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항열

 

'''관직'''
환관 → 연지(閼氏)의 보좌관
'''이름'''
중항열(中行說)[1]
'''국적'''
연 → 전한흉노
'''종족'''
한족
'''생몰 연도'''
불명
1. 개요
2. 행적


1. 개요


흉노의 대신, 생몰연도는 불명. 원래 연나라(燕) 출신의 환관이었으나 후에 흉노에 귀순하여 정치, 경제, 문화적 역량을 향상시켰다.

2. 행적


한족인 그가 흉노에서 벼슬을 하게 된 연유는 이렇다. 흉노의 선우 묵돌이 죽고 그 아들 계죽이 노상선우로 즉위했다. 이에 한나라에서는 황족의 여인을 선우의 연지(閼氏=后妃, 비)로 보냈는데 중항열은 이 황녀의 보호관 신분으로 파견되었다. 당시 흉노는 땅끝 몬스터 소굴 정도로 여겨졌던 탓에 중항열도 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고 한다. 하지만 "너 안 가고 목이 날아갈래? 아니면 살아서 갈래?" 라는 강압에 결국 어거지로 끌려가게 되자 '''"흉노에 가면 한나라의 재앙이 되겠다"'''는 폭언을 남겼는데 한문제는 그냥 홧김에 하는 소리인 줄 알았다고 한다. 하지만 중항열은 진짜로 도착하자마자 귀순해 버렸고 여러 가지 쓸모 있는 것들을 알려주었기 때문에 노상 선우는 그를 매우 아꼈다.
그가 흉노에서 한나라를 엿먹인 일들은 아래와 같다.
  • 흉노인들은 한에서 보내오는 의류와 식품을 매우 좋아했는데, 선우에게 간하여 이것을 막도록 했다. 흉노의 힘은 유목생활에서 비롯된 강인함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에 한의 물자를 계속 받아들인다면 이에 복속되어 정체성을 잃고 말리라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중국에서 제작된 사극 한무제에서도, 한 왕조에서 바친 비단을 중항열이 나서서 한 전사에게 입히고 가시덤불 우거진 초원을 말 타고 한 바퀴 돌고 오게 시킨 다음 너덜너덜해진 비단옷을 한의 사신 앞에서 들어보이면서 "보십시오. 이런 쉽게 닳아 빠지는 비단옷 따위가 어떻게 흉노의 따뜻하고 질긴 가죽옷에 비할 수나 있겠습니까?"라고 하는 장면이 있다. 또한 그는 선우에게 "한나라에서 들여오는 재료로 만드는 한나라식 음식 대신, 흉노 땅에서 나는 가축들의 젖으로 만든 치즈요구르트 같은 유제품들을 애용하라"고 권하기도 했다. 그래서 흉노는 중원에 들어가는 도박을 딱히 열심히 하지 않았고 유목 민족이라는 군사적 우위를 중국 밖에서 안전하게 제대로 살릴 수 있었다. 중원의 한족 농민들을 정복한 역대 유목왕조들이 하나같이 한족 문화에 동화되어 힘이 약해진 끝에 골로 간 것을 생각하면 진정한 신의 한 수.[2]
  • 선우의 신하들에게 숫자를 기록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흉노인들은 가축의 숫자를 셈할 수 있게 되어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허나 중항열 이전에도 흉노는 가을에 대집회를 열어 인구를 셈했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그가 전수해 주었던 것은 단순한 셈법이 아닌 중국의 관리들이 사용하던 구구단이나 방정식 같은 구체적인 셈법이나 기록법이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 한나라 황제와 주고 받는 서신을 손보았다. 서판, 봉투, 도장을 한나라 것보다 크게 만들고 어투도 거만하게 바꾸어 권위를 내세우게 하였다.[3] 고대 사회에서의 물품은 사용하는 이의 권위를 나타내는 수단이었다. 사대부 출신의 관리가 왕족이 입는 옷을 입었다고 파직되는 일이 상식이었던 시대였으니 중항열의 조치가 어떤 파장을 몰고 왔을지는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다.[4] 흉노에 직접적인 도움이 된다기보다는 단순히 어그로를 끄는 행위긴 하지만, 중항열이 얼마나 한나라를 증오했는지 짐작케 해준다.
  • 선우를 충동질했다. 노상 선우는 해마다 변경을 침범하여 약탈을 일삼았는데, 한 군에서 만 명 이상의 인명 피해가 난 적도 있었다. 한 조정에서는 사자를 보내 화친을 문제 삼았지만 흉노는 곧잘 약속을 어기고 국경을 침범했다. 한나라의 사신들이 "흉노의 정치는 덕이 없고 문화는 야만스럽다"고 비판하자, "근데 우리는 한나라처럼 세금이나 노역으로 백성들 등골 빨지도 않고, 겉으로 예의 차리면서 뒤통수 치지는 않거든요"라고 대꾸했다. 이쯤 되면 이미 완전히 흉노인이다.
