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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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말~한초의 무장. 창읍 사람으로 자는 중(仲)이다. 초한전쟁에서 유방을 도와 한 왕조를 세우는데 기여한 개국공신이다. 그러나 말년에 한신, 영포와 함께 토사구팽 당한 비운의 명장이다.[1]
2. 거야의 수적으로 일어나다
거야 지역에서 물고기를 잡으면서 무리를 이끌고 도둑질을 하고 있었다. 시황제 사후 진승이 난을 일으켜 천하가 혼란스러워지자 그를 따르던 무리 중 일부가 팽월에게 우리도 들고 일어나자고 궐기할 것을 권했으나 팽월은 "지금은 두 용이 싸우고 있으니[2] 때를 기다리자"며 궐기하지 않았다.
1년 정도 지난 후 팽월의 근거지 주변의 사람 백여 명 정도가 팽월에게 다시 찾아가 수령이 될 것을 청했는데, 팽월은 이를 사양하다가 억지로 권하자 겨우 허락했다. 이들에게 다음 날 해가 뜰 때까지 합류하기로 약속하고 약속 시간에 늦는 자는 참수하기로 했다.
다음 날 해가 뜨자 십여 명이 지각했는데 가장 늦은 자는 해가 중천에 떠서야 도착했다. 그러자 팽월은 '''"난 나이도 많은데도 너희들이 나를 억지로 대장으로 삼아 놓았고 약속까지 했는데 늦게 온 사람이 왜 이리 많나? 늦은 사람이 많아 다 죽일 수는 없고 가장 늦게 온 사람을 죽이겠다."'''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가장 늦은 사람이 속한 무리의 두령에게 명을 내려 그를 죽이라고 말했다. 모인 사람들은 "뭘 그렇게까지..."하는 반응이었다. 그러자 팽월은 지각한 그 사람을 끌어내어 직접 목을 쳐 제사를 지냈고 이후 팽월이 모인 자들에게 명령을 내리자 그들은 팽월을 두려워하며 명령을 따랐다고 한다. 군령의 엄격함을 설명해주는 일화로, 손무에 대한 일화중에도 비슷한 예가 있다. 즉 팽월은 용병의 기본을 알았다.
이렇게 세력을 규합한 후 각지를 전전하며 땅을 공략하다가 제후들로부터 떨어진 병사들을 모아 1천명을 모았다. 한편, 당시 패공이었던 유방이 초회왕의 명을 받고 서진하던 중에 창읍을 공격할 때 팽월이 유방을 도우면서 유방과 대면했다. 하지만 창읍이 함락되지 않자 유방은 그대로 서진했고 팽월 역시 거야에 머물면서 위나라의 흩어진 병사들을 모았다.
3. 급습으로 초나라를 괴롭히다
항우가 진의 수도 함양을 점령하고 제후왕들에게 분봉을 시행하였으나, 팽월은 임지를 받지 못하였다. 항우는 일개 수적으로 거병한 팽월의 활약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팽월은 항우에게 반감을 품게 된다.
진나라 멸망 이후 팽월은 일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제나라에게 의지한다. 제나라 왕 전영 역시 제나라 땅을 3조각으로 갈라버린 항우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팽월을 시켜 제나라의 땅을 정벌하고 예전 제나라의 영토를 회복한다. 항우는 자신의 분봉을 따르지 않았다며 제나라를 공격한다. 이때 유방은 팽월과 연락하여 장군에 봉하도록 했고, 팽월을 부추겨 초나라의 후방을 공격했다.
팽월은 항우의 본대가 제나라 땅을 공략하는 동안 초나라의 후방 깊숙한 곳으로 치고 들어가 보급품을 약탈한 다음 빠져나오는 전술을 반복했다. 그 기동성은 따를 자가 없어 초나라는 번번히 당할 수 밖에 없었고, 항우 측에서 소공 각을 보내 팽월을 토벌하려 했으나 오히려 역으로 당했다.
유방이 관중을 탈환한 후 동진하자 팽월은 3만의 군대를 이끌고 외황에서 유방을 만나 한나라를 따르기로 한다. 이 때 유방은 팽월을 위나라 상국으로 임명하고 군권을 주어 양나라 땅의 평정을 맡긴다.
