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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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중화사상의 내용
3. 형성과정
4. 특징
4.1. 중국 전체의 통합
4.2. 배타성
4.3. 다른 문화권과의 비교
4.4. 민족주의(내셔널리즘)와의 비교
5. 외국에서의 시각
6.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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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中華思想[1]
영어: Sinocentrism
프랑스어: Sinocentrisme
중국인(주로 한족[漢族]) 특유의 자문화 중심주의 사상. 골자는 중화 문명(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며, 그 문화적 역량이 어떠한 다른 문명보다도 우수하다고 믿으며, 다른 문명을 오랑캐로 낮잡아보는 사상이다. 나라 이름부터가 '중심 국가'라는 의미의 '中國'이다.
자국중심주의야 어느 나라나 일정 부분은 가지고 있는 거고, 애국심도 그 자체를 마냥 비난할 필요는 없지만, 중국의 중화사상은 다른 나라에 대한 멸시와 극단적 자국중심주의의 본보기로 거론되기도 하므로 문제가 되기도 한다. 현대에 들어 다문화/다인종을 접한 젊은 중국인들은 이런 경향이 비교적 옅어진 편이나, 한국도 마찬가지지만 남녀노소를 불구하고 자국의 문화와 역사에 지나치게 심취한 사람들이나 또는 소위 '중빠'(...)라 불리는 극단적 중국 추종자 중에는 여전히 중화사상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있다.
'''홍콩인들처럼 중화사상+시민의식(다른 나라에서 민폐짓을 하고 다니면 중화민족의 격을 손상시키는 것이다.)라면 문제가 될 여지가 없으나, '''중화사상의 제일 큰 문제점은 정말 미친놈이 나타나서 이 사상을 더 진화시켜 나치 독일같은 짓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2]

2. 중화사상의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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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적

서융
중화#s-2
동이

남만

한족은 대체적으로 중국 밖의 다른 나라나 민족은 자신들과 구별지어 오랑캐로 여기고 멸시하는 성향이 강했다. 중원을 중심으로 각각 동이(동쪽 이민족), 남만(남쪽 이민족), 북적(북쪽 이민족), 서융(서쪽 이민족)이라 칭하였다.[3] 다만 인식과는 달리 주변 이민족에 대한 이러한 호칭들은 처음부터 우월주의에 쩔어서 폄하적 의도로 만들어진 건 아니다. 예를 들어 동이에 대하여는 '동방을 이(夷)라 한다고 하였다. 이라는 것은 뿌리이니, 어질어서 살아나는 것을 좋아하므로 만물이 땅에 뿌리내려서 나오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라고 해석하였다.
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가운데 나라(中國)라고 할 만한 것이 북쪽은 사람이 살 수 있을까 싶은 혹한과 눈밭이 있는 시베리아가, 서쪽은 현대에도 교통이 어렵고 살기 척박한 타클라마칸 사막이 막고 있고, 동쪽으로는 끝을 알 수 없는 바다 태평양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정글지대와 섬들이 있을 뿐이다.[4] 고대인의 입장에서는 사람이 살 수 있는 최고의 땅이자 국가라는 세계관은 이러한 지리적 상황이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
명칭인 '중화(中華)'에서도 알 수 있듯이, 중화사상은 중앙[中]을 중심으로 미개한 주변부를 다스린다는 관념을 깔고 있으며, 따라서 중국이 '세계 유일의 황제' 개념이 정립되며,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등 나머지 지역은 혹은 제후 개념이 정립되어 발전한 중국의 역사 및 세계 체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완전한 황제의 통치를 위해서는 '중심부[中]의 절대 권력자인 황제를 정점으로, 각지의 왕 혹은 제후'로 이어지는 위계질서가 확립되어야 하는 것이며, 이를 정당화하는 것이 '하늘(天)로부터 부여받은 권위'(천명) 및 압도적인 인구와 영토에서 기인하는 문화력이었다.
따라서 '''근대 이전의''' 중화사상은 동아시아 문명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사상임과 동시에 국가간 권력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국제외교였다. 때문에, '''과거 역사의''' 중화사상을 정당화하는 것이 단순히 천명을 바탕으로 하는 위계질서'라는 것은 옳지 않다.이론적인 사상으로야 천명사상과 황제주의를 바탕으로 했으나, 실제로는 동아시아 어떤 국가를 상대로도, 심지어 당시 동아시아 전 국가가 연합해서 공격해도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한 국력을 자랑했던 중국의 국력과 지위를 인정하고, 중국은 황제국으로서의 지위를 인정받고 황제국의 권위를 누리는 대신 한반도 국가를 비롯한 주변국들의 군사적 안전(독립)과 정치적 안정성을 보장하고, 하사품이라는 명목으로 매년 수많은 선물을 지급하는 일종의 거래였다. 이 때문에 요나라나 서하, 금나라 등에 의해 국가의 존망이 위협받던 송나라는 정통 한족 국가임에도 황제국 행세는 겉치레였을 뿐, 거란과 여진을 자력으로 물리친 고려의 눈치를 보며 고려에 꼼짝하지 못했고, 중화식 외교관계에 어두워 주변국으로부터 뜯어내기만 할 뿐 그에 합당한 보상을 하지 않았던 원나라는 황실의 내분으로 군사력이 약해지려는 낌새가 보이자마자 바로 고려에 의해 쌍성총관부를 공격받게 된다. 또, 명나라와 청나라는 조선과 외교관계가 안정화되고 우호국이 된 후에 매년 조선에 보내는 하사품으로 인해 재정 부담을 겪었으며, 국가가 안정적이던 명나라 초중기에도 조선의 사신에게 '제발 적당히 좀 오면 안 되겠냐'며 조선의 공물을 오히려 부담스러워했다. 조선이 공물을 보내오면 그 공물의 몇 배는 되는 값어치의 하사품을 단순히 '천자의 은혜'라는 명목으로 지출해야 했으니까.
2010년대에 이 중화사상 때문에 중국의 외교가 갈수록 시궁창이 되어가고 있다. 일본의 침략이라는 고통의 역사를 공유하고 있음에도 한중관계는 갈수록 경색되어가고 있으며,[5] 자국의 어민들이 벌이는 불법 조업을 제대로 단속하지 않는 태도와 남중국해 문제 때문에 동남아시아 국가들과도 관계가 좋지 않다. 또한, 한때 아프리카 국가들에게 막대한 지원을 해주며 관계를 돈독히 하려던 중국이었으나, 아프리카 국가들 사이에서도 현지인 고용을 잘 하지 않는 등 투자로 인한 경제적 혜택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불만들로 반중 감정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외교 전문가들은 "'''중국은 과거 명청 시대의 외교보다도 후진적'(오히려 원나라의 그것과 더 가깝다)'''이라며, "중국의 외교관들은 이대로라면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평가를 내릴 정도로 중화사상은 중국의 외교적 행보에 있어서 큰 장애가 되고 있다.
전근대에 중화사상은 중국이 관리하기 힘들 정도로 거대한 영토를 가지고도[6] 안정적으로 통일왕조를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었다. 오호십육국시대오대십국시대, 정도를 제외하고 중국은 광대한 영토를 가진 국가답지 않게 통일 왕조를 안정적으로 유지해왔으며, 국가가 분열될 때도 외세의 침입보다는 내분과 반란으로 멸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현대 중국은 공산국가 건국과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유교적 질서가 파탄나면서 '''체면 문화가 사라지고''' 인문학이 박살난 반면, 당의 정책으로 강한 민족주의만 남게 되면서 주변국을 향한 일방적인 갑질로 바뀌어버렸다. 이 때문에, 과거와 달리 현대 중국은 변질된 중화사상으로 인해 외교에 큰 지장을 받고 있으며, 사실상 현대 국제사회에서 믿을만한 동맹국 하나 없이 고립되어버리게 된 가장 큰 원인으로 변질된 중화사상이 지적받고 있다.[7]
현재 현지에서 '''대중적인''' 중화사상의 내용을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다.[8]
홍콩, 타이완 : 우리나라는 세상의 중심이니 온 천하 만민한테 쪽팔릴 짓을 해서는 안된다.
중국 : 우리나라는 세상의 중심이니 우리 맘대로 깽판쳐도 된다.

3. 형성과정


역사적으로 '중국'이라는 개념이 등장하는 것은 상주 시대부터 확인할 수 있는 일로, 이(夷), 만(蠻), 융(戎), 적(狄) 등을 비롯해 수많은 이민족들이 존재했던 상황을 당시 문헌들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이후 춘추전국시대에 이민족과의 잦은 충돌을 빚으면서 '중국'과 '중화'의 정체성이 확립되다. 이 사상은 춘추전국시대부터 진(秦)ㆍ한(漢) 시대에 걸쳐 등장하기 시작했고, 특히 전한 시대의 공양학(公羊學)에서 두드러지며 오행 사상 등과 결합하면서 이론적으로 정립되고 기본적인 외형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한나라가 주변 민족들을 동서남북 다 털어버리기 전까지는 내부에서도 흉노와 같은 유목민들이 더 남자답다고 여기고 가서 선우가 되어 한나라를 괴롭힌 사람들이나 조타처럼 다른 농경 이민족들의 왕이 되어 나름 부심을 부리고 산 사람들이 꽤 있었다. 그리고 국제적 왕조인 당나라 이후부터는 주변국에도 본격적인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으며, 남송대 이후 발달한 성리학은 천자 중심의 질서를 더욱 크게 강요하였다.
재미있는 사실 중 하나는 중화 사상이나 중국 문명 자체의 시초[9]라고 볼 수 있는 주나라의 경우 연구 결과 의외로 초기에는 유목민 정복자[10]들이었다. 기록에는 상나라가 매우 포악해서 망했다고 되어 있지만 막상 주나라 사람들 역시 초창기에는 주변 민족들에게 별로 자비롭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11]
재미있는 사실 중 하나는 중화 사상이나 중국 문명 자체의 시초[12]라고 볼 수 있는 주나라의 경우 연구 결과 의외로 초기에는 유목민 정복자[13]들이었다. 기록에는 상나라가 매우 포악해서 망했다고 되어 있지만 막상 주나라 사람들 역시 초창기에는 주변 민족들에게 별로 자비롭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14]

