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우통 산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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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라질의 전 축구선수. 현역 시절 포지션은 레프트백이다.골을 넣으려는 욕심이 있었지만 팀을 위해 절제할 줄 아는 선수였다.
네스토르 로시
지아친토 파케티와 더불어 20세기 최고의 레프트백이자 월드컵 역사상 최초로 세트피스가 아닌 상황에서 득점을 올린 풀백으로 유명하다. 194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초중반까지 20년 가까이 그 기량을 유지하며 브라질 국가대표팀 주전 자리에 계속해서 머물러 있었던 선수이다. 브라질과 함께 월드컵 2연패를 달성하기도 했다. 별명은 축구의 백과사전.
2. 생애
2.1. 클럽 경력
니우통 산투스는 1925년 한 어부의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브라질의 열악한 환경과 달리 그의 가족들이 살던 바다에는 새우와 다른 물고기들이 풍부해서 식량 때문에 고생하진 않았다고 한다. 니우통 산투스 역시 브라질의 여느 어린 아이들과 같이 리우데자네이루의 해변에서 비치사커를 즐기며 축구를 처음 접하였다.
처음 그가 축구를 시작할 때에는 아웃사이드-레프트. 즉, 공격수였고[2] 14살의 나이에 학교를 도중에 나온 니우통 산투스는 플레셰이라라는 지역 아마추어 클럽에서 축구를 했다. 잠시 수비수로 포지션을 변경하기도 했지만 다시 공격수로 돌아갔다.
22세의 나이에 브라질 공군에서 병역을 마친 그는 지역 명문 중 한 팀인 보타포구 FR에 입단하게 되었지만 프로의 벽은 높았다.[3] 처음 보타포구에 들어왔을 때에는 경기조차 뛰지 못할 정도로 기회를 잡을 수 없었고, 이를 지켜보던 당시 보타포구의 감독은 니우통 산투스의 축구 지능과 신체 능력을 그대로 썩히기 너무 아까웠다. 결국 니우통 산투스의 수비력이 다른 공격수보다 뛰어난 것을 눈여겨보다 니우통 산투스의 포지션을 수비수로 완전히 변경하였고, 이는 보타포구와 남미, 더 나아가 세계 축구계의 운명을 바꾼 신의 한 수였다.
포지션을 바꾸자마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니우통 산투스는 1948년 3월 21일, 아메리카 미네이루와의 경기에서 데뷔전을 치렀고 여기에서 비록 팀은 1:2로 패했지만 기자단은 그를 MOM으로 선정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국가대표팀에도 선발되어 보타포구와 브라질 대표팀에서 대체불가능한 자원이 되었다.
16년간 보타포구에서 활약하면서 각종 공식 경기를 모두 포함하면 720여 경기를 뛰어 보타포구 역대 최다 출전 기록을 가지고 있다.[4]
2.2. 국가대표 경력
니우통 산투스의 진짜 전설은 바로 이 곳, 브라질 대표팀에서 만들어졌다. 처음 대표팀에서는 그 역시 후보 선수 생활부터였다. 이 당시 대표팀은 홈에서 열린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대회에서 우승을 거두었고 역시 같이 홈에서 열린 월드컵에서도 우승을 노렸다. 하지만 아쉽게도 우승을 목전에 두어놓고 거짓말같이 우승에 실패하여 브라질의 역사에 큰 상처를 남기게 되었다. 여기에서 니우통 산투스는 한 경기도 출전하지 못하는 바람에 브라질 축구팬들의 낙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5] 이 대사건으로 인해 니우통 산투스보다 앞서 월드컵을 뛰던 선배 수비수들은 전부 낙인이 찍힌 채 대표팀에서 퇴출되었고, 니우통 산투스는 이후에 본격적으로 대표팀 커리어를 시작하게 되었다.
