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홍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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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최홍희(崔泓熙, Choi Honghi)
'''국적'''
대한민국[image]캐나다[image]
''''''
창헌(蒼軒)[1]
'''생몰년도'''
1918년 11월 9일, 일제강점기 조선 함경북도 명천군 하가면 화대리[2]~
2002년 6월 1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직할시(향년 83세)
'''학력'''
주오대학 법학과
1. 소개
2. 생애
3. 해방 후 태권도의 이름을 만들다
5. 박정희와의 불화와 캐나다로의 망명
6. 친북 및 월북 활동과 사망
7. 업적 정리와 언론 보도
8. 한계 및 기타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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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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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태권도의 확립과 보급에 기여한 인물이다. 다만 최홍희가 만든 ITF에서는 최홍희가 태권도를 만들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태권도라는 명칭을 그가 만들어 낸 것은 사실이지만, 태권도라는 무술은 최홍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3] 또 태권도라는 명칭도 최홍희가 단독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남태희와 공동으로 작명한 것이라는 견해가 많다.
그의 행적 및 그의 태권도(ITF 태권도)가 북한 태권도라는 인식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북한 사람으로 오인하지만 원래는 '''남한 사람'''이었다. 다만 그의 출생지(함경북도 명천)가 해방 후 북한 영토가 된 점은 사실이다.
태권도 초창기에 태권도 확립에 기여한 주역 중 한명이지만 너무 강한 자기 주관과 자존심으로 인해 국내의 다른 태권도 사범들과 사사건건 다툼을 벌였다. 대한태권도협회에서 주도권을 두고 다른 사범들과 권력 다툼을 벌이다가 종국에는 추방, 제명되고 말았다. 게다가 박정희 정권과도 트러블이 있어서 1970년대 해외에 망명하여 캐나다를 중심으로 그가 설립한 국제태권도연맹(ITF)를 기반으로 활동했다.
그런데 대한태권도협회와 세계태권도연맹이 자유주의 국가들 사이에 급속도로 퍼지며 올림픽 시범종목으로까지 채택되자 다급해진 최홍희는 결국 북한과 결탁하고 만다. 이후 북한의 도움을 받아 공산권 국가들에 자신의 태권도를 보급하는데 힘썼다. 그가 조직한 ITF는 한국에서는 마이너이다 보니 듣보잡 취급도 받지만, 적어도 공산권 국가에서는 남한의 태권도보다 유명세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공산권 자체가 붕괴한 후론 ITF도 조직의 세를 유지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최홍희 사후에 ITF는 북한 정부가 완전히 장악, 흡수했다.
무술인으로서 그의 평가는 엇갈리는데, 여러 증언으로 볼 때 그는 무술에만 전념하지는 않았던 듯 하나, 맨몸으로 무예만을 익혔던 다른 무술인들과 달리 육군 소장 출신으로 어느정도 학식과, 국내 유이의 합법적무력사용 집단 고위급 인물로 인맥까지 갖추고 있었다는 점이 큰 차이점이자 장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태권도라는 무술 품새에 동양 철학의 이치를 담고자 노력하는 등 이론화 작업에 능했으며[4], 이런 지적인 면모는 무술인으로써 최홍희가 갖춘 강점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초기 태권도 대부들 중에 학식이 있었던 사람이 최홍희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서울대 교수와 야쿠르트 회장을 역임한 윤쾌병, 공학도 출신으로 철도청 공무원이었던 황기 등도 있었다. 특히 서울대, 건국대 교수를 역임하고 야쿠르트사를 창업하여 사업가도 성공한 윤쾌병은 학문적 소양에서는 최홍희를 아득히 능가한다. 하지만 윤쾌병에게 태권도는 취미, 동호회 활동에 불과했고 그는 교수로서 서울대에 있다가 건국대 수의학과로 옮겨가 건대 수의학과를 성장시키데 주력했고 60년대말부터는 사업계에 투신하여 야쿠르트사를 창업, 성공시키는 등 다른 활동들이 그의 본업이었다. 때문에 윤쾌병은 초기 몇년을 제외하고 태권도의 이론화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나중에 남한 태권도계에서 큰 족적을 남긴 김운용은 최홍희와 라이벌이었지만 몇가지 측면에서 최홍희와 비슷한 점이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김운용은 '''태권도 5단'''의 실력[5] 외에도 외교관 생활을 하며 닦은 인맥, 그리고 6개 국어를 할 줄 알았던 외국어 실력으로 태권도의 세계화에 큰 업적을 남겼다.
초기 태권도의 확립과 보급에 기여한 대표적인 인물 중 한명으로서 한국 태권도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무술인이지만, 캐나다 망명 이후의 한국인 입장에선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는 친북적인 행보로 인해 남한에선 잊혀지고 만 문제적 인물로 요약할 수 있다.

