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갑(갑옷)
'''紙甲'''
종이(紙) 갑옷(甲)이란 뜻으로, 이름 그대로 '''종이로만 만든 갑옷'''이다. 사실 조선의 종이제조 기술은 삼국을 통틀어서도 뛰어난 편이었다. 닥나무 섬유로 만든 한지는 식물처럼 결이 있어서 결대로 찢지 않으면 원체 질겨서 좀처럼 찢어지지도 않고 섬유가 죽지 않고 산 상태로 이리저리 서로 엉겨 있는데, 이는 오늘날 두루 쓰이는 A4용지라기보단 가죽, 합성수지에 가까운 편이었다고 한다. 괜히 실록을 완성한 후에 사초로 쓰인 종이를 '''빨아서''' 먹을 뺀 후 이면지인 양 다시 썼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이 아니다. 덕분에 짚단처럼 종이를 꼬아서 신발, 항아리, 밧줄 등도 만들고 옷도 만들어 입었다고 한다. 이처럼 활용도가 높았던 종이였기에 갑옷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었던 것.
추노에도 등장하였다.
처음으로 쓰인 것은 중국 당나라였다. 당나라의 지갑은 9세기부터 실전에 배치한 기록이 나오는데 종이, 목면, 비단 등을 겹치고 누벼 두루마기 형태로 만든 것으로, 가볍고 활동이 편해 궁수들이나 수전에서 주로 사용하였다.
우리나라의 지갑은 조선시대 태종실록에 풍해도(옛 황해도) 관찰사 '신호'가 태종에게 지갑의 도색과[1] 상관하여 건의를 올렸던 사실이 태종실록에서 나오는 것을 보아 조선 초기부터 존재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게다가 약점인 불과 물을 막기 위해서 옻칠을 해서 내구성을 추가로 보완했다.
이름만 봐도 약해 빠진 종이가 주된 재질이니 방어구로서 갖춘 성능이 심히 의심이 되지만, 세상이 아무리 막장으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자기 생사가 걸린 일로 장난을 치는 사람은 거의[2] 없다.'''
지갑은 실제로도 그 방어능력이 충분히 입증되었으며 따라서 당시 조선시대에 제식 갑옷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KBS 스펀지에서 지갑의 성능을 실험했는데, '''겨우 두께 1mm를 10m 거리에서 쏜 국궁의 화살이 뚫지 못하고 부러졌다.''' 다만 실험 조건에는 문제가 있는 것이 흔히 알려진 국궁은 습사용인 데다가 화살도 끝이 매우 둔탁한 연습용 죽시를 썼으며 참고로 양궁은 열세 장을 관통했다. 사실 최종보스는 현대식 권총으로 현대식 권총은 쉰 장을 아예 다 뚫어 버렸다. 그리고 Mythbusters에서도 종이갑옷 실험을 했으며 여기서 실험에 사용한 건 한국식이 아니라 중국에서 사용한 종이갑옷. 자세한 건 Mythbusters/유명한 호기심 해결 목록 문서 참조
제조 방식은 간략하지만 반복 작업이 많은 형식으로, 일정 크기의 한지 여러 겹을 최대한 접어서 6cm 정도의 두께로 만든 다음 그을린 사슴가죽으로 이를 엮어서 만든 지찰갑과, 천과 갑의지를 겹치고 종이못으로 고정해 조끼 형태로 만든 지포엄심갑이 있었다.
세종실록과 동국여지승람에서 갑의지(甲依紙)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갑의지는 전쟁터에서 화살을 막는 갑옷에 쓰인 종이이다. 화살을 막기 위해서는 물론 철판을 써야 하지만, 철판은 무겁기 때문에 대신 가벼우면서도 강도가 철판에 못지 않은 갑의지를 썼다."라고 쓰여 있다.
이 방어구의 냉병기에 대한 방어력은 꽤 훌륭한 편[3] 이며, 제조과정도 크게 복잡하지도 않고, 가볍고 튼튼하여 당시 조선에서 대량생산이 되었다. 특히 주로 투박하게 제조된 날붙이를 많이 쓰는 야만족들 상대로 효험이 좋아서 지갑은 주로 조선 북방 쪽에 배치된 병사들이 많이 착용했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철제 갑옷만큼의 방어력을 지닌 건 아니었기에(게다가 언제나 무기는 방어구보다 한 발 앞서간다...) 사람이 사망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이거라도 있으면 잘하면 다치는 선에서만 끝날 수도 있지 않은가.''' 현대까지 쓰이는 군 제식 방탄모도 파편을 막거나 총탄이 스칠 때 빗겨내어 치명상을 피하도록 만들어진 것이지, 정면에서 날아오는 총알을 튕겨내려고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4] 일단 가장 큰 약점은 역시 불. 아무리 옻칠과 소금물에 절여 강화한다 해도 종이인지라 한계가 있다. 물에 대한 약점은 옻칠을 통한 코팅 처리로 의외로 어느 정도 이길 수 있었다. 다른 약점은 역시 내구성. 아무리 튼튼하고 질기게 만든 종이라 해도 종이는 종이인지라 철갑보다는 내구성이 좀 낮을 수밖에.
조선 후기(흥선대원군 섭정기)에 이 지갑의 재질을 무명천으로 바꿔서 만든 갑옷이 있는데 그게 바로 면제배갑. 실제 어느 방송에서 국궁 및 공기총 등으로 관통 시험을 해 본 결과, 모두 견뎌 냈다. 다만 이 경우는 튼튼하게 고정을 한 것이 아니라 줄에 매달아 놓고 실험을 했기 때문에 투사체의 충격력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으며 실전에서 사람이 입었을 때 났을 결과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참고로 불에 약한 탓에 적군의 화포 공격을 당할 경우 불이 붙기 쉬웠다.
[1] 오오 카모플라쥬! 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위장 효과보다는 도색을 함으로써 생기는 일종의 '코팅'효과를 통한 유지보수 및 '상징'으로서 도색을 요구한 면이 더 크다.[2] 물론 예전에도 세상은 넓고 병신은 많다는 속된말이 딱히 틀린게 아니란걸 증명하듯 조선군중에서도 무겁다고 자기 갑옷의 방호재를 빼는 경우가 있었다. 환도도 분질러서 들고 다니거나 아예 대나무로 만들어 차는 시늉만 하기도 했다. 당연히 그런 사람은 전장에서 가장 먼저 전사한다. 다만 조선 건국 이후 평화가 지속되면서 북방 6진 소속 군사가 아니라면, 방어구를 대충 챙기는 사람들이 늘어났을 가능성은 제법 높다.[3] 위에서 화살건에 관해서 매우 악평을 들었던 것에 비해 왜 이렇냐고 여겨질수도 있지만 냉병기는 대부분 날붙이로 '''베어 상처를 입히는 무기'''이다. 즉 칼이나 창같은 냉병기로 죽는 원인은 자상이나 자상으로 인한 실혈사다. 그러므로 후술하는대로 금속이나 가죽에 비하면 한참 못하지만 어쨋든 날에 살이 직접 베이는것만 막을수 있을 정도로 질기기만 해도 방어구로서 효과가 있긴 있다는 뜻.[4] 애초에 총기의 유효사거리라는 것이 표준 방탄 헬멧을 정면에서 '''관통'''할 수 있는 거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