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방지추마골피
1. 개요
천방지축마골피(天方地丑馬骨皮)는 상놈이 쓰던 천한 성으로 잘못 알려진 7대성이다.
천(天)은 무당, 방(方)은 목수, 지(地)는 지관, 축(丑)은 소백정[1] 마(馬)는 말백정, 골(骨)은 뼈백정, 피(皮)는 가죽백정이라는 설이며 이 성들이 노비 성이라는 도시전설이다.
사실 역사를 좀 배운 사람은 백정 부분에서 뭔가 이상한 것을 느낄 것이다. 백정은 돌아다니며 사냥, 도축을 하는 화척(양수척)이나 가죽신발을 만드는 갖바치, 버드나무 가지로 바구니 만드는 고리백정 등등으로 나뉘지, 말이랑 소 잡는 사람, 뼈랑 가죽 다루는 사람을 따로 나눠 부르진 않는다.[2]
그리고 지관은 애초에 천민이 아니다. 조선시대와 고려시대에 지관은 엄연히 중인으로 분류되고, 국가에서 선발하는 잡과에도 의관이나 천문관 등과 함께 포함되어 있다. 이 때문에 서얼이나 몰락 양반들도 나중에 지관을 하는 경우가 조선 후기가 되면 많이 보인다. 그리고 방을 목수로 본다면 이 역시 장인[3] 으로 중인이지 천역이 아니다.
거꾸로 여기에 안 들어가는 천역들도 존재한다. 천민 문서를 보면 알 수 있으나, 과거에는 백정보다 광대를 오히려 더 세분화한 편이었고, 그 중에서 오히려 거주지 자체가 달랐던 백정들은 오히려 접점이 적었던 편이었다. 저 표현이 현대적 표현이라는 증거이다. 그리고 저 7, 8로 나누는 천민에 속하지 않는 천민들도 있었다. 예를 들면 소금을 만드는 연간이나 뱃사공인 진척 등이 대표적.
결정적으로 한국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백정이 임씨인데 이 리스트에 안 들어가 있다. 역사적 고증이 전혀 안 됐다는 확실한 증거.
2. 진실
이들 성씨는 오히려 신원이 확실하였다. [4] 이유는 아래 대목을 참조. 실제 가문의 내력과 해당하는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이 항목을 읽어보길 바람.
※ 법적으로 신분제도가 폐지된 갑오개혁(1894년) 이전 인물만 기재할 것.
- 천(千)씨: 일천 천. 중시조 천만리(千萬里)임진왜란 때 명나라 원군의 조병영양사(調兵領糧使) 겸 총독장(總督將)으로 파견되었다가 귀화했다. 시조는 파촉의 오랑캐 저족.
- 천(天)씨
- 방(方)씨: 모 방. 시조는 당나라의 한림학사 지(智)로서, 669년(문무왕 9) 문화사절로 신라에 와서 귀화하였다. 신라 시대부터 고려와 조선 시대의 양반 가문이다.
- 지(池)씨: 못 지. 고려 광종때 송나라에서 귀화한 성씨. 명문 가문으로 이름이 높았음. 고려 대대로 무신들을 배출함.
- 추(秋)씨 : 가을 추. 고려 때 관직을 지낸 귀화 가문.
- 축(竺)씨: 축씨는 승려나 귀화한 인도인이 천축(天竺)에서 따와서 쓰는 경우가 있었다. 축씨는 1985년 인구조사 때 당시 275개 성씨 중에 존재하지 않았다.
- 마(馬)씨: 말 마. 백제의 초기 개국공신, 조선 초기의 개국공신.
- 피(皮)씨: 가죽 피. 조선의 개국공신 ,병조판서, 전라감사.
3. 사유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성씨는 일반 대중들도 성을 갖게 된 고려 초기에 만들어졌다. 온갖 성씨라는 말에서 유래한 백성(百姓)이 원래는 귀족을 가리키다가 일반 서민을 뜻하게 된 이유가 여기에 유래한다.
이때도 천민은 성씨를 쓸 수 없었으나, 이후 신분제가 흔들리고 공명첩의 발행으로 양반 족보를 얻을 수 있게 되면서 천민들도 조선 후기 족보 위조 현상에 가세한다. 돈 주고 몰락양반의 족보를 사거나 아예 새로운 족보를 창조함으로써 자기 이름에 성을 붙이고 양반을 자처하는 것. 한국에 김해 김씨가 가장 많은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어마어마한 규모의 족보 위조이다.
이때까지는 그나마 출신지역을 통해 원래 신분을 대충 짐작은 가능했으나 그나마도 한국전쟁 때 일제가 정리한 행정 기록이 상당부분 유실되고 반촌이고 향, 소, 부곡이고 상관없이 피난민이 대량 발생하면서 유례없는 혼란이 펼쳐졌고, 그런 바람에 누가 어디 출신인지 전혀 알 수 없게 되었다.