2. 생애


일본 주오대학 법학과 1학년에 재학 중이던 1944년 1월에 징용되어 평양의 42부대에서 근무하였다. 그는 조선 학병을 중심으로 전국 반일동맹 조직을 도모했다가 검거되어 6년형을 선고받아 평양 형무소에서 수감되었고 해방과 함께 풀려났다. 그 후 대한민국 국군에 들어가 육군 장성이 되었다. 논산훈련소 참모장 시절인 1961년 박정희의 5.16군사 쿠데타에도 후방 부대로 참가하였다.

3. 해방 후 태권도의 이름을 만들다


최홍희 본인은 해방 전 배운 가라테를 중심으로[6][7], 여순 사건시 경찰에게 맞고 오던 개판 오분전 상태의 한국군에게 자기 몸을 단련할 수 있도록 무술을 지도할 생각을 했으며, 그가 제1군단 참모장 때 무술 시범을 본 이승만 박사가 "저것이 우리 고유에 내려오던 탁견"이라며 기뻐하자[8] '태권도(跆拳道)'라는 용어를 고안하였다. 1953년 제주에서 창설된 제29보병사단(이후 1959년에 감군으로 제20기계화보병사단에 통합)의 초대 사단장으로 부임한 후 부대이름을 '태권도부대'라고 하고[9] 장병들에게 태권도를 교육하기 시작했고, 최홍희 자신은 1955년 청도관에서 손덕성 명의로 명예 4단증을 받았다. 1955년부터 제3군관구사령관으로 1960년부터 제2훈련소장, 논산훈련소 참모장 시절인 1961년 박정희의 5.16군사 쿠데타에도 후방 부대로 참가하였다. 1961년부터 제6군단을 역임하였으며 1962년에 예편하였다. 1959년에 대한태권도협회를 창립하였으며, 여기에 이승만 대통령이 손수 "태권도"라 쓴 글씨를 하사하였다.
또한 이 '태권도' 보급의 전초기지 역할을 했던 청도관에서는 발차기를 중심으로 꾸준히 기술을 개발하였으며 특히 태권도에서 빠질 수 없는 뒤돌려차기[10][11]가 이 무렵(1960년대 초반) 창무관에서[12] 고안되었다. 또한 새로운 기술이 나오면 다른 주요 무관들과 교류전을 갖는 등 매우 의욕적으로 활동했다고 한다.[13][14]
훗날 박정희 대통령과의 불화로 캐나다에 망명하였지만, 태권도 수련은 멈추지 않았으며 특히 무게 중심을 이용하는 방법론에 중점을 두어 사인웨이브(Sine Wave)의 원리를 '체득(體得)'하기에 이른다.

