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동명이인)

 


1. 개요
2. 현대
2.1. 실존 인물
2.2. 가상 인물
3. 현대 이전
3.1. 고려시대
3.1.1. 金坵
3.2. 조선시대
3.2.1. 金絿
3.2.2. 金構


1. 개요


성씨로 , 이름으로 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목록.

2. 현대



2.1. 실존 인물


  • 김구 :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 김구 : 대한민국의 가수
  • 성우 김준의 본명[1]

2.2. 가상 인물



3. 현대 이전



3.1. 고려시대



3.1.1. 金坵


고려 시대 후기의 문신으로, 자는 차산(次山), 호는 지포(止浦)이다. 젊을 적에 제주 판관을 지낸 적이 있으며, 이 시기에 토지 분쟁을 방지하기 위해 자연적으로 많이 놓여 있는 현무암을 돌담으로 활용해 땅을 빼앗길 수도 있는 양민의 토지를 지키는 데 기여했다.

3.2. 조선시대



3.2.1. 金絿



[image]
김구의 필체인 인수체. - 대전시립박물관 전시
1488년 예산군 ~ 1534년
조선 중종 시대의 문신으로 자는 대유, 호는 자암(自庵)과 삼일재, 시호는 문의,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조선의 4대 명필로 손꼽힌 사람으로, 김구가 인수방에 살았으므로 김구가 쓴 필체는 '인수체'라고 불렸다.
생원 시절 세조 즉위 초에 폐위된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소릉(昭陵)을 복위를 청했으나 거절당한 적이 있으며[2], 1513년에 별시문과에서 을과로 급제하였다. 조광조, 김식 등과 함께 사림파의 주요 인물로 홍문관 부제학까지 올랐으나,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투옥된 뒤 개령으로 유배되고 남해, 임피 등으로 이배되었다가 1533년에 풀려났다. 이후 고향 예산에서 여생을 보내었으나 1534년, 풀려난 지 1년 만에 사망하였다. 사망한 지 4년 뒤인 1538년에 부제학 직첩을 되돌려받고[3] 영조 시절 시호를 추증받았다.[4]


3.2.2. 金構


1649년 ~ 1704년
조선 시대 후기의 문신. 당색은 서인 노론. 본관은 청풍 김씨이며 자긍(子咽), 호는 관복재(觀復齋)이고,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현종 10년(1669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숙종 8년(1682년) 문과에 급제했다. 이후 성균관전적과 각 조의 낭관을 거쳐 대사간, 장예원판결사를 지냈다. 판결사로 재직 중 세조에게 쫓겨난 노산군의 복위를 주장하여 단종복위를 성사시켰고 아울러 단종비 송씨의 묘를 왕비의 능으로 추봉하고 능을 조성하는 공사를 감독했다. 이후 형조판서를 거쳐 육조의 판서를 모두 지내고 숙종 29년(1703년) 우의정으로 승진했다. 어머니 상을 치른 뒤 병을 앓더니 몇 개월 안돼 56세의 나이인 숙종 30년(1704년)에 사망하였다.
졸기를 보면 숙종이 시킨 일들을 잘 처리해서인지 머리도 좋고, 능력도 좋은 편에 말주변도 좋아 숙종이 건강을 염려할 정도로 대접이 좋았다라는 얘기가 있다.숙종실록 40권, 숙종 30년 12월 18일 갑신 3번째기사 하지만 소론이 보충한 숙종실록보궐정오에서는 임금의 총애를 받은 건 사실이지만, 아첨만 잘하고 임금을 바로잡지는 못했다고 까고 있다.숙종실록보궐정오 38권, 숙종 29년 12월 13일 갑신 1번째기사
그의 집안은 4대에 걸쳐 6명의 정승을 배출한 집안이기도 하다. 영의정이 된 김재로는 그의 아들이며, 좌의정에 올랐던 김치인은 김재로의 아들이자 김구의 손자며, 정조 때의 서인 노론의 거두 김종수는 김구의 아들 김희로의 손자, 즉 김구에게 증손자가 된다. 동생 김유는 대제학을 지냈고, 김유의 아들로는 사도세자를 공격했던 영의정 김상로, 좌의정 김약로와 이조판서 김취로가 있다. 또한 독립운동가 김규식은 그의 동생 김무의 7대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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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서울특별시 송파구 올림픽공원 몽촌토성 내에 그의 무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