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프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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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트남의 종주권을 두고 1884년 8월에서 1885년 4월까지 청과 프랑스가 맞붙은 전쟁. 이 전쟁으로 프랑스의 베트남 식민지화가 가속화 되었다.
2. 전개
2.1. 프랑스의 베트남 진출
1858년, 프랑스는 인도에서 영국에게 밀려난 후 천주교 박해와 선교사 살해라는 구실로 베트남을 침공하였다. 프랑스군이 침범해 오자 베트남 정부는 태평천국의 분파를 이끌던 유영복(劉永福)이라는 인물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 유영복이 이끄는 부대를 흑기군(黑旗軍)이라고 했는데 흑기군은 1873년 12월 무렵, 600명의 병력으로 하노이에서 18명의 프랑스군을 격파했다.(?) 이에 프랑스는 550명의 해군 수병과 해병대를 파견했고 이듬해 5월 하노이 서쪽 외곽에서 3천명의 베트남 ─ 흑기군 연합군과 전투를 치렀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는 수에 밀려 패배했고(프랑스군 35명 전사 52명 부상, 흑기군 50명 전사 56명 부상) 당시 사령관이었던 리비에르는 전사했다.
2.2. 간명조약
12월, 프랑스 의회는 군비 추가와 함께 1만 5천여명의 증원군 파병을 승인했다. 원정군의 총사령관이었던 아메디 쿠르베는 압도적인 무기와 병력의 우위를 앞세워 손타이, 바쿠닌, 타이구엔, 훈호아 등 여러 도시를 함락하고, 손코이 강 삼각주를 제압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베트남 쪽에서도 별 수 없이 청나라에 손을 내밀었고, 청나라는 이 제안을 받고 파견했다.[1] 그러나 이 무렵 청나라는 신강에서의 전쟁이 막 끝나기도 했고, 이홍장은 베트남에 힘을 쏟을 생각은 별로 없었다. 그는 되도록 빨리 전쟁을 종결시키기를 원했기에 1884년 4월, 프랑스 대표 푸르니에와 함께 천진에서 만나, 이른바 간명(簡明) 조약을 체결했다. 청은 프랑스의 베트남 보호권을 승인하고 베트남에 주둔하고 있던 청군을 변경으로 철수시키기로 하는 대신, 프랑스는 중국의 변경을 침범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2.3. 프랑스의 기습 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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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프랑스는 간명 조약에 조인하고 난 뒤, 바로 청군을 공격했다.''' 청군이 국경선까지 철수한다는 약속을 어겼다는 것이 명분이었는데, 간명 조약에는 맹점이 있었다. 조약에서는 분명히 청군의 철수를 약속했지만 언제까지 철수할 것이라는 내용이 없었다. 만일 조약 내용에 청군이 특정 시한 내에 철수하겠다는 내용이 있었다면 그 전까지는 프랑스가 공격할 명분이 없었다. 그러나 간명 조약에는 철수 기한이 명시되어있지 않았으니 프랑스가 지금 청군을 공격해놓고 '왜 먼저 청군이 물러나지 않았느냐.'라고 논리를 펼 수 있는 셈이었다. 이에 베이징 주재 프랑스 공사는 전쟁 비용 2억 5천만 프랑의 배상과 청군의 즉시 철수를 요구했다. 청나라 조정에서는 '1개월 이내에 다 철수 시킬 것'이라고 공언했지만, 프랑스는 이미 푸저우(福州)의 마미군항(馬尾 軍港)을 공격했다. 이것이 마미 해전이다. 당시 선정대신을 맡으며 복주에 체류 중이던 하여장(何如璋)은, 나름대로 사태를 더 크게 만들지 않기 위해 발포 금지 명령을 내렸지만 덕분에 프랑스 함대는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복건함대를 전멸시켰다(...). 무엇보다 마미 조선소는 무려 은 2천만냥을 들여 만든, 양무파의 기대 그 자체였지만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2.4. 