4. 국제태권도연맹의 창시


최홍희는 1959년부터 1960년대 초까지 국군태권도시범단과 태권도외교사절단을 이끌고 베트남과 대만, 아프리카, 중동, 유럽 등지에서 시범공연을 하면서 태권도 국제기구를 창설해보려는 구상을 가졌다. 기구의 명칭부터 임원 구성, 규약 ,편제 등의 기초작업이 어느 정도 끝나자 1966년 3월 22일 조선호텔 로즈룸에서 국제태권도연맹을 창설했다. 창설임원은 김종필, 김완용, 김용태, 이상희, 조하리 등 최홍희의 군인맥과 정치인등이 대부분이었다. 부총재는 대한태권도협회 회장인 노병직, 사무총장은 엄운규, 기술위원장은 이종우로 되어있었다.[15] 가입국은 한국을 비롯해 베트남,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미국, 서독, 이탈리아, 통일아랍공화국 등 9개국이었다. 그러나 대한태권도협회는 국제태권도연맹이 유사단체를 만들어 파벌을 조장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국제태권도연맹의 해체를 종용함과 동시에 협회 내에 태권도 해외 보급 및 지도자 해외파견 등 대외관계를 전담할 상설기구인 국제분과위원회를 신설했다. 그러자 최홍희는 강력하게 반발에 나섰고 결국 대한체육회는 1968년 9월 3일에 업무 구분을 명확히 하기 위해 나섰다. 국제 태권도연맹은 산하 도장을 갖지 못하도록 하면서 국제 간의 친선을 도모하는 업무와 건전한 국제경기를 관장하고 대한태권도협회는 국내도장설립과 국내대회 관장 및 선수양성등의 업무를 보도록 했다. 그리고 1966년 9월 20일에는 태권도분규수습위원회가 신설되고 두 단체간의 분규를 없애려고 했다. 최홍희는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던 박정희의 지시로 이런 위원회가 생겼다며 반겨하지 않았다. 위원회에서의 합의 내용으로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1. 사범의 해외파견업무는 대한태권도협회 소관이니 당분간 태권도 국제적 보급을 위하여 대한 태권도 협회 회장과 국제태권도연맹의 총재가 협의하여 파견한다.단 1969년 9월 2일까지 만 1년간 해외 사범파견에 대한 권한을 대한태권도협회에서 완전 장악한다.'''

'''2.대한태권도협화는 국내의 기존 17개 중앙도장과 지관 과의 계열을 없애기 위해 지체없이 지역별 명칭으로 개칭한다.'''

'''3. 국제태권도연맹은 여하한 단증도 발급할 수 있으며 가맹국으로부터 4단 이상자에 대한 인준 신청이 있을 경우에는 이를 인준하고 인준서를 발급할 수 있다. 단 대한 태권도협회에 대해서는 인준권한을 위임하고 4급이상자에 대하여 국제태권도연맹에 등록만을 시키는 것으로 한다.'''

최홍희는 해외사범 파견과 단증발급은 국제태권도연맹의 고유 소관업무라고 여겼지만 대한태권도협회가 이 업무들도 자신이 하겠다고 하고 분규수습위원회의 지침대로 해외사범 파견에 대한 대한태권도협회의 동의를 얻기 위해 보낸 서류들을 무조건 회송하고, 이종우를 시켜 해외에 나간 사람들에게 자기들이 만든 것을 하라고 지시해 달라는 요구까지 했다고 분을 삭였다. 이런 분규는 1970년대 초까지 이어졌으며 결국 최홍희는 1971년 8월 분규수습위원회 전제회의에서 불만을 가지고 탈퇴했고 수습위원회는 해체되었다. 당시 대한태권도협회 제 7대 회장으로 취임한 김운용은 대한체육회에 가입한 단체는 대한태권도협회가 유일하다며 국제태권도연맹과의 차별화를 선언하기 까지 했다.

