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아프라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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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지리아군과 전투를 치루는 비아프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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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아프라군과의 교전을 준비 하고 있는 나이지리아군
'''Biafra War'''
1. 소개
2. 나이지리아의 독립, 그리고 혼란
3. 비아프라의 탄생, 그리고 내전
4. 비아프라 전쟁
4.1. 전쟁 중기까지
4.2. 전쟁 말기
5. 종전
6. 그외


1.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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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나이지리아로부터 분리 독립을 선언한 나이지리아 동부 '''비아프라 공화국'''과 이를 진압하려는 나이지리아 정부군 사이에서 1967년에서 1970년까지 벌어진 내전. 수단 공화국 내전, 서사하라 전쟁, 르완다 내전, 소말리아 내전과 더불어 아프리카를 지배했던 유럽 제국주의 열강 종주국들의 잘못된 식민 유산에 의해 생겨난 많은 아프리카 국가의 분쟁 중 하나이다.

2. 나이지리아의 독립, 그리고 혼란


1900년경 종교문화, 배경이 저마다 다른 서부 아프리카의 지역들이 영국의 식민 정책하에 나이지리아로 통합되었다. 이때 남부의 이보족요루바족은 영국으로부터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식민지 통치에 협조한 덕에 지원을 받아 더욱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슬람을 믿었던 하우사족은 빈곤에 시달리며 민족, 지역간 갈등이 격화되었다. 그러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탈식민지화의 바람이 불면서 나이지리아도 1960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다.
그러나 나이지리아 역시 영국이 다양한 민족들과 지역들을 적당히 통합하면서 생겨났기 때문에 많은 아프리카 독립국처럼 지역, 종교, 민족 갈등에 빠지게 되었고 복잡하기 짝이 없는 갈등 구조 앞에 민간 정부는 힘을 쓰질 못했다. 결국 1966년 1월 남부 이보족 출신의 이론시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군사 독재 정권을 수립했다.
대통령이 된 이론시는 독립 초 연방제로 유지되고 있었던 나이지리아를 강압적인 중앙집권주의로 나이지리아를 제어, 통제하려는 정책을 도입했다. 이러한 여러 민족 집단들, 특히 하우사족이 차지하고 있던 북부의 반발을 키웠고 결국 이론시는 같은 해 반대파의 총에 맞아 암살당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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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시의 후임자인 야쿠부 고원
한편 이론시가 암살당하자 나이지리아 군사 정권 내부에서도 권력다툼이 벌어졌다. 그 결과 북부 출신의 야쿠부 고원이 여러 경쟁자들을 억누르고 대통령이 되었다. 고원 대통령은 나이지리아의 불안정한 정국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부족 대표들과 지역 대표들을 모아 전국 대표자 회의를 개최하려 했으나 같은 해 벌어진 이보족과 하우사족 간 유혈 충돌로 회의는 결국 취소되었다.

3. 비아프라의 탄생, 그리고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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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아프라 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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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아프라 국장

▲ 비아프라 국가(1967~1970)
현재 비아프라 망명 정부가 제정한 국가와는 다르다. 대개 검색 결과로 나오는 비아프라의 국가는 현 망명 정부가 제정한 국가다. 원래 국가는 시벨리우스의 핀란디아의 곡조에 개정한 가사를 넣어 만든 노래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고원은 기존 연방제를 유지하되 나이지리아의 주를 4개에서 12개로 늘려 더욱 통제하기 쉽게 행정주를 개편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보족 출신의 오두메구 오주쿠 중령은 행정주 개편에 반발하며 고원 대통령을 격렬하게 비난하였고 자신을 지지하던 장교들과 남부의 이보족을 이끌고 이듬해인 1967년 5월 30일 나이지리아 동부의 3개 주들을 통합시켜 비아프라 공화국으로 독립을 선포했다. 그리고 오주쿠는 이보족의 지지를 받아 비아프라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비아프라의 독립 선언 후 고원은 전국에 비상 계엄령을 내리고 7월 7일 비아프라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 비아프라에 군대를 파견하면서 나이지리아는 사실상 내전 상태로 돌입했다.

