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신(한왕)
韓王 信
? ~ 기원전 196년
1. 개요
초한전쟁 시기의 한(韓)나라의 왕이자 한(漢)나라의 장수. 한(韓)나라 왕족 출신으로 한양왕의 서손이다.[1]
2. 회음후 한신과 혼동
회음후 한신과 동시대에 활약했던 동명이인. 본명이 똑같은 한신(韓信)이다. 구분하기 위해 보통 '한왕 신'이나, '희신(姬信)'으로 쓴다. 희신이라고 쓰는 이유는 주나라 왕족의 성은 희며, 한나라 왕실의 조상은 주나라의 동성 제후국인 진(晉)나라에서 갈라져 나온 방계 공족이기 때문이다. 다만 아직은 성과 씨(족명)의 차이가 남아 있던 시절이다. 굳이 말하자면 한나라 왕실은 희성 한씨다.
사기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남의 가랑이 밑을 기었다는 대장군 한신 열전은 <회음후열전>이고 이 한신의 열전 제목은 <한신노관열전>으로 자신과 마찬가지로 유방의 개국공신으로서 왕위에 올랐으나 후에 배신자가 된 노관과의 합전으로 묶여 있다. 보통 회음후 한신에 관심이 집중하고 한왕 한신은 관심밖인 경우가 많은 만큼 사기를 처음 보는 독자들을 낚는 주요인이다.
공교롭게도 두 한신 모두 기원전 196년 1월에 사망한다.
3. 생애
본래 한왕 신의 숙부 한왕 성(成)은 장량의 추천을 받아 항량에게 한왕(韓王)으로 봉해져 있었다. 하지만 범증은 장량을 경계해 한왕 성을 감금하고 봉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했다.
결국 한왕 성은 살해당하였으며 대신 항우의 부하 정창이 한왕으로 봉해졌다. 장량은 나중에 신을 유방에게 추천하여 태위(太尉)로 삼았다. 물론 한왕 신 역시 정창을 몰아내고 한나라의 성들을 점령했고 유방에게 한왕(韓王)의 자리를 인정 받았다.
참고로 신은 유방이 최초로 봉한 제후왕이었다. 어느 정도 한의 유민들을 배려한 정치적 결정으로 보인다. 묘하게 장량은 나중에 육국의 후예를 나눠 봉하자는 역이기의 계책에는 반대했지만 한신은 예외적으로 육국의 후예임에도 왕위를 받았다. 이는 한신이 육국의 후예라는 것 이외에도 유방 휘하에서 군공을 세웠기 때문이라고 봐야 할 듯.
이후 유방이 형양에서 달아난 후 위표, 주가, 종공과 함께 형양의 수비를 맡았다. 위표는 주가와 종공이 금방 죽여버렸지만(...). 형양이 함락된 후 항우한테 항복했지만 탈출하여 한나라로 돌아왔다.[2]
초한전쟁이 종결된 다음에는 태원군(太原郡)을 한국(韓國)으로 이름을 바꾸고, 한왕 신은 이곳으로 봉지가 정해진다. 실질적으로 흉노를 정면으로 막는 북방의 번국(蕃國)이 된 셈이다. 하지만 기원전 201년에 마읍에서 흉노에게 포위되었고 한신은 자주 사자를 보내 화해를 요청했으며, 한나라에서 이를 구원했지만 한신이 자주 사자를 보낸 것으로 인해 의심을 받아 책망받자 토사구팽을 우려해 9월에 흉노로 투항했다. 나중엔 진희와 손을 잡고 흉노 기병을 이끌고 쳐들어왔는데,[3] 한왕 신을 상대한 장수 진무(시무)는 지금이라도 돌아오면 폐하께선 패해서 어쩔 수 없이 달아났던 것으로 여기고 처벌하지 않을 것이라고 달래보려 했지만 한신은 초한전쟁 때는 항우에게 붙잡히고 지금은 흉노에 의탁해있는 자신의 처지가 새삼 비참해졌던지 돌아가고 싶지만 이젠 불가능하다는 말로 이를 거절하고 싸우다가 죽었다.