5. 박정희와의 불화와 캐나다로의 망명


국제태권도연맹대한태권도협회와의 관계가 악화되고 박정희 정권과도 껄끄러운 관계였던 최홍희는 계속해서 입지가 좁아졌다. 결국 최홍희는 1971년 암암리에 망명계획을 세우고 1972년 3월 캐나다로 망명을 떠났다.[16][17][18] 1973년에 영주권을 취득한 후 1974년 7월에는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23개국이 참여한 제 1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를 개최했다. 1978년에는 사범단을 이끌고 동유럽에 태권도를 보급했고 1970년대 말에는 북한방문을 비밀리에 추진했다. '''그리고 이것은 ITF분열의 계기가 되었다.'''[19][20] 1980년에는 태권도 시범단을 결성해 북한으로 가서 태권도를 보급하고 아들 최중화를 가족과 함께 평양으로 보내 제 2기 사범요원교육을 도와주게 하여 본격적으로 북한에서의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북한은 믿을 상대가 아니었다. 1981년 1기생 사범을 교육하고 1982년 2기생 교육을 한 뒤 3기부터는 이북자체에서 교육하겠다고 통보가 왔고 점차 사범양성 및 파견과 사범단 운영을 자체적으로 하겠다고 밝혔다.[21][22]

6. 친북 및 월북 활동과 사망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최홍희는 반한(反韓)적인 활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북한의 요청에 따라 태권도사범요원에 전력을 기울이면서 북한과 캐나다를 자주 왕래했고 이런 활동은 국제태권도연맹의 다른 인사들에게 "친북활동"으로 보이기 충분했다. 이런 일련의 활동으로 인해 최홍희를 따르는 사범은 1980년 초중반에 들어서서는 10여명에 불과했으며 그의 최측근 또한 이런 그의 친북적인 경향에 등을 돌렸다.[23] 1994년에는 태권도의 올림픽 정식종목 채택여부를 둘러싸고 WTITF간의 신경전이 이어졌다. 특히 최홍희는 세계 태권도 연맹을 가짜 태권도라고 비난하기까지 했다. 그러던 중 1994년 9월 4일에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 103회 IOC총회에서 WT의 태권도가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자 2000년대에는 두 단체와의 통합을 해보려고 했으나 WT에서는 흡수하면 모를까 화해와 통합은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면서 일축함[24]에 따라 무산되었고 2001년부터는 아들인 최중화와 갈등이 생겨 결국 최중화를 제명하고 북한으로 갔으며 2002년 평양에서 만 83세의 나이로 숨졌다.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고, ITF의 후계자로 장웅 IOC위원을 지명한 뒤 사망했다.[25]

7. 업적 정리와 언론 보도


나중에 북한의 다부작 영화 민족과 운명에서 최홍희를 주인공으로 다룬 에피소드가 제작되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젊은 최홍희(차홍기)는 공산주의 청년단에 들어갈 정도로 좌파 이념에 동조했지만, 출신성분과 불같은 성격으로 인해 월남하여 군직에 종사한다. 박정희는 처음에 최홍희를 형님으로 대우해 주면서, 최홍희는 군대에 태권도를 무술로 보급한다. 그러나 박정희는 군대가 최홍희 이하 이북 장교들의 사병으로 변모하게 될 것을 걱정하는데, 때마침 먼저 같은 이북출신으로 최홍희에게 모임을 제안했던 김형욱이 선수를 쳐서 자신이 이북 출신 모임을 사사로이 만들었다고 고백한다. 박정희는 이북 출신 장교들을 처단하기 위해 전두환을 시켜 전방의 부대가 북괴로 위장한 몇몇 부대에게 당하게 해서 최홍희를 실추시킨다. 거짓된 음모에 절망한 최홍희는 캐나다로 망명한다.

박정희전두환은 최홍희를 감시하기 위해 군대에서 최홍희가 총애했던 태권도 제자인 홍영자(가상의 인물이다)를 내세워 남한 태권도 도장을 장악하고, 최홍희를 암살하려 든다. 그러나 중정의 요원인 홍영자는 최홍희를 내심으로 사랑하고 있어 망설인다. 마침 같이 망명한 김형욱에게 올바른 민족의 길을 가르치기 위해 최홍희는 김형욱과 몇 번 접촉을 하고, 김형욱에게 미국에서 박정희의 부정을 까발릴 것을 권한다. 김형욱은 말을 따르지만 자신의 애인이 파리에 있다는 홍영자의 꾀임으로 인해 파리에 가게 되고, 거기서 요원에게 납치되어서 박정희의 총을 맞게 된다. 박정희 정권의 온갖 부정과 음모에 지친 홍영자도 전두환이 집권하자 한국 정부와의 연락을 끊고 최홍희와 국제태권도연맹에 들어가는 것으로 영화는 결말을 맺는다. 당연하지만 '''사실과는 완전히 다르다.'''