4. 특징



4.1. 중국 전체의 통합


흔히 중화사상을 '오래된 중국의 민족주의' 정도로 이해하고는 하나, 단순하게 볼 것은 아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근거 중의 하나는 혈통적으로 다른 공동체들을 많이 흡수하면서 중국이 성장해 나갔기 때문이며, 중화사상을 정당화하는 중요한 근간 중의 하나가 '우월하게 세계의 중심에 선 화(華) 문화'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만주족청나라옹정제 같은 경우, 동이[15] 출신의 순 임금과, 서융 출신의 주문왕[16]을 거론하며, 이들도 한족 질서에 편입될 수 있었음을 《대의각미록》에서 주장하여 청나라의 정당성을 삼는 근거로 내세웠다. 한족 항목에서 볼 수 있듯, 실제로 남중국과 북중국은 혈통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제법 큰 차이가 있음에도, 역대 중국의 국가들은 '중화'의 범위로 이들을 묶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하지만 이는 지배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적인 면이 강한 주장으로, 정작 한족 신사[17] 계층이 청 황실을 오랑캐라고 보는 관점은 청 말기까지도 변함이 없었다. 이들 한족 신사층은 지방에 웅거하면서도, '멸만흥한(滅滿興漢; 만주족을 멸절시키고 한족을 부흥시킨다)'을 표방하며 언젠가 '오랑캐의 지배'를 뒤엎을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고, 그것이 대대적으로 폭발한 것이 이른바 태평천국의 난이다[18]. 이는 외세에 의해 나라를 빼앗겼다고 인식하고 있다면 당연히 가질 수 있는 이념이기도 하다. 정확히 말하면 근대적 민족구분이 없던 상태의 근대 중국에 민족주의가 유입되면서 이런 인식도 생겨났다. 아무튼 청나라가 안정된 뒤에도 한족에 대한 강경책과 탄압이 완전히 사그라진 건 아니었다. 문자의 옥 항목 참조. 다만 당시의 민족 탄압은 근대적 민족주의가 적용된 형태는 아니었고 민족간의 경계도 애매했다고 한다. 중화주의가 민족주의로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보통 태평천국의 난 전후로 본다.
현대에도 중화사상은 지배를 위한 이데올로기로 사용되고 있다. 우선 종족 혁명론에 근거해서 반청복명을 주장하던 한족들이 자신들이 권력을 잡고나자 중화민족 개념을 급조해서 한족이 다른 민족을 지배하는 걸 정당화했다는 점이 대표적인 예다.
물론 이민족 왕조의 경우는 이민족이라는 이유로, 잘한 점은 덜 인정받고 한족 왕조와 똑같은 병크를 저질러도 더 까이는 성향은 컸지만, 하여튼 청나라 말기의 혁명파들은 청나라의 지배기간을 한족이 식민지배당하는 것으로 해석하며, 신해혁명은 한족의 독립운동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근대적 민족주의를 이렇게 해석한 것이다. '''현대 중국에서는 하나의 중국을 강조하기 위해 정 반대의 주장을 한다'''는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 서구의 개념인 민족과 식민지에 대해 당시 중국에서는 여러 해석이 나왔는데, 특히 중화라는 개념이 근대적 민족주의로 따지면 어디까지의 범위인가 하는 것이다.
반청복명의 혁명파들의 주장은 장빙린의 종족 혁명론에 근거한 해석이었다. 종족 혁명론은 한족만이 중화로 여겨질 수 있기에 수준 낮은 이민족을 배척해야 한다는 관점인데, 그래도 장빙린은 '한족과 만주, 몽골, 티벳, 위구르가 모두 별개의 나라가 되어야 하므로 한족이 새 나라를 세우고 나면 다른 민족들도 알아서 독립해서 나라를 세우라'는 나름 공평하고 쿨한 태도였다(...).
반면에 개혁파들은 청 왕조도 중화에 포함할 수 있다면서 혁명파의 이 주장을 반박했다. 삼합회(三合會)의 시초가 되었다는 말도 있는 홍문(洪門)은 명나라 말기~청나라 초기에 일어난 비밀결사(秘密結社)로, "반청복명"(反清復明, 청을 몰아내고 명을 부활시킨다)를 모토로 삼는다. 이후 홍문은 모든 산당(山堂)과 반청조직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 되었다.[19] 이러한 '멸만흥한' 이념이나 조선베트남 등에서 내세운 소중화 사상은, 오랑캐로 일컬어지는 외래인 중심의 지배를 부정하는 기조에서 성립된 것으로, 뿌리 깊은 중화사상 하에서 정통 중화인이 아닌 오랑캐를 질서의 정점에 세우는 것을 잘 인정하지 않으려 들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다만 현대의 중국은 자국의 독립운동을 탄압하며 무조건 하나의 중국을 내세우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조상들이 이민족을 거부했다는 것을 묻으면서까지 '중국은 처음부터 다민족국가였다' 라고 하는 방향으로 역사관을 굳히는 중이고 동북공정도 이 과정의 하나. 근대에는 혁명파와 개혁파의 해석이 충돌하긴 했지만 결국 이러저러 하다가 신해혁명이 발발하면서 공화국 중국은 한족 중심의 체제일 수밖에 없는 형태로 출발한다.
그런데 문제는 혁명파 이론을 지지하던 한족들도 정작 시대가 바뀌고 나자 다른 민족들의 독립운동은 탄압하는 이중잣대를 보인다. 위구르와 몽골에서 독립운동가들의 중국 군벌과의 투쟁이 계속되었고, 이 부분은 근대 중국의 제국주의적인 면모이지만 그냥 그 부분은 축소되고 군벌시대의 흥미진진한 통일 과정 정도로 여겨진다. 하여튼 여기에서 현대의 소수민족 문제까지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즉 '중화인'들이 중화사상을 정당화하는 이유는 중화 문화였지만, 그 기저에는 혈통이나 인적 공동체의 의미가 깔려 있었다. 특히 근대에 와서 더 이런 성향이 굳어진다. 그러나 '''고대 이래 황하 인근 집단이 주변의 이민족을 흡수하며, 지금의 한족으로 세를 불려 나아가는 과정에서 '중화'의 범위는 끊임없이 확장되었다'''. 이것은 중국의 중심 지역에서 인구가 팽창하는 범위 이상으로 이루어진 문화의 확장을 동반한 것이었고, '중화인'의 혈통적, 인적인 구성도 중화사상의 주장과는 다르게, 계속해서 유동하면서 넓어져 갔다. 시대가 지나면서 중국의 영토가 계속해서 확장된 것 또한 이렇게 당연하게 자신을 '중화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늘어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전국시대에 중국의 일원으로 취급받게 된 연나라, 초나라, 오나라, 월나라, 진나라(秦) 등의 공동체는 본래 전혀 다른 정체성을 지닌 '다른 세계'였다는 사실이 상주 시대 기록의 분석을 통해 드러나고 있으나, '''역사의 방향성은 이 모두가 '중국'에 편입되는 쪽으로 흘러갔다'''.[20] 오호십육국시대 중국에 진입했던 수많은 이민족과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 청나라의 정복왕조 역시도 막상 유목민 시절을 벗어나 정주민이 되면서부터는, 중국의 압도적인 문화와 인구 속으로 빨려 들어가 중화사상에 물들어 이 질서 안으로 편입되었다. 물론 이러한 이민족들이 중국에 미친 영향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중화사상과 민족의 팽창이 단지 문화와 인구를 앞세운 평화적 사상이라는 통념도 다소 중화중심적 해석인데 삼국지 같은 고서만 봐도 '''의도적으로 이민족을 사냥하고 흡수해서 동화시키는''' 행위도 숱하게 존재했다.
이민족 문화가 흡수되어 중국문화가 형성된 경우로는 청나라 시절에, 중국인 전통의 상투가 사라지고 변발로 문화적 습속이 바뀌었으며, 이후 현대화를 거침에 따라 상투는 다시 부활하지 못했다. 문화란 일방적으로 한쪽이 다른 한쪽을 물들이는 게 아니다. 물론 이 경우는 어디까지나 정복자의 강요에 의한 것이지만. 하지만 결국에는 이민족들도 '중화사상'이라는 큰 흐름에 뭉뚱그려졌다.
이처럼 '''중화사상의 막대한 힘이 동아시아에 작용한 결과, 근대 이전까지의 2,000년간 중국이 방대한 면적과 수많은 인구를 하나의 틀 안에 묶고, 이를 제국의 형태로 실현할 수 있었던 중요한 통치 이데올로기로 기능할 수 있었다'''.
또한 지금까지도 중국이 그 거대한 세력을 유지 가능하면서, 다른 국가들에 비해 꾸준히 정치적-통치적 폐쇄성을 띄는 근간이 되기도 하였다. 이는 중화사상으로 인해, 동아시아의 문화적 다양성이 사라졌다는 말도 되어, 빛과 그림자나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신화가 한국의 세계관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된 것도, 개별적인 정체성보다 중화사상에 근거한 세계 체제를 지향했던 중화 문화권의 과거사를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허나 중화사상은 근대적 민족주의로 발전한 이후로 큰 변화를 겪었기 때문에 지금의 중화사상도 과거의 중화사상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현대의 중화사상은 쇼비니즘에 가까운 성격으로 나타난다.
사실 본래 반청복명,멸만흥한을 외치던 한족들이[21] 갑자기 '하나의 중국'을 외치게 된 이유는 결국 정치적 이유가 90퍼센트인데, 막상 만주족의 지배를 뒤엎으며 독립하고 나니 마찬가지로 만주족의 지배를 받던 티벳,위구르,외몽골의 영토가 탐이 나서다. 만주족 왕조 청나라, 즉 '만청'을 부정하면 그 만청이 두배로 넓힌 광대한 영토를 다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되는것. 그래서 갑자기 '56개 민족의 연합체'라는 사상이 강조되게 된 것이다. 예를 들자면 청나라가 무너진 후에 티벳도 독립했는데, 50년대에 마오쩌뚱이 티벳을 강제병합 한 이후로 중공은 지금까지 쭉 '역사적으로 티벳도 중국의 일원이었기 때문에(청나라) 강제병합이 아니며 티벳 독립운동도 반란분자들에 불과하다'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4.2. 배타성


신체 구조, 군집성, 배타성 면에서 한족은 오랑캐와 구별되지 않지만, 그래도 한족은 전적으로 오랑캐와 구별되어야 한다. 왜 그러한가? 만약 인간이 스스로를 사물과 구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늘의 법칙을 어기는 것이다. 한족이 스스로를 오랑캐와 구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지상의 법칙을 어기는 것이다. 천지가 인간들을 서로 구별하고 통제하고 있는데 인간이 스스로 사회 집단을 구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바로 인간의 법칙을 어기는 것이다.

