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모(18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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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최성모(崔聖模)

자중(子中)

월당(月塘)
본관
전주 최씨
생몰
1873년 1월 9일 ~ 1936년 3월 22일
출생지
한성부 북부 안동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
사망지
경기도 수원군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대통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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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2.1. 초년기
2.3. 이후의 경력


1. 개요


한국국의 독립운동가, 감리회 목사.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최성모는 1873년 1월 9일 한성부 북부 안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에서 선략장군(宣略將軍) 행용양위부사과(行龍驤衛副司果)를 지낸 최영칠(崔永七)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행연서(行延曙) 도찰방(都察謗)을 지낸 최영오(崔永五)의 양자로 입적되었으며, 어렸을 때 황해도 해주부 해주면 남본정으로 이사갔다.[1] 일찍이 통훈대부(通訓大夫) 행연서도찰방(行延曙道察訪)을 지낸 최영오(崔永五)에게 양자로 입적했다. 어려서 부모의 높은 교육열로 한학을 수학했고 1888년 15살의 나이로 식년 진사시에 3등 216위로 급제하였다.# 그러나 벼슬길에 나아간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다.
기독교대한감리회에서 펴낸 <한국감리교인물사전>에 따르면, 그의 부인 김숙현(金淑賢)은 일찍이 기독교로 개종하였는데, '주신을 믿는다'는 의미에서 이름을 김주신(金主信)으로 바꿨다고 한다. 하지만 최성모는 아내의 이런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는 외아들 경환(景煥)에게 '어머니는 어리석은 여자'라며 기독교에 물들지 않도록 단속하였다고 한다. 그러던 1905년 무렵, 최성모는 친구 이필주와 함께 우연히 남대문로의 상동교회 앞을 지나다가 교회 입구에 걸려 있는 시국대강연회 포스터에 이끌러 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그날 전덕기 목사의 시국강연을 듣고 큰 감동을 받은 그는 교회에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그 귀가한 그는 배재학당에 다니는 아들을 불러 가위를 가져오라고 하고 직접 상투를 잘라 버렸다. 그리고는 이튿날부터 상동교회에 출석했다.
1908년 세례를 받고 감리교회에 입교한 최성모는 1912년부터 서강교회 전도사로 활동했다. 당시 그로부터 신앙 지도를 받았던 최석주는 "그의 설교는 웅변이 있고 해학이 섞인 이야기로서 젊은 사람뿐만 아니라 어린아이들에게까지도 감명 깊은 말씀으로 들렸다"며 "선생은 젊은이들에게 꿈을 넣어주었고 또 한편으로 용기를 넣어주어 선생이 서강교회에 계신 동안 일본으로 공부한다고 나간 사람이 4~5명이나 되었다"고 술회했다.
최성모는 전도활동 외에도 전덕기 목사의 지도 아래 신민회 회원으로 활동했고 YMCA의 간부로도 활도애했다. 이후 서울 협성신학교에 입학한 그는 1913년 3월 졸업 후 목사 안수를 받고 북감리교 목사가 되었다. <매일신보> 1915년 5월 27, 28일자 기사에 따르면, 그는 서울 도렴동에 소재한 종교(宗橋) 교회에서 홍종숙(洪鍾肅), 정춘수, 손정도 목사 등과 함께 특별전도회를 여러차례 열었다고 한다. 얼마 후 감리교회 연례집회인 연회에서 만주 봉천교회 목사 및 내, 외몽고 선교사로 파송되었으며, 1917년 해주 남본정 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목회활동에 전념했다.

