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어스 니에레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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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의 국가평의회장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탄자니아의 국부이자 초대 대통령.
독재자였지만 탄자니아에서 존경받는 인물 중 하나로 문맹률을 줄이고, 민족, 지역 통합을 추구하여 탄자니아를 아프리카에서 내전과 쿠데타가 없는 정치적으로 안정된 나라로 만든 것도 있다.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 지역에는 탄자니아나 보츠와나 같은 일부 국가들을 제외하면 민주주의 등 정치 권력의 견제가 제대로 안 이뤄지거나, 국가 기능이 제대로 돌아가지 못하는 등 독재와 쿠데타, 내전, 민족 갈등으로 정정이 불안정한 나라들이 수두룩하다.
탄자니아가 아직 통합되기 전, 그러니까 탕가니카와 잔지바르 술탄국으로 양분되어 있었을 때부터 독립운동에 가담한 사람이다. 그는 1929년 당시 탕가니카 지역으로 영국의 식민지였던 탕가니카에서 아프리카 민족연합(TAA)를 조직하여 탕가니카인들의 권익을 위해 힘썼다. 이후 탕가니카가 독립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해서 1962년에는 탕가니카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탕가니카가 잔지바르와 통합하고 탄자니아가 출범했을 때도 국민들의 그에 대한 지지는 열광적이여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탄자니아 인구의 약 50%가 기독교인이고 약 30%가 이슬람교도인데, 침팬지 연구로 유명한 제인 구달의 책에서도 언급에서는, 1960~70년대 탄자니아에서 연구하던 그녀는 국경 근처를 봐도 이웃 나라들에서 화염이 올라오는 걸 자주 본 반면, 탄자니아에선 그런 일을 한번도 겪지 않았다고 썼다. (난민들이 오면서 벌어지는 치안 문제로 강도를 당한 적은 있지만.) 그녀의 두 번째 남편이자 탄자니아 독립 이후에도 남아서 귀화하여 선거로 국회의원이 된 유일한 백인 데보 브라이슨도 이 나라만큼 주변에서 평화로운 나란 없다고 자랑했단다. 참고로 이 브라이슨이 지지하던 사람이 니에레레. 덕분에 니에레레에게 도움도 많이 받았기에 정치에 대하여 별다른 말을 삼가던 그녀는 탄자니아의 안정 및 침팬지 연구 보호에 니에레레의 도움이 너무 컸다고 매우 칭송했다.
이와 반대로 서방권에서는 부정적인 평가도 많은데, 이유는 민족 통합 과정에서 지방민들에게 스와힐리어 사용을 강제로 권하는 등 문화 탄압적 요소가 많은 정책을 시행하고, 나아가 탄자니아 내 외국 자본 독점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니에레레는 권력에 있는 동안 검소하게 생활했으며, 권력에서 물러난 뒤 고향으로 내려가 조용히 생활하다가 말년에 병으로 쓰러졌을 때는 국가에서 영국으로 병치료를 보낼 정도로 존경을 받았다. 1999년 10월 14일, 니에레레가 런던에서 노환으로 세상을 떠나자, 탄자니아는 이날을 국부기일로 지정하며 그의 사망에 많은 국민들이 슬퍼했다.
참고로 니에레레는 윗 나라인 우간다의 독재자 이디 아민 축출을 위해 탄자니아군을 파병해 우간다를 공격하여 아민의 폭정에 대항하는 우간다 반군 세력들을 지원한 바 있었고, 나중에는 아예 자기가 직접 탄자니아군, 우간다 반군과 함께 우간다 아민 정부군과 싸우기도 했었고 여전히 독립국으로 독립하지 못하고 유럽 강대국의 식민통치를 받고 있었던 아프리카 여러 나라들의 독립 운동을 지원해주기도 했으며 1960년대 말 비아프라 전쟁에서 나이지리아로부터 분리독립을 시도하려던 비아프라도 독립국가로 인정한 바 있었다.
공산주의식 집단농장 체제를 구성하려다 대차게 실패하면서 경제를 크게 말아먹은 전적이 있다. 니에레레는 정책의 실패를 인정하고 시장경제 중심 체제로 방향을 선회하면서 퇴임 직전 제2대 대통령이 된 알리 하산 음위니에게 다른건 몰라도 경제 정책만은 잘 이끌어달라고 조언했을 정도였다.