4. 비아프라 전쟁



4.1. 전쟁 중기까지


내전 발발 초기에만 해도 전세는 비아프라에게 매우 유리했다. 8월에는 반대로 나이저 강을 건너 베닌시를 함락하고 수도 라고스까지 진격할 정도였다. 그러나 아프리카와 서남아시아 지역에 영향력을 확대하려던 소련과 옛 아프리카 식민국가들에서 기득권을 유지하려던 영국이 나이지리아 정부에게 무기와 자금 등을 지원하면서 전세는 나이지리아 정부군에게 유리해졌다. 이에 나이지리아 정부군은 오레에서 시간을 벌면서 비아프라의 수도인 에누구를 공격하는 전략을 펼쳤고 결국 비아프라군은 패퇴에 패퇴를 반복하였다. 그 결과 나이지리아군은 비아프라 영토 상당수를 탈환하여 비아프라 공화국은 에누구에서 바하, 움바히아, 오웨리로 수도 이전을 강요받는 상황이 되어 비아프라의 영토는 1/10로 줄어들었다.

4.2. 전쟁 말기


대부분의 영토와 보급로를 상실하고 내륙에 고립되다시피 한 비아프라는 너 죽고 나 죽자 식으로 완강하게 저항했다. 그리고 나이지리아 정부가 소련과 영국 등 외국의 지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오주쿠는 외국에 원조를 요청했다. 이 때 영국과 정치적, 외교적으로 앙숙관계에 있었던 프랑스가 비아프라에게 무기와 총탄 등을 공급하고, 군사적 지원을 약속했다. 이어서 포르투갈스페인, 서독도 비아프라를 지원하면서 비아프라 전쟁은 나이지리아를 지원하는 소련, 영국과 비아프라를 지원하는 프랑스, 포르투갈, 스페인, 독일 등 서유럽의 과거 제국주의 식민종주국들의 대리전으로 비화되었다. 그리고 공산권이었지만 중소결렬로 인해 소련과 정치적으로 대립했고 역사적으로 아편전쟁으로 홍콩을 빼앗기는 등 영국에 대한 악감정이 있던 중국 역시 비아프라를 지지했다.[1] 또한 시대에 안 맞는 인종 차별적인 탄압 정책으로 아프리카와 국제 사회에서 고립되고 있던 남아프리카 공화국로디지아(지금의 짐바브웨) 등 남부 아프리카의 백인 통치 국가들 또한 국제 제재를 지원하던 아프리카 국가들의 분열을 도모하는 공작 차원에서 비아프라를 지원했다.[2] 한편 같은 해 벌어진 제3차 중동전쟁 당시 이집트, 시리아, 이라크, 요르단 등 당시 아랍권 적군으로부터 노획한 무기들과 이스라엘군의 노후 무기들을 재고처리하려던 이스라엘도 무기 판매, 지원을 타진하면서 사실상 비아프라를 지원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비아프라를 지원하자 이번엔 이스라엘과 적대적 관계에 있었던 사우디, 알제리, 시리아, 이집트 같은 아랍 세계 국가들은 나이지리아를 지지했다.[3] 소련의 동맹국이자 바르샤바 조약기구 회원국이었던 불가리아도 비아프라와 싸우고 있던 나이지리아군에 전투식량과 무기를 제공하는 등 결국 비아프라 전쟁은 대리전 수준도 넘어 대형 국제전으로 그 규모가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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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9년, 비아프라의 굶주린 아이. 돈 맥컬린(Don McCullin) 촬영. Life
전쟁이 길어지자 나이지리아 내에선 희생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속출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비아프라 전쟁의 참혹함은 전세계 여러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고 전쟁의 장기화로 굶주림에 허덕이는 비아프라 어린이들과 의약품이 없어 죽어가는 부상자들의 참상은 국제사회의 큰 동정심을 불러일으켜 수많은 국가들로부터 식량과 의약품을 지원받게 되었다. 숫자는 적었지만 탄자니아, 가봉, 잠비아, 코트디부아르 등 몇몇 아프리카 국가들도 비아프라를 정식주권 독립 국가로 승인하였고 비아프라의 자결권 지지를 공식적으로 선언했다.[4] 이에 나이지리아는 비아프라를 승인한 아프리카 국가들을 격렬하게 비난하며 외교관을 자국에서 추방하고 단교하는 초강수를 두기까지 했다.[5] 더욱이 이런 비아프라 전쟁의 잔학성에 나이지리아를 지원하고 있던 영국 내에서 나이지리아 정부군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중단하라는 비난 여론까지 일어났다.
