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우옌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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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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阮朝 (Nguyễn triều)
대월(다이비엣)의 후신인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 수도는 중부의 푸쑤언(Phú Xuân, 富春, 부춘: 지금의 후에)이었다.
2. 역사
2.1. 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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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을 통일한 응우옌푹아인(Nguyễn Phúc Ánh, 阮福暎)은 연호를 가륭(Gia Long, 嘉隆)이라고 짓고 황제에 즉위한다. 그는 떠이선 왕조와 겨뤄 두 차례나 패배하고도 끝내 외세의 힘을 빌려 떠이선 왕조를 쓰러뜨리고 구 찐씨 가문이 다스렸던 북부지방까지 합쳐 베트남을 통일하였다.
응우옌(Nguyễn) 왕조는 건국 뒤 청나라에 사신을 파견하며 자국을 인정할 것과 함께 자국의 호칭을 앞서 한대에 존재했던(혹은 새 이름 남과 대월의 월을 합쳐서) '남월'(Nam Việt, 南粤)로 고쳐 불러줄 것을 청했다. 그러나 중국 남부 지역을 점령한 과거의 남월과 연결지어 생각될 것을 우려한 청나라 조정은 '남월'을 뒤집어 '''월남'''(越南)이라 부르는 건 어떤지 제안했고, 응우옌 왕조 역시 이에 찬성하면서 1806년 대월은 비엣남(越南, 월남)이 되었다. 바로 21세기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는 비엣남(베트남)이란 이름이 시작된 것이다. 이후 조선, 류큐 왕국, 미얀마와 더불어 청나라의 명목상의 제후국이 되었다. 그러다가 1839년 국호를 '''대남'''(Đại Nam, 大南)으로 바꾸고 1945년까지 유지했다.
2.2. 전성기
'''응우옌 왕조는 베트남의 최후 통일 왕조이자 최대의 왕조였다.''' 건국 자체가 프랑스와 깊이 연관을 맺었던 만큼 신식무기를 다수 도입하였으며 이를 이용하여 이미 15세기부터 작은 속국으로 전락한 참파를 1832년에 완전히 멸망시켰다. 그리고 캄보디아까지 침략하여 종속시켰을 뿐만 아니라 꼭두각시 여왕 앙머이(អង្គម៉ី)을 세워 캄보디아를 쩐떠이 성(Trấn Tây thành, 鎭西城), 프놈펜은 쩐떠이 부(鎭西府)로 삼아 베트남의 한 지역으로 완전 병합하고, 캄보디아의 모든 문물을 베트남식으로 고쳐서 완전히 동화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캄보디아인들이 강제동화정책에 반발해 봉기를 일으켰고, 여기에 캄보디아 건너편에 있는 태국까지 개입하여 태국과 베트남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다(1841~1845). 결국 가운데 끼인 약소국 캄보디아는 태국에는 1년, 베트남에는 3년에 한 번씩 조공을 하는 이중 속국이 되었다.[4] 더 나아가 베트남은 태국과 메콩강(구룡강)을 경계로 캄보디아를 분할하는 계획을 꾸미기도 하였다. 또한 란쌍(라오스)의 반독립 세력인 씨앙쿠앙(ຊຽງຂວາງ) 정권에 쩐닝 부(phủ Trấn Ninh, 鎭寧府) 등 6부(府)를 설치하여 간접 통치를 하였다.
이를 보면 알수있듯이 '''사실 19세기 근대화라는 측면만 본다면 타 한자문화권 국가인 중국, 한국, 일본보다 베트남은 훨씬 유리한 조건에 서 있었다.''' 우선 조선과 청나라, 에도막부가 18세기 말~19세기 초를 기점으로 노쇠화 현상을 잇따라 겪으며 쇠퇴기에 접어들었지만 응우엔 왕조는 떠이선 왕조에 비해 개혁성 면에서 크게 후퇴하기는 했지만 앞의 세 국가와는 다르게 신생정권이었기 때문에[5] 사회의 경직성이라는 측면에 있어서는 이 세나라보다 크게 덜했기 때문에 이는 크나큰 큰 강점으로 작용했다. 또한 건국 자체가 프랑스로부터 도움을 얻어 성립된 만큼 일찍부터 서양의 기술을 대거 공여받아 군사력의 현대화에 주력할수 있었고 이 때문에 단시간이나마 국력이 융성할 수 있던 것이었다. 그러나 해당기간 동안 경제와 행정의 근대화보다는 유교질서 강화 및 영토확장에 몰두하면서도 내부통제가 잘 안되는 모습도 같이 보여주었는데 해당기간 동안 프랑스가 혼란기였기 때문에 응우엔 왕조는 이러한 문제점에도 국력이 융성할 수 있었고, 침략의 명분이 되던 기독교 탄압도 따지고보면 서양 열강들이 선교사들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라는 점을 생각하면 방어기제로 작용할수밖에 없었지만 하필이면 유럽 열강들이 산업혁명 버프를 얻으면서 당대의 베트남과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엄청나게 발전했던 시기라는 것이 응우옌 왕조 입장에서 큰 불행이었고 결과적으로 볼때는 실책이 될 수밖에 없었다. 즉, 내부의 문제점도 엄연히 있기는 했지만 운빨이 안 좋았던 측면도 부분적으로 작용했다.