1964~1985년까지 21년이란 그의 집권 기간도 비판의 대상으로, 독재자라 불리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인물이였다. 1965년 선거에서 니에레레는 96% 득표로 당선되었고 의회도 여당이 전석을 차지했으며, 니에레레가 물러난 뒤에도 집권 여당인 탄자니아 혁명당(CCM)의 일당 독재 체제는 1995년 선거 이전까지 계속되었다. 일당제가 폐지되고 다당제로 바뀐 이후에도 탄자니아는 1955년에서 1993년까지 자민당 절대 우위를 차지했던 제2차 세계 대전 전후의 일본이나[3] 1980년대에서 2000년대까지 범그리스 사회주의 운동당이 장기간 여당으로 지배했던 그리스,[4] 프랑스 식민지배에서 독립 이래 국민해방전선(FLN)이 장기 집권하고 있는 아프리카 북쪽 동네의 먼나라 알제리처럼 일당 독주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사실 깔 만한 점은 꽤 많은 편이지만 주변국 지도자들이 모두 파탄적이어서 그 반대급부로 대부분 묻힌 것이다. #
자국에서의 인지도는 굉장해서 오늘날에도 그의 이름을 딴 탄자니아의 국제공항과 문화 센터가 존재하고 있다. 또한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인 기니는 탄자니아와의 관계가 매우 우호적이라서 코나크리에는 줄리어스 니에레레 대학도 존재할 정도이다.
하츠 오브 아이언 시리즈의 모드 Wind Blow에서 케냐, 탄자니아, 우간다에서부터 (플레이하기에 따라) 마다가스카르, 잠비아, 로디지아(짐바브웨), 모잠비크까지 아우르는 '''동아프리카공화국'''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아프리카의 국경선은 워낙 이상하기 때문에 신성불가침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쿠바의 국가평의회장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1. 개요
탄자니아의 국부이자 초대 대통령.
2. 상세
독재자였지만 탄자니아에서 존경받는 인물 중 하나로 문맹률을 줄이고, 민족, 지역 통합을 추구하여 탄자니아를 아프리카에서 내전과 쿠데타가 없는 정치적으로 안정된 나라로 만든 것도 있다.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 지역에는 탄자니아나 보츠와나 같은 일부 국가들을 제외하면 민주주의 등 정치 권력의 견제가 제대로 안 이뤄지거나, 국가 기능이 제대로 돌아가지 못하는 등 독재와 쿠데타, 내전, 민족 갈등으로 정정이 불안정한 나라들이 수두룩하다.
탄자니아가 아직 통합되기 전, 그러니까 탕가니카와 잔지바르 술탄국으로 양분되어 있었을 때부터 독립운동에 가담한 사람이다. 그는 1929년 당시 탕가니카 지역으로 영국의 식민지였던 탕가니카에서 아프리카 민족연합(TAA)를 조직하여 탕가니카인들의 권익을 위해 힘썼다. 이후 탕가니카가 독립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해서 1962년에는 탕가니카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탕가니카가 잔지바르와 통합하고 탄자니아가 출범했을 때도 국민들의 그에 대한 지지는 열광적이여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탄자니아 인구의 약 50%가 기독교인이고 약 30%가 이슬람교도인데, 침팬지 연구로 유명한 제인 구달의 책에서도 언급에서는, 1960~70년대 탄자니아에서 연구하던 그녀는 국경 근처를 봐도 이웃 나라들에서 화염이 올라오는 걸 자주 본 반면, 탄자니아에선 그런 일을 한번도 겪지 않았다고 썼다. (난민들이 오면서 벌어지는 치안 문제로 강도를 당한 적은 있지만.) 그녀의 두 번째 남편이자 탄자니아 독립 이후에도 남아서 귀화하여 선거로 국회의원이 된 유일한 백인 데보 브라이슨도 이 나라만큼 주변에서 평화로운 나란 없다고 자랑했단다. 참고로 이 브라이슨이 지지하던 사람이 니에레레. 덕분에 니에레레에게 도움도 많이 받았기에 정치에 대하여 별다른 말을 삼가던 그녀는 탄자니아의 안정 및 침팬지 연구 보호에 니에레레의 도움이 너무 컸다고 매우 칭송했다.