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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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빡친 청나라 조정은 복건함대가 전멸한지 3일 후,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선언했다. 해전은 프랑스군의 압도적인 승리였고, 육전에선 의외로 청군이 분전했지만 유리하지 못한 건 마찬가지였다. 통킹을 둘러싼 크고 작은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교환비는 1 : 10을 넘겼다. 다만 압도적인 인명피해에도 어떻게든 프랑스군의 진격을 막아 프랑스군 지휘관마저 역관광시키고 교착상태를 만든 점에선 청군의 전술적 성공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프랑스군은 베트남 전선에서 우월한 교환비를 내면서 청군을 얕보고 지나치게 북상했다. 하필 이 시점에서 원군으로 온 풍자재는 당시 청군에 몇 없는 용장으로 물러서지 않고 치열하게 돌격했고 그 결과 프랑스군은 진남관(鎭南關) 전투에서 패배했다. 그나마 이후 벌어진 키루아(Ky Lua) 전투에선 청군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었고 피해도 크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서 프랑스군은 심각한 아노미 상태에 빠지며 물자까지 다 버리고 남쪽으로 도주했고 본토에 패전 가능성이 있다는 전보를 보내 내각까지 총사퇴를 하게 된다. 비록 청군은 교환비에서 압도적으로 피해를 많이 봤고 전황에서 확실하게 유리하다고는 볼 수 없던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의 전투 경과로는 협정에서 프랑스가 많은 양보를 해야 할 수도 있었으나....
2.5. 종전
'''청 조정은 프랑스에게 타협하여 화친을 구하고 1885년 4월 7일 전선에 정전하고 철병하라는 윤지를 하달하였다.''' 그리하여 화의가 시작되었는데 이전에 맺은 간명 조약의 유효성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리한 쪽은 프랑스였다. 간명 조약을 맺을 당시의 프랑스는 중국에 대해 우위에 있던 입장인데, 정작 청나라가 프랑스를 상대로 여러 차례 인상적인 활약을 펼치고도 조건은 이전과 전혀 달라진게 없었다.
3. 결과
이 전쟁에서 청나라는 은 10억 냥 이상을 지출했고 2억 냥 가량의 빚을 지게 되었으며 무엇보다 조공국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이 사라졌다.[2] 프랑스의 경우에는 드디어 청나라의 세력을 완벽하게 일소하고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을 확립하여 본격적으로 인도차이나 반도 식민지화에 착수하게 된다.
이와 같이 중화제국-조공국의 관계에서 제국주의 열강이 끼어들어 중국을 압도하고 조공국을 자기 식민지로 빼앗는 구도는 후일 청일전쟁에서도 그대로 재현된다. 쑨원 같은 경우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질서에 금이 간 이 어처구니없는 사태를 보고, 자신이 청나라 정부 전복에 뜻을 세웠다고 말했다. 이 사태는 근본적으로 청나라의 후진적인 체제 때문이라고 봤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전쟁으로 인해 다시 한 번 청나라의 취약함이 드러나자 영국, 러시아, 프랑스, 미국, 일본 등이 중국과 그 주변의 나라에 대하여 야심을 품기 시작하였다. 특히 조선과 만주가 전략적인 요충지로 청불전쟁 이후 10년 간 열강의 쟁탈목표가 되었다. 이후 청나라는 청불전쟁과 비슷한 전쟁에서 조선을 둘러싸고 일본이랑 복귀전을 치르게 된다.
4. 여담
청불전쟁은 조선의 역사에도 영향을 끼쳤는데 갑신정변은 조선 주재 청군 병력의 절반인 1500여 명이 청불전쟁에 투입된 것을 기회로 발생했다. 그러나 정변 세력은 처음부터 보유 병력이 적은 바람에 남은 청군의 규모로도 충분히 반격이 가능했다. 결국 갑신정변은 청군의 신속한 투입으로 삼일천하로 끝나고 만다.
5. 매체에서
2017년, 중국에서 청불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 <용의 전쟁>이 개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