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돌

 


'''2대 흉노 선우
묵돌선우
冒頓單于
'''

''''''
난제(攣鞮)
''''''
묵돌(冒頓)
'''아버지'''
두만선우(頭曼單于) 난제두만(攣鞮頭曼)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174년
'''재위 기간'''
기원전 209년 ~ 기원전 174년
1. 개요
2. 생애
2.1. 선우 즉위 이전
2.2. 동호 · 월지 정벌
2.3. 한나라와의 대결
2.4. 한나라와 화친 이후
3.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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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천지가 낳으시고 일월이 세우신 흉노의 대선우가 삼가 한나라 황제에게 묻는다. 무사한가?'''

묵돌이 효문제에게 보낸 서신.

흉노의 제2대 선우로, 진시황 이래로 위축되어 있던 흉노의 세력을 일신하여 전성기를 이끈 명군.
그의 치세 동안에 흉노는 동호월지 등을 비롯한 주변의 강적들을 차례로 정벌하여 영역을 크게 확장하였으며, 서역으로의 진출을 본격화하였고, 중국을 통일한 한나라와의 전쟁에서도 승리하는 등 군사적으로 우세를 점하였다.
그의 이름인 "묵돌(冒頓)"은 "모돈", "묵특" 등으로도 읽을 수 있다. 몇몇 기록에서는 "묵독(墨毒)", "묵돌(墨突)" 등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몽골식 명칭은 바타르인데, 바타르란 몽골어로 "영웅", "용사"라는 뜻이다.[1] 때문에 몇몇 학자들인 묵돌이라는 이름은 본명이 아니며, 여러 활약을 통해 얻게 된 이름이라 추측하기도 한다.[2]

2. 생애



2.1. 선우 즉위 이전


묵돌은 본래 흉노의 선우였던 두만의 아들이자 태자였다.[3] 그러나 두만은 총애하던 연지#s-3(閼氏, 흉노 부인의 칭호)로부터 얻은 작은 아들을 후계자로 삼기 위해 장남인 묵돌을 제거하려 하였다. 때문에 두만은 일부러 묵돌을 월지에 볼모로 보낸 후, 갑자기 월지를 공격하였다. 두만의 예상대로 월지 사람들이 분노하여 볼모로 와있던 묵돌을 살해하려 하였으나, 묵돌은 오히려 기지를 발휘하여 명마를 훔쳐 타고 본국으로 돌아왔다. 두만은 자신의 계획이 틀어진 것을 알았으나 아들의 용기를 가상하게 여겨 1만 기를 거느리는 대장으로 삼았다.[4]
사지에서 간신히 살아돌아 온 묵돌은 아버지 두만이 자신을 죽이려 했던것을 알게되자 분노하였으며 그를 제거하고 그 지위를 찬탈할 계략을 세웠다. 우선 그는 명적(鳴鏑)[5]을 만들고는 모든 부하들에게 자신이 쏜 명적을 따라 쏠 것을 명령했다. 이후 묵돌이 사냥터에서 명적을 쏘았는데, 이때 자신을 따라 화살을 쏘지 않은 부하를 그 자리에서 살해했다. 그 다음으로 자신의 애마와 애첩을 차례로 쏘았는데, 그때마다 주저한 부하들 역시 모두 목을 베어버렸다. 다시 사냥에 나선 어느 날, 묵돌은 아버지의 명마를 쏘았다. 그러자 부하들은 일제히 명적을 따라 두만의 애마를 쏘았다. 그제서야 묵돌은 흡족해하며 부하들을 쓸 만하다고 여겼다.
이후 두만이 사냥을 하러 가자, 묵돌도 이를 따라갔다. '''묵돌이 사냥터에서 아버지에게 명적을 쏘자, 좌우의 부하들 또한 지체 없이 두만에게 화살을 날려 죽여버렸다.''' 두만이 죽자, 묵돌은 잇달아 계모와 배다른 아우, 자신을 따르지 않는 대신들까지 모두 죽였다. 이렇게 아버지를 죽이고 반대파들을 일거에 숙청한 묵돌은 자립하여 흉노의 선우가 되었다.

