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제배갑
1. 개요
'''綿製背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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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 흥선 대원군이 지갑의 재질을 무명천으로 바꿔서 만든 것으로 알려진 갑옷 또는 방탄복.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등갑병이 연상된다. 이름은 면(綿)제 배갑인데 사실 목화가 아니라 삼베로 만들어졌다.
병인양요를 치른 후, 왜란 때 일본군이 쓰던 조총 '''따위'''와는 비교도 안되는 서양의 소총의 무서운 위력을 실감한 대원군은 전력 증강을 위하여 여러가지 신병기 개발에 노력했다. 이 무렵에 김기두(金箕斗)와 안윤(安潤)이라는 사람이 고안한 것인데 조총으로 실험한 결과, 12겹의 삼베를 겹치자 총알이 뚫지 못하는 것을 보고 만약을 위해 한 겹을 더 추가하여 총 13겹으로 채택하였다.
비록 개발과정이 원시적이며 과학적인 연구 끝에 나온 결과물은 아니지만, 질긴 섬유를 사용하고, 여러 겹의 섬유를 겹쳐서 탄환의 운동 에너지를 받아내는 원리 자체는 현대의 방탄복과 동일한 것이다.
일각에서는 최초의 방탄복이라고 주장한다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사실 이전에도 방탄복에 대한 개념과 실험은 여럿 있었다. 우르비노의 공작인 프란체스코 마리아 1세 델라 로베레가 밀란의 갑옷 장인에게 방탄조끼 제작을 의뢰하기도 했고. 1561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막시밀리안 2세도 갑옷으로 방탄 여부를 실험하기도 했다. 잉글랜드 내전 당시 올리버 크롬웰의 기병대인 철기대의 갑옷 또한 총알의 데미지를 일부 흡수하도록 설계되었다고 한다. Bulletproof(방탄)라는 말 자체도 15세기 후반에 이미 생긴 것으로 보인다.[1]
직물의 질김을 이용해서 탄환의 관통력을 저지한다는 개념도 이미 오래 전부터 있던 개념이고, 다른 나라의 경우 가장 방탄목적으로 흔하게 사용되던 직물은 비단이다. 질김(인장력)이 다른 직물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았기 때문. 대표적으로 삼국지의 관우의 상징인 녹색 비단 전포는 장식용이 아니라 전장에서 화살을 방어하기 위해 받쳐 입었던 것이고, 중세 몽골군은 비단조끼를 전투시 입고 나갔는데 화살을 비단옷을 뚫지 못했기에 실제 화살에 맞았을 경우, 화살촉은 몸속으로 파고들지 못했고 대신 비단을 당김으로써 손쉽게 화살촉을 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총기 시대로 패러다임이 바뀐 이후에도 비단은 방탄 목적으로 잘 쓰였는데, 예를 들어 권총으로 결투할 때, 비단갑옷으로 몸을 보호하는 것이 관례였다. 당시 실전에 쓰인 17~18세기 비단갑옷(Silk Armour)유물은 현재 박물관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면제배갑은 비단의 비싼 가격 때문에 삼베가 쓰인 것이고 삼베의 인장력은 비록 비단의 인장력에는 미치지 못했겠지만 이는 삼베를 비단보다 훨씬 많이 겹쳐있는 것으로 해결한 것으로 보이고 비단갑옷과 달리 면제배갑의 경우, 몸이 불편할 정도로 두툼하다는 인식이 있는 것도 삼베의 부족한 인장력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생긴 것으로 보인다.
면제배갑의 큰 단점은 천을 여러 겹 겹치는 제작법 특성상 착용시 상당히 더웠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더위를 아예 신경쓰지 않은 건 아닌지라 양 옆에 트임을 주는 등 통기성이나 더위 같은 측면을 신경 쓴 모습이 없진 않다. 다만 아무리 트임을 줘 봤자 면제 투구까지 써 버리면 그야말로 쪄 죽을 지경이었던지라 찜통인건 여전했다. 신미양요 기록 사진을 보면 조선군의 시체가 면제배갑과 세트로 되어 있는 면제투구보다는 전립을 쓴 모습이 대부분이다.
신미양요 당시 조선군에게 지급되었다. 그러나 미니에 탄이 개발되고 후미장전식 소총이 등장하기 시작한 서양식 화기를 막는데 한계가 있었다.
