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탄 치보르
1. 개요
헝가리의 前 축구선수로 1950년대 매직 마자르의 주전 윙어였다.
2. 선수 생활
2.1. 클럽
치보르는 유스팀부터 축구를 코마롬 AC 의 유스팀에서 시작한다. 치보르는 그 시절 기차의 엔진에서 운전을 하는 일을 하면서도 축구를 병행한다. 결국 코마롬에서 프로데뷔를 했고 점점 기량이 물오른 그는 헝가리의 여러팀에 눈에 띄었다. 결국 자국 최고의 명문팀 페렌츠바로시 TC로 이적한다.
당시 페렌츠바로시에는 산도르 코츠시스가 있었고 치보르는 데뷔하자마자 리그 우승을 경험한다. 치보르와 코츠시스는 계속해서 눈에 띄는 활약을 펼쳤고 헝가리의 국방정부의 지원을 받는 자국 최고의 명문팀 부다페스트 혼베드 FC로 이적한다. 코츠시스는 바로 이적했으나 치보르는 세펠을 걸쳐 부다페스트 혼베드로 이적한다. 당시 부다페스트는 페렌츠 푸스카스, 요세프 보직 등이 있었고 코츠시스와 졸탄까지 영입하며 최고의 스쿼드를 자랑하게 된다. 1954년과 1955년 연속으로 리그 우승을 하며 리그 2연패에 성공했고 다음 해에는 그 활약으로 유러피언컵 본선까지 진출하게 되며 승승장구하지만, 헝가리 혁명으로 인해 졸탄도 다른 선수들처럼 헝가리를 떠나 AS 로마에 잠시 뛰다가 FC 바르셀로나로 이적한다.
1958-59시즌에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와 페렌츠 푸스카스가 이끄는 레알 마드리드 CF의 독주를 끊어내며 라리가 우승과 코파 델 레이도 우승해 더블을 달성한다. 치보르는 주전으로써 맹활약한다. 당시 엘레니오 에레라 감독은 루이스 수아레스 미라몬테스를 중심으로 전술을 개편하고 있었고 치보르는 레프트 윙으로써 최고의 기량을 선보인다. 어쨌든 바르셀로나는 다음 시즌에도 리그 우승을 하며 리그 2연패를 따낸다. 특히 1960-61시즌에는 유러피언컵 결승까지 오른다. 에우제비우 이전의 아구아스와 콜루나가 있는 SL 벤피카와의 경기였는데 치보르는 골까지 넣지만 결국 팀은 3-2로 패배하고 만다. 졸탄은 이를 마지막으로 바르셀로나를 떠났고 무수히 많은 팀을 떠돌다 결국 1965년 현역은퇴를 선언한다.
2.2. 국가대표
1949년에 국가대표팀에 데뷔한 치보르는 1952 헬싱키 올림픽에서 헝가리의 전승 우승을 이끌어 금메달을 획득한다.[1]
이렇게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던 헝가리는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 참가한다. 조별예선에서 터키, 서독, 대한민국과 한 조가 된다. 첫 경기인 대한민국과의 경기는 9:0으로 승리하는데, 이 경기에서 치보르는 1골을 기록한다. 또 다음 서독과의 경기에서는 푸스카스가 부상을 당하지만 헝가리는 충분히 강력했고 8-3으로 승리한다. 그렇게 조 1위로 8강에 진출한 헝가리는 브라질을 만났는데 브라질 역시도 4-2로 승리한다. 이 경기에서 헝가리의 요세프 보직은 브라질의 니우통 산투스와의 마찰로 퇴장당하기까지 한다. 또 계속 난투극을 펼치며 그 경기에서 4장의 옐로카드와 3장의 레드카드가 나왔고 헝가리관중석에서 날아온 병에 브라질 선수가 맞자 락커룸에서도 난투극이 펼쳐졌다. 