- 왕부지(王夫之 1619~1692)

중화사상은 자문화 중심주의 사상이기 때문에, 그 특성상 당연히 강한 배타성을 깔고 있다. 사실, 현재의 중국인들 일부도 은연중에 아시아의 다른 민족들을 깔보면서 오만하게 행동하는 경우가 있기도 하다.[22][23]
전근대 중국이 동아시아권에서 막대한 문화적인 영향력을 행사함에 따라, 중국 바깥 권역은 자연히 오랑캐라고 멸시되었으며, 이를 방위와 결합해 '동이, 서융, 남만, 북적'이라 호칭하며 깔보았다. 이는 중국의 문화를 가장 적극적으로 수용했고 중국에 사대하면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던 조선 역시도 예외가 아니었다. 일례로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국왕 선조를 만난 명나라 사신 송응창은 "조선 왕이 고집이 세어 내 말을 듣지 않으려 하니 한심하다. 오랑캐를 설득시키는 일이 이와 같다"고 말한 바 있다. 또한, 처음 임진왜란이 발생했을 때 조선의 지원 요청에 북경에서는 황제에게 ''' 오랑캐들'''끼리 싸우는 것이니 도울 필요도 없다는 자국 내 의견도 있었다. 한마디로 일부 중국인들에게는 소중화를 내세우던 조선도 대놓고 오랑캐였던 셈이다.

4.3. 다른 문화권과의 비교


과거 중화사상의 유래가 된 서적들의 내용을 살피면, 과거 히틀러의 게르만 우월주의나 라틴 우월주의, 슬라브 우월주의와 크게 다른 점은 없다. 슬라브를 예를 들어서 설명하면, 현재 우크라이나 민족과 러시아 민족의 사이가 좋지 않으나, 슬라브 우월주의는 그것과 상관없이 양쪽에게 호소할 수 있는 사상이다. 중화사상도 이와 비슷하게 중화권 지역이 가장 우월하다는 사상으로, 과거 중화사상은 현재 서구식 민족주의와는 비슷한 점이 별로 없어 민족적 거부감이 적었다. 또 하나의 다른 예로, 초기 로마가 팽창하던 시절, 라틴 문화권이 가장 우월하다는 사상도 있었다. 현실은 로마와 라틴 연합이 싸우게 되었지만, 결국 승리한 로마가 점령한 라틴 도시국가들을 대한 것만 봐도, 로마 역시 이런 생각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로마는 이들에게 완전한 자치를 주고, 투표권을 제외한 모든 로마 시민과 동등한 권리가 보장된 라틴 시민권을 주었다. 연공도 요구하지 않았고, 단지 요구한 것은 전쟁이 났을 때 로마에게 보조병을 보냄으로써 협력하라는 것이었다.
이런 점을 보면, 로마의 민족 역시 라틴 민족들을 자신들과 동일하게 여겼으며 같은 라틴 문화권으로서 상당한 특혜를 베풀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로마의 경우 한니발의 침략을 받았을 당시 라틴 문화권에 있는 국가들의 자발적 지원을 받았던 반면에 중화사상의 경우에는 중국이 역사적으로 침략을 여러번 당할 때마다 중화문화권임을 자처하며 지원병을 제대로 보낸 나라가 거의 없었다는 점이 매우 다르다. 중화문화권에 속한 백제 또한 그 멸망 과정을 살펴보면 사비성이 함락되는 순간에도 지방 유력자들이 능동적으로 군대를 보내지 않았거나 지휘부가 통일되지 못해 각개격파당하는 모습을 주로 보인다. 부흥운동도 마찬가지로 세력들이 통합되지 못하고 따로 노는 모습을 자주 보인다. 무엇보다도 백제는 중화문화권에 속해 당나라에 조공하는 등 사대하던 나라였는데도 침략당했다는 점이다. 이는 라틴 문화권과 중화문화권이 제각기 매우 다르게 작용되었음을 뜻한다.
중국은 중화권의 영향이 크진 않은 편인 원나라 같은 이민족 왕조를 제외하면 일반적으로 중화권에 속한 나라들에 상당한 특혜를 베풀어 주었다. 그렇다고 해서 물론 항상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한반도는 몰라도 베트남의 경우는 중국에 잘 사대한 경우에도 별의별 트집을 명분으로 갑자기 중국왕조의 침공을 받는 일이 비일비재했는데 베트남이 숱하게 중국의 침공과 지배를 받은 이유는 원래 한나라, 당나라 시대의 영토라는 이유로 '다시 회복해야 할 영토'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중화주의가 타협적인 관계를 유지케 해줄 때도 많았지만 베트남에 대한 집요한 복속 시도는 중화주의가 팽창주의 역할을 한 예시.

전근대에는 당연히 혈연에 기반한 민족적인 면보다 학문적, 문화적 우월성이 강조된 사상이기 때문에 다른 민족들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으며, 이 사상의 영향으로 이민족들이 중국을 정복하고 얼마 되지도 않아서 중국을 자처한 사례들이 많다. 한 예로 청나라는 40년 만에 중국을 자처했다. 이 경우 민족끼리 동화되었다고 보기보다는, 중국 지역을 먹음으로써 타민족, 타국들보다 우월한 문명을 갖게 되었다고 선전한 것이다. 중화권에 속하는 국가들이 중화사상을 받아들인 이면에는 우리는 이런 위대한 문명의 일원이라는 생각이 있었으며, 서구에서 근대적 민족주의가 들어온 최근의 시각이 아니라면 딱히 민족적 자부심을 훼손하지 않는 사상이기 때문에 실질적 창시자인 한족만이 아닌 다른 민족들에게도 빠르게 전파되었다. 중국이나 중화 자체가 근대적 민족 개념이 아니었기에 가능했다. 물론 최근에는 과연 이민족들이 마냥 동화되었다는 기존의 해석이 합당한가에 대한 의문은 제시된다.[24] 역사해석에도 중화주의가 많이 반영되어 있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4.4. 민족주의(내셔널리즘)와의 비교


중화사상은 민족주의 또는 국수주의와 일견 비슷한 듯하면서도 차이가 있는데,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흔히 민족주의로 번역되어 쓰이고 있는 'nationalism'은 근대 영국에서 출발하여 유럽을 중심으로 퍼진 개념이라서, 그 이전부터 존재한 중화사상과는 태생이 다르다.
'nationalism'은 특정한 집단의 구성원 개개인이 하나의 공동체인 '민족'에 속한다는 자기의식을 지니고, 이를 대표하는 정체인 국가를 성립 및 유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사상이다. 이를 통해 개별적인 국민 국가는 고유의 언어, 문화 등을 누리며 타 국가와 구분된다. 이 개념이 수입되는 과정에서 민족이라는 말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일단 '근대 민족주의의 수입 이전에도 중화민족이 존재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근대 이후에나 등장한 개념화 작업이 근대 이전에 존재했다고 보는 점에서 무리한 해석이다.
유럽에서도 소위 '민족주의'로 지칭되는 'nationalism'이 18세기나 되어서야 등장했다고 이야기되는 이유는, 'nation'의 구성원들이 뚜렷한 독립적 공동체 속의 자기 정체성을 보유하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 이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 국민 국가의 보통 교육과 같은 것인데, 유럽에서 이것이 태동한 것은 18세기 계몽주의 사상 전파 이후이며, 그것의 실현은 19세기에 들어서야 보편화되었다. 그런데 중국만이 이러한 'nation'의 개념을 근대 이전부터(그것도 기원을 찾자면 '''상나라주나라 시대부터''') 갖고 있었다고 보는 데에는 무리가 많다. 때문에 최근 학계에서는 '민족'의 개념을 근대 이전으로 소급하는 데 조심스러운 편이며, '자국 의식' 정도의 용어로 대체하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반면 '화(華)'라는 개념은, 물리적인 혈통보다는 '''정신적인 사상, 문화, 관념적인 성격'''이 강하며, 소위 소중화를 표방한 주변국들도 중화사상을 인정하고, 조공 체제와 사대로서 받아들일 수 있었다. 물론 상기했듯 그래도 오랑캐로 취급하는 중국인들은 있었지만. 하여튼 동아시아에서는 이러한 중화사상에 반드시 중국 중심의 세계 체제가 동반되었으므로, 화이관(華夷觀) 자체가 개별 국가의 이념을 덮는 보편적인 세계관의 역할을 크게 했다.
일단 중화사상은 소국 혹은 속국이 중국이 문화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평화적인 주종관계를 맺는다면 중국은 이런 소국에게 문화-정치면에서 원조를 해준다는 것을 포괄하고 있기 때문에 특별히 중화사상 그 자체가 팽창주의인 것은 아니다. 중국은 이런 중화질서 내에서 행해진 조공무역에서 다른 문화권에 비해 이익을 주면서 소국을 자신의 편으로 잡아놓으려고 했다. 다만 베트남처럼 중국에 사대해도 지속적 침략을 받은 경우도 있으며 '''아군에게 베푸는 포용적인 면을 보이는 근대 민족주의 이전 제국의 사상은 로마 제국이나 오스만 제국에서도''' 보이기 때문에 '중국 문명만의 특수한 평화주의 사상'이라는 해석은 현대 중국의 타민족 지배를 합리화하는 신중화주의에 기반한 측면이 있다.
중화 질서에서의 서열도 국력의 영향이 물론 있기는 했지만 딱 국력에 의해서 정해진 것은 아니었다. 그와 별개로 한족이 팽창주의적 면모를 보이지 않은 것은 아니며, 사상과 문화의 차이로 흔히 소개되는 팽창 방식과 차이가 있어 느끼기 어려울 뿐이다. 동남아시아의 일부 지역, 중국 남방 지역이나 만주 등의 사례(고구려인, 베트남 민족 등등)를 보면 학살, 강제 이주 등으로 그 지역에서 타민족의 뿌리를 뽑은 후에서야 이주하는 방법이 한족의 팽창에 주로 이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놓고 타민족에게 인간 사냥[25]을 시전하고 기존의 문화를 금지시켜 동화시키는 정책은 근대 식민주의에서 나타나는 것과도 비슷하다.
하도 옛날이라 정사 혹은 준정사로 취급받는 것들이 적어 신뢰성의 문제가 있으나, 춘추전국시대 같은 시대를 보면 이는 은근히 고대부터 중국에서 이용되던 방식으로 이민족 정복 기록 후에도 이주하는 사람들도 별로 없고, 영토도 딱히 크게 늘어나지 않고 있다가 이민족이 그 지역에서 대규모 학살, 이주 혹은 한족 혈통을 자처한 후에서야 영토와 그 지역에서 한족 인구가 빠르게 팽창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교과서에서 보면 중국 대륙의 촉한 지역, 남방 개척 등이 마치 한 번에 그냥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나 중국 대륙의 한족이나 이민족들의 역사를 교차검증하면 실제로는 위의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다.
딱히 혈연에 한정된 사상이 아니기 때문에 소위 '중화민족'의 구성원이 아니어야 할 일본 등지에서 오히려 스스로가 중화임을 주장하는 소위 소중화 사례가 나타난다. 이들이 혈통적, 인적으로 중화를 주장한 것이 아님은 분명하며, 문화적인 의미가 크게 작용한 것이다. 즉 민족주의라는 말로는 문화의 파급과 세계 체제라는 의미에서 중화사상의 외연을 포괄하지 못한다. 이는 근대 유럽의 민족주의와 달리, 독립적인 자기 정체성[26]을 가진 공동체의 성립과, 이것의 수호를 동반하지 않는 속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근대 민족주의와 중화사상은 그 근저를 특정한 인적 집단에 둔다는 점에서 많은 공통점을 지니지만, 근대 민족주의는 자기 민족(nation)과 타자와의 명확한 구분, 자기 공동체를 대표할 국가의 건립과 공동체의 정체성 유지에 굉장한 힘을 쏟는 반면에, 중화사상은 문화적 역량(그리고 그것을 통한 외부 세계의 '교화')과 세계 체제라는 의미가 더욱 강조되며, 그로 인해 동아시아 체제와 중국의 정체성을 떼어내서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을 차이로 들 수 있겠다.
다만 근대 이후 중국에 민족주의가 전파됨에 따라, 근대 민족주의와 중화사상 간에도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속성이 강해졌다. 이는 서구 열강과 일본의 침입을 겪으면서 대내적 결속을 강화하기 위해 필수불가결했던 것이기도 하다. 청나라 시절까지의 중화사상이 동아시아 세계의 종주국으로서 일종의 자뻑이었다면, 현재의 중화사상은 '하나의 중화민족'을 주장하는 근거로서, 국민 국가의 구성을 위한 자국 통합의 중요한 도구로 작용하고 있다. 그 결과 중화사상은 소수민족 통치를 합리화하는 하나의 중국의 이념적 이데올로기로서도 기능하고 있다. 그렇기에 현대의 중화사상은, 19세기 이전의 것과 일정한 부분에서 차이를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즉 종합하면 전근대의 중화사상은 근대 민족주의와는 차이가 있으나 현대에 와서는 근대적 민족주의로 발전했다.

