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디 아민

 


[image]
'''전체 이름'''
'''Idi Amin Dada Oumee
(이디 아민 다다 오우메)'''
'''출생'''
1925년[1]
[image] 영국령 우간다 코보코
'''사망'''
2003년 8월 16일 (78세)
[image]사우디아라비아 제다
'''국적'''
[image] 영국령 우간다(1925~1962)→[image] 우간다 (1962~2003)
'''신체'''
193cm
'''임기'''
1971년 1월 25일 ~ 1979년 4월 13일
'''종교'''
이슬람
1. 개요
2. 생애
2.1. 유년기
2.2. 집권 이전
2.3. 집권 이후
2.5. 몰락과 최후
3. 일화
3.1. 인간백정
3.2. 식인 행위?
3.3. 기행
4. 각종 매체에서
5. 그 외


1. 개요


국가의 적들을 처치하는 방법은 복싱에서 상대K.O시키듯이 하는 것 뿐이다. 수단은 상관없다.

아프리카 중부 내륙국 우간다의 3, 4대 대통령이자 쿠데타 독재자다. 숱한 고금의 오만 독재자들 중에서도 잔혹함과 엽기스러움에서 가히 그 짝을 찾기 힘든 자이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70년대 ~ 80년대 내내 전세계 신문에 오르내렸을 정도다. '''검은 아돌프 히틀러'''라는 멸칭까지 있을 정도로 아주 잔혹한 독재자였다.

2. 생애



2.1. 유년기


우간다 북서부의 서나일 아루아에서 소부족 카크 출신으로, 농부이자 족장인 아버지와 악령의 힘을 빌려 사람들을 치료하는 주술사 어머니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지극히 가난했고 어린 시절부터 일을 해야 했다. 공식 교육은 거의 받지 못한 사실상 문맹이었다. 193cm의 거구로 권투 챔피언을 지낸 적이 있으며[2], 럭비 선수를 하기도 했다.

2.2. 집권 이전


1946년, 영국 육군의 식민지군 부대인 '킹스 아프리칸 라이플스'의 제4부대에 입대하였다. 이디 아민은 강제로 영국군에 끌려갔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디 아민은 자신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버마 전투에 참가했다고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이디 아민 본인의 말일 뿐 참전 기록은 어디에도 하나도 없다. '''애초에 2차 대전에 참전했다고 하면서 입대 년도가 1946년이라는 건 전혀 말이 되지 않는다.'''[3]
그리고 1953년부터 1959년까지 케냐에서 영국 육군으로서 반영 민족운동 비밀결사 진압에 참여했고 1961년에는 육군 중위로 승진하였다. 1962년 우간다 독립 이후, 1964년 육군 대령이 된 이디 아민은 1966년총리 밀턴 오보테를 도와 대통령 무테사 2세를 축출하는 데 동참한다. 쿠데타가 일어난 우간다에는 좌파정권이 들어섰고 1967년 아민은 군 통수권자가 되었으나 콩고 반란군 원조 문제에 연루되어 좌천당했다.
1971년 1월 25일, 오보테가 싱가포르에서 열린 국제 회의에 참여하고 있는 동안, 아민은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한참 냉전 시절이라 서구 국가들은 우간다의 좌파 정권을 무너뜨린 이 쿠데타를 환영했다. 영국과 이스라엘은 아민 정권을 바로 인정했다.