2.2. 동호 · 월지 정벌


묵돌이 흉노의 선우가 되었을 당시에는 동호#s-1가 한창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동호의 왕은 묵돌을 애송이라고 여겨 얕잡아보고 있었다. 그는 흉노에 서신을 보내 처음에는 죽은 두만의 천리마를 요구했고, 그 다음에는 묵돌이 아끼던 연지 중 한 사람을 잇달아 요구했다. 무리한 요구에 흉노의 신하들은 진노했으나, 묵돌은 아무렇지도 않게 동호 측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교만해진 동호의 왕은 이윽고 동호와 흉노의 사이에 위치한 황무지 1천 리를 요구했다. 이에 묵돌이 좌우의 대신들에게 의견을 묻자, 몇몇 사람들은 어차피 쓸모없는 황무지이니 동호에게 땅을 주어도 좋고, 그렇지 않아도 좋다는 반응을 보였다. 가만히 있던 묵돌은 "땅이란 무엇인가! 나라의 근본 아닌가!" 라고 불같이 화를 내며 땅을 주어도 좋다고 말한 신하들을 모조리 참수했다.
묵돌은 그 즉시 말에 올라 군사들을 소집하고는, 이번 싸움에서 도망하는 자는 죽이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그 다음에는 묵돌을 얕본 채 방심하고 있던 동호를 급습하여 그 왕을 살해한 후 백성과 가축들을 노획하여 귀환했다.[6]
이후 묵돌은 다시 서쪽으로 월지를 격파했고, 남쪽으로는 누번 · 백양까지 접수하여 과거 진나라몽염에게 빼앗긴 땅의 대부분을 회수하기에 이른다. 뿐만 아니라 북쪽으로는 혼유 · 굴석 · 정령 · 격곤 · 신려 5개국을 복속시켰다. 이에 흉노의 귀족과 대신들은 모두 엎드려 묵돌을 현군으로 받들었다.