4.5. 패권주의


중국이 제1등국의 지위가 되었을 때 어떻게 하면 좋을까? '''옛날부터 중국에는 '약한 자를 구하고 위태로운 자를 돕는다'라는 말이 있다. 중국에 이와 같은 좋은 정책이 있었기에 수천 년 간 강대했을 때에도 안남, 버마, 조선, 시암 등의 소국이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럽의 바람이 동으로 불어오자 안남은 프랑스에 멸망당했고, 버마는 영국에 멸망당했으며, 조선은 일본에 멸망당하고 말았다. '''따라서 중국이 만일 강대해진다면, 우리는 민족의 지위를 되찾을 뿐만이 아니라 세계에 대해 일대 책임을 질 필요가 있다. 만일 중국이 이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세계에 있어서는 별 이익이 없으며 오히려 큰 해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은 세계에 대해 어떠한 책임을 져야 하는가?

'''지금 세계의 열강이 추구하는 것은 다른 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이다. 만일 중국이 강해져서 열강과 마찬가지로 다른 나라를 멸망시키고, 열강의 제국주의를 흉내내어 같은 길을 걷는다면, 그들의 자취를 그대로 밟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하나의 정책, 즉 '약한 자를 구하고 위태로운 자를 돕는다'는 정책을 결정할 필요가 있다.''' 그럼으로써 우리 민족의 사명을 다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약소 민족을 돕고 열강에는 저항해야 한다. 전 인민이 이 뜻을 단단히 정하지 않는 한 중국 민족에게는 희망이 없다. 우리는 아직 발전하지 않은 상태이므로 '약한 자를 구하고 위태로운 자를 돕는다'는 뜻을 단단히 정해두어야 한다. 그리하여 장차 강대해졌을 때 오늘날 몸으로 느끼고 있는 열강의 정치·경제적 압박에 의한 고통을 되새겨, 장래 약소 민족이 만일 이와 같은 고통을 받는다면 우리는 그러한 제국주의를 소멸시켜 버려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치국, 평천하'인 것이다.

우리가 장차 '치국평천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먼저 민족주의와 민족의 지위를 되찾을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고유의 도덕과 평화를 기반으로 하여 세계를 통일하고, 하나의 '대동의 치'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야말로 우리들 4억 인의 큰 책임이다. 여러분은 모두 4억 인민의 한 분자이다. 모두들 이 책임을 져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민족주의의 참된 정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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쑨원, 1924년 3월 24일 연설

