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우제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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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포르투갈의 前 축구 선수.
별명은 흑표범(The Black Panther) 또는 흑진주. 흑표범이란 별명답게 순간적으로 치고 나가는 드리블 속도가 발군이었으며, 동작 또한 부드럽고 탄력 있어 지금 봐도 감탄스럽다. 페널티킥과 프리킥또한 당대 수준급이었으며 글자 그대로 대포알 같은 슈팅이 일품이었다. 발롱도르의 수상자이기도 하며, 2위에도 2번이나 올랐고 5위권내에도 자주 오르는 등 60년대 유럽축구를 지배했던 괴물포워드.
SL 벤피카에서 선수 생활의 대부분을 보내며 벨라 구트만 감독 휘하에서 유러피언컵을 우승을 하는 등 전 유럽에 그 명성을 떨쳤다. 클럽 올타임 탑 스코어러. 포르투갈 국가대표팀에서도 1966 잉글랜드 월드컵 3위 등극을 이끌며 골든슈와 브론즈볼을 수상했다.
2. 유년기
본래 포르투갈령 모잠비크 태생으로, 포르투갈 출신 백인 철도 노동자인 아버지와 흑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다. 찢어지게 가난한 가정으로 그나마 있던 아버지도 파상풍으로 인해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 혼자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고 에우제비우는 길거리 축구를 하던 도중 모잠비크 유소년 클럽에서 축구를 시작했다. 그러던 중 이 곳에 투어를 왔던 브라질의 축구팀 페로비아히아 감독 조세 바우에르의 눈에 우연히 띄었고, 그 재능에 홀딱 반한 바우에르는 에우제비우를 브라질로 데려가고 싶어 했으나 팀은 이에 퇴짜를 놓았다. 재능이 묻히고 있는 것을 안타까워 한 바우에르는 에우제비우와 포르투갈의 강호인 SL 벤피카 사이에 다리를 놓아줬다. 당시 벤피카의 감독은 헝가리 출신의 명장 벨라 구트만였는데 구트만은 벤피카로 부임하기 이전 브라질 상파울루 FC의 감독을 맡은 전적이 있고 그 때 바우에르는 상파울루 소속 선수로 구트만의 지도를 받은 적이 있었다.
리스본의 한 미용실에서 우연히 옆 자리에 앉은 구트만에게 바우에르는 에우제비우라는 보석을 추천해주었고 벨러는 곧바로 모잠비크로 향해 에우제비우의 실력을 확인한 후 그 역시도 에우제비우에 반해 팀에 에우제비우를 영입할 것을 적극 추천하였다.[3] 그리하여 에우제비우는 벤피카 소속 선수가 되었다. 한편 에우제비우가 벤피카에 입단하는 과정에서 에우제비우가 소속되어 있던 모잠비크의 축구팀이 스포르팅 리스본의 재정적 지원을 받는 팀이었기 때문에 스포르팅 리스본에 에우제비우에 대한 권리를 요구했으나 1년 정도에 걸친 지루한 공방 끝에 에우제비우는 SL 벤피카에 입단한다.[4] 후에 에우제비우는 이에 대해 벤피카에서는 자신의 가족들에게 많은 돈을 안겨주고 자신을 데려간 것에 비해 스포르팅에서는 싼 값에 자신을 2군 선수로 데려가려 했다면서 비화를 밝히기도 했다.
3. 클럽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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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우제비우는 데뷔한지 한시즌만에 31경기에서 29골을 넣는다. 또 SL 벤피카는 에우제비우가 오기 바로 1시즌 전에 레알 마드리드의 유러피언컵 5연패를 저지하며 우승컵을 들었고 에우제비우가 온 시즌에는 디펜딩 챔피언이 되었다.
벤피카는 2연패를 노리며 이번 1961-62 시즌에도 결승에 올랐고 그 상대는 레알 마드리드였다. 레알에는 30대 중반의 페렌츠 푸스카스와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가 있었다. 그둘은 전에 비하면 많이 기량이 떨어졌지만 클래스는 여전했고 푸스카스는 무려 해트트릭을 달성한다. 벤피카도 그에 뒤지지 않고 3골을 넣으며 3대3 긴장이 흐르는 접전을 펼친다. 그러나 이 정적은 에우제비우에 의해 깨진다. 무려 2분만에 2골을 기록한 그는 경기스코어를 5-3으로 만들며 벤피카의 유러피언컵 2연패를 완성한다.