2.3. 집권 이후


그러나 쿠데타 며칠 후 우간다의 지식인, 장교, 법관들이 마구 사라지기 시작했다. 대대적인 숙청이 시작된 것이다. 대상은 주로 오보테를 지지했던 세력들이었다. 약 3,000여 명의 정치인과 군인들이 살해당했고, 오보테를 지지하던 마을들은 폐허가 되었으며 주민들은 학살당했다. 이후 아민은 아프리카의 잔인한 폭군으로 이름을 날리며 국제사회의 비난의 표적이 되었다. 아민이 권좌에 있던 8년간 무려 30~50만에 이르는 우간다 국민들이 희생당했다고 인권단체는 추정하고 있다.
아민은 권력의 위임 없이 극단적인 민족주의를 가장한 사실상 자신의 변덕에 맞춰서 국가를 통치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대 이스라엘 관계. 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이스라엘과 우간다는 사이가 좋았다. 이스라엘을 우간다에 건국하려던 계획까지 있었던 만큼 실제로 우간다에서 과거 영국 식민지 시절 유대인들도 제법 살던 적도 있었고 아랍 국가들에 둘러싸인 이스라엘은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인 외교전을 치렀고 그 과정에서 우간다는 군사적, 경제적으로 많은 지원을 해주었다. 이디 아민은 반유대정권을 취한 후에도 자신이 골다 메이어, 모세 다얀과 각별한 사이라고 주장했고 모세 다얀이 자신을 아들처럼 대했다고 떠벌렸다. 그나마 이것도 어디까지나 아민의 주장이다. 아민이 찍은 다큐멘터리를 보면 골다 메이어와 사진을 찍으며 희희낙락하는 아민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갑자기 70년대 이디 아민은 자신이 무슬림임을 선언했고 대 이스라엘 관계는 하루아침에 뒤집어졌다. 이제 아민은 이스라엘의 적임을 자처했으며 나치유대인 학살을 미화하고 유대인들을 추방했다. 1972년에는 아프리카화 캠페인의 일환으로 아시아인, 특히 인도인들을 내쫓았다. 이들이 유대인과 더불어 영국 식민지 시절에 노동자로 와서 우간다 경제를 좌우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외국인 소유의 기업들을 국영화했다. 이 때문에 우간다는 경제가 파탄났다.
이러한 행적에도 불구하고, 당시 아프리카의 국가 대부분은 우간다처럼 독재 정권의 지배 하에 있었기에 다른 독재자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결국 아민은 주변 정권의 지지 덕에 1975년에는 OAU(Organization of African Unity)의 의장으로 선출되었고 1976년에는 자신을 종신 대통령으로 선언했다. 확고한 기반을 다진 아민은 극단적인 종족주의를 내세워 아콜리, 랑고 등 다른 부족들을 박해했다. 때문에 이슬람 교도라도 이들 부족들은 이디 아민을 매우 증오하게 되었으며, 아민이 축출되자 부족간 내전, 학살이 벌어질 지경이 되었다.
미국소련은 딱히 반응을 보이지 않았는데, 당시는 냉전이 한창 진행되던 중이라 자기 편이기만 하면 독재를 하든, 학살을 저지르든 딱히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2.4. 엔테베 작전


또한 1976년 팔레스타인과 독일 테러리스트들이 에어 프랑스 여객기를 엔테베로 납치하는 데 관여했다. 이스라엘 본토에서 2,000km이나 떨어진 이곳까지 이스라엘인들이 올 리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악과 깡''' 그리고 미국을 통한 경제적 원조를 비롯해 여러모로 엄청나게 앞섰던 이스라엘 정부는 '''한밤중에 C-130 수송기에 나눠타고 엔테베 공항을 습격'''한다는 전무후무한 대담한 작전을 계획 실행했다.
자세한 내용은 엔테베 작전 문서에 나와 있다.
이때 사망한 인질의 유족들이 아민이 몰락한후 이디 아민의 목에 거액을 걸었지만, 사우디아라비아 궁전에서 대우받는 아민을 죽이는 게 사실상 매우 어려운 데다가 설사 성공하더라도 범죄자가 되므로 죽이는 건 불가능했다. 결국 아민이 천수를 누리고 죽자, 그에게 당한 희생자의 유족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그 자를 죽이지 못해서''' 원통해했다고 한다.
다만, 의외로 이스라엘에 개인적으로 친했던 지인이 몇 있었던 덕인지, 아민은 우간다 공군 헌병들과 공항에 주기됐던 MiG-17 전투기들을 잃은 것에 대한 보복으로 병원에 입원시킨 할머니 인질 1명을 살해한것 외엔 딱히 이스라엘에 크게 보복을 계획하거나 항의하진 않았다.

