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징웨이 저격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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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격 직후의 왕징웨이
1. 개요
2. 배경
2.2. 선안내 후양외 정책
3. 전개
3.1. 왕징웨이 저격
3.2. 왕징웨이의 상태
3.3. 범인의 정체
3.4. 사건의 배후는?
4. 결과
5. 참고문헌
6. 관련문서


1. 개요


1935년 11월 1일, 국민당 제4기 중앙집행위원회 제6차 전체회의에 참석했던 중화민국 행정원장 겸 외교부장 왕징웨이를 노린 저격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중상을 입은 왕징웨이는 공직에서 사퇴하고 신병 치료를 위해 외유를 떠났다.

2. 배경



2.1. 장왕합작


왕징웨이장제스는 애증어린 정치적 관계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1925년 쑨원이 사망하고 왕징웨이가 국민정부 주석으로 추대되었을 때 황포군관학교 교장이었단 장제스는 왕징웨이를 적극 지지하는 정치적 동반자였으나 국민혁명에 관련된 의견 차이와 군사적 권위를 확립하려는 왕징웨이와의 충돌 끝에 1926년 중산함 사건이 일어나면서 결렬되었다. 권위에 심각한 타격을 입은 왕징웨이는 공직에서 사퇴하여 프랑스 외유를 떠났는데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 좌파들은 장제스를 견제하기 위해 왕징웨이를 도로 초빙해오자는 영왕운동을 벌이며 장제스를 압박했다.
1927년 귀국한 왕징웨이에게 장제스는 중국 공산당을 숙청하는 일을 돕는다면 정치를 왕징웨이에게 맡기고 자신은 군사 분야에만 집중하겠다고 제안했지만 왕징웨이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어 장제스는 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켜 공산당과 결별을 선언하고 독자적은 난징 국민정부를 수립하면서 우한 국민정부의 수장으로 옹립된 왕징웨이와 대립하게 되었다. 하지만 8월에 장제스가 하야하고 영한합작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왕징웨이가 서산회의파의 공격으로 덩달아 하야하게 되자 왕징웨이는 장제스와 손을 잡는 것이 좋다고 판단하여 다시 한번 합작하여 장제스의 공직 복귀를 도왔지만 광저우 폭동 문제에 휘말려 실각, 또다시 외유를 떠나고 반장파에 합류했다.
1920년대 후반 왕징웨이는 중원대전에 참여하여 옌시산과 함께 베이핑 국민정부를 수립하고 장제스에 대항했으나 장쉐량이 장제스의 편을 들면서 실패했다. 1931년 장제스가 입법원장 후한민을 감금하는 탕산 사건을 일으키자 왕징웨이는 자신의 파벌인 개조파를 이끌고 서산회의파, 광서파, 광동파와 합작하여 광저우 국민정부를 수립, 1차 양광사변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다른 반장파들의 괄시를 받으며 권력에서 소외된 왕징웨이는 제대로 빈정 상해 차라리 장제스와 합작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여 1931년 12월에 하야한 장제스와 도로 손을 잡게 되면서 3차 장왕합작이 성립되었다. 이에 따라 1932년 1월 왕징웨이가 행정원장, 장제스가 군사위원장에 취임하여 연립정부를 구성하였다.

