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1303)

 

1. 개요
2. 생애
3. 평가
4. 가족관계

崔宰
(1303년 ~ 1378년)

1. 개요


고려 후기의 인물. 완산 사람으로 본관은 전주 최씨다. 자는 재지(宰之)이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2. 생애


충혜왕 즉위년(1330) 10월[1]에 과거에 급제한다. 이 과거의 지공거는 안문개, 동지공거는 이담이었다. 후에 중부령이 되고 지서주사(知瑞州事, 충청남도 서산군)에 지방관으로 발령되는데 모친상을 당해 부임하지 못한다. 충숙왕이 복위한 시점에 필요 없는 관리의 수를 줄여나가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최재를 왕에게 추천한다. 충숙왕은 최재가 청렴결백한 관리였던 부친 최득평의 풍도(風度)를 닮았다고 하며 감찰지평의 관직을 제수한다.
부득이하게 관직에 나갔던 최재는 충혜왕이 복위하자 쫓겨난다. 실정을 벌이던 충혜왕이 으로 압송되고 충목왕이 즉위한다. 충목왕 3년(1347) 충목왕이 실정한 배경을 조사하기 위한 교정도감이 설치되고 최재는 판사[2]의 자리를 제안받는다. 최재는 "왕이 덕을 잃은 것은 왕이 스스로 한 것이 아니고 좌우 신하들이 영합했을 따름이다. 앞에서 영합하고 뒤에서 그것을 들춰내는 것은 내가 실로 부끄러워하는 것이다."[3]라며 병을 핑계로 판사직을 사양한다. 이후 전법정랑으로 옮겼다가 지흥주사(知興州事,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에 지방관으로 나가는데, 인승단(印承旦)[4]과 사이가 나빠 파직되고 전객부령에 임명된다.
충정왕 때 지양주사(知襄州事, 강원도 양양군)에 있다가 감찰정령에 임명된다. 공민왕 초에 사헌부집의에 임명되고 상서우승에 오른다. 최재는 공민왕을 도와 개혁에 앞장선다. 상주목사에 임명되는데, 공민왕 11년(1362) 홍건적을 피해 공민왕이 호종하는 신하들과 상주에 머무르게 되니 최재는 정성을 다해 공민왕에게 물자를 공급한다. 그러나 왕 주위의 여러 신하들이 소홀한 대접을 받아 최재를 비난했고, 최재는 파직된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다시 감찰대부로 기용되고 또 완산군[5]에 봉해져 전리판서가 된다.
우왕 3년(1377) 밀직부사상의에 임명되는데, 최재는 벼슬에서 물러날 것을 청해 다시 완산군에 봉해진다. 이듬해인 우왕 4년(1378)에 죽는다. 최재의 묘지명은 목은 이색이 지었으며 『목은문고(牧隱文藁)』, 『동문선』 등에서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3. 평가


고려사에서는 "성품이 강직하고 굽힘이 없어 세간에서 그를 중요한 사람으로 봤다."[6]라고 평한다.

4. 가족관계


□ 6대조: 최순작(崔純爵) : 전주 최씨의 시조
● 5대조 : 숭(崇)
○고조부 : 남부(南敷)
◆ 증조부 : 전(佺)
◎ 조부 : 정신(正臣)
■ 부 : 득평(得枰)
■ 모 : 청주 곽씨 : 감찰대부 곽예(郭預)의 딸
◇ 본인 : 재(宰)
◇ 부인 : 영월 신씨
◈ 아들 : 사미(思美)
△ 손자 : 서(恕)
△ 손자 : 원(愿)
△ 손자 : 각(慤)

◈ 아들 : 덕성(德成)
△ 손자 : 복창(復昌)
△ 손자 : 세창(世昌)
△ 손자 : 사창(仕昌)


◇ 부인 : 무안 박씨
◈ 아들: 유경(有慶, ? ~ 1413) : 참찬의정부사
△ 손자 : 사위(士威)
△ 손자 : 사의(士儀)
△ 손자 : 사규(士規)
△ 손자 : 사강(士康)
△ 손자 : 사용(士庸)
△ 손자 : 사흥(士興)








[1] 최재 묘지명의 기록, 고려사 최재 열전에서는 충숙왕 시기라고 한다. 충숙왕은 1330년 7월까지 왕위에 있다가 충혜왕이 즉위하게 되며, 이 해에 과거 시험은 충혜왕이 즉위한 뒤인 10월에 있었다.[2] 고려사 원문에서는 판관. 교정도감의 판사로는 왕후, 김영돈 등이 있었다.[3] 王之失德, 非王自爲, 乃左右逢之耳. 逢之於前, 揚之於後, 吾實恥之.[4] 몽골계 고려인 2세로 대표적인 부원배다. 후일 정승으로서 공민왕의 반원 개혁을 앞장서서 반대하다 끝내 파직된다.[5] 고려사 공민왕 세가에는 성산군(星山君)이라고 한다.[6] 性剛直不撓, 見重於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