2.3. 한나라와의 대결


한편 기원전 202년, 중원에서는 (漢)의 고조 유방이 비로소 패왕 항우를 쓰러뜨리고 천하를 평정하였다. 한(漢)의 제후국인 한(韓)나라는 산시성의 진양을 도읍으로 정했다가 강성해진 흉노의 침입에 대비하여 마읍으로 도읍을 옮겨갔다.
기원전 201년 가을, 묵돌이 마침내 마읍을 공격하여 한왕 신을 포위하였다. 한나라 조정에서는 이를 구원하기 위해 군사를 보냈으나, 한왕 신이 흉노에 강화를 위한 사자를 계속 보냈다가 한나라 조정의 의심을 사게 되자 흉노에 투항하고 말았다. 이후에도 흉노는 남하하며 사사건건 중국인들과 충돌하였다. 이 와중에 한고조 유방이 진희, 장도 등을 토벌하자 장도의 아들인 장연이 도망쳐서 흉노에 투항하였다. 뿐만 아니라 흉노에 투항한 한왕 신은 흉노의 장군이 되었고, 그 부하였던 백토 사람인 만구신과 왕항, 조나라의 후예인 조리 등도 흉노의 신하가 되었다.
진양에 머물던 한고조 유방은 묵돌이 대곡[7]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공격하기 위해 정탐을 보냈다. 그러자 묵돌은 일부러 살찐 소와 말을 감추고 노약자와 마른 가축 등을 보이게 하여 스스로를 약해 보이도록 꾸몄다. 기원전 200년, 한고조 유방이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공격해오자, 묵돌 또한 40만의 기병을 거느리고 나아가[8] 한나라 군사들을 '''백등에서 포위해버렸다.''' 유방은 포위를 뚫기 위해 7일간 애썼으나, 한군은 포위망 안팎으로 고립되어 서로 구원할 수도 식량을 보급할 수도 없게 되었다.
이때 한고조의 심복이었던 진평이 연지에게 접근하여 후한 뇌물을 주는 한편, 묵돌에게 바칠 미인이 그려진 미인도를 보여주었다. 그 연지는 한나라에서 미인을 바치면 자신이 총애를 잃을 것이라 판단하였다. 이에 연지는 묵돌에게 포위를 풀고 돌아가도록 설득하였는데,[9] 마침 흉노와 협력하기로 했던 왕황과 조리 등이 오지 않자, 묵돌은 이들이 한나라와 모의하는 것으로 의심하고는 포위망의 일부를 풀어주었다.
이렇게 묵돌에게 쳐발리고 간신히 구걸해서 포위망을 탈출한 유방은 사신을 보내 흉노와 ‘화친(和親)’이라는 이름의 조약을 맺었는데, 화친은 다음 다섯가지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10]
(1) 만리장성을 양국의 경계로 삼는다.
(2) 상호 형제관계를 맺는다.[11]
(3) 한나라 공주를 흉노 왕에게 시집보낸다.
(4) 매년 흉노에게 옷감과 음식을 보낸다.
(5) 관시[12]를 개설한다.
화친의 내용
앞의 두 항목으로 보아서 양국이 평등한 관계인 듯하지만 실상은 한나라가 흉노에게 일방적으로 공주와 물자를 바치는 형편이라서, 말이 ‘화친’이지 실제로는 '''불평등 조약'''이나 다름없었다. 그 같은 사정은 유방 사후 유방의 미망인 여후(呂后)와 묵특 사이에서 벌어진 소위 ‘농서(弄書)’사건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 조항들은 대부분 흉노가 한나라에서 물자 뜯어내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전쟁을 중단하고 화친을 맺는다는 1, 2번을 제외하면 전부 물자 뜯어내는 목적이다. 이때부터 한나라는 굴욕적이지만 매년마다 흉노에게 무명, 비단, , 곡식 등을 보내주기로 한다. 한나라 공주를 시집보내는 과정에서도 막대한 지참금과 생활비가 넘어갔고, 흉노가 마지막에 추가한 관시의 개설도 자주 개설하면 개설할수록 흉노로서는 의복과 식료품이라는 생활필수품에 대한 안정적인 수급이 가능해진다.[13]
이렇듯 한나라 입장에서는 유방이 지혜를 써서 슬기롭게 위기를 넘겼다는 인상을 주려 하고 있지만, 실상은 '''항복에 가까운 굴욕적인 패배'''로, 한고조 유방의 치욕과 그와 대비되는 흉노 묵돌의 전술적 능력은 이후로도 여러 번 회자된다.
기원전 199년, 묵돌은 여러 차례 한나라의 북쪽 변경 지역을 공격하였으며 유방이 군영에서 적의 군세를 바라보니 서쪽의 군사는 모두 백마를, 북쪽은 흑마, 동쪽은 청마, 남쪽은 적황마를 타고 있었으며, 싸우기도 전 위용에서부터 질려버려 화친할 생각을 한다. 결국 기원전 198년에 서인을 장공주라 속여보내어 화친을 맺었지만 자주 화친을 깨고 한(韓)의 영역을 침범해 들어왔다. 한나라의 번쾌가 출동하여 빼앗긴 땅을 되찾아왔으나 여전히 한나라는 국경 밖으로는 나가지도 못했다.
한편, 이 치욕적인 패배는 고제여후초한전쟁 당시 뛰어난 장수들을 이미 숙청했기 때문이라는 인식도 제법 있는 편인데, 사실 숙청 작업은 몇 년 후인 기원전 196년부터야 본격화되었고 한신, 팽월, 영포도 이 시점엔 다들 멀쩡하게 살아있었다.[14] 때문에 가능하다 싶었으면 유방도 재공격을 감안해봤겠지만 유방도, 그리고 그 다음의 여후도 흉노를 군사로 어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이유도 공통적으로 '항우 때문에 천하가 너무 지쳐서'였다. 즉, 장수의 유무를 떠나 그 장수가 타고 다닐 말조차 없어서 소를 대신 타고 다녔을 정도였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어마어마했던 초한전쟁의 타격이 야기한 결과로 봐야 할 것이다. 그 뒤로도 한무제가 등극하기까지 한은 계속 흉노에게 저자세 외교를 이어간다.
그래도 유명세가 퍼져서인지 이후로도 토사구팽 등이 엮여 한나라 장수들은 심심찮게 흉노에 투항하였고[15], 묵돌은 대군을 이끌고 국경 지방에서 약탈을 일삼았다. 황실의 여인을 공주라 속여 연지로 주고 해마다 면포, 견초, 쌀, 술, 각종 식량을 제공했는데도 저러니 유방 입장에선 골 아팠을듯.