이 때 그의 나이는 겨우 20살이었다. 이 때부터 당시 벤피카 최고의 스타였던 스트라이커, 아구아스를 밀어내며 팀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또 중원을 책임지던 마리우 콜루나, 공격진에 토레스, 시묘에스, 아우구스투와는 환상의 콤비로 벤피카의 황금기를 이끈다. 허나 이는 벤피카의 마지막 유럽대항전 우승이다. 당시 유러피언컵 우승을 이끈 명장 벨라 구트만은 팀과 연봉인상문제로 마찰을 일으키며 떠났고 이에 구트만은 “앞으로 100년 동안 벤피카는 유럽 대회 우승을 차지 하지 못할 것이야.”라는 저주를 퍼부었고 유럽 최고의 팀이었던 벤피카는 당연히 이를 우습게 여겼다.
1962-63 시즌 구트만이 없는 벤피카는 여전히 강력했고 리그 독주는 여전히 달리고 있었다. 이번에도 유러피언컵 3연패에 도전을 했고 에우제비우와 아구아스가 공존하는 벤피카는 어마어마한 퍼포먼스로 유러피언컵 결승에 다시 올랐다. 상대는 지아니 리베라의 AC 밀란이었다. 경기가 시작되고 에우제비오는 보기좋게 선제골을 뽑아내며 기세를 가져오나 알타피니의 두 골로 역전당한다. 아쉽게 준우승. 그러나 다다음시즌인 1964-65시즌에 에우제비우와 호세 토레스의 어마무시한 득점포로 다시 결승에 올랐고 상대는 산드로 마촐라의 인테르였고, 경기는 자이르 다 코스타의 결승골로 인한 1-0으로 벤피카의 패배였다. 그래도 에우제비우는 당당히 발롱도르를 수상한다.
또 1967-68 시즌에 다시 한번 결승에 오르나 보비 찰튼 - 데니스 로 - 조지 베스트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에게 연장전에서만 3골을 먹히며 4-1 패배. 벤피카는 에우제비우가 기록한 3번의 유러피언컵 준우승 후에 5번의 준우승을 더 경험한다. 매번 결승에서 좌절하긴 했지만, 60년대의 벤피카는 유러피언컵 결승에만 무려 5번을 오르는 괴력을 보였고 유럽 변방리그 취급받던 포르투갈리그는 65년 무려 유럽리그 랭킹3위, 벤피카는 UEFA 팀 랭킹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한다.UEFA 년도별 팀,리그랭킹
1972-73 시즌에는 벤피카를 이끌고 리그 40골을 터뜨리며 28승 2무로 무패우승을 달성하였다. 에우제비우는 벤피카에서 활동하는동안 총 7번의 득점왕을 타고 11번의 리그 우승, 5번의 컵대회 우승을 경험했고 15년간의 벤피카 생활을 마치고 1975년 팀을 떠난 뒤 여러팀을 돌아다니다가 1979년 현역 은퇴를 선언한다. 에우제비우가 벤피카에서 남긴 공식기록은 무려 715경기 727골이었다.
4. 국가대표
에우제비우의 첫 월드컵은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이었으며, 사실 포르투갈의 첫 월드컵이기도 하다. 이전까지 포르투갈은 유럽 최약체로 분류되었지만 에우제비우의 등장과 동시에 유럽 월드컵예선을 통과할 전력을 갖춘것. 에우제비우는 전 시즌에 흑인 최초로 발롱도르도 수상하고 폼이 최고로 올라있었다. 당시 포르투갈은 잘나가던 벤피카의 멤버가 대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포르투갈의 조별예선 상대는 불가리아, 헝가리, 디펜딩 챔피언 브라질이었다.
