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주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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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몽골의 1차 침입 당시, 철주성에서 벌어진 전투.
2. 소개
고려 고종 18년인 1231년, 권황제 살리타이가 이끄는 3만의 몽골군이 침입해왔다. 이에 함신진을 점령하고[2] 도달한 곳이 바로 철주성이었다(現 평안북도 철산군 서림).
壬午 蒙古元帥撒禮塔圍咸新鎭 屠鐵州。
임오일, 몽고 원수 살리타이가 함신진을 포위하고 '''철주를 철저히 짓밟았다.'''
《고려사》 고종 18년(1231년) 8월 임오일 기사
이 날 전투에 대한 경과는 《동국여지승람》에 등장한다[4] .高宗十八年 爲靜州分道將軍 蒙古兵渡鴨綠江 屠鐵州 侵及靜州。
고종 18년(1231년) 정주(靜州)[3]
분도장군(分道將軍)으로 있을 때 몽골군이 압록강을 건너 '''철주를 짓밟고''' 정주까지 침범해왔다.
몽고군이 침입했다는 소리를 들은 철주방어사(鐵州防禦使) 이원정(李元禎)과 판관 이희적(李希勣)은 몽고군이 기병 위주의 편성이라는 점을 감안해 군민들과 병력 2,500명을 평지에 위치한 철주읍성에서 철주성으로 이동 시켰다.
함시진을 포위한 병력은 놔두고 철주성에 도착한 살리타이는 그들이 사로잡은 고려의 서창낭장(瑞昌郎將) 문대(文大)에게 철주성을 향해 "항복하라"라는 말을 하도록 했으나 문대는 이를 따르지 않고 "항복하지 마라!"라고 외쳤다[5] . 이에 빡친 살리타이는 "항복하라는 말을 하지 않으면 니놈 목을 따버리겠다."라고 했으나 문대는 또다시 "항복하지 마라!"라고 외쳤고 죽음을 맞이했다.
보름 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6] 식량이 떨어졌지만 이원정과 판관 이희적은 끝까지 싸웠고 더이상 버티지 못하자 이원정은 화약고에 불을 놓아 처자와 같이 불길에 뛰어들어 자결했고 이희적은 성안의 부녀자들과 아이들을 창고 속에 몰아넣고 불을 놓아 살해한 후 자신도 남아있는 남자들과 모두 자결했다.
3. 과철주
김구(金坵)[7] 가 고종 27년(1240년)에 서장관(書狀官)으로 몽골로 가는 길에 철산군 북쪽 35리에 위치한 철주성을 지나면서 쓴 시인 『과철주(過鐵州)』에도 그때 상황이 스쳐가듯 나온다.
그 때에 성난 도둑 국경에 침입하매(當年怒寇闌塞門)
사십여 개의 성이 불타는 들 같았다.(四十餘城如燎原)
산을 의지한 외로운 성가퀴는 오랑캐의 길목에 당했는데(倚山孤堞當虜蹊)
만 군사가 입 벌리고 기필코 삼키려 하였네.(萬軍鼓吻期一呑)
백면서생이 이 성을 지킬 때에(白面書生守此城)
나라에 던진 그 한 몸은 기러기 털처럼 가벼웠다.(許國身比鴻毛輕)
일찍부터 인과 신으로 민심을 복종시켰으매(早推仁信結人心)
장사들의 고함소리 천지를 진동했다.(壯士嚾呼天地傾)
서로 버티어 반 달 동안 해골을 쪼개어 밥을 지으면서(相持半月折骸炊)
낮에는 싸우고 밤에 지키기에 용과 호랑이가 피로했다.(晝戰夜守龍虎疲)
형세와 힘이 궁하고 다했으나 오히려 한가함을 보여(勢窮力屈猶示閑)
누대 위의 관현은 소리 더욱 구슬펐다.(樓上管絃聲更悲)
나라 창고가 하루 저녁에 붉은 불꽃을 뿜으니(官倉一夕紅熖發)
즐거이 처자와 함께 찬 재로 변하였다.(甘與妻孥就灰滅)
충성스런 혼과 장한 넋은 어디로 향해 갔나.(忠魂壯魄向何之)
천고에 고을 이름이 속절없이 철주라고 기억하네.(千古州名空記鐵)
4. 이후
이 전투 이후 몽고군은 정주성에서 한차례 교전 후 점령하게 된다.[8] 정주성 전투 이후 몽고군은 북로군, 남로군, 본대로 나뉘어 각각 1만씩의 병력으로 진출하게 되는데, 이때 북로군은 귀주성으로, 남로군과 본대는 개성을 항했다.
[1] 원래 고려의 작계는 함신진에서 어떻게든 시간을 끌면 후방에서 대책을 세우고 병력을 소집한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함신진이 낼름 항복하는 바람에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는 것으로 오히려 철주성에서 15일 가까이 끌어주는 덕분에 고려군이 정비할 시간을 벌수있었다.[2] 압록강 하구의 관문이었다. 조충(趙沖)의 아들 조숙창(趙叔昌)이 방수장군(防守將軍)으로 보직을 맡고 있었으며 살리타이가 항복을 권하자 "성안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저 요구를 받아 들여야 된다"는 부사(副使) 전간(全間)의 건의에 따라 투항했다. 이 때문에 조숙창은 《고려사》에서 반역 열전에 이름을 올렸다.[3] 평안북도 의주군 고성[4] 권 53 철산군조 및 철산 군지 73면[5] 그런데 이 부분에서 문대의 말은 다소 기묘했다. 살리타이가 "진짜 몽고군이 왔으니 빨리 항복하라!"라고 외치게 하자 문대는 "가짜 몽고군이니 항복하지 마라!"라고 외쳤다고 한다.[6] 보름이란 이야기는 아래에 나오는 시(詩)인 『과철주(過鐵州)』에만 등장한다. 다른 기록에는 찾아볼수가 없다.[7] 우리 아는 독립운동가 김구가 아니다. 고려의 문신으로 생몰년은 1211년 ~ 1278년. 자는 차산(次山), 호는 지포(止浦) , 시호는 문정(文貞). 초명은 백일이며 부령현 선학동(현재의 부안읍 선은리)에서 태어났다. 17세에 과거에 급세해 이규보의 천거로 최우에게 발탁된 이후 최씨 정권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1240년, 과철주(過鐵州)등의 시를 지으며 원나라에 적대적인 감정을 보여주었으나 원나라와의 강화 교섭 후에는 친원적 인물로 변화되었다. 문집으로 《지포집(止浦集)》 3권이 있다. 글을 굉장히 잘써서 이규보가 "나를 이어 문형(文衡)을 잡을 사람"이라고 평할 정도였다.[8] 전투에 대해선 김경손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