보다시피 쑨원의 주장 또한 중화의 덕(德) 때문에 주변국이 독립과 평화를 보장 받았느니 하며 전근대 중화사상을 드러내는 내용이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중국의 책임과 의무를 강조하는 부분 또한 있다. 즉, 현대 중국의 패권주의는 쑨원, 더 나아가 전근대의 중화사상에 기반한 역대 중국 왕조의 그것과 비교해도 크게 변질된 형태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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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칭 대인이라면 군자의 면모를 보이고 을 베풀어야 하는데 오히려 소인배 짓거리를 앞장서서 하고 다니니 마음으로 따를 리가 없다.''' 전근대 중국은 천자국을 자처하는 만큼 황제국으로서의 체면을 상당히 신경썼으며, 그래서 과거 강대국에게 충성 및 우호의 이미지를 지닌 조공도 황제국의 체면때문에 제후국이 준 조공보다 더 높은가치인 선물을 역으로 돌려줬으며 자국민이 주변국에 민폐를 끼치는 경우에는 '''오히려 가중처벌을 했다. '''이는 중화사상의 영향도 있었지만 유교의 종주국이라는 특성상 덕치를 근본으로 삼았고 항상 주변국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했기 때문이다.[27] '''특히, 그 상대가 조선 같은 제후국인 경우에는 오히려 국가가 '''국민에 대한 보호를 포기하고''' '니들이 알아서 처벌하고 나중에 적당히 보고만 해라.' 고 할 정도로 주변국 관리를 잘 했다. 심지어 청나라도 역모, 밀수 등을 제외한 일은 조선에서 처리하도록 했다. 이 때문에 조선에서는 명 초기 때까지 남아있던 순장 풍습이나 공녀 요구에 대해서 깔지언정 '지들이 뭔데 우리한테'나 '니들이 사람이냐'는 식의 근본적인 불만은 터져나오지 않았다. '''아니, 우리나라를 돕다가 되려 지들이 망해버렸다.'''[28] 그러나 현대 중국에서는 마오쩌둥의 한 마디에 민족주의의 과격화를 막던 인문학과 유교가 근본적으로 박살나게 되어 시간이 흐르자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자문화 우월주의와 타국을 향한 갑질과 천시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당시 조선에서는 명이 국운이 기운 걸 '''빤히 알면서도''' 차마 명나라를 버리자라는 소리가 삼전도의 굴욕 전까지 나오지 않았다.[29] 현재의 한국에서도 미군이 정말 크게 사고를 치는 경우 외엔 어지간하면 친미 베이스를 깔고 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중국의 '''한족''' 정권이 한반도를 직접 손에 넣으려고 한 것은 한무제수양제, 당태종, 당고종 정도이다. [30][31] 그 이후 수많은 외침은 북방의 유목민족이나 일본에 의한 것이었다고 하나 한국사 전체로 보면 한족의 침략이나 이민족 침략이나 비등비등하다. 다만 당고종 이후로는 한족정권이 한반도를 손에 넣으려고 시도한 적이 없으며, 한반도 국가를 분명히 이민족 국가로 인식했고, 중국의 영역에는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물론 '중화의 영역'에는 포함된다고 인식했다. 이에 맞춰 한반도 정권들은, 외교관계의 한 형식인 사대의 예로 중국을 명목상의 상국으로 인정함으로써 중화질서에 편입하는 방식으로 평화를 얻었다. 현재 캐나다-미국의 포지션과 비슷하다.
더구나 보통 중국 대륙의 통일 왕조는, 만주연해주 정도를 제외하면 먹을 영토도 얼마 없는 동쪽보다는 서쪽으로 팽창하는 것을 선택했다.[32] 동쪽은 침공할 곳이 없으면 침공하는 정도로 큰 관심이 없었으며[33] 동쪽에 관심을 가질 때는 시비를 걸기도 하는 국가들이 나타날 때 정도였다. 유목민들은 모르겠지만[34] 최소 한족 왕조들 때에는 옛날 기록들을 참고해도 동쪽 영토에 대한 인식은 생각보다 그리 좋지 않았다. 한족들은 좋은 토지들을 찾아 돌아다녔는데, 일단 양은 많아도 물의 문제 같은 것들이 있는 곳들처럼 그리 좋지 않은 곳들이야 물론 중국 대륙에도 있었지만 동쪽은 한반도의 경우처럼 산이 많고 의외로 토착 인구도 많은데다가 토지의 질과 양이 모두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물론 북서쪽도 가까운 지역들은 토지가 질과 양이 모두 별로 좋지는 않았지만 사막을 넘으면 매우 좋은 토지들이 있다는 걸 중국인들은 이미 한나라 시대에 알고 있었으며 사막을 넘는 도박을 해볼만하다 생각해서 한무제 같은 제왕들도 시도를 하긴 했다. 그러나 동쪽 진출은 광무제나 위징 같은 사람들도 경제나 국력 낭비 정도로 여겼다. 물론 결국 북서 방향에서는 유목민들과 사막에 넘는데 실패하고 남쪽 방향에서는 동남아시아의 민족과 정글에 막혔다. 히말라야처럼 그냥 이유없이 장벽 역할을 하는 높은 산들도 방해물이었다.
사실 중국은 지금도 딱히 자원도 없고 인구 밀도만 높은 지역들은 탐내지 않고 대체로 바다 혹은 북서 방향으로 팽창하기를 원하는 편이다. 괜히 함께 미국에 맞서고 있는 러시아 혹은 인도에게 불신감을 주면서까지 1인당 자원량이 많은 지역들을 영토 교환[35]하거나 돈을 주고 사려고 하는 게 아니다. 러시아하고도 영토 협상을 하고 있어서 국경이 조금씩 변하기도 하며 세계 곳곳에서도 이런 협상들을 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어차피 영토 병합이 거의 불가능하여 영향력 확장 정도만 가능하기도 하고, 또 그런 것은 방향을 가리지 않는다. 그래서 오늘날의 중화사상은 서방의 패권주의와 다를 게 별로 없는 형태가 되었다. 현재 남중국해 등지에서 이뤄지는 분쟁이나 한반도에 대한 압박은 겉으로 보면 자원을 놓고 벌이는 충돌이지만, 실제로는 이들 나라를 장기적으로 장악하여[36] 최소한 제국 주변의 안정을 확보하고, 팽창이 목적이라면 이들 지역을 기반으로 더욱 뻗어 나아가고자 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 증거 중 하나가 바로 도련선 전략이다.[37]
이 중화사상이 미국의 패권주의와 비교되는 이유는 미국의 패권주의와 달리 중국은''' 자국을 위에 두고 일방적으로 패권을 휘두르는 듯한 '''외교방식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도 강경할 때는 강경하지만, 기본적으로 민주주의자유주의를 표방하는 만큼 상대방을 당근과 채찍처럼 강경하면서도 달콤한 경제적 이익으로 살살 달래기도 하고, 지원을 해주기도 하는 등 서방 세력에 편입하는 것에 대한 대가를 확실히 지급한다. 어떻게 보면, 이 미국의 외교방식이 오히려 위에 언급한 '정석적'인, 그러니까 과거 중국 왕조들의 제국(帝國)으로서 펼쳤던 중화 질서의 구축 방식과 유사할 지경이다.
반면 중국은 대국이자 상국인 자신의 나라를 중심으로 옛날 제후국이였던 국가가 중화 세계에 편입하는 것을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옛 중화제국의 세력권으로 여겨지는 나라들에 대해서는 외교적으로 고압적이고 일방적이다. 이 점이 미국의 패권주의와 비교되는 중화사상의 특징이다. 사실 미국 역시 자국의 세력권 내에서는 중남미, 중동만 봐도 잘 알듯이 지극히 고압적이고 일방적인 패권을 휘두르고 있다. 이 때문에 동아시아 지역과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반중감정이 강한 것처럼 중남미 지역에서는 반미감정이 강하다. 그리고 동아시아 지역에 미국과 동맹을 맺은 한국과 일본이 존재하듯이, 최근 중남미 국가들이 중국과 동맹을 맺는 것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중남미 국가들의 상태가 영 시원찮기도 한데다가, 오히려 중국이 남미 주변 국가들에게 보여주었던 미국을 능가하는 막무가내식 고압적인 태도와 자원만 빼먹어 가려는 얌체적인 모습을 보고 슬쩍 손을 빼려는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이 점은 아프리카 국가도 마찬가지. 오히려 아프리카 국가들에서 반중감정이 조금씩 싹트고 있다.
최소한 미국의 경우에는 베트남 전쟁과 이라크 전쟁,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통한 3 번의 경험과 2차 세계 대전 이후 세계를 주도해오면서, 단순히 국력과 군사력만으로 밀어붙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나라이며, 이 때문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시절을 제외하면 서방세계와 서방세계는 아니지만 외교적으로 친미국가를 상대로는 대우를 잘 해준다. 즉, 갑질은 할지언정 최소한 갑질에 대한 대가는 주면서 갑질을 하기 때문에 주변국들 입장에서도 자국민을 상대로 내밀 명분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의 경우는 주변국들의 자주국방과 경제를 무시한 채 무조건 중국을 따르라고 일방적으로 압박하는 데다가 그 태도나 형식도 미국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고압적이며, 주변국 입장에서 자국민들을 설득하는데 필요한 명분을 제공하지도 않는다. 이 때문에 미국의 견제책이 되어줄 국가로 생각했던 중남미 국가나 허울만 좋아보이는 중국의 식민지 정책인 일대일로를 통해 경제를 상승시킬수 있다고 기대했던 아프리카 등 초기에 친중이던 지역들 조차 얼마 되지 않아 '''죄다 반중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자국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해 일대일로에 참여했던 아프리카 국가들 상당수가 중국 채무로 인해 국가재정 파산 선언을 하는등 난리났고 이로인해 아프리카 중 독재정권이 아닌 국가들은 대부분 친미로 돌아서고 있다.
베트남 전쟁을 예로 들자면, 이 전쟁은 미국의 패권주의를 비판하는 예시로 정말 자주 등장하는 전쟁이면서도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이 중국보다는 낫다는 점을 보여주는 전쟁이기도 하다. 미군이 베트남에서 철수한 직접적인 원인은 '''명분없는 침략전쟁을 반대하는 시민들의 대규모 반전시위'''에 정부가 굴복한 것인데, 이건 독재국가 중국에서는 꿈도 못꾸는 일이다. 즉 미국은 정부가 막나가서 침략전쟁을 벌여도 시민들이 그것을 통제하는 것이 가능한 문민통제 민주국가인데 비해, 중국은 정부나 독재자의 행동에 시민들이 제동을 걸려 했다가는 그냥 유혈진압 피바다가 펼쳐지는 독재국가인게 가장 큰 차이점이다. 티벳과 홍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보라. 심지어 시민들이 정부를 비판하기는 커녕 오랜 세월 이어진 중화패권주의 내셔널리즘에 세뇌되어 물개박수를 치며 자국정부의 패권주의와 유혈진압을 응원하는 지경이다. 이렇게 세뇌된 국민들이 자국정부의 침략이나 패권주의를 응원하는 국가로는 '''나치독일'''과 '''일본제국'''이 있었다. 문화적 측면에서 봐도 미국은 과거 인디언,남미 등에 대한 침략을 비판하는 내용의 영화,소설,게임,음악 등이 넘쳐나는데 비해 '''중국에서 티벳 강제병합과 독립운동 탄압을 비판하는 미디어물을 제작한다면 어찌 될지 빤히 보이는게 현실이다.'''
이로 인해 중국은 동아시아 패권을 넘볼만한 국력을 지녔음에도 미국-한국, 미국-일본처럼 동북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 진정한 동맹국이 없는 상황이다 게다가 가장 인접한 국가이며 동남아시아 신흥 경제국가이자 군사대국 중 하나인 베트남과도 중월전쟁으로 사이가 안 좋았지만 중국의 강압적이고 남중국해 해양권등 영토까지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패악질을 지속적으로 하자 베트남전 앙금을 완전히 털어버리고 옛날 적군이였던 미국을 끌어들이며 친미국가로 변했다. 제아무리 초강대국이라고 하더라도 지역강국들의 협조와 동맹이 없이는 결코 세계 패권을 쥘 수 없다. 한때 유럽의 패자였던 나폴레옹이 어떻게 무너졌는지를 기억하자. 즉, 근현대의 중화사상은 민족주의, 패권주의라고 봐도 무방하다. 사실상 중국 위협론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는 셈이다. 게다가 시진핑의 장기집권 이후 이 현상이 더욱 심화되고 있는데,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된다면 중국도 향후 나치 독일이나 일본 제국전철을 밟게 될 가능성마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실 이미 중국의 군국주의화는 가시화될 정도로 진행되고 있다. 시진핑의 종신 집권이 확정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나름 허락되던 공산당에 대한 적당한 비판이나, 게임이나 드라마를 비롯한 대중문화들이 고강도로 규제를 받고 있으며, 뮌헨 협정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와 오스트리아 합병하겠다고 막나가던 히틀러 때보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이전에 비해서 훨씬 막나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그래도 히틀러는 당시 1차세계대전 이후 연합국에 불만이 있던 나라들을 포섭하여 자국군 서포트라도 했는데 중국은 근처 동맹국이 핵무기라는 강력한 원툴 외에 전력이라 할 수 없는 북한과 공공의 적인 미국을 견제하려는 불편한 동맹국 러시아[38] 외에는 아예 없다고 무방하며 만약 미국과 전쟁이 일어난다면 주변 강국인 대한민국, 일본, 호주, 베트남, 인도 등은 무조건 미국편에 설게 뻔하다. 이 때문에 믿을 수 있는 동맹국가들을 모두 잃어버린 채 공공의 적으로 찍혀버렸고, 그나마 미국을 견제하기 위한 불편한 동맹관계로서의 중러관계만 간신히 유지되는 상황이다. 거기다 해마다 군사 퍼레이드의 규모가 점점 화려해지고 커지고 있으며, 예전에 그나마 보여주던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 전략 역시 미국과 같은 초강대국을 상대할 때 빼고는 완전히 사라졌다. 이마저도 미국의 트럼프가 중국을 상대로는 시진핑 이상으로 강경하고 막나가는 모습을 보이는 데다가 중국 역시 미국이라는 거대한 소비시장이 존재하지 않으면 경제가 붕괴되며, 동시에 미국이라는 가상적국이 존재하지 않으면 내부 불만들이 모조리 중국 공산당으로 옮겨질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미국을 상대로는 꼬리를 내리는 것일 뿐이다. 또한, 중국의 국민들 역시 이전에 비해서 훨씬 국뽕에 찬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징기즈 칸고구려 등등 뭔가 대제국을 창설한 타 민족의 나라나 영웅을 중화민족 영웅이자 나라라며 누구도 속지 않을 수준의 수준 낮은 역사 왜곡을 일명 차이나 머니로 포섭[39]하여 저지르거나, 신화나 고대 사료 특유의 과장된 비유를 역사적 사실이라고 우기는 등 점점 폐쇄적이고 광신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즉, 지금의 중국은 군국주의 국가가 막장루트를 타기 직전의 모습을 이미 보여주고 있는 상황이다. 일각에서는 이미 미국과의 무역전쟁으로 경제에 큰 타격을 입고있는데 이게 장기적으로 지속되어 소생 불가능 상태까지 가면 너죽고 나죽자 식으로 핵을 날리는게 아니냐는 최악의 시나리오도 가정 중이다. 막장으로 유명한 공산당은 망해도 혼자 망하기보단 동귀어진을 택할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 2020/02/28 동귀어진 벌써 시동 걸었다.
전 세계를 혼란에 빠지게 만들고 온 세상에 퍼뜨린 COVID-19건으로 불편한 동맹 관계에 있던 러시아까지 독립적 조사에 찬성을 표하였지만# 러시아는 어디까지나 중국과 이번 일은 별개인 모습을 취하기 위해 한 것이고 공공의 적 미국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중국군도 필요하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좋은 관계이다.