2.2. 3.1 운동


1919년 2월, 최성모는 YMCA 간사를 맡고 있던 박희도로부터 독립선언에 관한 계획을 전해듣고 적극 협조하겠나고 나섰다. 그는 2월 26일 이승훈, 오화영, 이필주, 함태영, 안세환, 이갑성, 박희도 등 기독교 측 대표들과 함께 한강 인도교 옆 흑석동 입구에 위치한 음식점에서 비밀리에 만났다. 이들은 이 자리에서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에 서명, 날인할 기독교 측 대표를 뽑았다.
2월 27일, 최성모는 정동제일교회 내에 있는 이필주의 집에서 기독교 측 대표들과 다시 만나 독립선언서와 기타 서류의 초안을 회람한 후 기독교 측 민족대표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 날인했다. 그리고 거사 전날인 2월 28일 밤에는 종로구 가회동에 위치한 손병희의 집에서 천도교, 기독교, 불교 측 민족대표들과 만나 독립선언 계획을 최종적으로 확인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선언식 장소가 당초의 탑골공원에서 태화관으로 변경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이는 경찰과 시민, 학생들과의 충돌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3월 1일 오후 2시, 최성모는 인사동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서 행사에 참석하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다. 한용운의 식사가 끝난 뒤, 민족대표 일행은 경찰에 연행되어 남산 왜성대 경무총감부로 연행되었다. 7월 28일, 그는 서대문형무소에서 취조를 받을 때 폭동이 일어날 줄 알고 있지 않았냐는 형사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나는 폭동이 일어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그 질서를 존중하라는 것은 각자 업무에 안존하라는 취지로 해석하고 있다."

이에 형사가 "예수교 측 사람은 폭동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하여 총독부 앞에서 울면서 독립을 청원하기로 하자고 상의한 일도 있는 등 폭동이 일어날 것을 염려했었다는 데 어떤가?"라고 묻자, 최성모는 "나는 그런 상의에 참여한 일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후 8월 25일 고등법원에서 심문받던 중, 검사가 물었다.

"선언서를 발표하고 청원서를 내면 어떤 이유로 조선의 독립이 된다는 것인가?"

최성모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그와 같은 청원서를 내면 정부나 총독부에서도 생각해서 독립을 허여(許與)해 줄 것으로 생각했었다."

이에 검사가 물었다.

"선언서를 발표하여 조선 안을 소요(騷擾)하게 하면 일본정부에서는 그것에 반성하고 또 강화회의에서도 그것을 토의에 올리게 한다는 것으로, 그러한 방법으로 일본으로 하여금 조선의 독립을 어쩔 수 없이 승인하게 한다는 생각은 아니었는가?"

최성모는 이에 대해 그런 생각은 없었으며, 다만 일본 정부에 부탁하여 승인을 받고 싶다는 것만을 생각하고 있었다고 답했다. 또한 검사가 언제 독립이 될 것으로 생각했냐는 질문에는 "그것은 생각하지 못했다"고 답했으며, 독립이 쉽게 얻어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그후 최성모는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마포 경성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1년 11월 4일, 그는 친구 이필주 등 17인과 함께 만기 출옥했다.

2.3. 이후의 경력


최성모는 출소 후 서강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맡았고, 1922년에 상동교회에 부임해 2년간 시무했다. 이 시기 그는 각종 강연회와 사회 활동에 종사했다. YMCA에서 예수 일대기 강연회, 조선문통신 강습회, 경성 중앙예배당 엡윗청년회 주최 강연회, YMCA 주최 일요 강좌 등이 그의 대표적인 강연 활동이었다. 그는 이밖에도 최병헌, 김종우, 김창준 등과 함께 '공창(公娼) 폐지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동아일보 1925년 10월 4일자 기사에 따르면, 최성모는 공덕리에서 1년간 전도 활동을 한 후 상동교회 목사로 있다가 1924년 6월부터는 아내와 함께 만주 봉천성으로 가서 십간방(十間房) 교회에서 시목 활동을 했다고 한다. 이후에도 대련 감리교회 등지에서 활동한 그는 귀국 후 충남 천안의 제일교회와 예산감리교회 등에서 사목활동을 수행했다. 또한 1933년 가을에 경성 성결교회 총대표의 자격으로 잠시 미국을 방문해 성경교회대회에 참석했고, 미국 17개 주에 산재한 각 교회를 둘러본 후 10월 2일 배편으로 한국에 돌아왔다.
이후 모든 직책에서 은퇴한 뒤 경기도 수원에서 요양 생활을 지내다가 1936년 3월 22일 사망했다. 향년 63세. 그의 묘소는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교현리 선산에 마련되었다가 2006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최성모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1]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신분이 평민으로 나타나나, 생부와 양부가 벼슬을 지냈고 본인 또한 진사시에 급제한 것으로 미뤄 보아 양반 집안에서 자란 것으로 보아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