한신이 흉노로 망명하는 도중 퇴당성(頹當城)에서 서자를 낳아 이름을 퇴당이라고 하였으며, 동시에 한신의 태자 역시 아들을 출산하여 이름을 영(嬰)이라고 하였다. 훗날 문제 시절 퇴당과 영이 다시 귀순해 왔으며 각각 궁고후(弓高侯)와 양성후(襄城侯)에 봉해졌다. 오초칠국의 난이 일어나자 한퇴당은 용맹을 떨쳐 반란을 평정하는데 으뜸이었으며, 작위는 손자에까지 이르렀다. 한영의 서손인 언(嫣)과 열(說)은 무제에게서 총애를 받아 영행이라 일컬어졌으며 한열의 손자 증(曾)은 거기장군이 되어 선제의 공신으로 이름을 날리는 등, 한(韓)왕가는 한(漢)시대에 명문 귀족으로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전국칠웅 직계 후손 중에서는 함양성 방화와 더불어 씨도 남지 않은 진나라 영씨 등 다들 배드엔딩으로 끝났는데 이쪽만 유일하게 압도적으로 결말이 좋다.
이 인물의 자손들 중에 특이한 곳에 등장하는 사람이 있으니 바로 서진의 권신 가충의 아들 가밀이다. 본래 한신의 직계자손인 한밀인데, 가충이 아들이 없이 죽어서 외손자인 한밀을 가밀로 고쳐 양자로 삼았다. 그리고 나중에 가남풍이 주살될 때 함께 끔살되어 이 인물의 종가도 이 때 망한다. 그래도 전후 한왕조, 위나라, 서진까지 종가가 버티었으니 중국사치고는 엄청 오래 갔다.
4. 대중매체에서
이미 설명했다시피 한신은 회음후 한신과 한자까지 똑같은 동명이인이며, 이 때문에 초한전쟁을 다룬 작품에서는 많은 혼란을 주는 인물이다.
몇몇 초한지에서는 한왕 신과 혼동한 탓인지, 회음후 한신을 한나라 왕족으로 만들어버리고 장량과도 많이 얽히게 만든다. 덕분에 본의 아니게 처음 초한지를 접하는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존재가 되었다. 대표적인 작품이 고우영 십팔사략이나 고우영 초한지. 여기에 등장하는 '한신'은 한왕 신과 회음후 한신이 작가의 혼동으로 반강제 퓨전 당한 캐릭터이다.
회음후 한신만은 못해도 나름대로 공적을 많이 세운 장군인데, 초한지에서는 회음후 한신에게 묻히는 경향이 강하다. 작가의 지식 부족으로 혼동당하는건 둘째로 쳐도, 구분을 제대로 하는 작가들이라도 한자까지 똑같은 동명이인이 누차 등장하면 독자에게 혼동을 줄 수 있기 때문인지 일부러 등장 자체를 안 시키고 배제하는 경향이 있다. 안습.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의 유방전에서도 아예 존재 자체가 등장하지 않는다. 게다가 한신이 왕족이라는 설정으로 한왕 신이 등장하면 일단 한신이 가족이 형양에 갇혀서 죽느냐 사느냐 하는데도 유방과 딜을 하던 호래자식이 된다(...).
5. 둘러보기
[1] 여담으로, 한왕 신의 13대조, 곧 양왕의 11대조는 시호를 한간자(韓簡子)라 하는 한불신(韓不信)이다. 조상과는 이름이 정반대인 셈.[2] 항우가 자신의 숙부를 죽인적도 있는데다가 본인도 항우의 부하인 정창을 죽이는 등 서로 화합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3] 공교롭게도 회음후 한신이 진희와 모의한 혐의로 처형당한 것과 똑같은 시기였다. 한신의 모반 혐의가 이쪽이 한 짓을 이름이 똑같아서(...) 뒤집어 쓴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