5. 외국에서의 시각


로마에선 로마법을 따르자의 훌륭한(?) 예시. 타국에서 중국인들 이미지 망치는 큰 문제점으로 작용하고 있다.[40] 당장 옆나라 일본만 가도 이놈의 중화사상 때문에 중국인 혐오가 생긴 일본인이 한둘이 아니다. 특히, 미국이나 캐나다같은 이민자가 많은 국가에서도 일부 중국인 때문에 이미지가 썩 좋지 않다. 덩달아 같은 아시아인인 한국인이나 일본인, '''대만'''인들(민폐짓을 하라면 대륙인 흉내를 내라고까지 할 정도..)까지 엿먹이고 있다. 특히 같은 동아시아 국가 사람들은 더더욱 심하다. 길가다 물어볼게 있어서 동아시아인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 중국어로 물어 본다던가,[41] 새치기 역시 번번히 일어난다. 물론 단순히 무개념 중국인으로 볼 수도 있지만, 언어의 경우 중국이라는 나라가 인구도 많고, 북미국가는 중국인이 많을테니 동아시아인은 무조건 중국인이라는 잘못된 시각[42]에서 고집하는 경우도 있다. 온라인 게임에서도 이러한 문제는 심각한데, 영어로 말하라고 해도 끝까지 한어 병음으로만 채팅을 치면서 타국 유저들의 게임 진행에 어려움을 주는 중국 유저들 때문에 게임상에서도 중국인들을 기피하는 풍조가 생기고 있으며, 불법 프로그램으로 타국 유저들을 괴롭히는 악질적인 중국인 핵유저들 때문에 올바른 방법으로만 게임을 즐기는 정상적인 중국인 게이머들까지 피해를 받고 있다(나라 자체가 유럽 연합급 사이즈인지라 정상인들도 꽤 있다). 이러한 잘못된 중화사상을 간직한 중국인들 때문에 엄한 중국인들까지 피해를 보는 것. 심지어 어떤 중국인은 중국어를 계속 쓰면 언젠간 전세계인이 중국어를 쓰게 되지 않을까 행복회로를 돌리기도 한다카더라.
과거에는 중국이 패권을 주장했어도 아주 일부를 제외하면 주변국들이 스스로 따라왔는데, 그 이면에는 위에서 언급한 외교 방식 외에도 문화, 즉 소프트파워라는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통일 중국 왕조는 군사력과 경제력 뿐만 아니라 선진적인 정치제도(3성 6부제), 철학(유교, 도교, 불교, 제자백가 등), 인문학, 과학,[43] 기술,[44] 예술[45] 같은 소프트 파워 또한 로마와 함께 명실상부한 최강국이었고, 주변국들은 중화문명이 굳이 힘으로 억누르지 않아도 제 스스로 중국 중심의 질서에 따라주었다. 당연히 중국이 당대의 선진국이자 모든 국가의 모범이었기 때문이다.[46]
하지만 현재로썬 중국의 문화가 주변국들은 고사하고 제3 세계보다도 나은 구석이라곤 중국 요리를 제외하면, 그것들마저도 홍콩대만을 비롯한 중국이 말하는 '유사 국가'들과 비교하면 완전히 없다. 정치제도는 일당독재이긴 하되 과두정으로 그나마 권력의 견제가 이뤄지던 것을 시진핑이 사실상 일인독재로 후퇴시켜 버렸으며, 그 전에 애초부터 민주주의가 정착된 주변국들은 중국의 정치체제를 배울 생각 따윈 전혀 없다. 철학은 이미 청나라 시절부터 남발된 문자의 옥으로 후퇴하고 있던 상황에서 문화대혁명까지 일어나고 계속적으로 탄압을 해 온 결과 유교 문화의 헤게모니는 이미 한국에게 넘어갔고,[47] 예술도 문화대혁명의 광기가 휩쓴 뒤에도 지속적으로 검열을 해대니 문화·예술이 심각하게 지체되어 대중문화는 일본 문화야 말 할 것도 없고, 후발주자인 대만 문화한류가 중국 대륙을 휩쓸고 있는 처지이다. 그나마 다 지난 과거 일이라 검열에서 비교적 자유롭고 예산을 많이 부을 수 있는 사극 정도만이 주변국에 먹히는 수준.[48] 현실적으로는 결국 중화사상에서 중국 자신이 '''힘'만' 쎈 유목민 오랑캐 포지션을 차지하게 되었고''' 주변국들은 중국의 경제력 등의 국력을 제외한 중국의 대부분을 무시하거나 거부하고 있는 상황이다. 동아시아나 동남아시아 일부 국가들의 경우 미국 등 더 합리적인 대안에 기대는 형국.
아이러니하게도 위에서 언급했듯이 전근대 중국이 행했던 외교 방식을 작금의 미국이 행하는 것처럼,[49] 전근대 중국이 누렸던 그 소프트파워를 통한 패권 역시 현재는 미국이 그 자리를 차지한 상태다. 민주주의와 인권, 과학기술, 예술, 대중 문화 등의 영향으로 인해 타국들 스스로가 미국을 국가의 모범으로 여기고 미국 중심의 질서에 따라주는 것. 복지국가로 대표되는 북유럽이나 캐나다 등을 모범으로 삼는 사례도 있는 것을 보면 서구권이라고 칭해도 될듯.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트럼프가 당선되면서 적극적으로 중국을 견제하며[50] 경제적으로 압박을 가하고 푸틴과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등 반중 친러 행보를 나아감에 따라 중국이랑 대립이 치열해지고 있다. 이는 지극히 당연한 조치로, 미국은 결코 동아시아에서의 패권을 내려놓을 생각이 없고 내려놓을 수도 없다. 민주당이 트럼프의 정책에 사사건건 딴지를 걸고 있지만 중국 견제에는 동참할 정도다. 동아시아는 현재 미중러 3국의 패권싸움이 가장 치열한 곳인데, 이곳에서 만일 미국이 패권을 내려놓게 된다면 동아시아 뿐만이 아니라 유럽의 나토와 중동질서가 상당히 어지러워진다. 더욱이 미국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인해 패권을 반 강제적으로 내려놓게 된 영국의 위상이 세계 무대에서 어떻게 되었는지를 눈뜨고 똑똑히 보았다. 미국은 세계대전처럼 본토가 철저히 박살나는 정도의 상황이 아니라면 결코 동아시아(최소 일본)에서의 패권을 포기할 수가 없다.[51][52] 동아시아 패권의 포기는 연쇄작용을 일으켜, 유럽과 중동, 나아가 전 세계에서의 패권에 심각하게 안 좋은 영향을 끼치게 되기 때문이다.
중동은 말할 것도 없지만 특히 유럽은 러시아의 위협에 직접적으로 직면한 까닭에 굉장히 신중할 수 밖에 없다. 당장 러시아의 위협을 막아낼 수 있는 유럽의 세력이라면 독일과 프랑스로 좁혀진다. 그나마도 러시아가 중국과 맞댄 국경방비를 위해 병력이 분산되어있을 때의 이야기지 러시아가 본격적으로 유럽 진출을 시도하기 시작하면 미국의 도움 없이는 러시아를 막을 수 있는 유럽 국가가 하나도 없다. 과거 옐친 정권의 부정부패와 푸틴의 집권으로 인해 국가경제가 천연가스를 바탕으로 하는 자원경제로 바뀌고, 저유가 사태로 인해 골골대고 있다고는 하지만 러시아는 과거 미국과 패권을 겨룰 정도의 강대국이었다. 비록 소련이 붕괴되고 군축에 들어갔다고는 하나 물량으로 승부하는 러시아답게 엄청난 양의 재래식 전력은 아직 건재하다.
핵무기의 질이나 기타 군사력의 질이 밀린다는 것도 최첨단 무기로 무장하고 10년마다 신기술을 상용화해서 실전 투입하는, 돈지랄의 끝판왕을 보여주는 미국을 상대로나 그렇지 러시아의 군사력은 재래식 전력과 핵전력 모두 세계 2위급이다. 현재 유럽의 군사력을 전부 합쳐도 미국의 도움 없이는 러시아를 막을 수 없으며, 심지어는 과거 강군으로 유명했던 독일 연방군이 지나친 군축으로 인해 군사력이 약해졌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53] 실질적으로 미국의 도움 없이는 유럽 전체가 연합해도 러시아를 막아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괜히 트럼프가 고립주의 노선을 선택하고 미국우선주의 노선을 가시화했을 때 유럽 국가들이 긴장한 게 아니다.
한편 중국 공산당의 교육과정은 지나치게 애국심을 강조하는데, 여기에 중화사상까지 곁들여지니 필연적으로 중국 국민들의 과격화가 이루어지게 된다. 결국 중국 공산당은 자기들이 이 꼴을 만들어 놓고 뒤늦게서야 국민들에게 자제를 부탁하는 블랙 코미디스러운 상황이 연출되기도 한다.[54] 이는 중국 정부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던 것이 덩샤오핑의 개혁 개방을 계기로 중국도 서방 세계를 본격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면서, 중국의 젊은층이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해서 눈으로 보게 되었고 체제에 불만을 가졌기 때문이다. 과거 냉전 시대처럼 단순히 사회주의만으로는 인민 통치가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사회주의에 중화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민족주의를 더하게 된 것이다. 이러다보니, 최근 중국 젊은이들 중 일부 극우층에서는 '중국은 평화롭게 지냈으나 과거 제국주의 시대에 서구 열강과 일본에게 무수한 침략과 약탈을 당했다.'는 자학사관이 깃들게 되었으며, 그 결과 '그러니 이제 강대국이 된 중국이 되갚아줄 차례다.'라는 이상한 방식의 결론을 도출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최근 쯔위 사태 역시 중국 정부 차원에서는 조용히 처리하려 했으나, 이런 극우 젊은이들이 떠벌리고 다니는 바람에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대만의 항의로 양안문제가 크게 대두되었고, 중국 정부의 입장이 상당히 난처로워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양안문제와 남중국해 문제, 미중무역전쟁으로 인해 동아시아 내에서 미국과의 패권 싸움이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물론 이들도 사람인지라 '''자정 작용이 없는건 아니다. 당국에서 검열해 버릴 뿐.''' 서효동이나 진추실이 좋은 예.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이다.''' 그 어찌 마음에 의협심 없는 자나 불의에 복종하는 사람만 있겠는가.''' 실제로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한 번 폭발하기도 했다(그때도 조자양, 호요방 등 이건 아니다, 바뀌어야한다 라고 생각하는 인물들은 있었다. '''등소평이 59식 전차로 밟아버렸지만...'''). 자신들의 자랑스런 나라가 현실에서 죽을 쑬수록 이 현상이 최근의 경제위기 때문에 자연스레 고쳐질 확률이 높다.
그런데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재앙으로 인해 빠른 교정에 들어가고 있다. 어차피 죽을 거 목소리라도 내고 죽자는 분위기가 생기고있다. 한국의 인터넷 여론은 은거한 "진짜" 대륙인들이 나오고 있다는 분위기. 실제로 코로나 발생 이후 진실을 요구하는 대륙인들과 고발의 목소리가 VPN을 타고 외부로 나오고있다. 아예 TIME지에도 "CHINA'S TEST"(시험받는 중국)이라고 나올 정도. 당연히 검열을 통해 차단과 탄압을 하고 있지만 빠져나가는 법에 도가 튼 중국 네티즌들은 계속 한 수 앞을 지나가며 중국 당국을 엿먹이고 있다. 검열을 피하기 위해 갑골문을 쓰는 사례가 있을 정도.