면제배갑이 솜으로 만들어져서 총을 쏘았을 때 마찰력으로 인하여 갑옷에 불이 붙었다는 말이 있는데, 앞서 말했듯이 삼베옷으로 만들었고 총에 맞아서 불이 붙는 일은 없었다. 상식적으로 위의 개발 당사자들과 조선군이 제식 채용하면서 수 차례는 족히 실용적인지 실험했을텐데, 총탄이 접촉하는 순간에 불이 붙는 갑옷을 만드는 것이 더 힘들고, 사용할 리도 없다. 포탄이 폭발하면서 배갑에 포탄 파편으로 튀어 불이 옮겨붙은 것을 오인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미군이 신미양요 때 면제배갑을 하나 건져갔는데, 이것이 현재 남아있는 유일한 면제배갑 유물이며,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미군은 신미양요에서 이 방탄복의 활약이 남긴 인상이 강했는지, 1893년 시카고 엑스포에서 한국관(한옥을 지어서 참가)의 메인 전시품이 이 면제배갑 세트(몸체 갑옷 + 투구)였다.
2010년 2월 KBS 특집 프로그램 시간 여행에서 실물을 토대로 면제배갑을 복원했다. 무겁다는 인식과는 다르게 무게는 매우 가볍다고 하며, 실제 복원한 물건은 불과 3.5킬로그램에 불과했다.[2][3] 참고로 오늘날 쓰이는 방탄재 꽉 채워넣은 풀 바디아머류의 무게가 14kg이다. 또한 단점으로 기록된, 형태상 착용시 겨울이 아니면 매우 덥다는 점도 입증되었다고 한다. 이 문제는 현대의 군용 방탄복에도 아직 그대로 남아있다. 세월이 그렇게 흘러도 아직 방어력과 열피로의 반비례 관계는 해소하지 못했다.
북한에선 제2연평해전 이후 함정 승조원용 방편(탄환을 막는 방탄이 아니고, 폭발로 생기는 파편을 막아내는 용도)복으로 목화솜을 쑤셔넣은 방호구를 지급하는데, 만드는 방식은 좀 달라도 노리는 효과나 입으면 겁나 더운 점은 이거랑 똑같다.
2. 실제 유물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1점이 보관되어 있었으며,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 중이다.
특히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면제배갑은 1871년 미국인 사진사가 촬영한 사진을 통해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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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사진의 출처
이 갑옷의 형태는 총길이 85cm로 반령깃에 양 겨드랑이 부분은 깊이 파서 활동하기 편하게 했으며 또한 어깨의 좌측이 터져 있어 매듭단추가 달림으로써 입고 벗게 되어 있고 양쪽 옆의 트임에는 좌우에 2개씩 각각 앞뒷판으로 끈이 부착되어 매게 되어 있다. 또한 깃과 모든 테두리에는 같은 천으로 바이어스 처리를 곱게 하였으며 앞판의 좌우로 2개, 뒷판에 상하, 좌우로 2개씩 문양을 넣었는데 검은색으로써 도장을 찍거나 그려넣은 것처럼 보인다.
또한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소장품의 경우에는 요대 전면에 걸쳐 부적 문양이 있는데, 성리학적 합리주의를 표방한 조선에서 관급품에 노골적인 주술적 상징을 사용한 것이 이색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방어구에 이러한 주술적인 상징이 나타나는 것은 전세계적으로 보편적인 현상이며, 이 경우에는 특히 열악한 상황에서 우월한 서양 무기에 대항해야 하는 병사들의 심리적 안정을 위한 조치로 볼 수도 있다.
3. 창작물에서
- 영화 <불꽃처럼 나비처럼> 에서 이 갑옷을 입고 방탄실험을 하는 모습이 나온다. 다만 시대적으로 옳은 장면이 아니며 면제배갑에 대고 쏘는 총 역시 반자동총으로 묘사된다. 아리사카는 볼트액션 소총이고 시기상 흥선대원군 똘마니들이 쓰는 것도 맞지는 않지만... 뭔가 역사적 고증을 기대하지 말자. 이 영화 자체가 개그물 비스무리한 그런거라 그렇다.
- 2018년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신미양요 당시 조선군이 사용한다. 자세한 것은 미스터 션샤인/고증.
[1] 사실 저 방탄(Bulletproof)란 단어 자체가 갑옷에 총을 쏴서 막아낸 자국에서 유래된 단어다. 판매 전에 직접 총을 쏴서 방호성능을 직접 증명하는 개념. 그래서 이 시기 플레이트 아머 유물에는 총알을 막아낸 자국이 품질을 인증하는 표식으로 취급되었다.[2] 단, 위의 경우는 면제배갑을 전신으로 무장한 것이 아니라 투구와 흉갑이거나 흉갑만 착용한 경우라는 점을 고려해야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섬유의 중량이 비교적으로 가벼운 것은 사실이다.[3] 하지만 위에도 언급된 스미소니언에 보관되어 있는 실물품은 흉갑만 6.2kg, 벨트부분이 499g, 투구는 1.86kg 정도로 확실히 무거운편이 맞다. 현대에서 재현하다 보니 재질이나 제작법상 차이가 생긴걸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