팽성까지 쳐들어간 유방이 수수에서 항우에게 개박살이 나자 팽월도 군사를 이끌고 자신의 본거지인 외황 지역으로 후퇴한다. 한나라가 후퇴하여 형양과 성고에 방어선을 펼치자, 팽월은 황하 연안에서 슬금슬금 양나라 땅을 평정해간다. 여전히 항우는 팽월을 토벌할 수 없었다.
그 후로 유방이 무한방어를 펼치는 동안 초나라 북쪽 땅에 자리를 잡고 계속해서 초나라의 보급로를 끊고 용도(식량수송로)를 파괴한다. 이것은 항우에게 커다란 위협으로 작용하였고, 항우는 유방과의 싸움에 집중할 수 없게 된다. 그냥 보급로만 공격한 것도 아니고, 조금 여유가 생긴다 싶으면 바로 초나라의 수도인 팽성까지 급습하여 항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형양과 성고에서 유방이 무너졌을 때 팽월의 후방 급습으로 인해 항우가 유방을 추격하지 못하고 뒤로 후퇴했을 정도다. 항우는 유방과 싸우는 최전선 지역과 팽월이 파괴하고 다니는 후방 지역을 왔다갔다 하느라 막대한 군사적 소모를 겪어야만 했다. 한신이 초한 전쟁의 승패를 확정시키고 전란 종결을 한참 앞당긴 시대적 위업을 달성했다면, 팽월은 초나라와 대치하고 있던 유방에게 직접적으로 가장 큰 도움을 준 사람이다.[3]
마침내 참을 수 없게 된 항우는 직접 팽월을 추격하여, 외황 지역까지 도착한다. 외황이 팽월의 오랜 근거지였음을 아는 항우가 "이 땅에 사는 열다섯 살 이상의 남자를 모두 죽여라" 라는 명을 내리자, 당돌하게도 13살 남자 아이가 항우에게 "포악한 팽월이 외황의 백성들을 괴롭혔기 때문에, 힘없는 우리가 항복한 척 하고 대왕이 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왕께서는 백성들을 모두 구덩이에 파묻으라고 하십니다. 명을 거두지 않으신다면, 앞으로 백성들은 대왕을 두려워하며 필사적으로 저항하여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직언하여, 항우가 명령을 취소하게 만든다. 이후 항우가 양나라 땅으로 진군하자, 팽월이 함락시켰던 여러 성읍이 저절로 성문을 열고 항우를 맞이했고, 마침내 항우는 13살 소년의 깊은 헤아림에 감탄했다고 한다.
어쨌든 이러는 동안 항우가 빠져있는 최전방 지역에서 다시 유방이 공격해들어온다. 결국 항우는 팽월을 잡지 못하고 다시 유방을 상대하러 진군할 수 밖에 없었다. 원래 항우는 대사마 조구에게 병력을 주고 무조건 성을 지키라고만 명하였으나, 유방의 도발에 넘어간 조구는 명을 어기고 먼저 공격하는 바람에 함정에 빠져 참패한다. 사마흔과 동예를 시켜 조구를 보좌하게 했지만, 조구는 사마흔과 동예가 배신자라는 점을 이유로 그들의 진언을 듣지 않았던 것이다.
한편 항우가 떠났음을 알게 된 팽월은 다시금 양나라 땅을 정벌하기 시작했고, 점점 보급이 어려워진 초나라는 전쟁 수행 능력을 거의 상실한다. 이 즈음해서 한신이 북방을 완전히 정벌하였고, 한나라가 초나라를 상대로 확실한 우위를 점하기 시작한다.
4. 드디어 왕위에 오르다
한편 남방에서는 영포가 구강 땅을 정벌하고 다니면서 항우를 더욱 고립시켰고, 사방에 자기 편이 하나도 없는 항우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이때 유방 측에서 항우의 사정을 간파하고 화평 조약을 제의하는데, 조건은 항우가 붙잡고 있는 유방 가족의 석방이었다. 항우는 이 조건에 승낙했고, 자기가 가지고 있던 유방을 흔들 수 있는 마지막 패마저 스스로 내어준 꼴이 되었다.