이외에는 뜬금없이 HOI2 DHR에서 대한민국을 독립시키면 장성들 중 한 명으로 출연한다. 위에 적혀있었듯이 실제로도 한국군 장성이었고 소장으로 예편했다.
최근에 들어와서는 WT 내에서도 그의 친북적인 활동과는 별개로 그가 태권도의 창시자라는 것은 받아들여지지는 않지만 태권도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받아들이는 추세인데 태권도 원로 중 한 명인 박철희의 말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26]

태권도 창시자가 누구냐라고 묻는 것 자체는 태권도의 창시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우스운 일인지는 모르지만 현재 그런 이야기들이 빈번하게 제기되고 있어 이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 할 듯하다. 최홍희 씨는 자기 자신이 태권도를 창시했다고 한다. 이 말이 옳은 말일까? 그의 주장을 인정하게 되면 현재 태권도를 하는 모든 사람이 최홍희라는 사람으로부터 태권도를 배웠다는 것이 되는데,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우선 나는 그에게 태권도라는 무예를 배워본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무술 기법 하나 배워본 적이 없다. 그가 태권도라는 명칭을 만든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태권도를 창시한 것은 아니다.' [27]


8. 한계 및 기타 논란


이처럼 중요한 업적을 남긴 한국 현대사 굴지의 무술인이지만, 명백한 한계도 존재한다.
그는 대인관계가 썩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정확히는 인품 자체에 문제는 없었지만 자기 무술철학이 너무 확고해서 주변 인물과 항상 마찰을 겪었다. 명백히 다른 무술을 가르치는 5대관을 강제로 통합하려다 5대관 관장들로부터 신임을 잃어서 결과적으로 대태협에서 쫓겨나는 단초를 제공하기도 하고, 군대 선후임 관계인 박정희와의 불화는 유명하며, 캐나다로 건너간 이후엔 평생의 파트너였던 남태희까지 ITF에 대한 해석 차이로 불화를 겪고 떠나보냈으며, 무엇보다 가장 사랑해야 하는 가족인 '''아들 최중화까지 기어이 ITF에 대한 해석 차이로[28] 부자 간의 연을 끊게 된다.''' 사실 자기 주관이 뚜렷한 것이 잘못된 건 아니지만, 최홍희는 그 정도가 심해도 너무 심했다. 5대관과의 불화로 태권도의 분열의 원인을 제공하고, 심지어 그렇게 딴 살림 차린 ITF조차 화목하게 유지시키지 못하고 아들 최중화와의 불화로 ITF 전체의 사분오열의 싹을 제공한 것은 ITF, 아니 더 나아가 태권도 전체 역사에서도 좋게 평가해주긴 어렵다. WT가 실전성 논란을 겪는 와중에 그나마 실전적인 ITF마저 점점 하락세를 타는 현 시점에선 더더욱.
별 의미없는 비판이긴 하지만, 그의 친북적 행보를 들며 공산주의자 아니냐는 비판도 있는데, '''최홍희가 넓은 의미로 친북 인사는 맞아도 최소한 공산주의자는 아니다.''' 애초에 최홍희 본인이 6.25전쟁 때 북한군을 맞아 용감히 싸운 참전용사이고, 이승만 정권 시절 갓 태어난 대한민국 육군이 강건한 토대 위에 자리잡도록 한국형 군용무술 개발까지 한 사람이다. 이런 인물이 공산주의자라는 건 말이 안 된다. 더불어 논산훈련소 참모장 시절인 1961년 5.16 군사정변에도 후방 부대로 참가하였다.
