라도 은본위제도의 폐기와 금본위제도 도입을 검토하였는데 1910년 은원을 중심으로 재정을 통일하겠다는 방침이 정해졌고 1911년 신해혁명 이후 건국된 중화민국도 금본위제도의 도입과 화폐개혁을 검토했으나 계속되는 정치적 혼란 때문에 슝시링 내각 시절에 은본위제도 유지를 결정하고 은원 제조량을 늘렸다.
국민혁명으로 중국 국민당이 중국을 통일한 이후 화폐개혁에 대한 논의가 다시 활발해졌다. 1928년 4월 27일 국민당 58차 상무위원회 회의는 <통일국폐폐량용원안>을 채택하여 폐량개원을 결정하였고 1928년 6월 21일 전국경제회의 1차 소회의에서는 <국폐조례안>을 결의, 은본위제도를 유지하는 것은 시류에 적합하지 않으며 우선적으로 폐량개원을 실시하여 여러 종류의 통화가 통용되는 상황에서 은원을 중심으로 통일한 이후 금본위제도를 도입한다는 <선폐량개원, 후금본위제도>의 방침을 결정하였다. 1928년 7월 1일 전국재정회의가 개최되어 통일중국의 재정정리를 논했고 1928년 8월 철도부장 쑨커가 케머러를 중심으로 하는 외국인 자문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케머러 위원회는 폐량개원을 생략하고 금본위제도 도입을 주장했다.
1920년대 말에 이르자 당시 주요국가 중에 유일하게 은본위제도를 채택하고 있던 중국은 금은 투기매매가 활성화됨에 따라 큰 경제적 혼란을 겪게 되었다. 국민정부는 외국 은화 수입 금지, 금 수출 금지 등의 조치를 취하며 금본위제도 도입을 위한 여건을 조성하며 위기를 타개하려 했다. 이러한 정책은 쑹쯔원과 쿵샹시가 주도적으로 이끌어나갔다. 하지만 1931년 영국이 금본위제도를 이탈하는 등 세계적으로 금본위제도 이탈의 움직임이 포착되자 국민정부는 금본위제도를 일단 보류하고 폐량개원에 집중하기로 하였다.
한편 1914년, 슝시링 내각이 국폐조례를 선포하여 은원의 주조를 시작한 이래 1917년 말에 은원의 주조량은 1억 8559만원에 달했다. 1921년 4월까지 총 4억원에 달하는 은원이 주조되었고 1933년 3월에는 14억원에 달하는 은원이 유통되었다. 1920년대 초반에 금융시장의 동요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1921년 투기 과열로 금융파동이, 1923년에는 은량 부족에 따른 경제위기가, 1924년 강절전쟁으로 인한 금융위기가 발생했다. 은원의 위치는 은 밀수 열풍과 더불어 자꾸 떨어졌고 1923년에 전업공회가 은원의 신용이 떨어지는 문제를 지적하며 은원 제조를 중단할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이러한 문제점 때문에 상하이의 은행공회는 1923년 11월 19일 금융토론위원회를 조직하여 즉각적인 은량 폐지를 주장했다. 이들은 은량의 수요는 많으나 은행과 전장이 보유하고 있는 은량은 그에 맞지 않게 적기 때문에 자금회전이 되지 않으며 이 때문에 근래의 자금 경색 현상이 발생한다고 지적, 이 현상이 경제발전에 큰 장애물이 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3가지 방안을 제안했다.
1926년 국민당의 1차 북벌을 시작으로 중국의 지배권은 북양정부에서 국민정부로 넘어가게 되었다. 국민정부는 국민당의 2차 북벌 중인 6월과 7월부터 전국경제회의와 재정회의를 개최, 재정정리와 화폐개혁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1928년 11월, 국민정부는 직영 금융기관 중앙은행을 신설하여 상하이에서 영업을 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양은의 제조, 통제가 각 지방의 은장업 단체에 의해 운영되는 현실은 경제, 금융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하여 국민경제를 건설하려는 난징 국민정부의 입장에서 큰 장애물이 되었고 국민정부는 유력 은행과 금융기관의 손에 맡겨져 있는 화폐주조권을 회수하여 폐제 통일을 시도하였다. 배경 단락에서 상술한 바와 같이 난징 국민정부는 1928년에 폐량개원을 우선적으로 실시한 후 점진적으로 금본위제도를 도입하겠다는 방침을 결정한 바가 있으나 케머러를 중심으로 하는 외국인 자문위원회는 폐량개원을 생략하고 바로 금본위제도를 도입할 것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1929년 대공황으로 세계 경제가 휘청이게 되고 은의 가격이 종전의 반으로 폭락하자 금본위제 실시를 위한 금괴 마련이 도저히 불가능해졌다. 국민정부는 은으로 금을 사서 금본위제를 실시하려 했는데 은값이 반으로 떨어졌으니 이는 원래 계획보다 금본위제 실시의 비용이 2배로 폭증했음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케머러의 계획안은 국민정부에 의해 보류되었고 1931년에 영국이 금본위제도를 이탈하는 등 세계 각국이 금본위제도를 포기하자 케머러 계획은 완전히 폐기되었다.