물론 화평 조약 같은건 뻥이었고, 유방 측에서는 항우를 곱게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항우가 군대를 해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자, 유방은 한신과 팽월에게 사람을 보내 항우를 포위하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한신은 제나라의 반란을 진압해야 한다는 이유로, 팽월은 양나라 땅을 전부 평정할 때까지 군사를 나눌 수 없다는 이유로 협조하지 않는다. 결국 유방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추격해 고릉에서 항우를 공격하지만, 반대로 항우에게 깨져서 추격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이 당시에 팽월은 유방의 심기를 거스르고 있어서 유방과의 사이가 이전만 못했다. 한신이 제나라를 정벌하면서 쫓겨난 제나라 왕실의 후손이 팽월에게 도움을 청해 의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과거 진나라 멸망 직후에 팽월이 영토를 받지 못해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일 때 제나라에게 도움을 받았던 적이 있으니, 과거의 빚을 갚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한나라와 제나라의 사이가 좋지 않았으므로, 유방 입장에서는 제나라 왕실의 후손을 보호해주는 팽월이 곱게 보였을 리가 없다. 그저 굳건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는 팽월을 섣불리 자극할 수 없었기 때문에 건드리지 못하고 속으로만 끙끙 앓았던 것이다.
유방은 장량을 불러 팽월을 어떻게 구슬리면 좋을지 방법을 묻는다. 장량은 "팽월은 왕이 되고 싶은데 대왕께서 아직 왕으로 임명해 주지 않아서 군사를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양나라 땅[4] 을 팽월에게 주어 양왕으로 삼으신다면 앞으로는 폐하에게 충성을 맹세할 것입니다." 라고 진언한다.[5] 유방은 장량의 말을 따랐고 팽월은 감복하며 유방을 따르게 된다.
이후 항우와의 최후 결전인 해하 전투에 5만 군사를 이끌고 참전하였으며, 마침내 초나라를 격파하고 항우를 토벌한다.
이렇게 천하가 평정된 후 유방은 황제가 되어 한나라를 열었고 팽월은 양나라를 다스리는 왕이 되어 정도에 도읍을 세웠다. 거야 연못에서 일어난 일개 수적집단의 우두머리에서 시작하여, 드디어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 된 것이다.
'''그러나 한나라 개국 공신 제후왕들이 대부분 그렇듯, 팽월의 영광은 여기까지였다.'''
5. 몰락
몇 년 뒤 조나라 승상 진희가 반란을 일으키자 유방은 친히 반란 진압에 나서면서 팽월에게도 병사를 징발하려 했으나 팽월은 병을 핑계로 직접 가지 않고 수하 장수를 보냈다. 빡친 유방이 사자를 보내 갈구자 쫄아버린 팽월은 직접 유방에게 가서 사죄하려고 했는데 부하 호첩이 "처음에 안 가셨다가 꾸지람을 듣고 가시는데, 지금 가시면 분명히 황제에게 잡히게 됩니다. 차라리 이 기회에 반란을 일으키십시오."라고 진언했다. 팽월은 반란을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직접 가면 잡힌다는 호첩의 말은 맞는 것 같기도 해서 그냥 병을 핑계대고 버티고 있었다.
이 무렵 팽월은 태복[6] 에게 화가 나 있어서 끝끝내 죽이려고 하자[7] 태복은 도망쳐서 유방에게 "팽월과 호첩이 모반을 꾀합니다"라고 고변했다. 유방은 사람을 보내 팽월을 급습하여 잡은 후 낙양에 가두었고 이후 심문을 해 보니 반란죄가 인정되어 심문한 관리가 팽월을 법대로 처벌하기를 청했다. 보고를 받은 유방은 팽월을 서민으로 강등시켜 촉으로 귀양보냈다. 그렇게 촉으로 귀양가던 중 장안에서 오던 여후와 만났는데 팽월이 여후에게 울며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고향 창읍에 살게 해달라고 청하자 여후는 이를 허락하고 팽월을 낙양으로 데리고 왔다. '''그러나 이것은 여후의 페이크였다!''' 초나라의 포로가 되어 항우의 곁에 있으면서 팽월의 유격전이 거둔 효과를 유방보다도 더 확실히 체감해온 여후는 팽월을 절대 살려둬선 안될 위험분자로 여겼던 것이다.