[1] 초창기 ITF 태권도를 일컬어 창헌류라고 간혹 이야기하는데, 최홍희의 호에서 유래한 것이다.[2] 現 북한 함경북도 화대군 화대읍.[3] 당시 공수도 또는 당수도라고 불리우던 가라테를 참조하여 여러 무술을 연구 통합, 한국식으로 변형시킨 것이 태권도의 시작이다. 최초는 육군 무술로 사용되면서 시작했다. 이후 최홍희는 끊임없는 연구로 가라테 색깔을 빼려고 했고 그것이 지금의 ITF 태권도이다. 현재 한국의 WTF 올림픽 태권도는 최홍희가 망명한 뒤 한국에 남아있던 태권도 단체들을 군권력의 힘으로 통합시켜 국유화시킨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마침 최배달과 이소룡을 비롯한 많은 무술가들에 의해 세계적으로 마셜아츠(무술)붐이 일던 때였고 박정희 정권은 일본의 유도를 보면서 이 때부터 올림픽 종목으로 태권도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4] 태권도라는 명칭을 고안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볼 수 있다.[5] 태권도에 대한 공헌 버프 이런 것도 아니라 순수하게 실력으로. 경력만 놓고 보면 도장 하나 차릴 수 있는 실력이다.[6] 쇼토칸 가라테[7] 태권도 원로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전부 가라테를 배웠고 해방후에는 가라테 도장을 운영하던 사람들이었다.[8] 사실 일제 강점기 시절 유입된 가라테를 나름 소화했던 것이라고 한다. 다만 최홍희 본인은 태권도라는 단어를 만든 후 우리 고유의 색채를 입히고자 부단히 노력한 듯 하다.[9] 그래서 경례구호도 '태권'이었다.[10] 최홍희가 직접 창립한 ITF에서는 이 기술이 몸의 회전을 이용하여 돌려차기와는 반대 방향으로 돌려찬다면 반대돌려차기, 단순히 상대에게 등을 보이면서 뒤를 찬다면 뒷차찌르기라고 부른다.[11] 원래 태권도에는 가라테와 똑같이 앞차기, 돌려차기, 옆차기밖에 없었다.[12] YMCA 건물을 빌려 운영했던 도장[13] 다만 뒤돌려차기의 경우, 초창기에는 "일단 피하거나 앞으로 전진하여 손기술로 제압"하는 대처법이 나와 고전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한 일화로, 1960년대 초반 뒤돌려차기가 고안된 지 얼마 안되어, 전국 주요 무도관 중 강덕원과 교류전을 치르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강맹한 위력의 뒤돌려차기에 기가 죽은 학생들이 맥을 못췄지만(당시 강덕원은 지방의 명문 학교와 연계하여 나름 상당한 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겨루기가 계속 진행되다보니 애들 눈에도 "정신차리고 피하면 이길 수 있다"는게 보였던 것. 물론 이건 말 그대로 "초창기" 때의 얘기다. 현재는 견제, 기습, 마무리 등 응용법이 많이 고안된 상태.[14] 강덕원은 군 장교로 6.25에 참전한 박철희 관장이 운영한 곳으로 앞차기, 안다리걸어차기, 손기술을 매우 유용하게 활용했다고 한다. 부드러우면서도 타격순간에 힘을 내는 것을 강조했으며, 특히 실전에서 쓸 수 있도록 팔을 뒤로 빼는 예비동작 없이 바로 뻗는 주먹 또는 수도와, 역시 예비동작이 생략된 빠른 앞차기가 이 강덕원에서 연구한 결과물이다. 티우 월남 대통령을 경호한 장교 안낙순 씨가 이 강덕원 출신이며, 예비동작없는 빠른 주먹을 수련한 분 중에는 권투로 전향해 성과를 거두신 분도 나왔다는 후문이다.[15] 다만 엄운규는 자신이 사무총장으로 일한 적이 없다고 강변했다.[16] 다만 채명신 장군은 다른 증언을 했는데. 최홍희가 말레이시아 대사를 하던 시절에 태권도 보급과 동시에 금전문제가 발생하는 바람에 대사에서 면직되고 핀란드에선가 북한으로부터 접촉이 와 (최홍희의 형은 노동당간부였다.) 