1931년 만주사변이 발생하면서 만주에서의 세입과 해관 수입이 끊겨 경제에 엄청난 타격이 가해지고 화북을 중심으로 일본의 경제 침탈이 심화되자 국민정부는 적극적으로 화폐개혁에 매달리게 되었다. 1932년 7월 재정부장 쑹쯔원이 상하이의 은행과 은장업자들을 소집하여 폐량개원의 의사를 타진하며 다음과 같은 조건을 제시했다.
1933년 3월 10일부터 상하이에서 공포한 대로 양은 계산을 폐지하고 완전히 은원 제도로 개정하도록 시범적으로 실시했다. 상하이에서의 폐량개원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자 국민정부는 4월 5일 "이후 모든 공사의 금융수수와 계약, 어음체결 및 거래에 일률적으로 은화를 사용해야 하고 양은을 사용할 수 없다."는 폐량개원령을 공포하여 4월 6일을 기하여 폐량개원을 전국적으로 확대실시할 것임을 발표했다.
폐량개원은 성공적으로 단행되었고 국민정부는 화폐 주조권을 독점하게 되었음은 물론 과거 중국 내부에 외국 지폐, 금화, 동화 등이 마구 유입되어 사용되어 경제를 혼란하게 하던 일을 막고 정부가 통화량을 조절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어 경제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할 수 있었다.
이듬해인 1934년, 미국에서 은구입법이 시행되어 2억 온스에 달하는 중국의 은이 유출됨으로 경제위기가 도래하자 국민정부는 폐량개원의 성공을 바탕으로 1935년 11월 4일 전격적으로 법폐개혁을 단행하여 은본위제를 폐기하기에 이른다.
1. 개요
1933년 4월 5일 국민정부가 기존에 통용되던 은량을 폐기하고 은원만 통용되도록 실행한 화폐개혁.
2. 배경
청나라 때까지만 해도 중국은 화폐에 관해서 자유방임적인 정책을 취했고 자율적으로 주조된 은량의 통용을 허용했다. 하지만 1890년 외국의 금융을 참조하여 광서제 치세 때 광동총독 장지동이 처음으로 은원(은화)을 주조했고 이후 각 성에서 은원을 재조하기 시작하면서 근대적인 은화제도가 도입되었다. 선통제 치세에 이르면서 청나라도 은본위제도의 폐기와 금본위제도 도입을 검토하였는데 1910년 은원을 중심으로 재정을 통일하겠다는 방침이 정해졌고 1911년 신해혁명 이후 건국된 중화민국도 금본위제도의 도입과 화폐개혁을 검토했으나 계속되는 정치적 혼란 때문에 슝시링 내각 시절에 은본위제도 유지를 결정하고 은원 제조량을 늘렸다.
국민혁명으로 중국 국민당이 중국을 통일한 이후 화폐개혁에 대한 논의가 다시 활발해졌다. 1928년 4월 27일 국민당 58차 상무위원회 회의는 <통일국폐폐량용원안>을 채택하여 폐량개원을 결정하였고 1928년 6월 21일 전국경제회의 1차 소회의에서는 <국폐조례안>을 결의, 은본위제도를 유지하는 것은 시류에 적합하지 않으며 우선적으로 폐량개원을 실시하여 여러 종류의 통화가 통용되는 상황에서 은원을 중심으로 통일한 이후 금본위제도를 도입한다는 <선폐량개원, 후금본위제도>의 방침을 결정하였다. 1928년 7월 1일 전국재정회의가 개최되어 통일중국의 재정정리를 논했고 1928년 8월 철도부장 쑨커가 케머러를 중심으로 하는 외국인 자문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케머러 위원회는 폐량개원을 생략하고 금본위제도 도입을 주장했다.