2.5. 몰락과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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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한 달 전인 2003년 7월 6일 당시의 모습
결국 정권 말기에 들어서면서 우간다 내부에서도 아민 정권에 대한 불만이 고조됐고, 1978년 군 내부의 반역 음모를 무마할 겸 국내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이디 아민은 탄자니아 침공을 명령했다. 그러나 1979년 4월 11일 되려 탄자니아군과 우간다 국민해방전선의 반격에 수도가 점령당하여 아민은 리비아로 도망쳤다. 하지만 반이스라엘적으로 뜻이 맞던 카다피도 그를 환영하지 않았기에 리비아에서는 나와야 했다. 나중에는 이라크로 향했지만 거기에서도 사담 후세인 당시 이라크 대통령에게도 홀대받아 결국은 이라크를 떠나 사우디아라비아를 마지막 망명지로 택하고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사우디 정부가 내준 집에서 살았다. 그곳에서 아민은 조용히 지내다가 고혈압과 신경마비로 인한 혼수상태에 빠져 있다가 2003년 8월 16일, 숨을 거두었다.
물론 천수를 누리다 죽은 셈이라지만, 사우디아라비아의 이슬람 원리주의 장법 특성 때문인지[4] 아니면 그의 불명예 때문인지 그는 관도 묘비석도 없이 아래 사진의 황량한 맨땅에 묻혔다. 그의 시신이 묻힌 곳이 바로 아래의 사우디아라비아 제다에 있는 루와이스 묘지(Ruwais Cemetery)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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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일화



3.1. 인간백정


통치기간 동안 수많은 사람을 학살했다. 식인을 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물론 아래에도 나와 있지만 이디 아민 자신은 식인 행위에 대해서는 부정했다. 믿느냐 마느냐는 둘째 문제겠지만, 전속 주방장이던 오톤데 오데라(Otonde Odera) 역시 식인에 대하여서는 지금도 부정하고 있다. 자세한 건 밑에 서술. 다만, 오데라도 그가 잔혹한 성격의 막장 폭군에 별별 짓을 저지른 것은 군말없이 사실이라고 증언하고 있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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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한창 미쳐 돌아갔을 때'''의 이디 아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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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디 아민 시절 감옥의 모습이다. 복도에는 전류가 흐르는 물로 가득 차 있어서 탈옥을 시도했다가는 바로 감전사했다. '''이 감옥에서만 무려 20만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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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살형이 집행된 후의 희생자
이디 아민이 집권 중에 저지른 엽기적이고 추악한 행각은 역사상 그 누구와도 비교하기 힘들다. 자국민을 수도 없이 살해하고 탄압한 이디 아민은 기분에 따라 똑같은 죄라도 누구는 재판도 없이 무죄 석방시키고, 누구는 지독한 고통 속에 총살시키거나 쇠망치로 때려 죽이게 하는 처벌을 내렸다. 특히 아민이 직접 고안한 고문들은 정말 악명 높았다. 남자의 경우에는 '''성기를 쇠꼬챙이로 찍거나 잘랐고''', 여자의 경우에는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싶을 정도로 지독한 성고문을 가했다'''.
정적들도 상술한 잔혹한 방법으로 학살했으며, '''시체를 비료로 처리하는가 하면 강의 악어들에게 던져주기도 했다'''. 그래서 아민이 대통령으로 있는 동안 우간다의 악어들은 애써 사냥을 할 필요가 없어서 동물학자들이 경악할 정도로 게을러졌으며, 이후에도 우간다에는 혼란이 계속되면서 악어들은 계속 게으름을 피울 수 있었다. 게다가 이 시기에는 '''악어가 먹고도 썩어 남아돌 정도로''' 시체가 많아서 우간다 - 케냐 지방의 주요 댐인 날루발레 댐 관리요원들의 주 업무 중 하나가 '''상류에서 떠내려와 댐 수로를 막고 있는 시체 치우기'''였다고 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교도소의 죄수들을 빽빽이 못이 박힌 마루 위를 맨발로 걸어가게 했고 밤이 되면 독방에 가두었다. 한 죄수를 묶어놓고 다른 죄수로 하여금 그 머리를 망치로 때려 부수게 하는가 하면 며칠간 굶긴 그들에게 다른 죄수의 시체를 고기로 주기도 했다.''' 후술하겠지만, 80년대 전기 영화에서 아주 실감나게 나온다.
아민에게는 6-7명의 아내가 있었고 40명 정도의 아이들을 두었는데, 아내들 중의 3명은 싫증이 나서 곧바로 이혼했다. 이혼한 아내들 중 하나였던 케이는 이혼할 당시 아민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는데, 이혼한 후에 아민 몰래 낙태를 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민은 불같이 화를 내며 케이는 물론이고 수술을 한 의사까지 죽였고, 그것도 모자라서 '''케이의 시체의 팔다리를 절단해 바꾸어 붙인 뒤 헤어진 아내들에게 보여주었다'''. 이는 아민의 친척들에게도 행한 짓거리이다. 자신의 숙모가 식탁 위에서 이런 상태가 되어있는 참상을 목격한 아민의 가까운 친척은 공포를 느끼고는 그날로 우간다를 탈출했다.
또한 살아있는 사람을 탱크로 뭉개버리거나,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는 등의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기사.
그리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유명한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보복을 한답시고 빅토리아 호수 옆에 '''케이프타운'''이라는 이름의 폭격장을 만든 적이 있다. 아프리카 통일기구(OAU) 수뇌회의(1975.7.28~8.1) 당시 벌어진 일인데 이때 폭격이 실패하자 '''해당 부대 지휘관'''을 그 폭격장에 묶어놓고 재폭격을 실시했다. 이때는 명중했다.

