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제안
1. 개요
중기 고려왕조의 문관. 경주 최씨 문벌귀족 출신으로 할아버지가 그 유명한 최승로다. 당대 최고의 명문가 중 하나로 할아버지, 아버지, 본인이 다 문하시중을 지내고 배향공신이 되었다.[1]
2. 생애
현종 11년(1020) 고려에서 거란과 송나라에 동시에 사신을 보내는데, 최제안은 거란에 가서 천령절(千齡節)을 하례한다. 현종 17년(1026) 태자궁의 관리인 태자우서사에 임명된다. 이 때 태자궁에 함께 임명된 관리가 황주량(당시 태자소첨사)과 최충(당시 태자중윤)인데, 이들도 최제안과 마찬가지로 훗날 배향공신에까지 이른다. 최제안은 현종 21년(1030) 중추사, 덕종 3년(1034)에 형부상서에서 정종이 즉위한 뒤 이부상서, 정종 3년(1037) 상서좌복야 참지정사 중추사를 거쳐 정종 9년(1043)에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 판상서호부사에 오른다.
정종 12년(1046)부터 국가적 종교행사인 가구경행(街衢經行)을 시작하는데, 당시 문하시중이었던 최제안이 이를 주관한다. 같은 해 8월 문종이 즉위한 뒤 평장사 최충과 함께 선정전에 불려가 정사를 논의했으며, 10월에는 6위의 각 군에 선봉군을 편성할 것을 제안하기도 한다. 11월에 병을 앓았는데, 문종이 직접 병문안을 올 정도였다. 그러나 이틀 뒤 죽으니 문종은 사흘 동안 조회를 멈추고 애도했다. 사후 순공(順恭)의 시호를 받는다. 최제안의 어린 아들은 계훈(繼勳)[2] 이란 이름을 받고, 아직 관직에 나아갈 나이가 아니었음에도 이듬해인 정종 13년(1047) 8품 관직을 받는다. 선종 3년(1086)에 문종의 묘정에 배향된다.
3. 일화
최제안의 열전에 따르면 건국군주 태조 신성왕이 직접 작성한 훈요 10조가 여요전쟁으로 인해 사라졌는데, 이를 먼 친척인 최량의 집에서 다시 찾아낸 자가 바로 최제안이다. 최제안 덕분에 현대의 후손들이 태조의 유훈을 보고 분석할 수 있게 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