하지만 니우통 산투스에게도 마라카낭의 비극은 큰 충격이었고, 이로 인해 2년간 국가 대표팀에 소집되지 못했다. 2년 후에 열린 판아메리카 대회에서 복귀하여 골까지 넣으며 우승에 큰 역할을 담당한[6] 니우통 산투스의 다음 대표팀에서의 목표는 월드컵이었다. 하지만 다음에 열린 월드컵의 끝 역시 영 좋지 못했는데, 조별예선은 통과하였지만 다음 상대가 당대 최강팀인 매직 마자르 헝가리였다. 브라질은 헝가리에게 내내 끌려다니다 2:4로 패배하고 말았는데 경기 양상이 매우 거칠었고 니우통 산투스는 후반 26분, 헝가리의 미드필더 요세프 보직과 주먹다짐을 벌이다 퇴장을 당하였다.[7] 그리고 브라질은 망했어요...마라카낭에서의 침묵을 바라보는 것은 매우 슬픈 일이었다. 나는 뛸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니우통 산투스
이후의 코파 아메리카에서도 콩라인으로 밀려나게 된 브라질 대표팀. 그리고 니우통 산투스에게 스웨덴에서 열린 월드컵은 매우 중요했다. 그리고 니우통 산투스 역시 떨어진 명예를 위해 뛰었지만 의욕이 앞섰다. 첫 경기 오스트리아 전에서 감독 비센치 페올라는 니우통 산투스에게 계속 자기 자리를 지킬 것을 요구했지만 니우통 산투스는 계속 공격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결국 원투패스를 주고 받더니 오버래핑으로 골까지 뽑아내고 말았다.[8] 경기는 이렇게 3대 0으로 이겼지만 비센치 페올라의 주름은 깊어졌다. 수비수가 공격에 나선다는 것이 당시로서는 그다지 좋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 게다가 다음 잉글랜드 전에서 0대 0으로 비김으로써 감독의 주름은 더욱 깊어졌다.[9]
설상가상으로 당시 핵심 공격수로 데려온 주제 아우타피니까지 신통한 활약을 못보이자 비센치 페올라는 측면 수비수에게 아예 공격적인 역할도 어느 정도 넘기기로 결심했다. 수비수 중 니우통 산투스는 체력과 수비력, 공격력등 모든 면에서 만렙에 가까운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이미 입증했기 때문에 니우통 산투스와 니우통 지 소르지를 빼내어 각각 왼쪽, 오른쪽을 맡겼고 니우통 산투스에겐 공격도 하는 측면 수비수의 개념을 불어넣어주었다. 이렇게 비센치 페올라는 포백 수비라인을 만들어냈고, 최전방 공격수 자리에 신통치 않던 주제 아우타피니를 빼고 그 자리에 당시 17세였던 소년 공격수 펠레를, 측면 공격수 주엘을 빼고 가린샤를 넣었다. 그리고 컨트롤 타워 지지 옆에 수비력이 좋은 미드필더 지투를 넣는 대수술을 감행했다. 그리고 이 대수술은 말 그대로 '''세계 축구계의 역사를 바꿔놓았다!'''
브라질은 승승장구했고, 드디어 월드컵 첫 우승이라는 감격을 맛보게 되었다. 펠레와 가린샤라는 신성에게 주로 주목을 하지만 측면 수비수로서의 개념을 바꿔버린 니우통 산투스의 활약도 무시할 순 없었다. 축구 변방으로 취급받던 브라질도 순식간에 축구계의 중심으로 올라서는 순간이었다.
1959년 코파 아메리카에서 니우통 산투스가 하필 결승전이나 다름없던 아르헨티나와의 경기에서 뛰지 못하며 패배. 결국 준우승을 거두고 말았다.'''우리의 주장이었던 벨리니가 줄리메 트로피를 손에 받고 그것을 들어올렸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것을 향해 손을 뻗었고 모두가 벨리니처럼 트로피를 한 번씩 머리 위로 들어올려보았죠. 눈물이 가득 고였고, 컵의 윤곽이 흐려지더군요. 매우 감동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껴안고 웃고 서로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습니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저는 이 순간을 절대 잊지 못할 겁니다.'''
니우통 산투스
1962년 월드컵에도 니우통 산투스는 37세의 나이로 월드컵에 출전하였고 역시 주전으로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니우통 산투스는 이 대회에서 역사상 최초로 4개의 월드컵 대회에 참가하는 기록을 세웠다.[10] 특히 그의 활약이 순간적으로 빛났던 것은 조별 예선 마지막 경기인 스페인전이었는데 니우통 산투스는 여기에서 순간적인 기지로 페널티 킥을 모면하였다. 애매한 위치에서 니우통 산투스가 파울을 범했는데 니우통 산투스는 월드컵만 4회 경험한 베테랑답게 슬쩍 페널티 박스 밖으로 나가 밖에서 벌어진 반칙임을 태연히 주장하였고 심판은 그렇게 넘어갔다. 비록 펠레가 부상으로 처음 2경기만 뛰고 낙마했지만 가린샤를 필두로 나머지 선수들이 분발하여 브라질에게 연속우승이라는 기록을 안겨주었고, 1930년대의 이탈리아가 세웠던 기록을 재현해냈다. 그리고 니우통 산투스는 정상의 자리에서 대표팀 은퇴를 선언하였다.