1920년대 말에 이르자 당시 주요국가 중에 유일하게 은본위제도를 채택하고 있던 중국은 금은 투기매매가 활성화됨에 따라 큰 경제적 혼란을 겪게 되었다. 국민정부는 외국 은화 수입 금지, 금 수출 금지 등의 조치를 취하며 금본위제도 도입을 위한 여건을 조성하며 위기를 타개하려 했다. 이러한 정책은 쑹쯔원과 쿵샹시가 주도적으로 이끌어나갔다. 하지만 1931년 영국이 금본위제도를 이탈하는 등 세계적으로 금본위제도 이탈의 움직임이 포착되자 국민정부는 금본위제도를 일단 보류하고 폐량개원에 집중하기로 하였다.
3. 전개
3.1. 금융계의 폐량개원 논의
한편 1914년, 슝시링 내각이 국폐조례를 선포하여 은원의 주조를 시작한 이래 1917년 말에 은원의 주조량은 1억 8559만원에 달했다. 1921년 4월까지 총 4억원에 달하는 은원이 주조되었고 1933년 3월에는 14억원에 달하는 은원이 유통되었다. 1920년대 초반에 금융시장의 동요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1921년 투기 과열로 금융파동이, 1923년에는 은량 부족에 따른 경제위기가, 1924년 강절전쟁으로 인한 금융위기가 발생했다. 은원의 위치는 은 밀수 열풍과 더불어 자꾸 떨어졌고 1923년에 전업공회가 은원의 신용이 떨어지는 문제를 지적하며 은원 제조를 중단할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이러한 문제점 때문에 상하이의 은행공회는 1923년 11월 19일 금융토론위원회를 조직하여 즉각적인 은량 폐지를 주장했다. 이들은 은량의 수요는 많으나 은행과 전장이 보유하고 있는 은량은 그에 맞지 않게 적기 때문에 자금회전이 되지 않으며 이 때문에 근래의 자금 경색 현상이 발생한다고 지적, 이 현상이 경제발전에 큰 장애물이 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3가지 방안을 제안했다.
- 1. 은량, 은원을 교환 사용: 은량이 부족할 때에 은원을 대신 사용하여 두 통화를 동시 사용하게 하며 각지의 교역에서 결제수단을 일률적으로 하게 한다.
- 2. 은량, 은원의 법정비율의 규정: 이를 위해 통화의 교환비가를 정하게 한다. 국폐의 순도 7전2분4리6371을 적용하여 은원 1380원 대 은량 1천량으로 한다.
- 3. 화폐 순도의 화학검사:상하이의 중국은행과 교통은행이 사용한은 은원은 순도가 일정하지만 분란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은행공회에 화학검사실을 설치하여 법정비가를 엄격하게 유지하도록 한다.
3.2. 케머러 계획의 폐기
1926년 국민당의 1차 북벌을 시작으로 중국의 지배권은 북양정부에서 국민정부로 넘어가게 되었다. 국민정부는 국민당의 2차 북벌 중인 6월과 7월부터 전국경제회의와 재정회의를 개최, 재정정리와 화폐개혁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1928년 11월, 국민정부는 직영 금융기관 중앙은행을 신설하여 상하이에서 영업을 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양은의 제조, 통제가 각 지방의 은장업 단체에 의해 운영되는 현실은 경제, 금융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하여 국민경제를 건설하려는 난징 국민정부의 입장에서 큰 장애물이 되었고 국민정부는 유력 은행과 금융기관의 손에 맡겨져 있는 화폐주조권을 회수하여 폐제 통일을 시도하였다. 배경 단락에서 상술한 바와 같이 난징 국민정부는 1928년에 폐량개원을 우선적으로 실시한 후 점진적으로 금본위제도를 도입하겠다는 방침을 결정한 바가 있으나 케머러를 중심으로 하는 외국인 자문위원회는 폐량개원을 생략하고 바로 금본위제도를 도입할 것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1929년 대공황으로 세계 경제가 휘청이게 되고 은의 가격이 종전의 반으로 폭락하자 금본위제 실시를 위한 금괴 마련이 도저히 불가능해졌다. 국민정부는 은으로 금을 사서 금본위제를 실시하려 했는데 은값이 반으로 떨어졌으니 이는 원래 계획보다 금본위제 실시의 비용이 2배로 폭증했음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케머러의 계획안은 국민정부에 의해 보류되었고 1931년에 영국이 금본위제도를 이탈하는 등 세계 각국이 금본위제도를 포기하자 케머러 계획은 완전히 폐기되었다.
3.3. 폐량개원의 실시
1931년 만주사변이 발생하면서 만주에서의 세입과 해관 수입이 끊겨 경제에 엄청난 타격이 가해지고 화북을 중심으로 일본의 경제 침탈이 심화되자 국민정부는 적극적으로 화폐개혁에 매달리게 되었다. 1932년 7월 재정부장 쑹쯔원이 상하이의 은행과 은장업자들을 소집하여 폐량개원의 의사를 타진하며 다음과 같은 조건을 제시했다.