3.2. 식인 행위?


이디 아민은 식인을 했다는 것으로 매우 유명한데, 젊은 여자는 처형 후 성기를 도려내 먹었다거나, 자신의 정적들의 목을 잘라 그 머리를 냉장고에 넣어놓고 그것을 보면서 희희낙락했으며 인육을 먹고 국민들 앞에서 자신이 분석한 인육의 맛을 논하거나 주술에 취해 '''자신의 열 살 난 아들까지 살해해서 아이의 심장을 꺼내 먹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정작 아민 본인은 사우디아라비아 성직자들 앞에서 사람을 죽이기는 했어도 먹지는 않았다고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결국 충실한 이슬람 신도가 아니라고 사우디아라비아의 성직자들은 아민을 추방시키자고 건의했으나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은 이스라엘에 맞섰다는 점 하나로 편의를 봐주었고, 무엇보다 식인 혐의에 대한 증거는 결국 나오지를 않았다.
아민은 죽을 때까지 식인 여부에 대하여 강력하게 부정했지만, 본인의 증언이니 신빙성이 크게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이디 아민의 식인 행위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또 다른 증인이 있는데, 바로 1971 ~ 1978년까지 이디 아민의 전속 주방장이던 오톤데 오데라이다. Teufelskoche라는 책자(한국어 번역판 제목 <날 것의 인생 매혹의 요리사>)에서 나오길, 오톤데 오데라는 케냐에서 태어나 우간다로 가 영국인 성공회 목사에게 조리를 배워 우간다 호텔 주방일을 하면서 경험을 쌓았는데, 우간다 독립 이후로 케냐인 추방에 휘말려 고생하다가 반란을 일으키던 이디 아민 군대 주방일을 돕게되면서 이 인연으로 아민의 전속 주방장이 되었다. 오데라의 증언에 의하면 아민은 대식가에 온갖 산해진미를 즐기면서 잔학한 기행을 하던 인간이지만, 식인에 대해선 극도로 부정하고 있으며, 나아가 식인을 하느냐 내가 사람고기를 준비했다느니 온갖 모욕적인 소문이 있다고 분노했다고 한다. 그는 주방장으로 일하던 7년 동안 아민의 식인에 대해서는 강력히 부정하였다.
오데라는 주방장으로 일하면서 아민에게 엄청난 월급이나 보너스, 벤츠 차량, 으리으리한 집같은 후한 대가를 받고 아내도 여럿 두며 잘 살았지만, 이런 막대한 대가를 받는 대신 문자 그대로 '''목숨 걸고 일해야 했다고''' 한다. 그 예시로 하루는 오데라가 주방에 있는데 무장 친위대원들이 총기를 들고 주방으로 난입하여 자신이나 주방 보조들을 끌고 갔다고 한다. 어안이 벙벙한 오데라에게 아민은 무척 화를 내며 자신의 아들이 오늘 저녁을 먹고 배 아파하며 병원으로 갔다고 일갈했다. 만약에 독이 검출되면 네놈들은 아주 잔혹하게 죽을 각오를 하라고 으르렁거려서 다들 공포에 질려 덜덜 떨기만 했다고... 물론 의사에게 아들이 '''과식''' 때문에 배탈이 난 것 뿐이라는 진단을 받자 미안하다면서 씨익 웃어줬다고 한다. 그 뒤론 오데라를 비롯한 아민의 요리사들은 음식 재료에 대하여 사전 점검은 다들 그야말로 완벽하게 매달리며 주방 일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1978년, 케냐와 영토 및 여러 갈등이 빚어지면서 케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오데라는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강제로 케냐로 도로 쫓겨났다. 케냐인 아내 1사람만 같이 추방당했고, 그 뒤로 30년 넘은 지금도 우간다에 가보질 못해 다른 아내나 재산에 대하여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오데라는 케냐로 도로 추방당하면서 그야말로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졌다. 빈털터리로 쫓겨났고, 케냐에선 오데라가 가진 음식솜씨가 통하지 않아(주로 백인층 요리) 운전기사로 생계를 유지하고, 아내는 가정부로 일하며 살아가는 신세가 되었다고 회고했다. 이러다보니 오데라는 아민에 대하여 찬양할 생각은 없으며 거짓으로 식인을 부정하지 않는다고 외신기자들에게 털어놓았다. 다만 아민이 워낙에 성격이 제멋대로이고 사람을 마구 죽인 건 사실이었으며, 죽인 사람을 악어밥으로 던졌다는 이야길 친위대들이 하는 걸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항목에 나온 이나 온갖 괴식을 즐긴 것은 사실이라고 증언했다.
특히 오데라는 90년대에 자신에게 외신 기자들이 찾아와 아민의 식인에 대한 걸 물어봤을때 대체 뭔 소리하는지 몰라 멍 때렸고 그때서야 식인 장면을 넣은 아민에 대한 영화를 보고 저런 엉터리가 어디 있냐고 격분했다고 회고했다. 더불어 “그가 식인했다는 걸 내가 왜 부정하겠느냐? 그걸 증언하는 걸로 돈을 벌 정도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내가 아민을 감쌀 것 같느냐? 내가 인육 요리를 준비해서 그걸 탓할까봐 감춘다? 만약 아민이 식인 요리를 즐겼다면 나에게도 가차없이 만들라고 지시할 자였다. 뱀이나 별별 동물 생식을 준비하라고 하여 다 준비하던 나였다. 그런 내가 식인 요리 준비를 거부한다? 그렇게 수틀리면 나도 얼마든지 죽일 아민이었다. 추방당하기 전 나도 교도소에 몇 달 동안 갇혔을 때 '이제 나도 죽는구나'라며 모든 것을 포기했지만 아민이 그동안 먹은 요리들이 워낙 맛있어서 살려준다며 맨 몸으로 풀어준 것 뿐이다.”라고 이야기했다. 이래서 식인에 대해서는 정확한 증거가 없어 카더라 이야기라는 주장이나 분석도 많이 된다. 물론, 이 항목에 나오듯이 온갖 학살과 민폐는 확실히 증언이 넘치지만.