북한으로 가는 것이 결정되었다고 한다.[17] 또 다른 증언에는 최홍희가 최덕신까지 포섭해 최덕신이 채명신에게 전화를 했지만 채명신 장군은 이북으로 가자는 제의를 거절했다고 한다. 신빙성은 위키러들의 몫이다.[18] 다만, 최홍희와 항상 대립을 거듭하던 대태협 초대 회장 채명신의 발언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최홍희가 망명한 이후 대태협은 군사정권의 전폭적인 지지아래 엄청난 양적 성장을 이루어낸다. 또 최홍희는 6.25때에 빨갱이를 때려잡은 공로로 육군 장성에 오른 인물로 이런 사람의 형이 북한 노동당 간부를 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19] 농담으로 볼 수 없는게 최홍희가 북한을 방문하고자 했던 건 북한도 남한과 같은 한민족이므로 태권도를 보급해야한다는 민족주의적 사고가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북한이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함으로써 ITF내 사범들간에 많은 갈등을 야기했고 이것이 분열의 단초를 제공했던 것. 사족이지만, 이를 이유로 최홍희를 친북, 좌파 성향의 인물이라고 매도하기는 어렵다. 한국 전쟁에도 참전하여 공산군에 맞서 싸운 전력도 있으며, 캐나다 시민이 된 이후 제 3국 국민이라는 지위를 활용해 북한에 태권도를 보급하려 했던 것이지 북한의 체제를 찬양하거나 공산주의를 옹호한 행적은 없다. 단, 박정희를 비롯한 당대 군벌 인사들과 불화가 있었고, 주류에서 밀려난 그에 대해 역사가 불공정하게 서술되는 면도 있다.[20] 태권도를 정치적으로 이용한 아주 좋은 예는 대한 태권도 협회 전총재 김운용이다. (본인부터 태권도인이 아니었다.) 그는 군사정권의 권력을 등에 업고 태권도의 역사왜곡을 자행하며 양적성장을 이루어낸다. 태권도를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에 대해서는 한국 정부나 한국 태권도계에서 비난할 처지가 되지 못한다.[21] 그래서였는지는 몰라도 훗날 최중화는 2008년 9월 한국정부의 승인아래 34년만에 귀국한 후 북한 태권도의 실상을 폭로했으며 그는 기자회견에서 "장웅 계열의 ITF가 북한 노동당 통일선전부전위조직"이라며 북한의 태권도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밝혔다. [22] 최중화는 최홍희의 아들이기는 하지만 최홍희와 태권도에 대한 상충된 의견때문에 항상 반목을 거듭하였다. 최홍희가 북한의 장웅에게 태권도 총재자리를 넘기지 않았더라도 절대로 아들인 최중화에게는 총재자리를 넘기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더군다나 최홍희의 부인과 두딸은 지금도 장웅을 정식 계승자로 인정하고 관련 행사에 참가하고 있다. 철권으로 유명한 황수일도 장웅 계열이다.[23] 최홍희가 북한과 일본에 태권도를 보급한 것으로 인해 사범들이 돌아섰다는 것은 확인되지 않는 왜곡된 내용이다. 몇몇의 한국인 사범들은 최홍희와 태권도에 대한 생각이 서로 맞지 않아 그의 곁을 떠난 것이지 그의 태권도 보급 활동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다만, 최홍희의 의도는 좋았다. 비록 자신이 가라테를 개량하여 태권도를 창시했지만 민족 고유의 무술을 만들었다고 생각한 최홍희는 같은 민족의 나라인 북한에 전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통일이 되고나서 하나된 태권도를 구사하는 남북한을 꿈꿔왔었다. 