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성씨)

 



1. 개요
2. 千 (영양)
2.1. 이 성씨의 유명인
3. 天(연안)
4. 가상 인물


1. 개요


한국의 성씨. 한자로는 千, 天 두 종류가 있다.
가장 일반적인 로마자 표기는 Cheon이다. 2011년 외교부 여권 통계에 따르면 Cheon이 약 47%, Chun이 약 44%, Chon이 약 5%, Chen이 약 1.3%, Choun이 약 1.1%, Cheun 등 다른 표기는 1% 미만이다. 참고로 '전' 씨도 Ch를 사용하기도 하므로 로마자 표기만 보고서는 '전' 씨인지 '천' 씨인지 알 수 없다. 다만 거의 대부분은 '천'씨일 확률이 높다. 현행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에 따른 표기는 Cheon,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에 따른 표기는 Ch'ŏn이다.

2. 千 (영양)


본관은 영양(潁陽) 단본으로 전해진다. '''경상북도 영양군과는 아무 관계없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따르면 영양 외에도 개성(開城) ·강화(江華) ·광주(廣州) 등 무려 97본이 있으나, 모두 영양천씨의 세거지(世居地)를 나타내는 데 불과하다. 《영양천씨세보》에 따르면 시조는 명(明)나라 초기의 조신(朝臣)인 암(巖)이며, 그의 후손이 영양에 세거하였다고 한다. 중시조 천만리(千萬里)는 명나라 조정의 무신으로 있다가 1592년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 휘하의 영량사 겸 총독장(領糧使兼總督將)으로 아들 상(祥) ·희(禧)와 함께 조선에 들어와 참전하여 평양 · 곽산(郭山) 등지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는 정유재란 때에도 많은 전공을 세웠는데, 명나라 군사가 철수한 뒤에도 그대로 남았다가 귀화하여 화산군(花山君)[1]에 봉해지고, 후일 충장공(忠壯公)의 시호를 받았다. 그의 저서도 《사암선생문집(思庵先生文集)》 2권이 전하고 있으며, 전북 남원시 금지면(金池面) 방촌리(芳村里)에 있는 그의 묘는 세칭 '천장군묘(千將軍墓)'로 불리고 있다. 하지만 병자호란 이후 중국혈통 들은 다 잡아들이라고 명령했고 결국 은둔생활을 했다고 한다.은둔을 하면서 계속 밑으로 남하를 했고 영남쪽에서 번성을 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한국 영양천씨의 역사는 약 400년이 조금 넘는다. 씨와 같은 3획으로, 2획인 정(丁)씨와 복(卜)씨 다음으로 적다.
인구는 2015년을 기준으로 하여 100,014명이다.

2.1. 이 성씨의 유명인



3. 天(연안)


본관은 연안(延安) 외에 우봉(牛峰)이 전해진다. 민간 전설에는 “연안 지방에 한 기아(棄兒)가 있어 사람이 거두어 길렀는데, 그의 성을 알 수가 없으므로 만물지조(萬物之祖)인 천(天)으로 성을 삼았다”고 전해지나 사실 여부는 알 길이 없다. 문헌에는 조선 정조 4년(1780) 황해도 봉산에 살던 천명익(天命翊)이 식년 생원시(生員試)에 3등 68위로 급제한 것으로 나타나 있을 뿐이다.[2]
천씨는 1930년도 국세조사 당시 전국에 14가구가 있었는데, 그 중 12가구가 황해도 봉산(鳳山) ·서흥(瑞興) 지방에 살았고, 강원도 회양(淮陽)과 철원(鐵原)에 각각 1가구씩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1960년도 조사에 따르면 인구 250명으로 성별 순위는 258성 중 제169위였고, 1985년도 조사에서는 297가구에 1,351명으로 274성 중 제156위였다. 다만 2015년도 조사에서는 300명도 되지 않는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대거 ''''千''''으로 갈아탄 모양이다.
현대인물로는 평안북도 의주군 출신의 독립유공자 천경도가 있다.

4. 가상 인물


[1] 경상북도 안동의 별호(別號)[2] 방목에 따르면,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치용(稚用), 1747년(영조 23)생이었다. 아버지는 유학(幼學) 천도원(天道原)이고 천명성(天命性)이라는 동생이 한 명 있었다.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