- 1. 폐량개원을 실시하여 완전히 은원제도를 채용한다.
- 2. 신본위제가 주조되어 통용될 때까지 국제조례 이래 통용되어 오던 은원을 본위폐로 당분간 사용한다.
- 3. 은원의 법가가 결정된 후 새로운 은원을 주조, 유포한다.
1933년 3월 10일부터 상하이에서 공포한 대로 양은 계산을 폐지하고 완전히 은원 제도로 개정하도록 시범적으로 실시했다. 상하이에서의 폐량개원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자 국민정부는 4월 5일 "이후 모든 공사의 금융수수와 계약, 어음체결 및 거래에 일률적으로 은화를 사용해야 하고 양은을 사용할 수 없다."는 폐량개원령을 공포하여 4월 6일을 기하여 폐량개원을 전국적으로 확대실시할 것임을 발표했다.
4. 결과
폐량개원은 성공적으로 단행되었고 국민정부는 화폐 주조권을 독점하게 되었음은 물론 과거 중국 내부에 외국 지폐, 금화, 동화 등이 마구 유입되어 사용되어 경제를 혼란하게 하던 일을 막고 정부가 통화량을 조절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어 경제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할 수 있었다.
이듬해인 1934년, 미국에서 은구입법이 시행되어 2억 온스에 달하는 중국의 은이 유출됨으로 경제위기가 도래하자 국민정부는 폐량개원의 성공을 바탕으로 1935년 11월 4일 전격적으로 법폐개혁을 단행하여 은본위제를 폐기하기에 이른다.
5. 참고문헌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중국근현대사 3권 혁명과 내셔널리즘(1925~1945), 이시카와 요시히로, 삼천리.
- 北京政府時期 上海 銀行業의 制度的 지향: 廢兩改元과 匯劃制度를 중심으로, 김승욱, 중국근현대사연구 11권, 중국근현대사학회.
- 南京政府 시기 국가주도하 국민경제 건설: 民生主義 및 <實業計劃>과 관련하여, 강명희, 중국근현대사연구 31권, 중국근현대사학회.
- 廢兩改元에 관한 一考察, 임지환, 전북사학 11,12권, 전북사학회.
- 1930년대 중국의 金融統一過程에서 본 중앙과 지방: 廣東省의 지방화폐 정리과정(1936-1938)을 중심으로, 강진아, 중국학보 46권, 한국중국학회.
- 國民政府의 幣制改革과 中美銀協定의 의미, 김정현, 동아시아역사연구 5권, 동아시아역사연구회.
- 北京政府時期 上海의 近代銀行과 銀行公會, 김승욱 서울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 1930년대 초 南京國民政府의 金換本位制 도입 시도와 그 의미, 주형준,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6. 관련문서
- 제1차 초공작전(1930.12.19.~1931.1.3.)
- 탕산 사건(1931.2.28.)
- 제2차 초공작전(1931.4.1.~1931.5.31.)
- 1차 양광사변(1931.5.27.~1932.1.1.)
- 나카무라 사건(1931.6.27.)
- 만보산 사건(1931.7.1.)
- 제3차 초공작전(1931.7.1.~1931.9.20.)
- 류탸오후 사건(1931.9.18.)
- 만주사변(1931.9.18.~1932.3.1.)
- 3차 장왕합작(1932.1.)
- 마옥산 사건(1932.1.18.)
- 제1차 상하이 사변(1932.1.28.~1932.5.5.)
- 송호정전협정(1932.5.5.)
- 제4차 초공작전(1932.~1933.)
- 열하사변(1933.)
- 당고정전협정(1933.5.31.)
- 제5차 초공작전(1933.10.16.~1934.11.10.)
- 복건사변(1933.11.20.)
- 대장정(1934.~1935.)
- 하북 사건(1935.5.2.~1935.5.24.)
- 장북 사건(1935.6.5.)
- 하매 협정(1935.6.10.)
- 돈목방교령(1935.6.10.)
- 진토 협정(1935.6.27.)
- 타다 성명(1935.9.24.)
- 히로타 3원칙(1935.10.4.)
- 왕징웨이 저격 사건(1935.11.1.)
- 법폐개혁(1935.11.4.)
- 중미은협정(1935.11.13.)
- 기동사변(1935.11.25.)
- 12.9 운동(1935.12.9.)
- 동정항일(1936.)
- 2차 양광사변(1936.6.1.)
- 수동사변(1936.11.14.)
- 7군자 체포 사건(1936.11.23.)
- 서안 사건(1936.12.12.)
- 루거우차오 사건(1937.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