3.3. 기행


살아있는 독사를 잡아 그 자리에서 를 쳐서 요리를 만들어 외교 사절에게 권했고, 각료회의 중에 마음에 안 드는 장관이 있으면 즉석에서 뺨을 때리는가 하면 두 다리를 벌리고 서서 다리 밑으로 기어가도록 명령했고, 권투 챔피언 무하마드 알리에게 도전장을 내기도 했다. 백인 여성과 흑인 여성 2명과 함께 잠자리에 드는 것을 즐겼으며 모든 공문서에 적히는 자신의 이름 앞에는 ''''각하, 원수, 모든 지상 동물과 바닷속 모든 물고기들의 신, 좁게는 우간다에서, 넓게는 아프리카에서 대영제국을 무찌른 정복자''''라는 긴 수식어를 붙이게 했다.
또한 농담을 즐겨 아민이 한 농담은 나라 이곳저곳에서 유행어처럼 입에 오르내렸다. 이웃나라인 탄자니아의 대통령 줄리어스 니에레레가 아민의 정책을 비난하자 마치 상심한 듯 천연덕스럽게 "나는 니에레레를 너무 사랑한다. 그가 여자였더라면 흰 머리에도 불구하고 그와 결혼하려 했을 것" 이라며 조롱했다. 또한 워터게이트 사건 당시 닉슨 대통령에게 '''축하의 메시지를 담은 전보'''도 보냈다고 한다. 이러한 아민의 농담들 속에는 때때로 매우 진지한 면모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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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를 들고가는 백인 사업가들[6]
한술 더 떠서 아프리카 통일기구 수뇌회의가 열렸을 때에는 자신이 백인들을 굴복시켰다는 걸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우간다 내에 있던 백인 사업가 여섯 명을 잡아다가 노예로서 자신의 가마를 들게 하기도 했다. 이들은 당시 우간다에 거주하던 영국과 스웨덴 국적의 사업가들로, 아민이 우간다 내의 그들의 사업권을 몰수하겠다는 위협으로 자신의 가마를 들고 양산을 받쳐들게끔 강압적으로 명령한 것이었다. 그러나 서방언론들의 취재에 응할 때는 당시 사건에 대해 '''"나는 백인들에게 짐이 된다는 사실을 보여줬을 뿐"''' 이라며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고. 지금도 이 사건은 이디 아민 하면 거론되는 꽤나 유명한 기행 중 하나라고 한다. 출처1출처2출처3 위 사진은 '''흑인을 노예로 부리던 백인들이 반대로 당하는 것'''이라고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 '''자랑거리'''로 알려지기도 했다.
또한 이스라엘과 단교했을 때에는 자기 집 뒤뜰에 언덕을 만들어 ''''골란 고원''''이라 이름 붙인 뒤 병사들에게 점령하라고 시킨 적이 있다고 한다.