2.3. 프랑스의 침략
그러나 프랑스의 본격적 개입이 시작된다. 이미 1787년 베르사유 조약까지 맺을 정도로[6] 프랑스는 베트남에 대해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응우옌푹아인이 왕조를 세운 1804년 당시 프랑스는 나폴레옹 전쟁이 시작되던 시기라 베트남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으므로 이후 몇십년간은 나름 독립을 유지하며 주변국까지 세력을 넓히며 그럭저럭 지냈지만, 애당초 프랑스의 지원으로 세워진 나라라 자주성을 구사하기는 한계가 있었다. 프랑스가 자국의 혼란을 수습한 시점에, 영국이 아편전쟁과 같은 무력 수단을 통해 청나라와 난징 조약을 맺는 것을 보고, 인도차이나에 대해서도 무력을 앞세운 정책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2.4. 다낭 항구의 시위와 제1차 사이공 조약(1862년)
19세기 중반엔 전 국토에 천주교 신도가 45만명으로 늘자 유교적 가치관을 지닌 지배층에겐 독이 되었고, 이들은 천주교도들을 '역도'로 몰아 탄압하기 시작했다. 1847년 2월 26일, 프랑스는 베트남이 선교사를 박해하는 것을 구실로 다낭 항구에서 무력시위를 하면서 사형 선고를 받은 프랑스 선교사 5인의 석방을 요구한다. 당시 베트남의 황제였던 소치제(Thiệu Trị, 紹治)는 프랑스의 요청을 받아들여서 선교사들을 석방하라고 명령하였고, 프랑스 함대는 3월 16일 다낭을 떠났다.
그러나 4월 15일 프랑스 함대는 다시 선교사들의 석방을 요구하면서 다낭에 정박 중이던 베트남 함대 5척을 격파시켰다. 그 결과 베트남은 사망자 40여 명, 부상자 90여 명, 실종 1000여 명의 피해를 입었다. 소치제는 이미 약속대로 선교사들을 석방한 상태였기 때문에 매우 격노하였으나, 군사적인 힘에서 밀려 대책이 없었다. 그 해 11월에 소치제는 아들 사덕제(Tự Đức, 嗣德)에게 '''모든 외국인을 사형에 처하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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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사덕제도 소치제의 정책을 계승하여 쇄국적인 태도를 유지하였다. 그 과정에서 1840년부터 20년간 순교당한 유럽인 선교사가 25명, 베트남인 사제가 300명이며 신도는 2만명이었다. 이들이 살던 마을도 역도의 마을이라 하며 파괴됐다. 이때 선교사들을 잔혹하게 처형했는데 프랑스 선교사인 조셉 마르찬트는 살을 집게로 뜯겨져 죽는 능지형에 처해지고 피에르 보리는 참수되었으며 장 찰스 코나이는 참수되고 시신이 토막나는 잔혹한 형벌에 처해진다.
하지만 해당 시기의 프랑스는 나폴레옹 3세가 집권하면서 그 동안의 정국 혼란에서 어느정도 벗어났을 시점이었고 또한 나폴레옹 3세는 그동안 프랑스 확장의 걸림돌이던 영국과 아예 친하게 지내는 쪽으로 노선을 틀어, 뒷탈의 여지를 없앤 뒤 안정적으로 해외 식민지 확보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런 와중에 위와 같은 만행이 프랑스 정부와 천주교 교단에 생생히 전해져 전 프랑스 내에 베트남을 규탄하는 여론이 휩싸였고, 이는 본격적인 베트남 침략의 빌미가 되었다. 분노한 프랑스는 1858년부터 군사 침략을 개시하며 전쟁이 벌어졌고, 결국 황제는 판타인잔(Phan Thanh Giản, 潘淸簡) 등을 사이공에 파견해 프랑스, 에스파냐와 베트남 사이에 제1차 사이공 조약(1862년 6월 5일)이 맺으며 항복했다.
