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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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초나라의 제18대 군주. 2대 왕. 초소오의 아들. 초 무왕 때부터 초나라는 칭왕(稱王)하기 시작했다.[3] 그런데, 화씨지벽 전설에서는 그 전 군주인 분모가 초여왕(楚厲王)을 칭하였다고 하는데, 정확히 초나라가 칭왕한 시기는 바로 이 초무왕 때다.
2. 치세
분모 17년(기원전 741년), 초 무왕은 형 분모를 시해한 뒤 초나라 군주에 올랐다. 그는 등나라 후작(鄧侯)의 딸 등만(鄧曼)을 아내로 삼았다. 그리고 투백비(鬭伯比)를 영윤으로 임명하고, 굴하(屈瑕)를 막오(莫敖)에 봉하면서, 국력이 날로 신장되어갔다. 그런데, 초나라는 자작이었기 때문에, 그 지위가 매우 낮았다. 그리하여 웅철의 승진 욕구가 샘솟았다.
주 환왕 16년이자, 초 무왕 37년(기원전 704년) 여름에 침록 부근에서 회맹을 가졌는데, 그 때 참여한 나라는 파나라, 용나라, 복나라, 등나라, 교나라, 나(羅)나라, 진(軫)나라, 신나라, 이나라, 운나라, 강나라였다. 황나라, 수나라는 오지 않았다. 초 무왕은 대부 위장을 보내 황나라를 책망했다. 막오인 굴하로 하여금 수나라를 치게 했다. 그리하여 수나라를 크게 이겼다. 패배한 수후는 달아나고 거우인 투단은 수나라에서 포로를 잡고 전리품을 얻었다. 그리고 이 일을 계기로 웅철은 왕을 자칭하니 바로 초 무왕이다.[4]
초 무왕 41년(기원전 700년), 초군은 교나라에게 승리했고, 정립성 아래서 회맹을 가졌다.
초 무왕 42년(기원전 699년), 굴하로 하여금 나나라를 치게했는데, 패전하였다. 굴하는 패잔병을 거느리고 황곡으로 갔으나 초 무왕의 꾸지람을 듣고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이때 변화가 화씨지벽의 원석을 바쳤다가 오른쪽 다리에 월형을 당했다.
초 무왕 51년(기원전 690년), 수나라를 정벌하는데, 한수 동쪽에 이르러 갑자기 초 무왕이 병이 들어 죽었다. 초나라의 영윤 투기와 막오 굴중은 초 무왕의 발상을 비밀에 부치고 여전히 안원에서 동진할 계획을 세웠다. 초군들이 수나라의 성 근처에 이르자 수의 군신들이 굴복하였다. 초군이 회군하자 한수를 건넌 뒤 발상하고 그 뒤를 이어 아들 웅자가 즉위하여 초문왕이 되었다.
[1] 청화대학(清華大學)에서 소장하고 있는 청화전국간(清華戰國簡) 내용 중에 초나라의 역사를 담은 문헌인 초거(楚居)라는 기록에는 이름이 철(徹)로 기록되어 있다.[2] 앞의 주석에서 언급했듯이 사기의 저자 사마천이 한무제의 이름이 유철이라서 피휘를 하기 위해 기록한 이름. 참고로 이름이 같은 후대 인물인 괴철도 이와 같은 경우이다.[3] 주나라 천자만이 왕을 칭한 춘추시대임을 감안하면 대담한 일이기는 하나, 초나라가 원래부터 묘족의 국가였다가, 중원에 편입된 것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 아니다.[4] 당시 강회 지방에서 수나라는 강한 편에 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