4. 각종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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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프 올리타(Joseph Olita. 1944 ~ 2014. 케냐 출신 배우, 2014년 6월 2일 병으로 세상을 떠남)가 연기한 이디 아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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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리스트 휘터커가 연기한 이디 아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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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디 아민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엔 1980년 작인 《이디 아민》이 있다. 원제목은 Rise and Fall of Idi Amin. 케냐와 나이지리아,영국 합작영화이며 1990년에 이 작품은 한국에서도 상영했고 비디오로도 나왔다. 고기를 손으로 집어먹는 포스터와 영화 광고 어구가 진짜 흠좀무이다. 포스터를 장식하는 고기는 영화를 보면 인육이다. 반대자의 검시현장에 나와서 저 고기를 처묵처묵한다. 이디 아민의 인육설에 대해서 꽤나 믿는 사람들이 많다는 증거. 하지만 영화 자체는 그리 평이 좋지 않고, 흥행도 그리 성공하지 못했다. 국내에서도 서울관객 3만 정도에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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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006년작 포리스트 휘터커 주연의 《스코틀랜드의 마지막 왕》(The Last King Of Scotland)이 있다. 한국에선 제목을 축약한 '라스트 킹'이란 제목으로 개봉했다.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에 빛나는 휘터커의 '''광기 어린''' 연기를 보면 이디 아민이 어떤 악행을 자행했는지 적나라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제임스 맥어보이가 연기한 스코틀랜드 의사 니콜라스가 자신에게 인도인 추방에 대해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권고하자 끼어들지 말라고 소리 질러놓고는 해외 언론에서 아민의 광기에 대해 비판하는 기사가 나오자 다시 왜 날 말리지 않았지?라고 울부짖는 장면은 가히 가관이다. 니콜라스가 말렸잖아요 라고 항변하니 말린 것으론 부족해! 날 설득했었어야지! 라고 절규하는데... 여튼 직접 보는 것이 좋다. 그리고 제목이 우간다의 마지막 왕도 아니고 엉뚱하게 왜 '스코틀랜드'의 마지막 왕이냐 하면 이디 아민이 평소에 스코틀랜드를 굉장히 좋아했다고 한다. 자신을 잉글랜드로부터 우간다를 지켜냈다고 자칭할 정도였다고 한다. 평도 좋았고 600만달러 제작비를 들여서 5천만 달러 가까이 수익을 벌어들이며 흥행도 성공했다.
물론 휘터커의 이디 아민 연기도 훌륭하고 《스코틀랜드의 마지막 왕》도 수작이기는 하나 사진으로 보다시피 80년작의 이디 아민을 맡은 조지프 올리타의 외모가 더 흡사하며 내용 면으로도 더 디테일하게 다뤘다. 구할 수 있다면 꼭 보기 바란다. 단, 국내 비디오에서는 인육 취식이나 반대자 머리 냉동실에 넣어두기나 독사 회 쳐먹기 등등 잔인한 부분들은 몽땅 삭제되었다.
80년대판은 그때 당한 사람들이 자문에 참여했고 학자 중 하나는 본인 역으로 출연하기도 한다. 아민 역의 올리타는 케냐 출신인데, 나중에 덴젤 워싱턴이 나온 다른 영화 《미시시피 마살라》(1991)에서도 이디 아민으로 잠깐 출연한다.
이디 아민 자신이 출연한 다큐멘터리 영화도 있다. 제목은 <장군 이디 아민 다다>(1974). 이디 아민의 진솔한 이면을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사실, 감독이 몇 군데 페이크임을 넣어두었다.[7] 이를테면 아민이 자신은 민주적으로 통치한다고 자랑하는 장면 뒤에 의문사나 의회 해산에 대한 기록 영상을 넣는다든가. 그래서 판본을 두 가지 만들었고 이 중 아민에게 유리한 판본'''만''' 우간다에서 상영했다. 아민에게 걸려서 원판은 서구에서도 자진해서 극장에서 내려갔다. 감독이 원판을 극장에서 내린 과정도 걸출한데 우간다에 있는 모든 외국인들을 억류한 후 감독에게 전화를 강제로 걸게 하여 극장에서 영화를 내리게 했다. 당연히 감독은 인질들의 안전 때문에 영화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우간다판 영화는 아민의 선전영화로 유명해졌지만... 아민이 퇴임한 후 원판 영화가 공개되었다. 현재 한국에도 DVD가 수입되어 판매되고 있으니 관심있는 사람은 찾아보길. 자화자찬에 쩔어있는 이디 아민의 온갖 기만을 엿볼 수 있다. 자신이 버마에서 일본군을 격퇴했고 모셰 다얀과 자신이 절친한 사이이며 골다 메이어가 자신을 아들같이 생각했고 카스트로가 자신의 위엄에 감명받아서 굴복했다는 투의, 진위여부가 의심되는 온갖 자랑을...
레슬리 닐슨 주연 코믹 영화 <총알 탄 사나이>(1988)에서 이디 아민이 초반부에 잠깐 나오는데 미국 배우 프린스 휴즈 Prince Hughes (1947–2004)가 맡았다. 다만 엑스트라 수준. 주인공 프랭크에게 고르바초프, 호메이니,아라파트 ,카다피 등이 쳐맞는데 그 자리에 있던 이디 아민은 쳐맞고 창문 밖으로 내던져 떨어졌다....