지금이야 불가리아와 헝가리는 유럽축구 약체에 속하지만 60년대의 불가리아는 유럽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인 CSKA 소피아의 멤버들이 대거 포진한 세계랭킹 15위권, 헝가리또한 전성기의 매직 마자르에는 못미치지만 세계랭킹 10위권내에 들었으며 플로리안 알베르트와 페렌츠 베네라는 슈퍼스타들을 앞세운 강팀이었다. 물론 브라질은 말할것도 없었다. 포르투갈또한 에우제비우, 토히스, 콜루나라는 스타들이 있었지만 이전까지 세계대회에서 족적하나 남긴적없던 포르투갈은 월드컵 3조의 약체국으로 분류되었었다. 하지만 포르투갈을 이끄는 에우제비우는 불가리아전에서 득점을 올리고, 펠레가 버티는 브라질에게 2골을 넣으며, 포르투갈은 3전 3승으로 다음 라운드에 진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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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966년 7월 23일 리버풀에서 벌어진 8강전, 에우제비우는 또 한번 축구 역사에 길이 남을 전설적인 시합을 치른다.월드컵에서 돌풍을 일으킨 두 팀이 8강전에서 격돌했다. 바로 포르투갈 VS 북한.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킨 팀들답게, 시합 내용 또한 명승부였다. 포르투갈이 전반 25분 만에 3골을 내주며 이탈리아와 함께 북한의 이변의 희생양이 될 뻔하다가, 에우제비우가 전반전 2골, 후반전 2골 총 4골을 몰아쳐서 4-3으로 역전해 결국 5-3으로 승리한다.[5]
4강 상대는 잉글랜드, 잉글랜드의 바비 찰튼은 당시 최고 전성기를 맞고 있었고 포르투갈은 2골이나 먹힌다. 에우제비우가 후반에 페널티 킥 만회골을 넣지만 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그래도 3·4위전에서도 전설적인 골키퍼 레프 야신의 소련을 상대로 2-1로 승리하며 팀의 3위를 이끈다. 첫 월드컵에서 3위라는 호성적을 낸것이다. 게다가 에우제비우의 활약은 그야말로 혼자서 팀을 이끌다시피했고 전세계가 에우제비우의 활약에 찬사를 보냈다. 에우제비우는 9골을 넣으며 골든슈와 브론즈볼 그리고 올스타팀에 선정되었고 해당년도 발롱도르 2위에 오른다. 1위는 월드컵 우승을 이끈 바비 찰튼...그마저도 찰튼과 고작 1포인트 차이로 2위였으니 에우제비우의 무시무시한 활약을 가늠할수있다. 1966 발롱도르 포인트
5. 플레이 스타일
폭발적인 주력과 순발력에 당대최고의 드리블링에 반 박자 빠른 슛 능력까지 겸비한 스트라이커로 현역 시절 펠레와 비교되던 기량을 보여주었다. 빠른 스피드를 가졌던 에우제비우는 무려 100m를 11초만에 돌파하는 파괴적인 주력을 가지고 있어 뛰어난 돌파 능력 또 라인 브레이킹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당연하게도 몸도 굉장히 탄탄해서 몸싸움에 밀리는 광경을 보기 힘들정도였고 [6] 볼 컨트롤, 드리블도 발군이어서 상대 수비가 뭉친 지역도 기가 막히게 흔들어 놓았다. 킥 능력이 좋아서 대포같은 중거리 슛도 아주 잘 찼다. 무려 40m거리에서 프리킥골을 넣은적도 있으며 슈팅파워또한 축구역사상 최고수준이었다. 위에서 말한 유로피언컵 2분만에 2골을 보면 그의 플레이를 아주 잘 알수있다. 첫번째는 하프라인부터 측면에서부터 수비를 다 제치고 돌파한뒤 만든 페널티 킥이고 두번째골은 드리블로 수비 몇명을 벗겨낸뒤 대포알같은 슛팅을 했다. 그런식으로 득점하는 루트가 잦았으며, 무려 벤피카에서만 700골을 넘게 넣고 축구 역사상 득점순위 9위에도 올라있는 엄청난 골잡이였다.https://www.uefa.com/insideuefa/about-uefa/news/0211-0f8a35876e14-1dd0d4511a73-1000--eusebio-da-silva-ferreira-1942-2014/
이런 모습을 보면 페널티 박스 안에서 볼만을 기다릴것같은 최전방 스트라이커같지만 그는 따지고 보면 인사이드 포워드였으며, 소속팀 벤피카에서나 대표팀에서나 타겟맨 역할을 맡아줄 주제 아우구스투 토히스라는 월드 클래스의 스트라이커가 있었기 때문에 자신은 하프라인 근처까지 내려오며 팀원들을 이용한 연계나 2:1 패스 그리고 직접 볼을 뿌려 기회창출하는 플레이메이킹 같은 부분에서도 굉장히 탁월한 모습을 보여줬다. 경기장 공격지역 전체를 이용하는 활동 범위가 워낙 넓은것도 한 몫 했다고 한다.
