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나라
1. 개요
仲(197년~199년 음력 6월)
후한 말 원술이 황제를 참칭하며 세운 국가. 후한서집해(後漢書集解)에서는 충(沖)으로 나오고 삼국지연의에서는 성(成)으로 나온다. 수도는 회남윤(淮南尹) 수춘현(壽春縣)이다.
2. 역사
2.1. 건국
흥평(興平) 2년(195년) 겨울, 회남(淮南) 일대를 장악한 원술은 황제를 참칭하려 하였으나 주부(注簿) 염상(閻象)이 이에 반대하자 실행으로 옮기지 않았다.
건안(建安) 2년[1] 봄, 하내(河內) 사람 장형(張炯)이 부명(符命)[2] 을 알리자 전국옥새를 가지고 있던 '''원술은 오행과 참문에 따라 황제를 자칭하며 국호를 중(仲)이라 하였다'''. 이후 구강태수(九江太守)[3] 를 회남윤(淮南尹)에, 교유(橋蕤)와 장훈(張勳)을 대장군(大將軍)에 임명하였다. 또한 공경(公卿)과 관직을 설치하고, 봄에는 성의 북쪽 교외에서, 겨울에는 성의 남쪽 교외에서 제사를 지냈다. 한편 후궁 수백 명에게 화려한 옷을 입히는 등 사치가 극심하였고, 때문에 백성들은 굶주림으로 서로 잡아먹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2.2. 멸망
같은 해 9월, 원술은 교유 · 장훈과 함께 진(陳)을 점령하고 진왕(陳王) 유총(劉寵)을 죽여 세력을 넓혔다. 그러나 조조(曹操)의 공격을 받아 크게 패하였고, 옛 부하인 진란(陳蘭)과 뇌박(雷薄)에게 의탁하고자 하였으나 자기들도 조조한테 죽을까봐 거절당하였다. 이에 종형 원소(袁紹)에게 제호를 바치는 서신을 보내어 황제를 칭할 것을 종용하였는데, 원소는 아무런 답장을 보내지 않았으나 속으로는 이를 옳게 여겼다.
곧바로 원술은 당질 원담(袁譚)이 다스리는 청주(靑州)로 향하였으나, 유비(劉備)에게 저지당하여 가지 못하였다. 수춘에서 80리 떨어진 강정(江亭)에 이르러 식량을 확인해 보니, 보리 부스러기만 30곡 정도 남아있을 뿐이었다. 날이 몹시 더워 꿀물을 마시려 하였는데, 꿀 또한 없었다. 원술은 난간에 걸터앉아 탄식하며 말하였다.
이윽고 원술은 수레 바닥에 엎드려, 피를 한 말가량 토하고 죽었다.'''나 원술이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2.3. 멸망 후의 황실
원술이 숨을 거둔 후, 종제 원윤(袁胤)은 일족들을 이끌고 환성(皖城)을 지키고 있던 원술의 옛 부하인 여강태수(廬江太守) 유훈(劉勳)에게 의탁하였다. 이후 유훈이 출진하여 성을 비운 사이 손책(孫策)이 환성을 공격하여 빼앗았고, 원씨 가문 사람들은 포로가 되어 손책에게 끌려갔다. 원술의 아들 원요(袁耀)는 훗날 오나라(吳)에서 낭중령(郞中令)을 지냈으며, 원술의 딸은 손권(孫權)의 후궁이 되었다.
3. 중나라(仲)의 군주
4. 창작물에서 등장
지금껏 창작물에는 딱히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토탈 워: 삼국에서는 원술 세력의 직위가 공에 도달하면 중 공국, 왕에 도달하면 중나라로 바뀌게 구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