여후는 부탁을 들어주는 척 다시 팽월을 유방에게 데려가서는 곧바로 태도를 뒤집으며 "팽월을 살려두는 것은 후환을 남기는 것이니 이 기회에 죽이는 게 나아요. 그래서 제가 팽월을 데리고 왔지요"라고 아뢰었고 팽월의 부하였던 사람으로 하여금 팽월이 다시 모반을 꾀했다고 말하게 했다. 정위[8] 왕염개가 팽월과 그 가족을 멸족시킬 것을 청하자 유방은 이를 받아들여 팽월과 가족들을 모두 죽였다. 양나라 왕은 유방의 아들인 유회[9] 에게 넘어갔다. 유방과 여후는 팽월의 시체를 '''소금에 절이고 그 살덩이를 각지의 제후들에게 보냈다'''. 즉 "니들도 허튼 생각하면 이렇게 된다. 알아서 몸 사려라"라는 의미. 정작 이로 인해 공포에 질린 노관과 영포가 반란하게 되고 유방의 죽음으로까지 이어졌으니 역효과만 난 조치였다. 다만 팽월의 머리 부분만은 시장에 내걸렸는데, 팽월의 옛 친구이자 신하인 난포가[10] 죽음을 무릅쓰고 거두어 무사할 수 있었다.[11][12]
이렇듯 팽월은 초한전쟁에서 화려한 게릴라전을 펼쳐 용맹을 떨친 끝에 개국 공신의 반열까지 올랐지만, 그 역시 토사구팽의 비참한 말로를 맞게 되었다. 제거된 공신 중에서도 가장 억울한 사례로, 한신은 초한전쟁 중에도 자립의 움직임을 보이고 역이기를 죽게 만들고 종리말을 숨기는 등 책잡힐 일이 많았고, 장도와 영포와 노관은 실제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제거당한 것이지만 팽월은 그런 것도 아닌데 의심받아서 죽었다. 팽월의 목을 매장하며 곡하다가 체포당한 난포가 '반란죄라고 팽월의 삼족을 멸하더니 아직도 변변찮은 증거 하나 나온 게 없지 않느냐'며 항의하니 유방이 할 말이 없었을 정도. 거병할 때도 나이가 제법 있었다는 언급이 있는 걸 보면 죽을 무렵에는 고령이었을 것이다. 한신과 소하도 이렇게 다짜고짜 죽이려 들지는 않았는데, 팽월에게만 왜이리 가혹했는지는 의문이다. 다만 초한쟁패기 당시 항우를 끊임없이 괴롭힐 정도로 게릴라전에 능하다보니 언젠가 실제로 반역을 일으켰을 때 진압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어차피 골칫거리가 될 가능성이 높으니 핑계가 생긴 김에 죽인 셈이라 할 수 있다.
허나 팽월 또한 스스로 유방의 심기에 거스르는 행동을 했던 것은 사실이다. 특히 문제가 된 것은 개국공신이기는 하나 황제의 명령을 밍기적 대며 무시한 것인데, 해하 전투때에도 가만히 있다가 고릉에서 유방이 대패한 후 포상을 약속받고 나서야 움직였고, 그 외에도 유방이 팽월에게 병사를 내놓으라고 재촉했다는 사서의 기록을 보아 수시로 명령을 어겼던 것 같다. 이는 신생왕조에 있어 가장 중요한 황제의 권위를 땅바닥에 떨어뜨리려는 것과 같은 행위로, 가뜩이나 반란으로 신경이 날카로워진 유방으로서는 심히 불쾌하기 짝이 없는 행위였다. 팽월이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13] 유방의 명령에 거스르지만 않았다면 토사구팽을 당하더라도 그럭저럭 나름대로 평온하게 천수를 마무리 했을지도 모른다. 황제 눈치 보면서 현명하게 엎드려야 하는 시점에서 옛날 군벌 시절처럼 처신한 것이 죽음을 부른 것이다.