6. 기록
6.1. 대회 기록
- SL 벤피카
- 프리메이라 리가: 1960-61, 1962-63, 1963-64, 1964-65, 1966-67, 1967-68, 1968-69, 1970-71, 1971-72, 1972-73, 1974-75
- 타사 드 포르투갈: 1961-62, 1963-64, 1968-69, 1969-70, 1971-72
- Taça de Honra: 1962--63, 1964-65, 1966-67, 1967-68, 1968-69, 1971-72, 1972-73, 1973-74, 1974-75
- Taça Ribeiro dos Reis: 1963-64, 1965-66, 1970-71
- 유러피언컵: 1961-62 [7]
- 토론토 메트로스-크로아티아
- 북미 축구 리그: 1976
- 포르투갈 축구 국가대표팀
- FIFA 월드컵 3위: 1966
6.2. 개인 수상
- 발롱도르: 1965
- FIFA 월드컵 골든슈: 1966
- FIFA 월드컵 브론즈볼: 1966
- FIFA 월드컵 올스타팀: 1966
- 유러피언컵 득점왕: 1964-65, 1965-66, 1967-68
- 유러피언 골든부츠: 1967-68, 1972-73
- 볼라 지 프라타: 1964, 1965, 1966, 1967, 1968, 1970, 1973
- FIFA XI: 1963, 1967
- 포르투갈 올해의 축구 선수: 1970, 1973
- 포르투갈 골든볼: 1991
- 월드 사커 올해의 팀: 1965
- FIFA 100: 2004
- FIFA 20세기 유럽팀: 1998
- BBC 올해의 운동 선수: 1966
- PFA 메리트 상: 1993
- FIFA 공로 훈장: 1994
- UEFA 주빌리 어워드: 2003
- UEFA 회장상: 2009
- IFFHS 레전드: 2016
- 골든풋: 2003
7. 은퇴 이후
은퇴 후에도 축구 홍보대사로 활동했으며,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는 해설자로도 활동했다. 덧붙여 이로부터 18년 뒤인 2010 FIFA 월드컵 당시 북한과 포르투갈의 조별 리그 G조 경기 중 경기 때 직접 관전하러 온 것이 알려져 화제가 되었다. 그리고 북한을 7:0으로 관광태우는 것을 보며 박수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8. 사망
2014년 1월 5일(한국시간 기준), 7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사인은 심장마비. 포르투갈 정부는 이날 고인을 기리는 뜻에서 조기를 내걸고 나흘간을 '국가 애도의 날'로 선포했다. 이날 포르투갈 어디나 조기가 걸리지 않은 것을 찾기 힘들었다.
위에서 언급한 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에서는 조별 예선에서 펠레의 브라질을 만났는데, 펠레에게는 흑역사 월드컵이었지만[8] 경기장에서 둘의 만남은 꽤나 인상적이었는지 짧은 만남 동안 친분을 쌓은 듯하다. 이후 그들은 선수 말년에 미국리그에서 만나 친구가 되었다고하며, 에우제비우의 사망이 알려지자 펠레는 '''"에우제비우는 내 형제 같은 사람이었다. 신께서 그를 보살펴 주시길..."'''이라며 평소의 펠레답지 않은 트윗을 올리고 에우제비우의 명복을 빌었다.
9. 에우제비우에 대한 말, 말,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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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선수 에우제비우와 맞붙은 경험은 특권이었다.'''