이와 반대로 서방권에서는 부정적인 평가도 많은데, 이유는 민족 통합 과정에서 지방민들에게 스와힐리어 사용을 강제로 권하는 등 문화 탄압적 요소가 많은 정책을 시행하고, 나아가 탄자니아 내 외국 자본 독점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니에레레는 권력에 있는 동안 검소하게 생활했으며, 권력에서 물러난 뒤 고향으로 내려가 조용히 생활하다가 말년에 병으로 쓰러졌을 때는 국가에서 영국으로 병치료를 보낼 정도로 존경을 받았다. 1999년 10월 14일, 니에레레가 런던에서 노환으로 세상을 떠나자, 탄자니아는 이날을 국부기일로 지정하며 그의 사망에 많은 국민들이 슬퍼했다.
참고로 니에레레는 윗 나라인 우간다의 독재자 이디 아민 축출을 위해 탄자니아군을 파병해 우간다를 공격하여 아민의 폭정에 대항하는 우간다 반군 세력들을 지원한 바 있었고, 나중에는 아예 자기가 직접 탄자니아군, 우간다 반군과 함께 우간다 아민 정부군과 싸우기도 했었고 여전히 독립국으로 독립하지 못하고 유럽 강대국의 식민통치를 받고 있었던 아프리카 여러 나라들의 독립 운동을 지원해주기도 했으며 1960년대 말 비아프라 전쟁에서 나이지리아로부터 분리독립을 시도하려던 비아프라도 독립국가로 인정한 바 있었다.
3. 비판
공산주의식 집단농장 체제를 구성하려다 대차게 실패하면서 경제를 크게 말아먹은 전적이 있다. 니에레레는 정책의 실패를 인정하고 시장경제 중심 체제로 방향을 선회하면서 퇴임 직전 제2대 대통령이 된 알리 하산 음위니에게 다른건 몰라도 경제 정책만은 잘 이끌어달라고 조언했을 정도였다.
1964~1985년까지 21년이란 그의 집권 기간도 비판의 대상으로, 독재자라 불리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인물이였다. 1965년 선거에서 니에레레는 96% 득표로 당선되었고 의회도 여당이 전석을 차지했으며, 니에레레가 물러난 뒤에도 집권 여당인 탄자니아 혁명당(CCM)의 일당 독재 체제는 1995년 선거 이전까지 계속되었다. 일당제가 폐지되고 다당제로 바뀐 이후에도 탄자니아는 1955년에서 1993년까지 자민당 절대 우위를 차지했던 제2차 세계 대전 전후의 일본이나[3] 1980년대에서 2000년대까지 범그리스 사회주의 운동당이 장기간 여당으로 지배했던 그리스,[4] 프랑스 식민지배에서 독립 이래 국민해방전선(FLN)이 장기 집권하고 있는 아프리카 북쪽 동네의 먼나라 알제리처럼 일당 독주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사실 깔 만한 점은 꽤 많은 편이지만 주변국 지도자들이 모두 파탄적이어서 그 반대급부로 대부분 묻힌 것이다. #
4. 기타
자국에서의 인지도는 굉장해서 오늘날에도 그의 이름을 딴 탄자니아의 국제공항과 문화 센터가 존재하고 있다. 또한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인 기니는 탄자니아와의 관계가 매우 우호적이라서 코나크리에는 줄리어스 니에레레 대학도 존재할 정도이다.
하츠 오브 아이언 시리즈의 모드 Wind Blow에서 케냐, 탄자니아, 우간다에서부터 (플레이하기에 따라) 마다가스카르, 잠비아, 로디지아(짐바브웨), 모잠비크까지 아우르는 '''동아프리카공화국'''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아프리카의 국경선은 워낙 이상하기 때문에 신성불가침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5. 관련 문서
[1] 스와힐리어로 선생님이라는 뜻.[2] Tanganyika African National Union, TANU.[3] 물론 비자민당계 정당들이 권력을 잃으면서 다시 재집권하기는 했다.[4] 결국 여기는 잘못된 경제/복지 정책으로 말미암아 수년 뒤인 2010년대 그리스 재정 위기를 불러와 나라 말아먹은 정당으로 민심마져 잃고, 국회 의석조차 없는 원외 정당으로 몰락했다. 다만 그리스는 2000년대 초 범그리스 사회주의 운동당 이후에 집권한 신민주당도 통계 조작으로 무리하게 유로화를 채택하고, 2004년 아테네 올림픽 개최로 더욱 막대한 부채들이 늘어나는 등, 안 그래도 취약했던 국가 재정이 버티지 못하면서 재정 위기가 발생한 원인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