2.3. 이후
1965년 4월 5일, 니우통 산투스는 축구 선수로서 은퇴하였다. 정식 은퇴 경기가 아니고 대중들에게 특별히 말을 하지 않은지라 150명 정도만이 모여 그의 은퇴를 기념하였고, 여기에서 국회의원이던 니나 히베이루에 의해 니우통 산투스 도로가 지정되었다. 축구계에서 은퇴한 이후에는 보타포구의 홈구장 근처에서 약국과 스포츠 용품점을 경영하였지만 약국은 얼마 안 가 파산, 스포츠 용품점은 10년 정도 후에 접고 말았다. 그 이후에는 어린 아이들을 대상으로 축구 교실을 열었고, 어린 시절의 취미였던 낚시를 하며 소일하였다. 1998년에는 나의 골 나의 생이라는 제목의 자서전도 출간했다.
2007년에 니우통 산투스는 치매 진단을 받았고 2013년 11월 27일 폐 감염으로 인해 사망하였다. 이 당시 4달 사이에 1950년대 브라질 축구의 황금기 멤버들 중 4명이 사망하여 브라질 올드팬들의 아쉬움을 불러일으켰다.[12]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축구의 백과사전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축구 전반에 대한 지식과 센스가 탁월했다. 이는 월드컵에서 오버래핑으로 골을 기록하면서 수비수가 공격에 참가하면 안된다는 고정 관념을 박살낸 선수임에서 드러났다. 물론 신체 능력도 좋아서 체력은 당대 최고 수준이었고[13] , 스피드 역시 빨랐으며,[14] 수비력과 공격력 모두 뛰어났다.
위상은 매우 높다. 그 호베르투 카를루스보다 위라는 평가를 받는 선수이며, 브라질과 남미 역대 베스트 11을 꼽으면 레프트백의 자리는 거의 그의 몫이다. 즉, 한 마디로 '''남미 역대 최고의 레프트백'''. 그리고 풀백의 오버래핑이 중요한 공격의 물꼬인 현재의 선수였다면 평가가 충분히 더 올라갈 수 있는 선수이다.
4. 기록
4.1. 대회 기록
-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 FIFA 월드컵: 1958, 1962
-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1949
- 팬아메리칸 챔피언십: 1952
4.2. 개인
- FIFA 월드컵 올스타팀: 1958
- 월드 사커 올해의 팀: 1960, 1961
- FIFA 20세기 월드팀: 1998
- FIFA 20세기 남아메리카팀: 1998
- 브라질 축구 명예의 전당
- FIFA 100: 2004
- 골든풋: 2009
5. 가린샤와의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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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최고의 윙어라는 평가를 받는 브라질 축구계의 레전드 선수였던 가린샤와의 인연도 유명하다. 가린샤는 유아 수준의 지능을 가지고 있었던 터라 정식적인 코스를 밟지도 못했고 그저 지역 팀 중 하나인 보타포구의 감독을 쫓아다니면서 축구를 시켜달라고 귀찮게 했다.'''그가 보타포구에 입단 테스트를 받으러 왔을 때 그는 바로 첫 터치로 내 다리 사이에 공을 넣어 지나갔다. 많은 사람들은 내가 불쾌해 했을 거라는 생각을 했지만 그들은 잘못 짚은 것이었다. 난 거기 있던 임원들에게 그와 계약해야한다고 말했고 다행히도 그들은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니우통 산투스
그래서, 가린샤에게 짜증이 솟구친 감독은 가린샤에게 입단 테스트를 제의했고 가린샤의 포지션이 윙어라는 것을 들은 감독은 입단 테스트에 참여할 상대를 데려왔는데 그 상대라고 데려온 게 바로 팀의 주전 레프트 백인 니우통 산투스였다. 말이 테스트지, '''"저기 서 있는 절름발이 새끼한테 네가 가서 본때를 보여주고 다시는 못 돌아오게 안드로메다로 보내버려라!!"'''같은 사실상 테스트를 빙자한 가린샤 퇴치였다. '''2010년대를 기준으로 따지자면, 입단 테스트의 상대로 마르셀루 비에이라나 데이비드 알라바 정도 되는 월드 클래스 선수를 다리가 휜 장애인 상대로 붙여준 격이다.'''
'''그러나, 니우통 산투스는 가린샤에게 시작부터 다리 사이로 공을 통과시키는 굴욕적인 알까기를 당하는 등 그야말로 처참하게 털렸다.''' 이 놀라운 결과를 봤지만 보타포구의 팀 관계자들은 가린샤의 유아 수준 지능 때문에 가린샤의 발탁을 망설였지만 여기에서 니우통 산투스는 오히려 감독에게 가린샤와 같이 팀에서 뛸 수 있도록 해달라고 설득했다. '''왜냐하면, 같은 팀으로 받아들이면 가린샤를 적으로 상대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갸린샤는, 보타포구에서 활약할 수 있었고 전설이 되었다.'''
