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긴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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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주긴완 (周健宏 / Chow Kin Wan)
'''생년월일'''
1990년 6월 19일 (33세)
'''국적'''
[image] 홍콩[image] 대한민국
'''출신지'''
서울특별시 양천구 목동[1]
'''출신학교'''
명지대학교
'''포지션'''
슈팅 가드, 스몰 포워드
'''신체사이즈'''
192cm, 93kg
'''프로 입단'''
2016 KBL 국내신인선수 드래프트 4라운드 10순위
울산 모비스 지명
'''역대 소속팀'''[2]
울산 모비스/현대모비스 피버스 (2016~2017.11)
전주 KCC 이지스 (2017.11~2018)
원주 DB 프로미 (2018~2019)
'''등번호'''
28(현대모비스, KCC), 0(DB)
'''SNS'''

1. 개요
2. 생애
3. 은퇴
4. 국가대표
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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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홍콩에서 대한민국으로 국적을 귀화한 前 농구선수였으며 홍콩명은 초우긴완이다. 한때 홍콩의 농구 스타로서 자리를 잡았으나 한국 프로 무대에서는 1군 무대에 단 1경기도 출전하지 못하고, 큰 부상으로 인하여 짧은 커리어로 선수 생활을 마감하였다.

2. 생애


홍콩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의 사업 때문에 홍콩으로 건너가 어린 시절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냈다. 잉와 컬리지[3] 시절에는 학업과 농구에 병행하며 2008-09시즌 디오세샨 컬리지와의 결승전에서 14분을 소화해 60-45로 격파하는 데에도 도움을 주었고, 그와 동시에 엘리트 베스트 대상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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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2009-10시즌, 온칭 농구단(安青)에서 프로로 데뷔해 뛰어난 경기를 펼치며 리그 3위를 기록하였고, 1년 뒤인 2010-11시즌에는 난화 농구단(南華)에서 9분을 소화해 팀의 승리를 이끄는 등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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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이키 주최로 개최된 일대일 길거리 농구대회에 참가해 NBA의 레전드였던 코비 브라이언트의 지목을 받고 배운 뒤, 성인 홍콩 국가 대표팀에서 활약할 정도로 빨리 성장하며 유망주로 꼽혔다. 그러나 2011년 동아시아 대회 준비를 앞두고 있었을 때 어머니의 전화로부터 외할머니가 대장암으로 별세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으며 결국엔 국가대표팀마저 은퇴해 버렸지만, 국제대회에서 친분을 쌓았던 전직 국가대표 이승준의 도움을 받아 한국과 연이 닿았고 2012년, 명지대학교에 입학하였다. 빅맨 급의 신장은 아니었으나 소속 대학의 전력상 센터를 맡아 팀의 주축으로 활약했다. 대학 입학을 기점으로 본래 추구하던 개인기 위주의 농구 대신 팀플레이 위주의 농구를 익히게 된다. 18세(한국 나이 19세)에 농구를 접한 주긴완은 구력이 짧은 데다 엘리트 체육을 경험하지 않았음으로 적응에 어려움이 있었고, 한국식 농구는 물론이고 합숙 등의 한국의 체육 문화에 생소함을 느꼈지만, 팀에 도움이 되는 선수가 되고 싶다는 마음으로 처음부터 하나씩 배워가며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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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3학년이었던 2015년에 얼리 엔트리로 드래프트에 신청했지만 본인의 이름은 불리지 못하고 떨어져 버렸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2016년 신인 드래프트에 도전한 끝에 유재학 감독의 부름으로 가장 마지막에 4라운드 10순위로 울산 현대모비스에 지명되었는데, 그 감격에 겨운 나머지 눈물을 펑펑 쏟아내면서 눈길을 모은 장면이 홍콩에서도 화제가 되었다. 드래프트에서 보여진 모습과 선수 개인의 특이 이력으로 인해 농구팬들의 많은 격려와 응원을 받았다. 일례로 선발된 당해, 모비스 신규 선수들이 구장을 찾아 인사와 소감을 나누었을 때, 1라운드 1순위로 지명된 이종현보다 주긴완에게 쏟아진 함성과 박수가 컸다. 유재학 감독은 물론 구장을 찾은 기자들 조차 인지할 정도였는데 이후 한 기자가 이날에 대해 묻자 주긴완은, 자신이 아니라 감독 및 코칭스태프에게 쏟아진 것이었다며 겸손하게 답한다.

3. 은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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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KBL에서의 프로 데뷔는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2016-2017 시즌에는 1군에서 모든 기회를 얻지 못했고, 2017-2018 시즌에도 거의 나오질 않자 도중인 11월김진용과 묶여 전주 KCC 이지스박경상과 2:1로 트레이드되었는데, 이마저도 1군에서 많은 기회를 얻지 못하고 D리그에서 고작 2경기만 뛴 것이 전부였다. 또 보수 총액 3천 5백만원에 1년 계약으로 원주 DB 프로미로 이적했어도 사정은 다르지 않아 1군은커녕 D리그조차 모두 나오지 못해 버렸다. 이상범 감독 역시 주긴완의 목마름을 알고 있었고 절실한 모습을 보인다면 경기에 출장시킬 것이라 하였고 주긴완 본인 역시도 DB에 만족감을 보였으나 연습경기에서 심한 다리 부상을 입는 바람에 오랜 시간 치료에 전념해야 했다. 그런 연유로 결국 한국 프로 농구에 몸담은 3년 동안 '''1군 무대에서 데뷔전 조차도 치뤄보지 못한 채''' 쓸쓸히 은퇴하고 말았다.[4]
현재 홍콩에 체류 중이며, 부득이하게 은퇴를 택했지만 농구에 대한 열정은 여전한 것으로 보인다. 드래프트 이후부터 은퇴 이전까지 여러 감독이 입을 모아 말할만큼 성실하고 절박한 선수였기에, 그의 은퇴 사실은 현재까지도 농구팬들의 아쉬움을 자아낸다.

4. 국가대표


청소년 국가 대표팀에 선출된 적이 있으며 2009 동아시아 농구 선수권 대회와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에도 출전했다. 그리고 2011년 1월 22일 마카오에서 개최된 농구 친선경기에서 12분을 소화해 90-59로 대승을 거두었다.

5. 관련 문서


[1] 다만 태어난 지 '''3개월만에''' 홍콩으로 이주하였다. 참조[2] KBL 한정[3] 홍콩명 英華書院. 영어명 Ying Wa College. 1818년 11월 11일 영국의 선교사 로버트 모리슨에 의해 창립된 홍콩의 중학교이다.[4] 2019년 5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