2.2. 선안내 후양외 정책


한편 중국은 1931년 만주사변에 이어 1932년 제1차 상하이 사변, 1933년 열하사변을 맞이하여 일본 제국의 침략에 시달리고 있었다. 장제스와 왕징웨이가 공유하고 있던 것은 중화민국이 일본과 정면으로 싸워서는 쨉도 안된다는 것이었고 이에 따라 둘은 일본의 침략에 손 놓고 당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섣불리 무력대응을 할 수도 없다고 여겼다. 여기서 장제스는 중국 내부의 군벌과 공산당을 토벌하여 국내를 안정시킨 다음에 일본에 맞설 것을, 왕징웨이는 외교적 수단을 강조했는데 이에 따라 장제스와 왕징웨이는 일본의 침략을 국제연맹에 제소하여 외교적인 도움을 강구하는 한편 1932년 2월 <대일 문제에 대한 담화>를 발표, 일본에 대해 일면저항, 일면교섭 정책을 취하겠다고 발표했다.
1933년 일본 제국과 중화민국 사이에 당고정전협정이 체결되면서 일본의 확장은 일단 중단되는 듯 했지만 일본 제국은 화북분리공작을 취하며 중국에 대한 침략을 멈추지 않았다. 1935년 5월 일본 제국은 비무장지대의 소요와 친일파들의 암살을 이유로 허잉친을 위협하여 6월에 허잉친-우메즈 협정[1]을 체결하여 화북의 중앙군과 국민당 기관을 철수시킬 것을 강요했고 차하얼에서도 봉천 특무기관장 도이하라 겐지가 차하얼 정부 대치주석 친더춘을 위협해 친더춘-도이하라 협정[2]을 체결했다. 1935년 11월, 일본은 한간인 인루겅을 포섭하여 기동방공자치정부를 수립하는 기동사변을 일으켜 다시 한번 중국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일본의 계속된 침략에 중국의 민심은 격앙되어 중앙에 항일을 요구했다. 국민정부는 일본의 위협 때문에 1935년 6월 돈목방교령을 발표하여 반일운동을 단속하려 했지만 수면 밑에서는 비밀리에 항일단체를 지원하며 항일여론을 조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강성해진 항일여론은 정부를 성토하며 방침을 전환하라는 압력을 넣었고 여기에 중국 공산당이 주도권 확보를 위해 국민정부를 비난하며 항일 여론을 부추겼다. 재야의 항일 여론은 날이 갈수록 강성해졌으며 남의사를 비롯하여 중국 국민당 내부 단체들도 항일을 요구하는 등 정부의 수뇌인 장제스와 왕징웨이는 이런 대일 교섭파의 수장으로 엄청난 압력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국민정부 수뇌는 열하사변에서 중국과 일본의 국력 차이를 실감한 터라 일본에서 출범한 히로타 고키 내각의 중일친선 정책에 부응하여 일본과의 교섭에 나서고 있었고 강성해진 배일 분위기는 더욱 큰 반발과 공격적 여론을 불러 일으켰다.

3. 전개



3.1. 왕징웨이 저격


9월로 예정되었던 4기 6중전회가 1935년 11월 1일이 되어서야 난징에서 개최되었다. 6중전회는 1931년 12월 4기 1중전회에서 결정된 광저우 국민정부와 난징 국민정부의 통합을 정리하기 위한 제5차 전국대표대회를 준비하기 위한 예비회의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따라서 6중전회에 부여된 정치적 의미는 매우 높았고 따라서 6중전회에 대해 내외의 관심이 주목되었다.
11얼 1일 아침 7시, 중앙집행위원들은 난징 교외의 중산릉을 참배하고 9시에 중앙당부 대강당에서 6중전회 개막식에 참여했다. 왕징웨이가 개막식 연설에 참여하여 국난의 엄중함을 강조하고 국내 안정을 위한 토벌전쟁에서 상당한 성과가 있었음을 치하했다. 9시 35분, 개막식을 마치고 장제스, 옌시산, 왕징웨이 등 중앙집행위원들이 대강당 앞에서 다섯 줄로 도열하여 단체 사진 촬영을 했다. 이때 장제스가 보이지 않아 사람들이 장제스를 찾으려 했는데 우톄청이 "장 선생은 안 옵니다."라고 말하여 그대로 촬영을 마친 후 예비회의를 위해 회의장으로 이동했다. 이때 장제스는 보안에 문제가 있다는 측근들의 의견에 따라 사진 촬영에 참가하지 않고 강당으로 들어가서 중앙당부 2층 집무실에서 중앙당부 비서장 예추창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 순간 취재기자들 중 회색 대의를 입은 한 사람이 뛰쳐나와 왕징웨이를 향해 스페인제 권총을 2발 발사했다. 왕징웨이는 자신이 그날 총에 맞을 것을 직감했는지 괴한이 자신에게 총을 겨눔에도 전혀 달아나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처음 총성이 울렸을때 중앙위원 겸 강소성 교육청장 저우포하이는 처음에는 폭죽소리가 난 줄 알고 뒤돌아보았으나 총을 든 남자가 서 있고 왕징웨이가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괴한은 연달아 2발을 더 발사하였고 왕징웨이는 도합 3발의 총알을 맞았다. 장쉐량과 장지 등 중앙집행위원들이 달려들어 범인을 제지하는 사이 위병들이 범인에게 총을 쏘아 제압했다. 총소리를 듣고 장제스가 강당에서 뛰쳐나와 직접 왕징웨이를 차에 태워주었고 왕징웨이의 아내 천비쥔은 침착하게 왕징웨이의 몸에 담요를 덮어주었다. 왕징웨이는 천비쥔과 측근 천궁보의 도움으로 급히 중앙의원에 옮겨졌다.