6. 어록
'''나는 매우 허약하게 자랐지만 지금은 강하고 잘 다치지 않는다(resilent). 심각한 통증에 시달려본 적도 없고, 피곤함을 느낀 적 없이 축구를 해왔다. 게임에서 만난 라이벌들은 종종 옳지 않은 방법으로 나를 멈추게 하려고 했지만 성공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나는 피하거나 점프를 뛰어 그것들을 피했고, 셔츠를 찢어버리기도 했지만 누구도 나를 멈추게 할 수 없었다.'''
7. 사생활
니우통 산투스는 2번의 결혼을 통해 4명의 아이를 두었다. 1953년에 아비가일 테셰이라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두었지만 이혼하였고, 1971년에 마리아 첼리아와 결혼하여 2명의 아이를 더 낳았다. 그리고 마리아 첼리아와는 평생을 함께하였다.
[1] 의외로 당시 황금기였던 브라질 대표팀의 멤버 중 센추리 클럽에 가입한 선수는 아무도 없다. 펠레의 경우는 30살에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하여 91경기에서 자신의 기록을 마감했고, 발지르 페헤이라도 70경기 수준에서 멈추었다. 당시에는 A매치 주간이 보장되어 있지 않았고, 친선경기도 불규칙적으로 열렸기 때문에 선수들의 공식 기록에 남아있는 A매치 수가 지금에 비해 훨씬 적을 수밖에 없다.[2] 니우통 산투스는 12살이 되던 1937년 무렵부터 그의 친구들과 푸무(fumo)라는 축구팀을 만들고 거기에서부터 이미 공격수로 뛰었었다.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다른 아이들의 팀과 다르게 푸무는 더욱 특출났고, 그 덕분에 경기도 뛰면서 약간의 돈도 받았다고 한다[3] 여기에 입단하게 된 배경으로는 그의 삼촌이 이 클럽의 디렉터로 있었기 때문이었다[4] 721, 723, 729 경기 등 기록의 편차가 있지만 700경기는 넘겼다는 것이 정설이고, 그 뒤를 잇는 가린샤가 600여 경기임을 감안한다면, 그리고 웬만한 선수들은 거의 유럽으로 진출하는 요즘 축구계의 양상을 보면 이 기록은 보타포구 팀 내에서 거의 넘사벽 수준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5] 이후 195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브라질의 전성기를 생각한다면 참으로 다행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월드컵에서 뛰었던 주전급 선수 중 다음 1954년 월드컵에 다시 발탁된 선수는 미드필더 바우에르밖에 없을 정도였다[6] 니우통 산투스의 포지션이 수비수임을 생각해보자[7] 이 경기는 흔히 말하는 베른의 난투극으로 월드컵 역사에 남은 난투극 중 하나로 기록이 되었다[8] 여담으로 이것이 월드컵 역사상 수비수가 프리킥 등 데드볼 상황이 아닐 때 넣은 첫 번째 골이다[9] 이것 역시 월드컵 역사상 최초의 0대 0 무득점 경기이다[10] 월드컵 4회 출전 기록은 같은 브라질의 골키퍼 카를로스 호세 카스틸류, 멕시코의 골키퍼 안토니오 카르바할과 동시에 이룬 기록이다. 카스틸류는 1954년 스위스 월드컵을 제외하면 주전으로 나선 대회가 없지만 카르바할은 이후 1966년 월드컵까지 모두 주전으로 출전하여 5대회 연속 출전의 기록을 세운다[11] 보타포구의 홈구장 에스타지우 주앙 아벨랑제 소재[12] 7월에는 수비수 자우마 산투스가, 8월에는 골키퍼 지우마르와 니우통 지 소르지가 같은 날에 사망하였다[13] 펠레는 그의 자서전에서 니우통 산투스가 1958년 월드컵 당시 브라질 대표팀 멤버 중 최고의 체력을 지녔다고 언급했다. 놀랍게도 이 당시 그의 나이는 33살이었다. 팀 내에서 역시 체력이 좋기로 소문난 발지르 페헤이라와 자우마 산투스보다 그가 더 체력이 좋았다는 것에서 그의 위엄을 알 수 있는데 이 당시 둘 다 20대 후반의 신체적 완숙기였다[14] 그의 달리기는 치타와 100m를 10.2초에 뛰었다는 남아공의 럭비 선수 브라이언 하바나를 연상시킨다는 표현이 있다.[15] 리우 지 자네이루 주립 리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