6. 같이보기


  • 국수주의
  • 사대주의
  • 소중화
  • 제후
  • 중국위협론
  • 민족주의
  • 아큐정전
  • 국뽕
  • 만물중국설
  • [55]

[1] 일본에서 유래한 학술용어로 원어민들은 보통 화이지변(華夷之辯:중화와 이족夷族의 구별) 또는 중국중심주의, 중화중심주의라 한다.[2]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닌 게 1900년대 대부분의 독일인들도 유대인을 정말 싫어하기만 했지 죽이려고 까지는 안 했다. 그러나 앞뒤 꽉꽉 막힌데다가 극우였던 히틀러가 등장하면서 1930년대~1940년대에 걸쳐 우생학과 '이 썩어 빠진 세상은 우리 독일이 구원해야 된다'와 같은 주장을 펼치며 온갖 전쟁범죄들을 일으켰다. 현재는 인권의식이 강화돼 그런 일은 일어나기 어렵다고 하지만 자기 자국민들도 걸리적거리면 무력진압하며 인권을 무시하는 독재국가에서 중화사상을 본격적으로 밀기 시작하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실제로, 이미 마오쩌둥은 권력을 잡았던 기간 동안에 민주화 운동을 일으키는 자국민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했다.[3] 사실 중국이 진나라 이후로 영토 확장을 하면서 중국 대륙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기 전까지는 중화의 영역이 중원으로 한정되었다. 즉, 지금은 중국의 일부인 산동 반도나 수도 베이징이 있는 중국 동부 지방도 모두 예전에는 동이로 취급되었다. 베이징이 수도로서의 위상이 오른 것은 명나라 때부터이며 그전까지 중화문명의 중심은 시안과 무려 13개 왕조가 도읍으로 정한 뤄양이었다.[4] 고대의 화남 지방은 습지와 정글로 차있었으며, 전염병으로 유명하였다. 이러한 습지가 개간되기 시작한 것이 오나라이며, 본격적으로 개발된 것은 동진 시절부터이다.[5] 2010년대 초만 해도 넷상에 반중보다 반일이 더 짙은 분위기였는데, 2010년대 후반은 인터넷의 반중감정도 반일감정과 동급정도로 짙어졌다. 심지어 사드 보복 때문에 한중관계가 악화된 후 '''난징 대학살을 난징 대축제, 난징 페스티벌 등으로 바꿔 부르기도 한다.''' 중국인들을 엿먹이기 위해 천안문 드립이나 파룬궁 드립을 사용할 정도. 실제 중국에서의 천안문 드립과 파룬궁 드립은 목숨이 왔다갔다할 정도로 위험한 드립이다.[6] 중국의 면적은 러시아를 제외한 유럽 대륙보다 크다.[7] 이는 광대한 영토를 안정적으로 다스릴 수 있는 원동력이었던 중국의 전통과 유교사상이 서구 열강의 침공과 사회주의로 인해 '낡은 것'으로 치부되어 중국인들 스스로가 박살내면서, 그간 유지되던 각 지방에 대한 중앙정부의 복속력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그간은 천하제일국이라는 자부심과 화의 민족이라는 중화사상을 바탕으로 지켜왔으나, 이것이 박살나면서 중앙 정부가 손길이 안 닿는 지방을 복속시킬 방도가 사라진 것이다. 그러다보니 중화사상을 부활은 시켜야되는데, 이는 또 모든 국가가 평등하다는 현대식 평등주의와 사회주의에 정확하게 반대된다. 그러다보니 어줍잖게 부활시킨 중화사상에 민족주의를 섞고, 거기에 중국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을 강조하는 내용을 섞다보니 지금의 민폐 중화사상이 부활하게 된 것이다.[8] '''절대 다 그렇다는 뜻이 아니다.'''[9] 은나라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상나라는 동이족이라는 이야기가 예로부터 중국에서도 있었고 백성들 대부분은 상나라나 그 문화권에 속한 사람들이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천(天) 사상, 제후 체계 혹은 중국 인문주의의 기틀을 놓았다는 점에서 기본적인 기틀 자체는 주나라가 형성했다고 본다. 여담으로 '''역대 통일왕조 중 왕실이 순수하게 한족으로만 이루어진 왕조는 주나라, 진나라, 한나라, 송나라, 명나라 5개 왕조뿐이다.''' 하나라는 사료가 매우 부족하여 입증이 안됐고 수나라, 당나라는 한족과 선비족이 결합해서 세워진 왕조이고 상나라, 원나라는 이민족이 건국하고 한족을 통치한 왕조다.[10] 중국 사료에서도 초기 주나라 사람들을 유목민으로 추측하기도 했으며 상나라와 만나고 그들의 문물을 흡수하며 점차 농경 민족이 되기는 했지만 많은 면에서 그들과 달랐다. 만주원류고에서도 서이의 후예(한족)인 너희나 동이(만주족)인 우리나 같은 오랑캐인데 누가 지배하든 무슨 상관이냐는 주장이 있는 것으로 봐서는 꽤 최근까지도 그러한 관념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11] 매우 공격적으로 활동하며 자기들 앞을 막으면 죄다 오랑캐 취급을 했기에 옛날 중국인들이 상나라 사람들을 동이족 같은 오랑캐로 생각하기도 하거나 상이라는 글자가 천해진 이유로 추측되기도 한다(상인은 장사치라는 뜻이지만 상나라인들에게서 기원했으며 주나라인들은 서쪽에서 와서 상나라인들도 그들 입장에서 보면 동이족이었다. 물론 한때는 상나라의 제후였고 상나라의 문물을 받은 만큼 다른 오랑캐들에 비하면 경멸적 뜻이 적긴 하다).[12] 은나라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상나라는 동이족이라는 이야기가 예로부터 중국에서도 있었고 백성들 대부분은 상나라나 그 문화권에 속한 사람들이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천(天) 사상, 제후 체계 혹은 중국 인문주의의 기틀을 놓았다는 점에서 기본적인 기틀 자체는 주나라가 형성했다고 본다. 여담으로 '''역대 통일왕조 중 왕실이 순수하게 한족으로만 이루어진 왕조는 주나라, 진나라, 한나라, 서진, 송나라, 명나라 6개 왕조 뿐이다.''' 하나라는 사료가 부족하여 입증이 되지 않았고 수나라, 당나라는 한족과 선비족이 결합해서 세워진 왕조이며 상나라, 원나라, 청나라는 이민족이 건국하고 한족을 통치한 왕조이다.[13] 중국 사료에서도 초기 주나라 사람들을 유목민으로 추측하기도 했으며 상나라와 만나고 그들의 문물을 흡수하며 점차 농경 민족이 되기는 했지만 많은 면에서 그들과 달랐다. 만주원류고에서도 서이의 후예(한족)인 너희나 동이(만주족)인 우리나 같은 오랑캐인데 누가 지배하든 무슨 상관이냐는 주장이 있는 것으로 봐서는 꽤 최근까지도 그러한 관념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14] 매우 공격적으로 활동하며 자기들 앞을 막으면 죄다 오랑캐 취급을 했기에 옛날 중국인들이 상나라 사람들을 동이족 같은 오랑캐로 생각하기도 하거나 상이라는 글자가 천해진 이유로 추측되기도 한다(상인은 장사치라는 뜻이지만 상나라인들에게서 기원했으며 주나라인들은 서쪽에서 와서 상나라인들도 그들 입장에서 보면 동이족이었다. 물론 한때는 상나라의 제후였고 상나라의 문물을 받은 만큼 다른 오랑캐들에 비하면 경멸적 뜻이 적긴 하다).[15] 은나라 왕조 시절 그 지배권 동부에 해당하는 산둥 반도 부근. 한반도나 일본도 취급 자체는 동이라고 할 수 있으나, 춘추전국시대 이전에는 지리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다.[16] 그런데 주나라 같은 경우는 서융을 가리켜 도의를 지키지 않는 오랑캐라 욕하고 진나라 왕을 책봉하면서 서융을 정복하라고 했기 때문에 출처에 의문이 있다.[17] 紳士: 지방 유지, 명문가.[18] 다만 청조에 적극 협력하여 태평천국의 난 진압에 앞장선 것도 한족 신사층이다. 증국번, 좌종당, 이홍장등이 대표적. 이들은 점차 군권을 쥐던 만주팔기를 대체하여 민국 초기 군벌로 성장한다.[19] 여기서 주로 수련시킨 무술이 홍가권(洪家拳)으로 발전해 나아갔다고 하며, 무협소설, 무협영화의 좋은 소재가 되기도 했다고 한다.[20] 연나라는 주나라의 전진 멀티로서, 주나라의 문화를 이 지역에 전파하는 선봉이었고, 초, 오, 월은 주나라와는 다른 정체성을 주장하면서도, 주나라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중국으로 편입됐다. 진나라는 전자인지 후자인지 좀 논란이 있는 편.[21] 태평천국때도 신해혁명때도 이게 구호였다[22] 본래 중화사상에서 말하는 중화는 중국 본토 중에서도 중원(中源), 즉 황하 중 하류만을 뜻하였다. 즉, 한족들의 본래 생활터전인 중원 밖에 있는 민족은 모조리 오랑캐로 봤다는 뜻이다. 동이족이라는 요임금도 한반도를 뜻하는 말이 아닌 오늘날의 중국 동부지방 사람임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나마 춘추전국시대가 끝나고 진, 한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중화의 범위가 국가 전체로 커지게 되었으나, 그전까지 중화는 오로지 중원만의 것이었다.