2.4. 한나라와 화친 이후


유방이 세상을 떠나고 여후(呂后)가 권력을 잡자 기원전 192년에 묵돌이 그녀에게 편지를 보냈다.

“나는 외로운 군주로서 습한 소택지에서 태어나 이 가득한 들판에서 자라났소. 여러 차례 변경에 가보았는데 중국에 가서 놀고 싶은 희망이 있었소. 이제 그대홀로 되어 외롭게 지내고 있으니, 우리 두 사람이 모두 즐겁지 않고 무엇인가 '''즐길 것'''이 없는 듯하오. 그러니 각자 '''갖고 있는 것으로 서로의 없는 것메워 봄이 어떻겠소?'''”

ㅡ 흉노의 선우 묵특이 여후에게 보낸 편지

성희롱에 가까운 이 편지로 인해 당연히 한나라 조정은 '''발칵 뒤집히고 여후는 길길이 날뛰었다.''' 한 성질 하는 여후는 곧 바로 흉노 정벌군을 편성하려했고 이때 번쾌가 자신에게 10만의 군대만 주면 흉노를 쓸어버리겠다며 조정을 선동했는데 다른 신하들도 여후의 눈치를 살피느라 맞장구를 쳤지만 오직 계포만이 혼자 나서서 "'''번쾌를 참하십시오.''' 선황제조차 40만이 넘는 병력과 명장들을 이끌고 원정했지만 다 죽다가 겨우 살아왔는데, 번쾌 따위가 혼자서 뭘 할 수 있습니까? 지금 번쾌는 고작 태후께 아첨하기 위해 면전에서 태후를 기만하고 천하를 흔들려 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진나라진승에게 반란의 빌미를 준 것이 흉노에게 국력을 낭비했기 때문이며 여전히 그 상처가 낫지 않았는데도 저런 소리를 하니 '''목을 베어야 합니다.'''"라는 발언으로 기를 죽여버렸다. 이렇게 계포가 유방의 실패를 들어 말린 탓에 여후도 결국 울며 겨자먹기로 참으며[16] 다음과 같이 답서를 보내며 화친을 계속 이어나고자 했다.

선우가 폐읍(弊邑-자신의 고장을 낮추는 말)을 잊지 못해 서신을 보내니 폐읍(弊邑)은 몹시 두렵습니다. 물러나 매일 스스로를 돌아보면(退日自圖) 연로하고 기력은 쇠하여 머리카락과 이는 빠지고 행보(行步)하는 것도 도를 잃었으니 선우께서 그릇된 말을 듣고(單于過聽) 스스로를 더럽히실 필요가 없습니다. 폐읍이 죄가 없으니 응당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제게 어거(御車) 2승(乘), 말 2사(駟-1사는 말 4필)가 있으니 이를 바쳐 늘 타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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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후가 흉노 선우에게 보내는 답서

한고조 유방 사후 여태후가 보여준 행적이나 일들을 보면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저자세이다. 이 답서를 본 묵돌은 사죄의 서신을 보내며 묵돌 역시 말을 보내며 화친을 청했다.
기원전 182년에 한나라에서 종실의 여인을 공주라 속여보내어 묵돌은 그녀를 연지로 맞이하였다.
효문제가 즉위한 이후에도 약탈은 계속되었으며 묵돌이 보내는 서신은 대부분 오만하고 고압적이었다. 예를 들면..

천지가 낳으시고 일월이 세우신 흉노의 대선우가[17]

삼가 한나라 황제에게 묻는다. 무사한가?[18]

말년인 기원전 174년에 우현왕[19]이 화친을 깨뜨리고 현재의 허난성 지방을 공격했다. 한나라는 이를 격퇴했으나 피해 역시 막심했다. 이에 묵돌도 내심 너무했다 싶었는지 우현왕에게도 한소리하면서 효문제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이게 걸작이다.