2.5. 프랑스령 코친차이나(1869년)
조약에 따라 다낭 등 세 항구가 개항되었고, 꼰선(Côn Sơn, 崑山) 섬이 포함된 꼰다오(Côn Đảo, 崑島, 곤도) 제도[7] 와 코친차이나의 동부 3성(省)[8] 이 프랑스에 할양되었으며, 프랑스인에게 전국에서 그리스도교 포교의 자유와 메콩 강의 항행권을 부여하기로 결정하였다. 조약이 비준된 뒤 응우옌 왕조의 황제는 3성의 반환을 요청하기 위한 특사를 파리에 파견하였고, 프랑스 외무당국도 한때 조약의 재검토를 시작하였으나(1864년 반환조약), 비준하지 않고 오히려 사이공 현지의 프랑스군이 코친차이나의 서부 3성[9] 마저 점령함으로써(1867년) 남부의 6성은 사실상 프랑스령 코친차이나가 되었다. 이때 서부3성의 현령이자 제후였던 판타인잔은 프랑스군과 싸우다가 중과부적으로 수세에 몰리자 결국 음독자살한다. 이로써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로 전락하기 시작한다. 프랑스는 베트남을 약화시키기 위해 베트남에게서 란쌍 6부 땅을 뜯어서 라오스에 되돌려 주었고, 역시 프랑스의 보호령이 된 캄보디아에게 베트남이 뜯어간 시아누크빌, 캄포트, 케프, 스바이리엥을 돌려주었다.
2.6. 하노이 침공과 제2차 사이공 조약(187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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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남기(大南旗)''', 1878년부터 프랑스령 코친차이나의 사실상 속국이 된 대남국이 사용.
프랑스가 코친차이나를 정복한 목적 가운데 하나는 메콩 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중국의 윈난 성으로 통하는 무역로를 개척하려는 것에 있었다. 그러나 2년 동안 메콩 강을 탐험한 에르네스트 두다르 드 라그레(Ernest Doudart de Lagrée, 1823 ~ 1868)는 메콩 강 상류가 급류가 심하고 암초가 많아 무역로로 적당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1871년 프랑스의 모험가이자 상인인 장 뒤퓌(Jean Dupuis)가 베트남 북부를 흐르는 홍강을 통해 윈난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1872년 11월 베트남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은 채 윈난으로 화물을 운반했으나, 베트남 정부는 뒤퓌를 도운 베트남인들을 투옥하고 뒤퓌의 영업활동을 금지했다. 뒤퓌로부터 보호 요청을 받은 코친차이나 총독 마리 쥘 뒤프레(Marie-Jules Dupré)는 군대를 파병하여 홍강 유역의 하노이를 점령하였고, 베트남은 프랑스와 제2차 사이공 조약(뒤프레 조약)을 맺는다.
프랑스는 이 조약에서 베트남의 주권과 독립을 인정하는 대신, 코친차이나 6성의 완전한 식민지배와 함께 하이퐁, 하노이 등의 항구와 홍강(송코이강)을 통상 목적으로 개방하게 하였다. 또 하노이에 영사관을 개설하고 수도 후에에는 공사관을 주재시킬 권리를 얻었다.
2.7. 청나라의 개입과 제1차 톈진 조약(1882년)
베트남의 종주국을 자처하던 청나라는 뒤프레 조약이 체결되자 자신들이 승인하지 않은 베트남과 외국 사이의 조약은 무효라고 선언했다. 청나라는 본래 조선이나 베트남이 주변국과 외교를 하는 것을 크게 건드리지 않았으나, 19세기 말 이때는 중국 본국조차 아편전쟁 등으로 서구열강에 크게 위협받는 절박한 상황이었기에 어떻게든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전통적 조공국 개념을 근대적인 속국 개념으로 확대 해석해 조선과 베트남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려 했다.[10]
당시 청나라 조정은 천지회 탄압을 피해 베트남으로 도망친 류융푸(劉永福)가 이끌던 흑기군(黑旗軍)을 지원하기로 하고 새로 3만 5천의 군대를 파견하면서 방위 체제를 강화하였다. 이에 프랑스 원정군 사령관인 아메데 쿠르베(Amédée Courbet)와 그 후임인 샤를 테오도르 밀로(Charles-Théodore Millot)는 청나라 국경과 인접한 랑 썬과 뚜엔 꽝을 점령하는 강경한 모습을 보였다.