[23] 이 배타성이 어느 정도로 강하냐면, 송나라 때 거란의 요나라와 전연의 맹을 맺은 이후로도 샌드백마냥 털리자, 송나라에서는 고려에서 온 사신에게 지원군을 요청했다. 당시 고려는 거란을 자력으로 물리친 전과가 있었기에 국격이 상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고려 사신을 인솔하던 소동파(시인으로 유명한 그 소동파 맞다)는 '오랑캐 놈들이 중화 민족 앞에서 거드름을 피우니, 그 꼬라지를 차마 볼 수 없다.'며 내내 툴툴거렸다고 한다. 송나라로서는 고려의 지원을 받아야만 요나라를 상대할 수 있는 입장이었기에 대놓고 화를 내지는 못했지만, 중국인들, 특히 한족들의 배타성과 자국 우월주의가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 있다.[24] 사실 살호령에 의해 사라진 갈족처럼 하드파워에 의해 말살된 민족들도 꽤 많다.[25] 그런데 춘추전국시대와 그 영향이 있던 한나라 시대까지는 유교 사상이 그리 강하지 못하여 조공이나 선물을 바치겠다고 사기를 치고 길을 뚫어주거나 성문을 열어주면 침공해서 학살하거나 인간 사냥을 하는 둥 유독 사악한 면이 있었다. 후에는 상당히 성격이 달라진다.[26] 이는 타자와의 명확한 구별을 동반한다. 즉 동아시아 세계 자체를 뭉뚱그려 파악하는 중화사상의 기저와는 큰 차이가 있다.[27] 즉, 화의 민족인 중국인이 오랑캐의 나라에 가서 미개한 짓을 한다는 것 자체가 중화민족의 격을 훼손시켰다는 의미이다.[28] 명나라가 망한 것은 임진왜란 때문이 아니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가 조선에 지원한 지원금은 은자 200만 냥 정도인데, 이 당시 황제였던 만력제는 자기 아들 결혼식에 은자 800만 냥을 쓰던 인간이다. 임진왜란이 명나라의 국가 역량에 적잖은 부담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나라가 망할 정도는 아니었고, 명나라의 멸망은 장장 30여년에 걸친 만력제의 사치 및 태업 때문이다. 그리고 명나라 파병을 하지 않으면 조선이 망하고 자기들이 뚫릴 입장이 되기 때문에 이 때는 더 많은 희생을 치러야 한다.
아이러니 하게도 이런이유로 '''한국은 임진왜란때 스러져간 명나라 장병들과 6.25때 스러져간 장병을 추모하는 시설이 동시에 존재한다.'''
[29] 그나마 광해군이 명나라에서 적당히 발을 빼려 했지만 인조반정 때문에 무산되었다.[30] 이마저도, 더 이상 넓힐 땅이 없거나, 고조선고구려 같은 국가들이 중화 패권에 거슬림이 될 때나 한반도를 침략했다. 즉, 중국은 애당초 한반도에 대해서 '자원도 안 나고, 딱히 땅이 넓은 것도 아니고, 말은 잘 들으니 굳이 직접 다스릴 필요는 없는 땅'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31] 그리고 중국이 정복하려고 한 한민족 국가는 신라백제를 빼면 고구려발해와 같이 전부 만주에 있는 국가이다. 왜냐하면 만주 지역에서 발흥한 강국은 중화 패권에 위협적이었기 때문이다.실제로 송나라명나라를 멸망시킨 만주족금나라청나라만주에서 건국되었다. 다르게 말하자면 '''한민족 니들은 계속 한반도에 찌그러져 있어라'''라는 소리이다.[32] 한반도중국 대륙에 비하면 면적도 작은데다 산지가 많고, 일본 열도대만 섬, 오키나와 제도는 바다를 건너가야 한다.[33] 이런 사례들을 구체적으로 비교해보면 그렇다.[34] 여요전쟁, 여몽전쟁, 원나라의 일본원정 등.[35] 실제로 인도에게 아크사이친과 아루나찰프라데시의 교환을 제시하기도 했다.[36] 1인당 자원이 부족한 판국에 인구 밀도가 높은 지역들을 직접 병합할 생각은 거의 없다. 세력권을 바꾸려고 하는 것뿐이다.[37] 제1~3도련선으로 나뉘는데, 제1도련선은 한반도를 제외한 서태평양 연안 지역, 제2도련선은 한반도를 포함하고 일본 열도까지 영향권 하에 두는 서태평양 전역, 제3도련선은 미국의 하와이 외곽까지 뻗어나가 태평양을 반분하는 것이다.[38] 러시아는 중국이 워낙 적을 많이 만들어놔서 정작 전쟁이 일어나면 국경에 위협이 가지 않는이상 참전을 안 할것이다. 일단 군사강국인 한국, 호주, 인도, 베트남과도 상대하게 되며 특히 인도는 핵무기도 있고 호주는 서방 일곱개의 눈에 속할정도의 전력을 지니고 있다. 일본은 실전도와 훈련은 바닥이긴 하지만 일단 공군전력은 동북아에서 튼튼한 전력을 갖추고 있으니 이들과 상대해봤자 좋을 것도 없다.[39] 실제로 고구려, 발해 역사를 차이나머니로 포섭하여 옥스포드에서 출간한 그림책에 고구려시절 영토를 중국 국가영토라고 그리게 하는데 성공했고 이를 항의하자 출판측에서는 이는 어디까지나 한국의 의견이라며 거절했다 한다.[40] 다만 여기서 설명하는 사례들을 보면 중화사상보단 걍 아직은 낮은 중국의 시민의식(...)이 문제의 핵심으로 보인다.[41] 영어로 중국어를 못한다고 하거나 중국인이 아니라고 말해도 끝까지 중국어로 말하는 사례가 종종 발생한다. 단순히 영어를 못해서 그러는 거라고 핑계대기도 뭐한 것이, 이런 케이스는 보통 자신이 영어를 못해서라기보단 '''"이 나라 사람들도 중국어를 알아듣겠지?"'''라는 마인드에서 나오는 무례이기 때문.[42] 이거는 비단 중국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타 인종•민족들에게도 나타나는 현상이다. 북미에서 동양인들한테 멋대로 중국어를 쓰는 사람들은 인종•민족 불문하고 널렸다. 가끔 가다 동양인들도 그런다(...). 한국인들도 예외가 아니다.[43] 당시 동아시아에서 중국은 유럽과 아랍의 과학을 직접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유일한 국가였다. 한국과 일본은 중국을 통해서 서양 문물을 수입해야 했으며, 그마저도 중국에 직접 가보거나, 중국에서 수출을 허가하지 않으면 서양 문물을 받아볼 방법이 없었다. 그나마 일본은 임진왜란 전후에 포르투갈, 네덜란드와의 교역을 통해 서양 문물에 눈을 뜨게 됐지만, 양쪽에 껴있던 조선은...[44] 동아시아 4대 발명품이라 불리는 화약, 종이, 나침반, 활판인쇄술이 모두 중국에서 발명되었다. 특히 종이는 파피루스를 발명한 서양에서조차 아랍을 통해 기술을 받아들였으며, 화약은 냉병기에서 화기로 무기의 양상을 바꿔놓은 발명품이다. 또, 나침반은 문명의 범위가 일개 대륙에서 지구 전체로 확대되는데 큰 역할을 했으며, 인쇄술은 책을 통해 인류가 지식을 오래도록 보존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45] 구양수체와 같은 각종 서예법이 중국을 통해 동아시아 전체로 퍼져나갔으며, 청자와 백자를 비롯한 도자기 기술 역시 고려청자 이전까지는 중국이 유명했다.[46] 당장 동아시아의 모든 국가들이 중국의 3성 6부제를 비롯한 정치 체제를 자국의 실정에 맞게 적당히 바꾼 제도를 사용했으며, 과거제 역시 중국을 통해 들여온 공무원 선발제도다.[47] 어느 정도냐면 공자를 비롯한 유교 사상을 연구하기 위해 중국의 학자들이 한국으로 넘어와서 연구를 하며, 이황, 이이를 비롯한 조선의 학자들의 저서를 통해 성리학을 연구한다. 이유는 각종 왕릉, 사찰과 함께 홍위병의 공격을 가장 많이 받은 것이 유교 서책이었기 때문.[48] 오죽했으면 사극이 너무 넘쳐난다는 이유로 금지령을 내렸을 정도이다.[49] 미국과 러시아는 소국이라고 무시하던 나라들한테 각각 한 번씩 따끔하게 혼난 적이 있다. 소련은 아프간에서, 미국은 베트남에서. 그래서 이 양국은 속국을 자기 아래로 두지 않고 일종의 '''딜'''이나 '''퍼주기'''를 통해서 관계를 유지한다.[50] 대만과의 은근한 교류는 덤.[51] 미국에 있어서 동아시아, 특히 일본의 경우 일본을 포기하면 대 동아시아 최전선이 넓디넓은 태평양 너머의 하와이가 되기 때문에 미국의 대 동아시아 최후의 마지노선이다. 상황이 여의치 않게 돌아갈 경우 한국이나 대만은 몰라도 일본만큼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52] 하지만 지금은 상대가 소련이 아니라 중국이라서 한국과 대만의 지정학상 중요성이 예전보다 훨씬 더 커진 상황이라서 역시나 함부로 포기할 수 없게 되었다.[53] 현재 대한민국 육군의 전차 보유 대수는 독일 육군의 전차 보유 수보다 약 3배 가량 많다. 독일 뿐 아니라 서유럽 전체 육군 전차를 끌어모아도 부족할 정도. 그것도 예비까지 전부 끌어다 모은 수이고 정상적으로 작동되는 것만 골라 비교하면 차이는 더 벌어진다. 해군도 신규함 사업에 실패하고, 잠수함도 정비를 못해서 가용 잠수함 전력이 0대라는 엄청난 기록을 달성했으며 공군은 유로파이터의 장대한 삽질로 인해 폭망.[54] 웃기게도 이런 상황은 중국이 그토록 흑역사라고 여기고 있는 홍위병의 탄생과도 유사점을 보인다.[55] 네이버 차이나판 댓글중 반박을 못하면 미국의 개라고 몰아가는데 하드카운터인 사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