3.2. 왕징웨이의 상태


왕징웨이의 부상은 심각했다. 한발은 왼쪽 팔, 한발은 왼쪽 뺨, 한발은 등을 맞추어 다섯번째와 여섯번째 갈비뼈를 지나 허파를 뚫고 척추에 박혔다. 왕징웨이와 천비쥔 모두 죽음을 각오할 정도의 상황이었으나 중앙의원에서는 왕징웨이의 부상이 치명상은 아니라고 진단했다. 왼쪽 팔의 총상은 경미한 부상이라서 즉각 봉합수술로 치료했고 왼쪽 뺨의 총상은 뼈가 관통되어 왼쪽 눈에 파편이 박힐 정도였으나 세차례의 수술 끝에 파편을 모두 제거하여 역시 잘 처리되었다.
문제는 등에 박힌 총탄이었는데 당시 중국의 의학기술로는 제거가 도저히 불가능했다. 왕징웨이는 국난의 시기에서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행운이니 여생을 바쳐 일하겠다며 정계 복귀 의사를 타진했지만 11월 20일 상하이의 병원으로 옮겨 독일인 의사들의 수술을 받아 왼쪽 뺨의 파편은 제거했지만 등에 박힌 총탄을 제거하진 못했다. 결국 왕징웨이는 건강상의 이유로 공직 수행이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12월 1일 국민당 5기 1중전회에 전보를 보내 행정원장과 외교부장 직에서 사직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국민당 5기 1중전회는 왕징웨이를 중앙정치위원회 주석 겸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으로 선출했지만 어디까지나 공직을 수행할 수 없는 왕징웨이의 상태를 고려한 체면치레에 불과했다.
왕징웨이 피격 이후 행정원장은 부원장 쿵샹시가 대리하고 외교부장은 외교차장 당유임이 대리하던 상황이었는데 결국 1중전회는 12월 16일 왕징웨이의 사직을 수리하여 장제스를 행정원장으로 추대했다. 장제스는 왕징웨이의 측근인 구멍위에게 행정원 부원장을 제의했지만 구멍위가 고사하여 쿵샹시가 다시 행정원 부원장을 맡았고 외교부장은 장췬이 맡았다. 1중전회에서 왕징웨이 파벌은 대거 실각했고 정부 내부의 분위기를 포착한 왕징웨이는 1936년 3월 프랑스와 독일로 가 독일의 의료기술로 치료를 받고자 했으나 당시 의학기술로는 제거가 불가능했고 독일에서 온천 요양이나 하다가 1937년 1월에 귀국했다. 결국 제거되지 못한 총알은 골수종양을 일으켜 1944년 왕징웨이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
한편 정부는 6중전회를 즉각 중단시키고 난징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천비쥔은 촬영식장에 장제스가 없었다는 것 때문에 장제스를 배후로 여기고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장 선생님. 너무 하십니다. 의견이 다르면 서로 이야기하면 될 게 아닙니까. 이처럼 심한 짓을 하지 않아도 되지 않겠어요?"


3.3. 범인의 정체


범인은 신광(晨光)통신사 기자 손봉명(孫鳳鳴, 쑨펑밍)으로 당시 32세였다. 19로군 중사 출신으로 제1차 상하이 사변에 참전한 경력이 있었고 19로군 소대장과 복건성에 주둔한 12사단 중대장을 지낸 적이 있었다. 체포된 손봉명은 자신의 저격에 대한 대의명분을 외쳤고 단독범행을 주장했다. 손봉명은 위병의 사격으로 가슴에 2발의 총알을 맞아 스스로도 이미 위독한 상태였고 결국 고통을 호소하여 각성제를 한방 맞은 후에 수술을 받고도 몇시간만에 11월 2일 숨지고 말았다. 경찰은 그의 주머니에서 아편이 발견되었다고 발표했다. 손봉명의 급사는 배후에 장제스가 있다는 의심을 부추겼다. 일단 장제스는 왕징웨이의 입장을 고려해서 사건의 배후를 중국 공산당이라고 발표하게 했고 장제스의 측근 천리푸는 이 사건이 진급이 누락된 장교가 불만을 품고 저지른 개인적인 소행으로 일축했다. 하지만 배후에 서남파가 있다는 소문도 돌았다.
장제스는 군경에게 지시하여 10일 이내에 손봉명의 배후를 색출하라고 명령했다. 배후는 금방 포착되었는데 손봉명에게 권총을 제공한 것은 1934년 10월 신광통신사를 설립한 호운경(胡雲卿, 후윈칭)이었다. 호운경은 중국 국민당 난징 시당부 청년부장을 맡았던 인물이고 신광통신사의 취재부장 하광피(賀光披, 허광포)는 우익단체인 사회과학가연맹의 일원이었다. 이 둘은 즉각 체포되어 기소되었는데 자신들이 국민정부의 대일 유화정책에 불만을 품고 친일파의 몸통인 왕징웨이와 장제스를 제거하려한 것이었다고 진술했다.

