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후(고려)

 



<colbgcolor=#FEDC89><colcolor=#670000> '''왕후
王煦 | 王脫歡'''
'''시호'''
정헌공(正獻公)
'''작위'''
계림부원군
계림부원대군
계림군공
'''성씨'''
권(權) → 왕(王)
'''이름'''
재(載) → 후(煦)
'''몽골식 이름'''
토곤(脫歡, Toγon)
'''친부'''
권부(權溥)
'''양부'''
충선왕
'''생몰년도'''
음력
1296년 ~ 1349년 7월 4일
양력
1296년 ~ 1349년 7월 19일
1. 개요
2. 생애
2.1. 양자 입적
2.2. 원나라에서의 활동
2.3. 충숙왕, 충혜왕 시기
2.4. 충목왕, 충정왕 시기
2.5. 사후
3. 평가
4. 가족관계
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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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 원 간섭기의 인물. 본관은 안동. 권부와 변한국대부인 유씨의 아들로 증조부는 도첨의참리 유승(柳陞)이다.

2. 생애



2.1. 양자 입적


권재(權載, 왕후의 처음 이름)의 큰형 권부는 일찍이 충선왕이 원나라에 있을때부터 알현하며 총애를 받는다. 하루는 충선왕이 권부에게 형제에 관해 묻는데, 권재의 이야기를 듣더니 기뻐하며 직접 만나보기도 전부터 낭장의 벼슬을 제수한다. 권재의 벼슬은 곧 정5품의 삼사판관에 오른다. 권재가 원나라에 가서 왕을 알현하니 왕은 권재를 자신의 아들로 삼고 왕씨 성과 함께 후(煦)라는 이름을 하사한다. 충렬왕이 죽고 충선왕이 복위한 뒤 왕후는 왕과 같은 수레를 타고 다니게 되며, 벼슬은 사복부정을 거쳐 사헌집의에 이른다.

2.2. 원나라에서의 활동


충선왕은 1313년 아들 충숙왕에게 양위하고 원나라로 돌아가버린다. 아직 20세가 안 된 왕후는 충선왕을 따라 대도에 간다. 충선왕이 무종에게 주청함에 따라 왕후는 원 황태자(무종의 동생 아유르바르바다, 무종 사후 인종으로 즉위)의 시구르치(速古赤, 숙위병 또는 측근)가 되고 계림군공의 작위와 함께 대도에 집과 토지를 받는다. 한편 고려에서 충숙왕으로부터 1314년 삼중대광 계림부원군, 1316년 계림부원대군 작위를 받기도 한다. 세간에서 왕후가 왕의 동생(王弟)라고 불렸다고 하니 충숙왕도 왕후를 친동생처럼 아낀 것으로 보인다.
1320년 충선왕과 가까웠던 인종이 죽고 무종의 장남 영종이 즉위하는데, 그 이듬해인 1321년 고려계 환관 임바얀투구스가 충선왕을 참소한다. 진즉에 심왕위도 조카 왕고에게 넘기고 제안받은 우승상 자리도 거절하는 등 권력에서 멀어지려고 하던 충선왕은 결국 토번으로 유배되기에 이른다. 이 때 왕후는 자기가 충선왕 대신 유배가겠다고 청하기도 한다. 얼마 뒤 왕후가 충선왕을 보러 문객 2~3명을 데리고 토번으로 가는데 황명을 받든 사신을 만난다. 최성지, 이제현 등이 1323년 원 승상에게 충선왕 소환을 요청하니 대도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왕후 등은 사신의 역마를 얻어타고 먼저 임조(臨洮, 간쑤성 린타오현)에서 왕을 만났으며 함께 대도로 돌아오게 된다.

2.3. 충숙왕, 충혜왕 시기


1325년 5월 양부 충선왕이 대도에서 죽고 왕후는 밀직부사 이능간과 상복을 입은 채로 충선왕의 영구를 받들고 고려에 온다. 충선왕의 능인 덕릉(德陵)에서 한달에 두 번씩 초하루와 보름에 사제(私祭) 지내기를 죽을때까지 꾸준히 한다.
충숙왕이 충혜왕에게 양위하고 원나라에 있을 때 심왕 왕고 등이 매번 왕위를 노린다. 충숙왕 주변의 사람들이 하나둘 배반하고 심왕의 편에 붙는데 왕후는 스스로 의(義)를 지켜 후일 간언을 듣지 않는다.
충혜왕 복위 3년인 1342년에는 원나라에 가서 한동안 내려주지 않은 충선왕, 충숙왕의 시호를 받아오기도 한다. 당시 고려 조정의 권신들은 왕후의 제안에 반대했기 때문에 왕후는 스스로를 책망하며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금액을 소비한 끝에 목적을 이룬다.

