쯩 자매
1. 개요
쯩 자매(徵姉妹)는 1세기 후한의 지배 하에 있던 베트남(당시에는 남비엣)의 여왕으로 남비엣의 반란을 주도한 쯩짝(14년 ~ 43년)과 쯩니(14년 ~ 43년) 자매를 일컫는다. 베트남의 잔 다르크라고도 불린다.
2. 생애
2.1. 항거의 배경
베트남이 중국의 한(漢)나라에 점령당한 것은 기원 전(BC) 111년의 일이었다. 그 후 100여 년 동안 중국은 간접통치 방식으로 베트남을 지배했는데, 기원 후부터는 직접통치 방식으로 변화했다. 한나라는 복장에서 예식에 이르기까지 주민들의 풍습과 습관을 강제로 바꾸려 했을 뿐만 아니라, 가혹한 세금을 부과하고 건강한 젊은이들을 노예로 끌고 가기도 했다.
압제가 계속될수록 베트남 민중들의 가슴 속에는 서서히 독립에 대한 열망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당시 하노이 서북쪽의 작은 마을 '메린'의 토호인 '락장'에게는 ‘쯩짝’ (徵側 Trưng Trắc, 징측)과 ‘쯩니’ (徵貳 Trưng Nhị, 징이)라는 총명한 자매가 있었다. 중국에 대항하여 싸워야 할 때가 오고 있다고 예감한 쯩 자매의 어머니 역시 딸들에게 무예를 가르치고, 군사전술을 교육한다.
2.2. 항거의 전개
언니 쯩짝이 19살이 되었을 때, 그녀는 이웃 마을 ‘추지 엔’의 락장 ‘티 사익’ (Thi Sách)과 혼인한다. 베트남에 전승되는 전설에 따르면 쯩 자매가 반란을 일으킨 이유는 언니인 쯩짝의 남편인 티 사익이 후한의 태수에게 처형당하였기 때문이며, 티 사익은 부당하게 대우받는 베트남인을 위해 투쟁하였다고 묘사된다.
그 후 쯩짝과 쯩니 자매는 사람들 앞에서 "압제자를 몰아내자"고 설득한다. 하지만 막강한 중국 군대의 위협 앞에 베트남 사람들은 행동하기를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쯩 자매는 숲속으로 걸어 들어가 화살로 호랑이를 사냥해서, 그 가죽을 벗겨 전투 명령서를 작성했다고 한다. 쯩 자매의 강인함과 의지에 감동한 베트남 민중들은 쯩 자매의 지휘 하에 점령군을 몰아낼 준비를 했다. 드디어 서기 40년, 한나라 군대에 맞서 베트남 민중들은 봉기하게 된다. 무기도 전술도 중국군에 뒤떨어졌지만, 결연한 의지 하나로 베트남군은 중국 군대에 맞섰다. 언니 쯩짝은 뛰어난 전략가였고, 동생 쯩니는 두려움을 모르는 타고난 전사였다.
한나라군은 이를 진압하고자 쯩 자매가 이끄는 봉기군과 수차례 교전을 벌이지만, 세를 업고 달려드는 봉기군이었던지라 한나라군은 족족 격파당하고 베트남에서 쫓겨나고 만다. 게다가 머지않아 쯩 자매의 베트남군은 당시 베트남에 설치된 한나라의 군(郡)인 교지(交趾)를 점령하고 한나라 세력을 완전히 축출해버리는 데에 성공했다. 그리고 그 기세를 타고 언니 쯩짝은 왕위에 올라 한의 지배에서 벗어난 독립된 왕국을 선포하여 봉기의 위세는 절정에 달한다.
한편 한나라 입장에서는 설상가상으로 쯩 자매의 봉기가 성공을 거두었다는 소식을 접한 인근의 수많은 성들 및 고을들이 모두 쯩 자매의 세력권에 합세하여 반란을 일으켜, 그 영역이 오늘날 광둥성 남부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결국 이는 제국의 변방이라고는 하나 엄연히 제국의 영토요, 남방영토가 뚝 떨어져 나갔다고 해도 무방한 수준이었으니, 당연히 좌시할 리 없던 한나라는 이를 진압하고자 토벌군을 파병하게 된다.
그리고 그 토벌군의 장으로 임명된 이가 <삼국지>에 나오는 마등, 마초의 선조인 명장 '''마원'''(馬援)이었다.
2.3. 비운의 결말
베트남의 자유와 독립은 오래가지 못했다. 쯩짝이 왕위에 오른 3년 뒤인 서기 43년, 한나라의 광무제는 대규모 토벌군을 마원 장군에게 맡겨 베트남으로 파병했다. 3만 명의 토벌군을 상대로 베트남군은 여장군 ‘레쩡’의 반격 등 영웅적인 항전을 벌였지만, 베트남이 상대하기에 중국은 턱없이 강한 나라였다. 물자도 부족하고, 훈련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병사들을 데리고 중국의 정예 군대를 이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이때 한나라 군 전부가 옷을 모두 벗고 알몸 작전으로 나서서 베트남 여성 병사들은 당황하고 부끄러워 달아났다고 한다.출처[1]
오늘날의 하노이 근처에서 벌어진 최후의 전투에서 쯩 자매는 필사적으로 항전했지만 중국군의 포로가 된 수천 명의 베트남 병사들은 참수당하고 만다. 쯩 자매는 몸을 숨기지만 쫓아온 마원에게 잡혀 결국 처형당하고 목이 낙양으로 보내진다.
3. 기타
베트남 아이들이라면 어려서부터 그리는 인물로, 이들 자매와 코끼리는 늘 세트로 따라 다닌다. 쯩짝은, 한족인 조타(남월)와는 달리 베트남의 정체성을 내세우고 처음으로 왕이 된 인물이기 때문에 베트남족의 역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에는 쯩 자매를 뜻하는 하이바쯩[2] 군이 있고 베트남 곳곳에 자매의 상이 세워져 있으며, 호찌민 최대 번화가 1군 시내에는 하이바쯩 거리와 쯩짝(쯩 자매 중 언니)의 남편에게서 이름을 따온 티사익(Thi Sách)거리가 나란히 있을 정도로 베트남 사람들에게 쯩 자매가 갖는 의미는 크고도 깊다.
쯩짝은 기원 1세기에 여왕에 올랐는데, 이는 아직 이 시기에는 베트남에서는 유교 문화보다 전통 문화의 영향이 더 컸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한국 인터넷상에 쯩 자매가 쌍둥이라는 설이 퍼져있는데 해외 인터넷상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한국에서만 퍼진 낭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