그러나 전세는 뒤집을 수 없을 정도로 나이지리아군에게 기울어있었고 비아프라는 외부의 지원으로도 이미 전세를 뒤집을 힘이 없었다. 이러는 사이 국제연합(UN)이 나이지리아와 비아프라 양국이 전쟁과 무력 사용을 중단할것을 촉구했고, 현 아프리카 연합의 전신인 아프리카 통일기구(OAU) 등이 전쟁을 평화적으로 종식시키기 위해 평화 협상을 중재했지만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한 채 실패로 끝났다. 그 이유는 나이지리아와 비아프라 두 나라의 입장을 결국 절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이지리아는 비아프라의 전면 투항과 분리 독립 완전 포기를 주장했고 비아프라는 독립 인정과 나이지리아군의 군사 행동 중단을 요구하는 등 양측의 입장이 평행선을 달렸다. 아프리카 통일기구 중재의 종전 협상이 결국 실패로 끝나자 탄자니아, 잠비아, 코트디부아르, 가봉을 제외한 대다수의 아프리카 통일기구 회원국들도 비아프라를 비난하면서 평화 협상 중재를 중단하고 말았다.
한편 아프리카 통일기구 중재의 평화협상이 실패로 끝나고 충돌이 격화되자 1969년 오주쿠 비아프라 대통령은 분리 독립을 포기하는 대신 비아프라 지역에 국방과 외교를 제외한 높은 수준의 자치 정부를 요구했다. 그러나 나이지리아 정부는 무조건 투항을 요구하며 오주쿠 대통령의 요구를 무시했고 오히려 비아프라에 대한 공세를 강화했다. 나이지리아 입장에서는 자치 정부 수립해주었다가는 다른 민족들도 서로 자치 정부를 세운다고 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쟁이 이미 나이지리아 측에게 유리해져가고 있었는데 자치정부 수립이라는 비아프라 측의 요구를 받아들일 이유도 없었다. 결국 나이지리아군의 강력한 무력 공세에 비아프라군의 사기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5. 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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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 나이지리아군의 승전 소식에 환호하는 나이지리아 시민들.
마침내 1969년 연말과 1970년 1월에 벌어진 전투에서 비아프라군은 궤멸에 가까운 큰 타격을 입었다. 이 틈을 타 나이지리아군이 비아프라의 임시수도 오웨리로 진격하자 오주쿠 대통령은 비행기를 타고 해외로 달아났다. 1월 10일 오웨리가 함락당하자 필립 에피옹 비아프라군 참모총장 등 비아프라에 남아있던 장성과 정부 각료들은 전투를 중단하고 나이지리아의 수도 라고스로 이동하여 1월 13일 야쿠부 고원 대통령에게 항복하고 비아프라의 연방 복귀를 선언했다. 결국 비아프라 전쟁은 200만 명의 전사자와 50만 명의 아사자들을 낸 채 비아프라의 패망으로 종료되었다. 야쿠부 고원 대통령은 전쟁이 끝나고 비아프라가 다시 나이지리아 연방 주로 복귀하자 연방에서 이탈하려고 참혹한 전쟁을 일으킨 비아프라 권력층을 전쟁범죄자로 사형시켜야 한다는 여론을 무시하고 국외로 도주한 오주쿠 대통령을 제외한 필립 에피옹 등 비아프라 공화국의 나머지 정부 인사들에게 특별 사면 조치를 내리며 처벌하지 않았다.
한편 해외로 망명한 구 비아프라 공화국의 인사들은 비아프라 망명정부를 수립해 지금도 비아프라의 독립을 요구하며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다. 다만 아이러니 한 점은 비아프라군을 진압한 야쿠부 고원이 1975년 군부 쿠데타로 실각하고 2020년 현재까지도 나이지리아에 귀국하지 못하고 영국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는데 비해, 비아프라 대통령을 맡았던 오주쿠는 1982년에 나이지리아 정부로부터 사면받은 후 나이지리아로 귀국했다. 그리고 죽을때까지 나이지리아에서 정치활동을 하며 비록 득표율은 미미하기는 했지만 두차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정도로 건재를 발휘했고, 장례식도 굿 럿 조너선 당시 나이지리아 대통령이 참석하는등 꽤 화려하게 치러지는 등 나름대로 대접을 받았다는 점이다.