이걸 우리는 '베른의 전투'라고 부른다. 4강 상대 디펜딩 챔피언 우루과이와는 치보르의 선제골에도 연장을 가는 접전을 펼쳤지만 연장전에서만 코츠시스가 2골을 박으며 4-2로 다시 승리하고 결승에 오른다. 강력한 퍼포먼스로 오른 결승은 서독과의 경기였는데 이 때 부상도 제대로 회복 못한 푸스카스가 감독에게 자신이 나오고 싶다고 어필했고 나와서 선제골을 넣는다. 또 헝가리는 2분 뒤 졸탄의 골까지 더 해지며 기세를 탄다. 그러나 서독은 금방 두골을 만회하며 동점을 만들었다. 헝가리는 이 후 계속 파상공세를 펼치지만 서독을 골대와 수비수,골키퍼가 몸을 던지며 막아냈고 손에 땀을 쥐는 이 경기는 후반이 끝나기 6분전 서독의 헬무트 란의 기적적인 중거리슛이 헝가리의 골망을 가름으로 끝이난다. 그들의 4년간의 무패기록이 가장 중요했던 경기에서 깨지고 만것이다. 이것이 그 유명한 베른의 기적.[2] 그래도 치보르는 충분히 대활약했다.
헝가리는 월드컵이 끝난 이 후에도 패배없이 2년간 또 무패행진을 달린다. 하지만 그들을 멈춘것은 축구팀이 아닌 자국민들이었다. 당시 헝가리 자국내의 상황은 이랬다. '작은 스탈린'이라고 불리는 마차시 라코시, 공산주의 정치가가 헝가리의 공산화의 정책을 추진하며 자신의 반대되는 세력은 가차없이 숙청했고 헝가리 땅은 무서운 공기가 내돌았다. 하지만 민주화 운동이 언제나 그랬듯 헝가리의 국민들을 분노하게 했고 헝가리 혁명이라 불리는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고만다. 이 때의 '매직 마자르' 헝가리 국가대표팀은 외국에 원정을 가있었고 자국으로 돌아갈 수 없자 각각 여러나라로 망명을 가며 해체되고 만다. 매직 마자르는 말 그대로 공중분해를 당한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당대 최고의 레프트 윙어. 단순 기량만 봐도 굉장한 선수였다. 헝가리의 라이트 윙어 부다이와는 다르게 인사이드커터 성향을 뛰던 윙어였다. 수준급의 스피드와 발재간을 이용해 드리블 돌파로 상대의 측면을 탈탈 털던 윙어였다. 물론 한 발 더 빠르면서도 위협적인 크로스도 주특기. 그래도 그는 중앙으로 파고들어오면서 혼란을 주는데 더욱 더 능했다. 특히 헝가리의 '소셜리스트 풋볼'에서 가장 핵심으로 여기는 스위칭에 아주 능했다. 위에서 말한 영국 내의 반응처럼 말이다. 히데구티가 수비를 끌고 내려오면서 생기는 공간에는 푸스카스와 코치슈만 침투하는것이 아니었다. 졸탄도 자주 중앙으로 들어가며 득점을 노렸고 그 침투 역시도 뛰어나 득점도 꽤 했다. 또 중거리슛도 잘 쏘던 선수였다.
그에게 정말 아쉬운것은 헝가리 혁명이다. 축구에 만약은 없다지만 헝가리 혁명이 없었다면 축구강국은 브라질이 아닌 헝가리였을 수도 있다. 이건 푸스카스나 보직, 코츠시스 등 당대 최고의 선수들에게는 너무 아쉬울수 밖에 없다. 그러나 클럽에서는 제대로 그의 기량을 보여주는 기록이 있다. 그보다 더 뛰어난 선수로 추앙받는 코츠시스를 제치고 새로 개편하던 바르샤에서 주전을 차지한것. 워낙 이적기록이 많다보니 어찌보면 클럽에서의 활약이 과소평가 받는게 없지 않아 있다고 보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