2.4. 충목왕, 충정왕 시기


충목왕이 즉위한 1344년에 원나라에 다녀오고 첨의우정승에 임명된다. 이듬해 1345년에 친모의 상을 당하는데, 친부 권부의 강권 끝에 상중이지만 우정승 업무를 보게 된다. 무신정권 시기 생겼던 인사기구 정방을 폐지해버리고 인사권을 다시 전리사(이조)와 군부사(병조)에 귀속시킨 것이 왕후가 우정승으로 있으면서 이룬 업적이다. 그러나 권문세족이 빼앗아 자기들끼리 나눠가진 녹과전(祿科田)[1]을 원 주인에게 돌려주려다 미움을 받아 1345년 12월 파직된다.
파직된 다음해인 1346년 8월에는 친부 권부마저 죽었는데, 바로 다음 달에 혜종 토곤테무르의 소환으로 상복을 벗고 원나라에 간다. 왕후는 마찬가지로 소환된 좌정승 김영돈과 함께 황제 앞에 불려가는데, 혜종은 둘에게 고려의 선왕(충혜왕)이 덕을 잃은 이유를 묻는다.

선왕(충혜왕)은 처음에는 이와 같지 않았는데, 다만 소인배가 그렇게 인도했을 따름입니다. 그 무리는 가지 않고 여전히 남아있어 또 지금 왕(충목왕)을 그르치려 합니다.[2]

혜종은 대답에 동의하며 둘에게 고려에 돌아가서 그 소인배들의 죄를 다스리라는 칙명을 내린다. 왕후 등이 이를 충목왕에게 그대로 전하니 1347년 정치도감(整治都監)이 설치되고 왕후는 4인의 판사 중 한명이 된다.
태비의 위로와 황제의 독려로 박차를 가하던 왕후의 고려 개혁 노력은 기황후의 친척 동생 기삼만의 옥사로 제동이 걸린다. 다시 판정치도감사에 임명되지만 김영돈과 의견 차이로 갈등을 빚는다. 김륜, 이제현 등이 올린 상소문에 따르면 강윤충의 방해로 1348년 왕후는 더 높은 관직이지만 실권이 없는 영도첨의사사에 임명돼 정치도감의 개혁에 착수할 수 없게 된다.
같은 해에 개경과 양광도, 서해도에서 큰 기근이 들자 국고를 열어 진휼한다. 충목왕이 재위 4년만에 병사하자 다시 정승에 임명된 왕후는 기철과 함께 섭행정동성사에 임명되고, 새 왕의 임명을 위해 이제현을 원나라에 보낸다. 1349년 혜종의 생일을 축하하러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7월 계사일 창의현(昌義縣)에서 54세의 나이로 병사한다.

2.5. 사후


정치도감의 조사 대상이었던 우정승 노책이 원한을 품고 관청에서 왕후의 장사를 치르는 것을 적극적으로 막는다. 또 운구하는 길의 역참에서 시신을 정청(正廳)에 두지 못하게 했는데, 각 역관의 아전들은 울고 부르짖으며 부모와 같이 제사를 지낸다. 공민왕이 즉위한 뒤 1352년 정헌(正獻)의 시호가 더해지고 아들은 관직에 등용된다. 공민왕 재위 전에 죽었지만 공민왕의 묘정에 배향된다.

3. 평가


사람됨이 강직하고 장중했으며, 얼굴은 크고 몸은 수척했으나 바라보면 의연했다. 평생 망령된 말을 하지 않았다. 독서를 조금 해서 대의에 통달했으니 선현의 일을 말할 수 있었다. 손님 접대하기를 좋아해 비록 낮은 선비라도 예를 다해 대접했다. 재상이 두 번 돼서 유익한 일을 행하고 해로운 일은 제거하는 것을 마음으로 삼았다.[3]

『고려사』 권110, 왕후 열전.

왕후와 김영돈은 황제(원혜종)의 명을 받들어 오랜 폐단을 정리하려 했으나 마침내 강윤충 등에게 모함을 당하니 식자들이 이를 애석하게 여겼다.[4]

『고려사절요』 권25, 충목왕 4년 12월 정묘.


4. 가족관계


  • 조부: 권단
    • 부: 권부
    • 모: 변한국대부인 유씨
      • 형: 권준
      • 형: 권고
      • 본인: 권재
      • 동생: 권겸
작은형 권고의 손자가 여말선초의 성리학자 권근이다.
  • 본인: 왕후
  • 처: 남양 홍씨
    • 아들: 왕중귀
    • 며느리: 행주 기씨
      • 손자: 왕숙
      • 손자: 왕엄
      • 손자: 왕도
왕후묘지명에 따르면 첨의평리를 지낸 홍선(洪詵)의 딸에게 장가 들어 딸과 아들을 뒀다. 딸은 원나라 사람 상좌(上左)에게 시집갔다. # 아들 왕중귀는 기철의 딸에게 장가든다.

5. 기타


  • 충선왕의 양자가 됐지만 엄밀히는 충선왕 소생 왕자가 아니기 때문인지 고려사에서는 종실 열전에 포함되지 않는다.

[1] 녹봉을 충당하기 위해 경기 지방의 토지를 인당 분급한 것이다. 쌀과 땔나무가 나는 토지를 분급하는 전시과의 보안책으로 두 제도는 공존한 것으로 보인다.[2] 先王初不若是, 但小人導之耳. 其徒尙在不去, 亦誤今王.[3] 爲人剛正莊重, 魁顔脩幹, 望之毅然, 平生不妄言, 稍讀書, 通大義, 能言先賢事. 好接賓客, 雖下士必待之盡禮. 再爲相, 以興利除害爲心.[4] 王煦金永旽奉帝命, 欲整理舊弊, 卒爲允忠等所陷, 識者惜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