내 부하(우현왕)는 싸울 생각이 없었는데 너희 부하(후의로후 난지)가 먼저 쳐들어온 바람(모의하는 바람)에 싸운 것 뿐이다.

근데 너희는 왜 먼저 사과를 안 하는 거냐? '''죽을래?'''


한편, 우현왕은 서방 원정을 벌로 받았는데(...) 월지를 섬멸하고 서방의 26개국을 평정했다. 이로써 흉노는 인근의 유목 민족들을 평정했으며 서역의 국가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후 묵돌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인 계죽이 노상선우가 되어 뒤를 잇게 된다. 효문제는 다시 황족 출신의 여인을 연지로 보냈는데, 이때부터 선우에게 황녀를 보내는 것이 일종의 관례처럼 자리잡게 되었다. 한편, 효문제가 보낸 사절단 안에는 황녀의 보좌역인 중항열도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이 사람은 큰 사건(?)을 일으키는데...'''

3. 평가


(흉노는) 순유(淳維)[20]

로부터 두만(頭曼)에 이르기까지 천여 년 동안, 때로는 커지고 때로는 작아졌으니, 흩어지고 갈라짐도 무상하였다. (중략) 그러나 묵돌(冒頓)에 이르자 흉노는 가장 강대해져서 북이(北夷)들을 모두 복종시키고 남쪽으로는 중국(中國)과 대적하기에 이르렀다.[원문]

《사기》 권110 〈흉노열전〉

후에 북쪽으로 혼유(渾庾), 굴역(屈射), 정령(丁零), 격곤(鬲昆), 신려(薪犂) 등의 나라를 복속시켰다. 이에 흉노의 귀인(貴人)과 대신(大臣)들이 모두 탄복하였으니, 묵돌선우(冒頓単於)를 현명하다고 여겼다.[원문]