사기에서는 위에서 언급되었듯 위표와 함께 열전이 실려 있는데, 사마천은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을 미천한 신분에서[14] 입신 출세하여 왕의 자리까지 올랐으나 반역의 마음을 품고 패망한 부류라고 적고 있으며 위표와 팽월 모두 나름대로 능력은 있었으면서 자신의 몸을 보존하는 것만 걱정한 부류로 평가하고 있다.
6. 창작물에서
적룡왕에서는 카리스마 있는 노인으로 등장. 거병할 때 지각한 사람의 목을 벤 일화도 나온다. 마지막에 항우를 함께 치자는 유방의 사자를 맞이하고 나서는 "후후훗, '''유방놈!''' 드디어 천하를 잡으려 하는구나!"라는 대사를 날린다(...).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고대무장 중 한 명으로 등장. 한신, 영포 등과 비교하면 능력치가 살짝 후달리는 느낌이지만 그래도 무장으로는 쓸만한 능력치다.
삼국지 11에서의 특기는 급습. 급습전에 능했던 그에게 잘 어울리는 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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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희대의 명대사를 남겼다(...). 정작 본인은 촉 땅에 들어가기 싫어서 여후 앞에서 매달리다 처참하게 죽었다는 걸 생각하면 당혹스러운 대사.
그러나 삼국지 12에서 삭제되었다. 그것도 같이 삭제되었던 인상여, 장의가 나오는데...
샐러리맨 초한지에서는 인천 지역에 해상 물류를 주름잡는 조폭 두목으로 등장하였다. 배역은 자이언트에서 이범수의 조력자로 등장했던 송경철.
삼국지평화에서는 '''유비'''로 환생한다. 환생하기 전에 촉 땅은 협소해서 어찌 한신(조조)와 영포(손권)과 맞서냐고 걱정하자 부하를 얻게 되는데 바로 항우(관우)와 번쾌(장비), 괴철(제갈량), 허복(방통).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에서는 고대무장으로 나오며, 병종은 산악기병. 그러나 같은 병종의 조운과 여포, 마초, 등애와 달리 쓸모없는 약체라 버림받는다.
라디오 드라마 와이파이 초한지에서의 성우는 남도형.[15] 진승·오광의 난 이후 거야택에서 수적생활을 하다 거병하는 것으로 첫 등장한다. 이후 함양레이스를 하는 유방을 도우면서 다시 등장한다. 항우의 18제후왕 분봉 이후, 필리버스터에 동참하며, 삼진평정 이후 독립적으로 활동하면서 유방을 도와준다. 천하통일을 위해 장량이 구상한 독수리 삼형제 둘째에 해당한다.[16] 형양 · 성고 전역과 광무 대치 때 계속 등장해 항우의 후방을 급습하지만 광무 대치 전후 시점에서 유방에게 도움을 주는 것을 거절하고 왕위를 요구함으로써 토사구팽이 예약된다.[17] 해하 전투 때 한신의 명령을 따르고 항우군을 공격하는 공적을 세운다. 한나라 건국 이후, 조금씩 노쇠한 모습을 보이며 한신과 함께 여태후의 독수리 삼형제 해제 멤버 중 두번째로 지목되어 파촉으로 압송되나 여태후와 조우해 형장에서 죽는 것으로 더 이상의 등장은 없다.[18]
