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헌후

 


'''진(晉)나라 8대 국군
헌후
獻侯
'''
''''''
희(姬)
''''''
진(晉)
''''''
적(籍), 소(蘇[1], 穌[2])[3]
'''아버지'''
진정후(晉靖侯) 희의구(姬宜臼)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812년
'''재위 기간'''
음력
기원전 822년 ~ 기원전 812년
1. 개요
2. 치적
3. 당시 주나라와 제후국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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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晉)나라의 제8대 군주. 진희후아들. 진목후아버지이며, 진문후, 곡옥환숙할아버지다. 주선왕 대의 진나라 군주다.[4]

2. 치적


주선왕 13년(기원전 814년)인 진헌후 9년, 주선왕이 동쪽에 순수를 해 진나라에 이르자 진헌후는 병사를 거느리고 주선왕의 명을 받들어 산동 지방[5]오랑캐들인 숙이족을 정벌하였다. 주선왕은 진헌후에게 명령하여, 2개 읍을 점령하게 한 뒤, 주선왕은 친히 전장에 이르러 순수를 하였다. 진나라 군대는 대승을 거두었다. 본국으로 돌아와 개선한 뒤, 주선왕은 진헌후의 공로를 치하해 향기로운 술, 활과 화살, 수레 끄는 말[6]을 하사했고, 그것을 진헌후는 매우 기뻐했다. 그리고는 즉시 정벌에 공을 세운 이들에게 무거운 상을 내렸다.
주선왕 15년(기원전 812년)인 진헌후 11년, 진헌후는 사망했고, 그 뒤는 아들인 희비왕이 이으니 그가 바로 진목후다.

3. 당시 주나라와 제후국의 관계


당시 산동 지방의 숙이족들을 치는데, 근처에 있는 제나라노나라는 주선왕을 돕지 않고 다소 멀리 떨어진 진나라를 쓴 이유는 바로 당시 제나라와 노나라 등은 주 왕실을 따르려는 마음이 없었으나 진나라는 여전히 주 왕실에 복종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주유왕포사를 웃게 하기 위해 봉화대를 자주 허투로 쓴 일로 인해 제후들이 주나라를 따르지 않았다는 것은 근시안적인 해석이다.
주나라가 권위를 잃은 까닭은 공화 사건과 그 외에 주나라의 실정으로 점점 권위를 잃어갔던 것이 포사 사건과 견융족들이 쳐들어와 호경에서 낙읍으로 동천한 것으로 터진 것 뿐이다.[7]
[1] 사기세본의 기록.[2] 북조 진후묘 유적에서 나온 기록[3] 사기 본문에 남아 널리 알려진 적(籍)은 蘇와 비슷하기 때문에 잘못 적은 것으로 보인다.[4] 이걸 굳이 언급하는 까닭은 당시에 아직은 주나라의 힘이 상당히 남아있었기 때문이다.[5] 그 당시에 제나라나라, 노나라 땅이다.[6] 이 당시에는 전차전을 위주로 했다.[7] 주선왕 때는 중흥기 임에도 이랬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