《사기》 권110 〈흉노열전〉

묵돌의 생애와 일대기는 대부분이 사마천의 《사기》 〈흉노열전〉에 기록되어 있다. 《사기》가 집필되었을 당시에 한나라의 황제였던 한무제는 그간 축적된 국력을 모두 흉노와의 전쟁에 쏟아붓고 있었다.[21] 더욱이 당시 중국인들은 한고제 이래로 흉노에게 당해왔던 굴욕을 잊지 않고 있었으며, 사마천 그 자신도 흉노에 항복한 맹장 이릉을 변호하려다가 궁형을 당했기 때문에 흉노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 없었다.
그럼에도 사마천의 묵돌에 대한 묘사는 마냥 부정적이기만 하지는 않다. 물론 권좌를 위해 아버지조차 서슴없이 죽이는 비정한 인물이라는 점을 감추진 않았지만, 그의 장점이었던 과단성과 결단력, 용맹성 등 비범하고 영웅다운 풍모도 숨김없이 묘사하였다. 이처럼 사마천은 흉노에 대해서 나름대로 객관적인 서술태도를 고수하였다. 중항열이 흉노의 관습을 야만적이라고 비판했던 한나라 사신들의 말을 날카롭게 반박했던 일화를 상세히 소개한 것이 그 예이다.
어찌 되었든 간에, 사마천의 기록에 따르면 묵돌이 당시 흉노와 한나라에 끼친 영향은 적지 않았다. 중국인들이 본래 흉노 선우들의 계보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다가 묵돌 이후에야 비로소 그 계보를 기록하기 시작했다고 한 점을 보더라도, 묵돌의 통치하에 급성장한 흉노가 한나라에 큰 위협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기》에서 흉노의 귀인과 대신이 묵돌을 현명한 군주로 여겼다고 한 점을 보면 흉노인들도 그를 위대한 지도자로 존경한 것으로 여겨진다.
묵돌을 항우와 비교하자면, 그는 문맹이었지만 무력은 몰라도 정치력이나 통솔력은 항우와 비교하는게 실례일 정도긴 하다. 인성적인 측면에서도 지금 보면 둘 다 좋다고 하긴 어렵지만, 항우는 살육을 할 때 감정적으로 하여 민심이 그를 등지고 제 살 깎아먹기로 자멸했지만, 묵돌의 살육행위는 자기 부족의 생존과 세력 확대를 위한 측면이 있었다. 또 애초에 흉노족 관습에서는 강력하고 능력이 뛰어난 자가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유목민의 풍속이 있을 수 있고, 두만 또한 애첩의 아들이 뒤를 잇게 하기 위해 자기 아들이 볼모에 있으면서도 죽일 음모를 꾸몄으며 유교 사회가 자리잡지 못한 흉노에선 서로 간의 패륜이 피장파장이었다.[22]
유목제국의 첫 명군이자 장장 2천여년을 이은 유목제국과 중화제국 간의 대결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23]
비록 현대에는 딱히 흉노를 계승했다고 할 만한 민족이나 국가가 남아 있지는 않지만, 흉노를 선조로 여기는 몇몇 나라들은 묵돌을 영웅 내지는 위인으로 대접하고 있다. 스스로 흉노의 피를 이어받았다고 자부하는 현대의 몽골이 좋은 예이다.[24] 그 외에 터키에서도 그를 "메테 한(Mete Han)"이라 부르며 위대한 선조로 추앙하고 있다. 이 두 나라에서는 우표나 동상 등으로 묵돌의 모습을 표현하기도 한다. 재미있게도 몽골에서는 그의 외모를 몽골인에 가깝게 그리는 반면, 터키에서는 투르크인에 가깝게 묘사하는 편이다. 이외에도 투르크권 국가에서 단군급으로 추앙받는 오구즈 칸의 행적이 목돌과 유사하기 때문에 '''오구즈 칸=묵돌'''이라는 주장이 나온다. 오구즈 칸의 일대기 자체는 단 40일만에 성인으로 성장했고, 용을 해치웠다는 등의 설화적인 내용이 다수 섞여있지만 목돌에 대한 기록물과 비교해보면 행적이 놀랄만큼 유사하기 때문이다. 다만 묵돌 자체가 실제 무슬림이 아니었지만 설화 내용 자체는 튀르크인들이 이슬람교를 믿은 다음에도 게속 구전이 되어왔기 때문에 무슬림(...)으로 나온다.
[1] 현대 몽골의 국부로 추앙받는 담딘 수흐바타르도 여기에서 이름이 유래했고, 몽골의 수도인 울란바타르도 ‘붉은 영웅’이란 뜻이다.[2] 몽골의 역사 학자들은 묵돌 선우의 이름에서 바타르란 단어가 유래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오늘날 몽골인들은 자신들을 가리켜 흉노의 후손이라고 여기고 있다. 허나 정작 몽골 자체는 후술하겠지만 동호의 후예로 추정된다.[3] 흉노에서는 태자를 좌도기왕이라고도 불렀다.[4] 이는 강하고 용기있는 자를 높이 평가하는 유목민 사회의 일면을 보여주는 예이기도 하다. 두만의 입장으로는 사람들의 이목이 묵돌에게 쏠린 상태에서 그를 함부로 해치우기 어려웠을 것이다.