'''바비 찰튼'''
'''에우제비우와 비교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는 내게 왕과 같은 사람이다.'''
'''루이스 피구'''
'''에우제비우는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이다. 우리 세대보다 이전 세대에겐 특히 더 그랬다. 피부색과 클럽, 정치적인 면을 떠나 포르투갈에서 그는 그 자체로 특별한 의미를 지닌 인물이었다.'''
'''주제 무리뉴'''
'''과거에 디 스테파노와 에우제비우가 있었듯 지금 시대에 가장 뛰어난 선수는 호날두와 메시다.'''
'''알렉스 퍼거슨'''
'''에우제비우는 현역 시절 포르투갈 축구 그 자체일 정도로 대단한 선수였다. 몇 년 전 세상을 떠난 것은 아직도 안타깝다. 그와 국가대표팀에서 같이 뛰었으면 어땠을까 하고 자주 생각한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10. 여담
- 1970년 9월 3일, SL 벤피카 팀이 내한해 친선 시합을 가진 일이 있기 때문에, 한국 축구 팬들에게도 무척 친숙한 선수다. 그때 골 지점으로 부터 40m 가까이 되는 거리에서 강력슛을 날려 골을 넣어 당시 관객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다. 여담으로 옛날엔 영어식으로 철자를 읽어서 '유세비오'라 불렀기 때문에, 이 선수를 어떻게 부르느냐에 따라 축구 팬 세대 구분을 할 수도 있다.[9]
- 골닷컴에서 시대별 최고의 공격수 5인을 선정했는데, 1960년대 공격수들 중 2위에 이름을 올렸다.
- 강부자가 경기중에 골대 옆에서 에우제비우가 오줌싸는걸 직접 본 적이 있다고 한다.
[1] 외래어 표기법상 영어를 제외한 로망스어와 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나 관사는, 발음의 변화를 반영하지 않은 채 뒤 요소와 붙여 적는다.[2] A매치 득점은 1973년까지 41골을 달성했는데, 이는 2005년 파울레타가 깰 때까지 32년 동안 깨지지 않았다. 현재 포르투갈 축구 국가대표팀의 A매치 최다 골 기록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갖고 있다.[3] 에우제비우가 포르투갈 소속으로 월드컵을 뛰었지만 그가 포르투갈의 식민지인 모잠비크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아프리카 축구계는 에우제비우를 아프리카 역사상 최초로 유럽에 족적을 남긴 축구선수라고 주장한다.[4] 이 때 벤피카가 에우제비우를 지키기 위해 벌인 행각은 한 편의 첩보전을 연상케 하는데 리스본에 오자마자 에우제비우는 알가르브 주 라구스의 한 호텔로 보내졌고 그 후 2주간 호텔 안에 갇혀 살다시피 하였다. 벤피카는 에우제비우의 신분 노출을 막기 위해 루트 말루수(Ruth Malosso)라는 가명까지 지어주었다. 이 때 에우제비우는 고향인 모잠비크로 돌아갈까도 생각하였지만 어머니의 설득으로 그만두었다고.[5] 에우제비우의 골에 맞춰 북한 아나운서가 "유세비오의 골입니다, 유세비오가 넣었습니다, 또 유세비오, 아, 또 유세비오..." 이런 식으로 비통하게 탄식했다고 한다.[6] 하지만 악질적인 태클로인한 몇번의 무릎부상이후 선수 후반기에는 적극적인 몸싸움을 피하는 모습을 보인다. 게다가 순간적인 가속도로 수비수들을 제치는데 능한 에우제비우의 플레이 특성상 무릎에 걸리는 과부하는 타 선수들에 비해 더 심했으니까... [7] 준우승은 3회 [8] 저 당시 펠레는 불가리아와 포르투갈과의 경기에서 심각한 태클로 부상을 입고 분노해 다시는 월드컵 경기에 나서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물론 피파에서 옐로/레드카드 제도와 선수 교체 제도를 70년 월드컵부터 도입하며 선수들의 안전 관리에 신경쓰기 시작했다.[9] 강부자가 마이 리틀 텔레비전 V2에서 유세비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