또한 무술은 배움에 있어 정치적 이념과 이데올로기에 구애받지 않고 초월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너무 낭만적이었던 게, 최홍희가 북한을 드나들며 태권도를 전해준 후에 북한이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후에는 후계자 결정에 있어 많은 갈등을 초래했으며 이런 갈등이 나아가 국제태권도연맹이 분열로 연결된 오늘날의 상황을 보면..[24] 최홍희는 태권도의 스포츠화를 누구보다 경계하던 사람이다. 당시 ITF태권도는 해외 특히 북미를 중심으로 엄청난 세력을 구축하고 있을 때였다. 당연히 이제 막 올림픽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WT태권도보다 도장도 많고 수련인구도 많았기 때문에 WT쪽에서 통합을 먼저 제안했을 가능성이 있다. ITF태권도의 세력이 지금처럼 약해지게 된 것은 최홍희 사후, 단체의 분열에 따른 계파 싸움과 올림픽 정식 종목된 이후 WT태권도의 급격한 성장 때문이다. WT가 최홍희에게 까이고나서 이런 식으로 왜곡해서 알리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최홍희가 태권도의 스포츠화를 싫어했다면 WT가 스포츠인 올림픽을 하든 말든 관심끊었어야 하지 않나?[25] 현재 국제태권도 연맹은 장웅계열과 최중화계열, 트란콴 계열로 갈라져 있다.[26] 출처는 허인욱의, 관(館)을 중심으로 살펴본 태권도 형성사. 한국학술정보(주).에서 가져왔음[27] 당연한 말이다. 태권도 원로중에 태권도를 배웠던 사람은 한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태권도 원로들은 일제시대때 가라테를 배웠던 사람들이고 해방후에는 일본인들이 사라진 당수도장(가라테 도장)을 그대로 넘겨받아 운영하던 사람들이었다. 최홍희가 태권도라는 이름으로 각 도장들을 통합하려 했을 때 기어이 공수 혹은 당수라는 이름을 지키려고 최홍희에게 엄청난 비난을 하기도 했다. 결국 최홍희가 외교관으로 외국을 가있는 틈을 타 몰래 대한 태권도 협회를 가라테 느낌이 물씬나는 대한 태수도 협회라는 이름으로 단체명을 바꾸었고 이걸 알게 된 최홍희는 한국에 들어옴과 동시에 다시 명칭을 대한 태권도 협회로 복구시켜 버린다. 최홍희가 망명한 이후에는 군사 정권의 힘에 굴복하여 태권도라는 이름에서 더 이상 명칭이 바뀌는 일은 없게 되었지만 태권도 원로들의 가라테에 대한 향수는 태권도의 품새와 격파 시범, 약속 겨루기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유구왕국(현 오키나와)의 항일무술이었던 당수에다 일제의 왜색을 입혀서 만들어 낸 무술이 가라테이다. 원래의 당수에는 무기술과 유술기도 존재하지만 일본 무술인 검도와 유도가 존재한다는 이유로 당수의 무기술과 유술기를 없애버리고 지금과 같은 타격기 중심의 무술을 만들어 내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작 당시의 일본인들에게는 삼등민족들이나 하는 무술로 인식되어 천시와 핍박을 받았었는데 이 가라테의 왜색을 없애려고 애를 쓴 것이 최홍희이었고 그 시작이 태권도라는 이름의 도입이었다. 극진 가라테의 최배달이 당수 본연의 모습인 실전성에 집착하였다면 최홍희는 당수를 베이스로 한 민족무술에 집착하였던 것 같다.[28] 대충 최중화는 실전성을, 최홍희는 역시 본인의 초심이었던 '한국인에게 맞는 격투기'를 추구했던 듯하다. 그래서인지 최홍희 태권도를 정식으로 계승한 장웅계는 전반적으로 WT처럼 화려하지만, 최중화계는 전반적으로 동작이 옛날 태권도처럼 소박하고 실전적인 게 특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