[5] 구멍 뚫린 장치를 달아서 소리를 내는 신호용 화살을 말한다. 이 화살을 쏘면 굉음을 내며 날아간다.[6]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보면 묵돌이 앞서 2차례에 걸쳐서 신하들의 분노에도 불구하고 고분고분하게 동호의 말을 들었다가 갑자기 180도 변한 모습과 백등산 포위전에서의 묵돌의 능구렁이 같은 태도를 보면 어쩌면 계획대로일 수도 있다. 즉 동호를 방심하게 만든 뒤 급습할 계획을 세웠고 그걸 숨기기 위해 일부러 저자세로 나오는 척 했을 수 있다는 것 앞에서 나왔지만 찬탈을 계획했을 때도 부하들이 자신의 말을 고분고분 듣게 만들게 하고 그때까지는 기다린 것을 보면 묵돌은 상당히 계획적이고 참을성이 있으며 할 때는 빠르게 해치워버리는 스타일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동호의 왕은 처음부터 묵돌에게 심리전에서 패했지만 그것도 모르고 철저히 묵돌이 짜놓은 연극에 놀아난 꼴이다. 사실일지는 알 길이 없지만[7] 대(代)의 상곡을 말한다.[8] 하지만 당시 흉노의 인구는 백만도 안될 정도로 적어서 현재는 과장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기병 1기는 일반 병사 1명의 최소 3배, 최대 10배의 위력을 발휘하기에 같은 수의 병사라도 압도적인 차이를 낸다.[9] 단, 위에서 언급한 애첩을 사살하거나 동호에 아무렇지 않게 바쳤던 등 얘기를 생각해보면, 단순히 사랑하는 연지의 말을 듣고 결정했다기보다는 다른 원인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우세하다.[10] 원래는 4가지였으나 뒤에 5번 조항이 추가된다.[11] 당연하지만 흉노가 이고 한나라가 동생이다.[12] 중원 국가와 외부 민족 간의 공식 무역.[13] 이건 조공무역보다는, 조선시대에 일본이 왜관 무역을 할 때 세견선으로 미곡 수입하던 것을 생각하면 쉽다. 일본과 북방유목민족은 안정적인 식량수입이 필요하기 때문에 교역량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이득이다. 역으로 이걸 통제하려면 관시 횟수를 줄이거나, 세견선과 미곡량을 줄이면 된다.[14] 다만 단적으로 한신만 놓고봐도, 이때쯤이면 좌천되어 사실상 목숨만 부지하고 있었을 뿐 이미 권력 투쟁에서 밀려난 후긴 했다. 당연히 유방에 대한 충성심도 장담할 수 없던 상황.[15] 당장 양국이 화친을 맺기가 무섭게 기원전 195년, 창립 공신이자 한의 제후국이었던 연나라(燕)의 왕 노관이 한 조정으로부터 의심을 받자 흉노로 투항하며, 그해에 유방이 죽는다. [16] 이유야 여러 가지겠지만 계포가 워낙 신의에서 명성이 높았던 인물었고, 여후 입장에선 대패고제가 흉노에게 화친하고자 딸 아이를 바치려고 했던 아픈 기억을 떠올렸을 수도 있다.[17] 이런 식의 표현법은 후대의 사산조 페르시아에서도 보인다. 실제로 사산조 페르시아의 인 샤푸르나 호스로 2세는 로마 제국에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을 가리켜 '왕중의 왕이자 해와 달의 형제'라는 표현을 썼다.[18] 원문을 보면 무양(無恙)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별 근심 없이 잘 살고 있냐?는 뜻에 더 가깝다. [19] 흉노의 직위 중 선우 바로 밑의 위치. 좌현왕과 우현왕이 있다.[20] 흉노의 시조로 알려진 사람이다.[원문] A B : 後北服渾庾、屈射、丁零、鬲昆、薪犂之國. 於是匈奴貴人大臣皆服, 以冒頓単於為賢.[21] 이때 한나라는 초한쟁패 당시의 국력손실을 회복하였고, 위청이광, 곽거병 등의 명장들까지 거느리고 있었기에 거의 총력전 수준으로 흉노에게 대반격을 가하며 혁혁한 전과를 올리고 있었다. [22] 중원 정복 이후 마찬가지로 서로간 싸우다가 강희제 이후 유교를 확실히 받아들인 청나라와는 너무나도 대조적인 풍경이다. 그나마 몽골계 중원 정복왕조인 원나라 정도가 흉노와 비슷하다.[23] 스포일러 아닌 스포일러를 하자면 결과는 중화제국의 승리로 끝이 났다. 다만 그 중화제국도 처음 세워질 때는 유목국가였다.(정확히는 반농반목) 한족과 북방 유목민족의 대결로 한정짓는다면 신해혁명이 그 마지막 대결이었다고 볼 수 있다.[24] 하지만 정작 몽골의 계보는 도리어 동호와 이어진다. 흉노의 지배층은 튀르크계로 추정되고, 흉노 시절의 몽골계(동호)는 피지배층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