프랑스의 강경한 대응에 당황한 청나라는 결국 이홍장을 파견하여 프랑스 대표 프랑수아 에르네스트 푸르니에(François Ernest Fournier)와 제1차 톈진 조약(톈진 담판, 1882년)을 맺어서, 베트남 북부(통킹)에서의 양국 주둔군의 철수와 베트남과 외국 사이의 조약 존중을 약속하였다. 또 베트남 황제의 위신을 떨어뜨리지 않을 것이며, 베트남 내륙 북부의 바오탕(Bảo Thắng, 保勝, 보승)에서 중국과 프랑스가 공동 무역하며, 또한 베트남을 중국의 영토와 같은 비율로 세금을 징수하고, 중국과 프랑스는 경계를 설정하여 베트남 북부(통킹)의 자치를 보호한다고 하였다.2.8. 프랑스의 보호령(1883년)
이어서 1883년 제1차 후에 조약(계미 조약, 아르망 조약)으로 베트남은 프랑스의 보호령이 되었다. 남부의 빈트안을 코친차이나 식민지에 할양하고, 북부의 타인호아, 게안, 하틴의 3성을 통킹에 편입하며, 안남 지방은 응우옌 왕조의 황제의 통치를 인정하지만 관세, 토목은 제외하며, 수도 후에에는 프랑스 대사관을 둘 것, 통킹은 보호령으로서 실질적으로 프랑스의 관리하에 둘 것 등이 내용이었다.
다음 해에는 제2차 후에 조약(갑신 조약, 파트노톨 조약)을 체결하여 프랑스의 대표인 총독이 베트남의 외교권을 총괄하고, 후에 황궁에 프랑스 수비대를 상주시키는 것 등을 추가하였다. 이때부터 베트남은 '''안남'''(Annam, 安南)국이라는 이름으로 돌아가게 된다. 안남이 과거 당나라가 베트남을 지배하기 위해 설치했던 안남도호부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을 이용한 프랑스의 노림수였다. 안남은 지방 이름으로 사용될 때는 수도 후에를 포함한 중부 지방을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베트남 전체를 의미하는 의미로도 프랑스 서적에서 자주 사용되었다.
2.9. 청불전쟁(1884년 8월 ~ 1885년 4월)과 제2차 톈진 조약(1885년)
그러나 당시 청나라의 실권을 쥐고 있던 서태후가 ‘베트남을 프랑스에게 넘길 수는 없다’는 훈령을 발표하고, 통킹 주둔군의 철수를 거부하면서 1884년 8월 6일 청의 선전포고로 프랑스와 청나라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이것이 바로 청불전쟁이다.
이 전쟁은 청나라가 우세한 상황이었으나 장기전에 따른 피해를 우려한 이홍장이 화의를 제의했다. 최종적으로 화의를 통해 프랑스가 청나라에 어떠한 요구도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전쟁을 끝냈다. 영국, 미국, 독일의 중재로 청나라는 1885년 6월 9일 프랑스와 제2차 톈진 조약을 맺고 안남(황제가 다스리는 중부)과 통킹에 대한 프랑스의 보호권을 승인하고, 베트남의 두 곳을 청나라와 프랑스의 무역지로 지정하고,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을 포기하였다. 그 외 중국 내부로 오는 프랑스 화물은 베트남과 광서 변경에서 관세율을 감하기로 하고, 이후 청나라에서 철도를 건설할 때 프랑스와 협상하기로 하였다.
이것은 '''베트남에 대한 2100년 간에 걸친 중국의 영향력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프랑스의 본격적인 식민지가 되었음을 의미'''하고, '''이로써 베트남은 사실상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 앞서 말했지만 이후의 응우옌 왕조는 괴뢰 왕조로 1945년, 아니 베트남국까지 하면 1955년까지 살아남았다. 정권은 살아남았어도 당연히 중앙 정부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는 없었지만. 이는 프랑스가 이미 왕조 시대를 끝내고 공화국이었으므로 식민지 베트남은 그냥 모양새만 황제를 존속시키는 형태를 했을 뿐, 한국 일제강점기의 이왕가 체제와 크게 다를 게 없었다. 차이점은 베트남 중부지방, 즉 안남에서의 명목적 자치는 보장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의 지배는 중국의 군림보다 더 가혹한 형태로 나타났다.
이후의 역사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참조.
3. 역대 황제
4. 추존 황제
5. 계보
- 완복양(10)까지는 응우옌씨 정권, 완복영(1) 이후부터는 응우옌 왕조.