5. 그 외


이디 아민이 살아 있던 시절 우간다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행해지던 신고식 행사가 바로 큰소리로 "'''이디 아민 죽어라!'''"하고 소리치는 것이었다고 한다. 아민이 대표팀 내에 끄나풀을 심어뒀다는 이야기가 나돌던 시절이라 정말 많은 담력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아민의 병세가 악화되었을 때 우간다로 귀국하는 문제가 거론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무세베니 대통령이 "'''이디 아민은 범죄자다. 돌아오면 우간다에서 가장 큰 감옥이 있는 곳인 루지라로 보낼 수밖에 없다'''"고 못을 박아 아민은 돌아올 수 없었다. 아민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사망했을 때 그 소식을 듣고 전 우간다 국민이 기뻐했으며, 몇날 며칠을 축제로 보냈다.
이후 밝혀진 의학 보고서에 따르면 이디 아민은 장기간의 매독 감염으로 가벼운 조울증에 걸린 상태였고 그로 인해 격렬하고 상반되는 감정과 발작, 편집증, 정신분열증을 일으켰다고 한다. 하지만 매독 감염으로 인해 생기는 정신이상은 정신분열증보다 매독으로 인한 치매로 분류한다. 이 차이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될 수도 있지만, 실은 절망적일 정도로 상당한 차이이다. 정신분열증은 약으로 증상을 크게 완화할 수 있지만, '''현대 의학에서 치매는 아직도 손 쓸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다'''. 실례로 치매 환자가 아이를 삶아 죽여 국으로 만드는 예를 보면 이 인간도 치매에 걸린 게 맞긴 맞는 듯. 하지만 이런 악독한 독재자 밑에서도 혜택을 누린 몇몇 이슬람 교도들은 함께 모여 아민의 기념관을 세우는 것을 의논했으나, 자금 지원을 부탁한 아랍 국가들에게는 죄다 거절당했다.
더욱이 우간다 안의 이슬람 교도 모두가 이디 아민을 지지한 게 아니다. 아민의 식인 행위에 기겁한 보수적 율법학자들이나 진보적 이슬람 교도들은 '이것은 이슬람교도의 망신거리가 아니냐'면서 아민을 극도로 혐오했으며 결국 우간다를 떠나서 아랍 각지에서 아민의 행위는 이슬람의 망신이라고 열심히 주장하면서 아랍 국가들이 아민을 다시 보게 된다. 그러니 이스라엘에 저항했다는 점으로 뜻이 통했을 아랍권에서도 그를 외면했고 카다피조차도 아민을 환영하지 않았다. 부하들도 사람고기를 먹은 또라이 식인종 자식을 받아줬다간 우리만 망신당하니 내보내라고 충고했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이렇다 보니 여러 이슬람권 나라를 떠돌던 아민의 망명을 마지막으로 받아준 나라인 사우디아라비아이스라엘과 맞섰기에 받아줬다고 정부에게 밝혔지만, 정작 거기서도 불만이 적지 않았다. 식인을 해서 쿠란을 모독한 인간 말종을 왜 받아줘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이디 아민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부족함 없이 넉넉히 살기는 했으나, 선술한 대로 정치적 행사에서부터 그 모든 초청 자리는 일절 제외되었다. 사실, 왕가에서도 얼굴 드러내지 말고 조용히 지내라는 투로 대했는데, 어느 왕족은 외출 도중 아민과 만나자 불쾌한 얼굴로 인사도 안 받아주고 가던 길을 갔다 한다. 그 왕족은 "나를 보고 잡아먹고 싶어할지도 모르잖아?"라면서 아예 식인귀로 여겼다고… 이 이야기는 론리플래닛 지은이가 쓴 <론리플래닛 나쁜 나라들> 사우디아라비아편에서도 언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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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은 이디 아민의 아들. 오른쪽은 그에게 살해당한 피해자.
이디 아민의 아들도 아버지의 단점들만 죄다 물려받아서인지 나쁜 길로 빠져들어서 갱단의 일원이 되어 경쟁자 갱 동료를 무참하게 살해하는 살인을 저질렀다. 것도 그냥 죽인 것도 아니고 칼로 20번이나 찌르고, 야구방망이와 맥주병, 망치, 주먹 등을 이용해서 피해자를 구타해서 사망케 해서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이것 때문에 과연 그 아비에 그 아들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2007년 4월, 런던 올드 베일리 법원의 스티븐 크레이머 판사는 이디 아민의 아들 파이잘 왕기타에게 살해 공모 혐의를 인정해 5년형을 선고했다. 고작 5년형만 받은 이유는 당시 살해장면이 찍힌 CCTV에 왕기타가 직접 흉기를 휘둘러 살해하는 모습이 없었기 때문이다. 왕기타는 다른 조직원들이 피해자를 난자해 쓰러트린 후 걍 열심히 스톰핑만 했다.
이러한 행적 때문에 동탁이 서방에서 환생한 거 아니냐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어마어마한 거구다. 우선 키가 193cm인데, 누가 봐도 비만 수준의 체형인지라 몸무게는 120kg가 넘는다는 것이 중론이다. 이정도면 야구선수 이대호와 동급인데, 어마어마한 악덕 독재자에 식인이라는 막장짓까지 더해져 무시무시한 포스를 내뿜는다.