[1] 다만 한신은 끔찍한 처세술 덕에 이미 눈밖에 난 상태였고 영포 역시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그 둘은 마냥 억울하다고 할 수는 없다.[2] 진승과 진나라의 싸움을 말한다.[3] 한신은 항우와는 해하 전투 이전까지 교전을 벌인 적이 없고, 성고가 뚫려서 유방이 도망쳐올 때까지 원군도 보내지 않아서 참다 못한 유방이 직접 찾아가 군사를 강탈하게 만드는 등 초한전과는 반쯤 동떨어진 별개의 세력에 가까웠다. 참고로 위의 성고가 뚫렸을 때도 사실 타이밍이 좀 늦었는데 팽월의 활약으로 수습할 수 있었다.[4] 수양 이북에서 곡성까지의 땅으로, 대략 오늘날의 하남성 동북부와 산동성 서부 지역이다.[5] 이때 유방은 한신을 회유할 방법에 대해서도 물어봤고, 장량은 제나라 땅을 아예 넘겨주고 통치권을 완전히 보장하면 된다고 답한다. 당시의 한신은 제나라 왕위에 오르긴 했지만 형식적인 왕위였고 완전히 분봉 받은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6] 이 당시 수레나 말을 관리하던 관리. 유방의 심복 하후영이 이 직책에 있었다.[7] 다른 기록에 따르면 팽월의 친구였는데 팽월의 이름을 팔아 백성들에게 온갖 횡포를 부리다가 처벌받게 되자 팽월을 모함했다고 한다.[8] 형벌을 관장하던 관리.[9] 시호는 조공왕. 유방의 아들들은 문제를 제외하면 다들 불행한 죽음을 맞이했는데, 조공왕도 마찬가지. 여태후가 동생 조유왕 유우를 굶겨죽이고 조공왕을 양나라에서 조나라로 옮겼고 또 여씨의 여자를 왕후로 삼게 했는데, 조공왕이 어떤 여자를 사랑하자 이 여왕후가 그 여자를 죽였다. 조공왕은 상심이 커 자결했고, 여태후는 조공왕이 여자 때문에 죽었다고 조나라를 조공왕에게서 거두어 여씨 제후 왕국으로 삼았다.[10] 연왕 장도 밑에서 일하다가 반란에 연루되어 죽을 뻔한 것을 팽월이 재물을 바쳐 구해준 은혜가 있었다고 한다.[11] 이 때의 난포의 목숨을 건 간언을 가상히 여긴 한고제는 난포를 살려준 후 도위로 임명하였고, 이후에도 난포는 봉국인 연나라에서 재상이 되어 흉노를 격퇴하는 등의 공로를 세우다 오초7국의 난에서 반란 진압에 지대한 공을 세우고 제후 자리까지 올라 한경제 재위시기까지 천수를 누린다. 다만 성격은 마냥 의협심만 넘친 것은 아니었는지, 반고의 한서에선 은혜와 원한을 철저히 갚았다고 서술한다.[12] 근데 팽월과 마찬가지로 생년일은 안 나와 있지만, 무지막지하게 장수했다. 젋은 시절에 팽월과 같이 술집 일을 했었고, 기원전 202년에 팽월이 대부로 삼았다는 거 보면 그 당시 나이가 아무리 젊어도 30대였을텐데, 기원전 145년에 사망했다. 즉 오초칠국의 난에서 공을 세울 당시 '''70~80대'''였다는 의미가 되고, 사망 당시 나이는 심지어 90대였을 수도 있다는 의미. 고대 기준으로는 믿기지 않을 수준의 장수다.[13] 사실 팽월은 원래 유방 못잖은 무지렁이였던 데다가 유방의 직속 부하였던 적도 별로 없다보니 황제의 신하이자 제후라는 위치에 맞는 처신에 대해 잘 몰랐을 가능성이 높다. 즉, 이미 한나라와 고제를 섬기는 제후이면서도 마음가짐은 여전히 초한전쟁 시절 게릴라전을 펼치던 때와 마찬가지라는 것. 팽월이 꽤 나이가 들어서 거병을 했다는 말도 있으니(처음 거병할 때 주위에서 그에게 두목 자리를 맡아줄 것을 요청했으니 꽤 나이가 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 쉽게 마음가짐이 변하진 않았을 것이다.[14] 그러나 성씨만 봐도 알 수 있듯, 위표는 위나라 왕족 출신으로 나라가 망하면서 나락으로 굴러떨어진 케이스이지, 처음부터 미천한 신분은 아니었다.[15] 항우도 맡아서, 항우와 만나 유격전을 할 때마다 수시로 자문자답한다.[16] 사기에서 장량이 진언한 천하통일을 도울 세 인물을 재창작> 독수리 삼형제가 된다.[17] 작중에서 해하 전투 이후 두번째로 제거된다. 첫번째는 한신.[18] 팽월의 음침한 톤은 후속작의 사마의에게 계승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