6. 그외


국제 구호 활동의 최전선에 나서던 적십자는 당시 교전 지역에 함부로 인력을 투입하기 어려운 데다, 자칫 비아프라 측에 대한 구호 활동이 정치적 지지로 보일 수 있는 상황에서 제대로 된 구호 활동을 펼치기 어려웠다. 이러한 적십자의 행동에 불만을 품은 몇몇 의사들이 뜻을 모아 극한의 상황에서도 의료 - 구호 활동을 펼치는 조직을 결성하게 된다.
'''그 조직이 바로 국경 없는 의사회이다.'''
이 전쟁으로 인해 처음으로 서양에 아프리카라는 곳이 빈민과 고난의 지역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비아프라 정부는 처음에는 '기독교 국가'나 '문명 국가' 등의 선전으로 아프리카 내의 이스라엘이라는 이미지로 서양에 이 전쟁을 알리려 했으나 효과가 없자 대신 인도주의적 고비로 서방에 알리려 했다. 특히 홀로코스트의 이미지를 가져다 쓰면서 도덕적 자본(moral capital)을 사용해 지원을 받으려 했지만, 결국 이 전쟁이 '일방적인 학살'이 아닌 '정치적 내전'이라고 결론을 내린 서방 국가들은 차갑게 비아프라 정부에게 등을 돌렸다. 홀로코스트같은 '절대적인 악'이 아닌 정치적 내분이라고 판단되는 순간 비아프라 정부는 모든 신용을 잃었던 것이다.[6] 또한 민족자결주의로 많은 제3세계 국가들에게 호의를 얻으려 했으나, 민족자결주의는 반식민주의 사상까지만 허용되는 범위였다. 많은 제3세계 국가들은 이 내전 개입에 나이지리아라는 국가의 존엄성을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에 나이지리아를 지원했거나 침묵했다. 이는 애초에 대다수의 제3세계 국가들이 나이지리아와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서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은 식민지화 과정에서 민족, 언어, 종교, 문화 등 다양한 요소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자신들의 편리에 맞게 식민지 지역에 경계선을 긋고 행정구역을 나눠 대립과 분열을 부추기며 식민 지배를 하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그대로 독립시켰다.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아프리카와 중동 국가들의 내전전쟁, 영토, 종교, 민족 분쟁 등의 원인은 대부분 이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인간의 동정심에 호소하는 인도주의적 주장들은 국제사회의 엄격한 힘의 논리에는 낄 자리가 없었다.
아프리카와 전세계를 충격으로 몰아갔고 나이지리아 현대사에서 가장 참혹했던 전쟁이지만 국내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더 많다. 대부분은 '엥? 나이지리아에도 그런 슬픈 역사가 있었어?' 라고 하는 수준. 물론 나이지리아의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참혹했던 비극이라서 백과사전이나 일부 서적에서 서술되기도 하지만 이 전쟁을 잘 아는 사람들은 극히 드물다. 주로 미국 언론을 통해 소식이 전파되고 이를 받아서 보도하던 60년대 한국 언론[7] 덕에 나이 든 사람들은 간혹 '비아프라'라는 이름 정도는 기억하지만 정확하게 어디 붙어있는지는 모른다.
먼나라 이웃나라 구판에 아프리카 내부 문제와 엮여서 등장한다.

[1] 티베트와 타이완, 위구르 등 자국의 분리 독립 문제가 있고 타국의 분리 독립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중국이 비아프라를 지지한 사실이 의아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도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면 인도차이나 전쟁이나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처럼 반식민주의 성질을 띄는 다른 나라의 분쟁에 개입하여 독립을 요구하는 국가를 지원해주기도 했다.[2] 심지어 남아프리카공화국은 1970, 80년대 모잠비크나 앙골라 같은 주변 아프리카 국가에서 벌어진 내전에서 반군 세력들을 지원하면서 비아프라 전쟁 때 썼던 분열, 지원 정책을 다시 사용하였다.[3] 이집트는 공군 비행사들까지 보냈다.[4] 한편 이 4개국이 비아프라를 승인하자 아프리카 국가들에서도 이들 정부의 입장에 대해 논란이 일어났다. 비아프라를 승인할 경우 식민지 시절부터 설정된 국경을 지니고 있던 아프리카 국가들의 민족, 종교에 의한 분리주의를 확대시켜 독립한 지 몇 년도 안 돼 사분오열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5] 탄자니아와 잠비아, 코트디부아르는 비아프라 전쟁이 나이지리아 군이 승리로 끝나고 비아프라가 패망한 뒤에도 비아프라의 주권국 승인을 취소하지 않고 오히려 야쿠부 고원 정권을 비난했다.특히 코트디부아르는 아예 비아프라의 오주쿠 대통령의 망명을 허용해주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외교라는 게 어디까지나 국익에 따라 움직이는 거라, 고원이 쿠데타로 축출되자 나이지리아와 다시 국교를 수립하는 등 관계를 회복하여 지금 현재 나이지리아와 탄자니아, 잠비아, 코트디부아르와의 사이는 나쁘지 않다.[6] 프랑스와 포르투갈 등 비아프라를 지원했던 나라들도 패망 직전에는 지원을 끊어버리거나 지원 물자 규모를 축소해버렸다.[7] 아이러니하게도 국내 정치 사회 보도를 독재정권이 통제했기 때문에, 60년대부터 80년대 중후반까지 한국 언론은 국제면 비중이 지금보다 더 높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