[1] 1923년 혹은 1928년 출생이라는 설도 있다.[2] 이디 아민의 키는 190cm가 넘는데, 저런 체형이면 한 눈에 봐도 당연히 100kg을 넘는다. 이디 아민 정도의 체구이면 체급은 슈퍼 헤비급이다. 유도로 따지면 무제한급에 해당된다.[3] 상식적으로 2차 대전에 참전하려면 아무리 늦어도 1945년 8월 1일 이전에 입대해야 한다. 히로시마원자폭탄이 떨어진 1945년 8월 6일에는 추축국이나 연합군이나 이미 신병을 전선에 더 이상 투입하지 않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이탈리아 사회주의 공화국나치 독일은 그 전에 이미 차례로 항복한 상태였고, 그나마 일본 제국 혼자서 발악하고 있었다.[4] 원체 사우디 장법이 관도 묘표도 없이 그냥 보자기나 천으로 싼 시신을 구덩이에 넣고 흙을 부어 묻은 다음 머리와 다리 부분에만 벽돌이나 작은 돌을 묘표 대신으로 놓는 방법이다.[5] 애당초 이 사람도 아민의 손에 가족들을 잃을 뻔했던 경험이 있는지라, 아민이 몰락하고 난 뒤에도 그를 두둔할 이유가 전혀 없는 사람이므로 어느 정도 신빙성은 있다.[6] 트로피코 5에서는 이디 아민이 영국 여왕에게 청혼했다가 거절당하자 우간다 정상회담에 참석한 영국인 사업가들을 잡아다가 가마를 들게 했다고 한다.[7] 애시당초 감독이 프랑스 누벨바그 감독들이나 뉴 저먼 시네마 감독들이랑 친했던 바벳 슈뢰더다. 80년대부터 메인스트림 친화적으로 변했지만 반골 기질이 좀 있었던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