6. 기타
바오다이 사후 태자였던 응우옌푹바오롱(Nguyễn Phúc Bảo Long, 阮福保隆, 1936~2007)이 명목상의 베트남 황위를 이어받았으며 그가 2007년에 부르고뉴에서 후사 없이 죽은 뒤 동생인 응우옌푹바오탕(Nguyễn Phúc Bảo Thăng, 阮福保陞, 1943~2017)이 왕위 요구자가 되었다. 2017년에 바오통이 사망한 현재는 그의 동생인 응우옌푹바오안(Nguyễn Phúc Bảo Ân, 阮福保恩, 1951~)[14] 이 명목상의 베트남 황위를 요구하고 있다.
현대 베트남에서 평가는 좋지 못하다. 남북베트남을 완전 통일한 최초의 왕조이면서 최후의 왕조이고 왕조 자체는 1945년(길게보면 1955년)까지 이어졌으나 실질적으로 제기능을 한것은 그의 반도 안되는 60여년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식민당국에서 통치의 정당성을 위해 응우옌 왕조를 의도적으로 폄하했던 경향이 강하며 베트남의 독립운동을 주도한 민족주의 진영이나 공산주의 진영에서도 애초에 건국자체가 외세의 힘을 빌려서 이룩했다는 점과 결과적으로는 식민지배를 불러왔기 때문에 박하게 평가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나마 1990년대 중반 이후로는 응우옌 왕조가 생각보다 근대적인 모습을 지녔다는 점이나 쇄국이라고 해도 외국문물을 무조건 차단하지는 않았다는 점이 어느정도 재조명되면서 상당부분 재평가받고 있으나 베트남이 독립 한 이래로 프랑스, 미국, 중국과 싸워 이겼고, 그 이전에도 중국과 몽골의 대군을 상대로 여러차례 이겨본 전적이 있는데 응우옌 왕조가 전성기 시절에 참파를 완전히 멸망시키고 캄보디아를 분할하는 등 강력한 군사력을 과시했을때도 있었기는 했어도 결과적으로 프랑스를 상대로 이겨보지는 못하고 통치권을 내주고야 말았으니 응우엔 왕조에 대한 이미지가 여전히 좋을수가 없기는 하다.
7. 출처
- 먼나라 이웃나라 시즌2(지역/주제편): 동남아시아, 천년 문명의 신비에서 21세기 변화와 개혁의 주역으로 - 이원복 글/그림. 김영사. 2018. p97~99.
[1] 제4대 황제 사덕제 때인 1863년 공식 국기가 된 롱띤(long tinh, 龍情). 노란색은 황제의 황색이고 붉은 원은 남쪽을 의미한다. 1878년까지 사용. 식민지 시절에도 기가 있었다. [2] 베트남국 멸망[3] 외왕내제 체제이며 완복영이 할거하던 시기를 건국으로 본다면 단순 할거하던 시기까진 왕이였다가 정식으로 왕조 건국후 황제를 칭했다.[4] 같은 시기 비슷하게 이중 속국이 된 곳으로 중국과 일본 사이에 있는 류큐 왕국이 있었다.[5] 물론 응우옌 왕가 자체는 이미 남북조 시대 시절부터 권력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떠이선 왕조 시기를 거치면서 응우옌 왕가와 권신들이 잇따라 죽거나 숙청을 당하여 몰락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물론 구 지주들에게 특권을 주는 법안을 내놓기는 했지만 어쨌든 변화 자체는 불가피했던 것.[6] 이 시점에는 아직 루이 16세의 왕정 시대였다. 이 조약을 맺으신 분이 바로 쟈롱 황제이고 황제의 친아들인 응우옌 푹까인이 7세의 나이에 프랑스까지 직접 가서 체결했다. 즉 왕조 자체가 프랑스의 영향권 속에서 시작했다는 소리다.[7] 프랑스는 말레이어 발음을 따서 풀로콩도르(Poulo-Condore)라고 불렀다. 프랑스가 꼰선 섬에 지은 감옥에 베트남의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대거 수감되었다.[8] 비엔호아, 자딘, 딘뜨엉.[9] 빈롱, 짜우덕, 하띠엔.[10] 그러다 결국 청불전쟁, 청일전쟁 패배로 조선과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을 완전히 포기하게 된다.[11] 즉위 3일만에 폐위되어 연호를 정하지 못했으며 아호인 육덕당(Dục Đức/育德堂)을 따라 죽득 황제라 부른다.[12] 응우옌 왕조 수립 이전 베트남 남부를 지배하던 지방 정권. 명목상으로는 후 레 왕조의 신하였기 때문에 황제(皇帝)가 아닌 왕을 칭했지만 사실상의 독립 국가였고, 역대 왕도 후일 황제로 추존되었다. 다만 황제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많이 있다.[13] 자롱 황제 추존[14] 그에게는 세 아들이 있는데, 둘째와 셋째 아들은 쌍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