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북
1. 개요
자는 칠칠(七七).[2] 호는 호생관(毫生館),[3] 삼기재(三奇齋), 거기재(居基在), 성재(星齋).'''橋下魚動, 脚下肉動'''[1]
― "부인 참한 규수감 좀 알아보시오!!!" 최북의 부친이 이 시를 보고 한 말
조선 후기의 화가. 본관은 경주. 무주에 위치한 최북 미술관에서는 본관이 무주라 되어 있다.
2. 생애
1712년 한성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으며[4] 아버지 최상여는 호조의 회계 실무자인 계사(計士)를 지냈다. 어렸을 적의 아명은 식(埴)이며 20대 무렵에 이름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
당대에 드물게 조선을 떠나본 이이기도 하다. 1748년(영조 23영) 조선 통신사의 화원으로 일본을 방문했으며 정확한 시점은 확인할 수 없지만 흑룡강을 건너 만주를 여행했다고도 한다.
강퍅한 성격 때문에 가난을 면치 못했다. 생계와 술값을 위해 평양과 동래까지 가 그림을 팔기도 했으며 가난은 말년까지 이어졌다. 죽기 직전에도 열흘 동안 굶다 그림을 팔아 겨우 돈을 마련했다고 하며 그 돈으로 술을 마시고 누워자다 결국 동사#s-3했다.
그는 49세에 죽었는데 이를 두고 사람들은 자신의 죽을 나이를 알고 칠칠이라는 자를 지어 사용했다고 평가했다.(7×7=49)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884회 방송분(2019년 10월 6일)에서 그의 생애를 소개했다.
3. 성격
자존감이 강하고 괴팍했으며 자신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 있으면 행패를 부렸다고 한다. 오만한 자를 혐오해 면전에서 면박을 주기도 했다. 그림값을 제대로 쳐 주지 않으면 그림을 다 그리고도 화폭을 찢어 놓았고 그렇다고 후하게 주면 의뢰인을 조롱했다. 또한 동료 화원들을 무시하는 언행을 자주 하기도 했다.
하루는 한 선비가 거금을 가져와 산수화를 부탁했는데 막상 그림 받는 날에 받은 그림은 산만 표현되어 있어 이를 항의했더니 "그림 밖이 물이야."라고 소리치며 내쫓았다고 한다.
높으신 분들 앞에 가서도 그의 성격은 죽지 않았다. 젊은날 높으신 분 한 분이 그림을 그릴 것을 강요하자 "남이 나를 저버린 게 아니라 내 눈이 나를 저버린 것이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한 쪽 눈을 찔러 애꾸가 되었다.
술을 매우 좋아해 하루에 대여섯 되씩 마셔댔다고 하며 술값은 집안의 서책을 팔아서 댔다.
한번은 모 대감댁에 갔는데 하인이 대감에게 최 직장[5] 께서 요셨다고 하자 노발대발하며 최 정승이라 하지 않고 왜 직장이라고 하냐고 화를 냈다. 이에 하인이 언제 정승을 한적이 있냐고 되묻자 "이놈아! 그럼 내가 언제 직장은 지냈단 말이냐!!" 라며 화를 내고는 그대로 돌아갔다. 또 한번은 어느 대감 댁에 갔는데 주인이 그의 괴이함을 보고 "저기 앉은자의 성은 무엇인고?" 라고 하자 "내 먼저 묻노니 그대의 성은 무엇인가?" 라고 소리치고는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고 한다.
모름지기 천하 명인은 천하 명산에서 죽어야 한다고, 금강산에 놀러갔을 때 자살하고자 구룡폭포에 몸을 던졌다고 한다... 다행히도(?) 나뭇가지에 옷이 걸려 목숨은 건졌다.
4. 평가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았지만 당대에도 인정받는 화가였다. 조선후기 문인 화가인 조희룡은 최북을 김득신, 이인문, 김홍도와 같은 반열에 놓았다. 최북의 또래인 문인 정범조도 최북을 정선, 심사정에 견주었다.
산수화에 능해 '최산수'라고 불렸으며 남종화의 화풍을 계승해 상상력만으로 절경을 그려냈다. 화훼, 짐승 등을 그리는 데도 재주가 있었는데 특히 메추라기를 잘 그려 최메추라기라는 별명도 있었다.
손가락에 먹을 묻혀 그림을 그리는 지두화(指頭畵)라는 당시 청나라 화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5. 그림
- 공산무인도
- 메추라기와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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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뜻은 다리 밑에 물고기가 노닌다, '''다리 밑에 고기가 꿈틀거린다.'''[2] 이름인 북(北)을 파자한 것이다. [3]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말 그대로 붓(毫)으로 먹고 산다는 뜻이다. 명나라의 문인 동기창이 보살은 붓에서 태어난다고 한 말에서 화가로서 자부심을 담은 뜻도 있다.[4] 헌데 무주를 비롯한 전라북도에서는 무주 최씨라는 이유로 전라북도 출신, 무주 출신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이를 비판하는 사람도 많다.[5] 말단 벼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