그야말로 '''복수귀'''... 자신을 사지와 다름없었던 흉노 땅으로 내몰았던 것에 대해 정말 단단히 복수하였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죽을 만큼 싫은 흉노로 보낸 것에 대한 복수랍시고 선택한 방법이 그 흉노의 편에 서서 그들을 돕기(...)라는 대단히 심각한 딜레마가 존재한다. 본인이 이를 자각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심지어 한나라 사신들과의 설전에서 자기가 그렇게 싫어했던 흉노의 풍속과 습관, 문화에 대해 우월성을 극력 어필하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때 중항열이 주고 받은 한 사신과의 문답은 중화사상이나 정착민의 편견이 들어간 시각에 치우치지 않고 흉노의 입장에서 유목 민족으로써의 그들의 사회상을 증언하고 또 변호해 주는 사료[5]가 되기도 한다. 사마천은 중항열이 한 사신과 주고 받은 그 문답을 자신이 저술한 사기 흉노 열전에 모두 수록했고, 이 기록은 오늘날 '''흉노의 사회 구조를 연구하는 중요한 1차 문헌 자료'''로 쓰이고 있다.
노상 선우가 죽고 아들 군신 선우가 즉위한 후에도 중항열은 한과의 전쟁을 계속 간했다. 군신 선우는 그 말에 따라 극심한 약탈을 자행했는데 한군은 막을 방도가 없었다. 편제를 바꿔 북쪽의 요충지에 군대를 주둔시켰으나 흉노군이 워낙 기동력이 뛰어났던 탓에 원군이 제때 도착하기는 매우 힘들었다. 그렇다고 요새 밖 국경을 넘어서 기마 부대와 싸우겠다는 것은 여간한 전력으로는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라 하릴없이 철수하곤 했다.
약탈은 문제의 뒤를 이은 경제 대까지 이어졌다. 오초7국의 난이 있은 후 경제는 우호 정책을 썼다. 화친의 맹약을 확실히 하고 교역을 열었으며 물자를 후하게 보내주었다. 이는 확실히 먹혀들어 흉노는 정말로 한과 친해져서 만리장성 근처의 국경에서까지 교류하게 되었다. 한의 입장에서도 흉노와의 화친은 잇따른 전란에서 회복하는 기회가 되었다.
그러나 흉노에게 있어서는 중항열이 남긴 씨앗이 좋기만 했다고 보기도 어려운데, 이후 흉노가 하도 행패를 부리자 한나라로서는 점점 더 견디기가 어려워졌고, 얼마 후 등장한 한무제는 풍족해진 국가 재정을 가지고 대규모 원정을 기획하여 이광, 위청, 곽거병 등을 주축으로 하여 흉노와의 전쟁에 돌입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차피 중항열은 흉노가 좋아서 편을 든 게 아니라 순전히 한나라를 엿먹이기 위한 것이고, 어쨌든 한나라가 흉노와의 전쟁으로 국력을 거하게 말아먹었으니 나름 성공한 셈이다. 게다가 본인도 과거에 흉노에 오는 걸 그렇게도 싫어했으니 어떻게 보면 본인이 과거에 싫어했던 나라와 지금 원한을 가진 나라를 싸움붙여서 둘 다에게 빅엿을 먹인 게 된다.
[1] 中行이란 성씨는 본디 군대 용어였기 때문에 行伍를 '항오'로 읽는 것처럼 '중항'으로 읽으며, 옛 사람 이름에서 說은 悅(기쁠 열)로 읽는 사례가 많다.[2] 한 명이 열 명을 죽이는 것보다 열 명이 한 명을 죽이는 게 더 쉽기 때문이다. 유목 민족은 보통 농경 민족을 4 ~ 5번 더 이긴다고 해도 딱 1번 진 순간 돌이킬 수 없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제국을 세울 정도로 몸빵력과 동원력이 뛰어난 경우에는 말이 필요 없을 정도.[3] 예를 들어서 노상 선우가 한문제에게 답장을 보낼 때 간독을 한 자 두 치라는 규격으로 보내서 도발했는데, 사실 한나라에서 한 자 한 치라고 오직 황제만 쓸 수 있는 간독규격이 있었기에 저런 결정을 한 것이다.[4] 훗날 송나라의 관료 배송지유표를 엄청난 역적으로 평가했는데, 그 이유가 형주목밖에 안 되는 관직을 갖고도 거만하게 황제의 옷을 평상복으로 입고 다녔기 때문이다.[5] 한 설전에서는 한나라 사신이 흉노는 노인을 천대하는 관습이 있다면서 그 증거로 좋은 건 젊은이에게만 주고 노인은 별 볼것 없는 것만 먹는다는 걸 근거로 내세웠는데 중항열은 한나라에서도 군대에 들어가는 젊은이에게 부모가 좋은 거 먹여주지 않냐고 말하고는 이렇게 반박했다. '''흉노는 전투를 자주 한다.-그런데 늙은 사람이 싸울순 없다.-그런고로 좋은 건 젊은이에게 주어 잘 싸울 수 있게 하고 그 젊은이가 노인까지 지키는 거다.''' 라고 했다. 또 한나라 사신이 "그럼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는 건 어떻게 설명할 거냐?" 라고 하자 "그건 대를 잇기 위함이다. 그리고 한나라에서도 가족끼리 별것도 아닌 거 가지고 죽이는 일이 생기면서 뭔 소리? 멋대로 기준삼아 얘기하지 마시오" 라고 반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