즉, 대부분의 거대 본관 성씨들의 족보는 위조된 족보 내지는 돈 주고 산 족보이다. 혹시 각자의 가문의 족보에 시조가 신라시대부터 시작돼서 어쩌고 하는데 고려 이후는 비교적 아귀가 잘 맞지만 그 이전의 기록이 뭔가 아귀가 맞지 않다거나 하면 그 부분은 지어낸 부분일 가능성이 높다.
4. 진짜로 천민 성씨를 알고싶다면?
수백년전 조선시대때 어느성씨가 천민이었는지 따지는건 정말 할짓없는 짓이지만 정말 천민이 많았던 성씨는 있다. 바로 김, 이, 박, 정, 최...로 대표되는 메이저 성씨들이다.
조선시대 천민 대부분은 성씨가 없는 경우가 많았는데 갑오개혁때 의무적으로 성씨를 만들어야 되면서 그냥 자기 주인의 성씨를 쓰거나 사람많은 성씨로 대거 편입되었기 때문. 특히 사람많은 성씨들은 족보를 사거나 해도 별로 위험하지 않았으므로 조선시대부터 이후 일제시대까지 천민출신이 가장 많이 사서 들어갔던 성씨다. 즉, "어? 네가 빈씨라고? 우리 집안 족보에 없던데 무슨 소리야?"같은 소리를 들을 위험성이 낮았다는 이야기.
오히려 천방지추 같이 숫자가 적은 성씨들은 조선시대 천민들이 만들어 편입한 비율이 낮아 인구수가 적은 것으로 신분이 확실한 편이다.
실제로 600만 떼를 이룬 김해 김씨는 광복 후 종친회에서 돈주고 성을 팔았으며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가야부락이 지금까지 전해오면서 그만큼 어이없는 숫자가 카운트되는 것이 매우 우스꽝스러운 것이다. 경주 김씨의 경우도 마찬가지...
5. 기타
고려 시대나 조선 시대에 중죄인에게 동물을 뜻하는 성씨[8] 가 부여되었긴 하다. 그러나 후대에 전혀 계승되지 않고 모두 성을 바꿨기 때문에 오늘날의 "천방지추마골피"씨들과는 상관없다.
다만, 수필가 피천득씨는 자신의 수필 피가지변(皮家之辯)중에서 '우리 조상이 제비를 뽑았는데. 피(皮)씨가 나왔다며 , 피씨 성에 대해서 성은 피(皮)가라도 옥관자(玉冠子) 다는 맛에 다닌다는 말이 있으며, 옥관자는 최소 당상 정삼품 (堂上正三品)에서 종일품(從一品)에 있는 사람이 다는 것이며 , 정삼품 당상관 이라고 하더라도 피씨는 상당한 양반이 아닐수 없다고 하면서, 희성으로서 역사에 남는 이름이 없는 것은 , 조선시대 중인에 해당하는 의원 집안으로, 시의(侍醫) :어의(御醫 :임금과 왕실 주치의)도 있었다고 적고 있다. 실제로 피씨는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 50여명중 의과 급제자가 유독 많다. 아닌게 아니라 두 아들도 의학에 종사하거나 하였던 적이 있다.
6. 관련 문서
[1] 구한 말, 재산을 모으는데 성공한 일부 백정들은 그간 겪은 설움을 후대에 물려주는 일이 없도록, 추 씨(축 씨)처럼 티나는 성 씨가 아닌 기존의 잘 알려진 성 씨의 본관을 새로 칭하기도 하였다. 이 분들의 경우는 자식 교육에도 남다른 공을 들였고, 일본강점기 - 6.25 전쟁의 난세를 헤쳐나가며, 정말로 현대 한국의 주요 지도층으로 성장하게 된다.[2] 사실 마나 골이 들어가는 조선시대 천인이라면 마조, 혹은 골패로 상징되는 도박꾼들이 된다.[3] 장인중에서도 철을 다루는 철장은 일이 너무 힘들어서 신량역천 취급당하기도 했다.[4] 전근대에는 성씨가 있으면 귀족이었고, 현대에는 조선시대 당시 노비의 자손이라도 누구나 성씨는 있다.(족보를 사거나 노비가 사라지면서 다른 집 족보에 편입되었으니) 천방지추마골피가 천민 자손이라는것만큼이나 이들이 귀족 자손이라는것도 별 근거는 없는 소리이다.[5] 무려 이순신의 장인이다.[6] 조선 태종 때 2차 왕자의 난 평정의 공으로 좌명공신.[7] 조선 개국공신, 병조판서, 전라감사.[8]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고려의 태조가 목천(木川) 지역의 호족들이 자주 반란을 일으키자 우(牛), 마(馬), 상(象), 돈(豚), 장(獐) 등의 짐승의 뜻을 가진 성씨를 부여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