3.4. 사건의 배후는?


하지만 배후에 장제스가 있다는 소문은 계속 나왔다. 정황상 장제스가 자리를 비운 것이 너무도 미심쩍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상하이 경찰국은 사건 배후에 남의사가 있다고 판단하는 등 장제스 연루설이 계속 흘러나왔다. 이 와중에 1935년 12월 25일, 대일 교섭을 맡고 있던 왕징웨이의 측근 당유임이 암살되고 왕영태에게도 테러가 이어졌다. 이에 장제스는 군사통계국의 다이리에게 지시하여 범인을 색출할 것을 지시했다. 1937년 2월 24일 다이리는 서남정무위원회의 유로은이 배후라는 것을 포착하여 그를 체포했다. 유로은은 광동파 천밍수, 리지선의 교사를 받아 청방 조직원 왕야차오와 접촉, 손봉명을 사주하여 왕징웨이를 저격하게 했으며 이후 정응창을 사주하여 당유임을 피살하게 했다는 것이었다. 이에 정응창도 체포되었다. 이것으로 서남파가 배후에 있다는 세간의 소문은 사실임이 입증되었다.
허나 이 왕야차오의 정체 때문에 장제스가 배후에 있다는 가설은 완전히 죽지는 않았다. 왕야차오는 1932년 제1차 상하이 사변 중 상하이에서 의용군 설립에 앞장선 인물인데 남의사의 주요 인물들과 연계가 있는 인물이었고 쑹쯔원을 비롯해서 장제스와 친하지 않은 여러 인물들에 대해 암살을 시도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가설은 정황 증거 외의 어떠한 물리적 증거가 없을 뿐더러 장제스가 왕징웨이를 제거할 필요가 없었다는 정황 증거가 더 많다. 장제스 평전의 저자 조너선 펜비는 장제스가 왕징웨이를 무력을 사용해서 제거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고 단언하고 있다. 1935년 시점의 왕징웨이는 장제스에게 걸리적거리는 정적이 아니라 장제스의 선안내 후양외 정책을 수행하는 중요한 동반자였고 당정의 주요부문은 이미 장제스가 완전히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왕징웨이는 실권이 거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왕징웨이를 무력으로 제거할 이유는 존재하지 않았다. 게다가 왕야차오는 장제스 역시 암살하려고 수차례 시도한 인물이었다.[3]
다만 왕징웨이가 물리적으로 무력화된 상황에서 장제스가 당정조직에서 왕징웨이 계파를 대거 몰아내고 권력을 독점하여 정치적인 큰 수혜를 입었다는 것 자체는 부인할 수 없다.

4. 결과


이후 국민정부법폐개혁을 단행하면서 경제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했고 장제스는 12.9 운동을 비롯한 배일운동을 묵살하며 국방건설에 착수했지만 1936년 12월 12일 서안 사건으로 2차 국공합작에 동의하게 되었다.
왕징웨이는 서안 사건 소식을 듣고 서둘러 1937년 1월에 귀국했지만 도착해을 때는 이미 상태가 다 정리된 후였다. 왕징웨이는 5기 3중전회에서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회 주석으로 추대되어 외형상의 장왕합작을 복구했지만 장제스가 후항일에서 선항일로 선회하면서 두 사람의 정책관은 근본적으로 틀어진 상태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지고 비관에 빠진 왕징웨이는 일본 제국협력하는 길을 선택하게 된다.

5. 참고문헌


  • 왕징웨이 연구, 배경한, 일조각.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서안사변, 나가노 히로무, 일월서각.
  • 장제스와 국민당 엘리티스트, 정두음, 도서출판선인.
  • 중국근현대사 3권 혁명과 내셔널리즘(1925~1945), 이시카와 요시히로, 삼천리.
  • 중일전쟁 전후 대일 협력자 '汪精衛集團'의 형성(1928~1938), 박상수, 사총 65권, 고려대학교 역사학연구소.
  • 광주국민정부의 北伐과 蔣介石의 대응, 김영신, 중국학연구 55권, 중국학연구회.

6. 관련문서



[1] 혹은 하매 협정.[2] 또는 진토 협정.[3] 중국 학계에서는 이 왕야차오라는 인물이 천밍수와 결탁하여 김구로 하여금 훙커우 공원 의거를 일으키도록 사주하여 실질적으로 훙커우 의거의 또 다른 주역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장제스와 친밀하였던 김구와 장제스를 극도로 혐오하였던 왕야차오가 이런 위험한 일을 같이 하였다는 증거가 발굴되지 않아 한국 학계는 이를 수용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