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덕
1. 한국의 독립운동가
김상덕은 1892년 12월 10일 경상도 고령현 내곡면 저전동(현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저전리)의 빈농 가정에서 아버지 김성옥(金聲玉)과 어머니 김경익(金敬益) 사이에서 6남매[2]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5살 때 아버지의 권유로 고향 저전동 근처 내상리 소재 내산서당(乃山書堂)에 들어가 홍와(弘窩) 이두훈(李斗勳)의 문하에서 19살 때까지 한학을 수학했다.
21세가 되던 1912년 4월 뒤늦게 고령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이듬해 중퇴하고 1913년 경성부로 유학, 경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17년 3월 경신학교를 졸업한 그는 곧 일본에 유학, 세이소쿠(正則)영어학교를 거쳐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부에 입학하였다.
그러던 중 1919년 최팔용·백관수·김도연 등과 함께 조선독립청년단 대표로 2.8 독립 선언에 참여했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며, 그해 3월 21일 도쿄지방재판소에서 금고형을 언도받고 공소하였으나 2심에서 공소가 기각되었다. 출옥 후 1920년 3월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동방혁명대표자대회에 한국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가하였고 1923년 2월에는 상하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서 개조파로서 선언서 수정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6월 국민대표회의의 폐회 선언이 이뤄지면서 결렬되자 1924년 봄 길림성 반석현(磐石縣)[3] 으로 가 김동삼 등과 재만농민동맹(在滿農民同盟)을 조직하고 집행위원으로서 기관지 《농민보(農民報)》를 간행하였다. 이후 정의부에 참가했으나, 1928년 정의부·참의부·신민부의 통합회의가 결렬되자, 김동삼을 따라 혁신의회(革新議會)에 참여해 집행위원을 맡았다.
1932년 한국독립당 소속 군대인 한국독립군 참모를 거쳐, 1933년 한국독립당 중앙대회의 결정에 따라 신숙과 함께 난징에 파견되어 한중연합군을 조직하기 위해 중국 국민정부와 교섭하기도 했다. 1934년 3월에는 난징에서 신한독립당 창당에 참여하여 당무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35년 조선민족혁명당 창당에 참여하여 서기부원 및 중앙집행위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1942년 조선민족혁명당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자 같은 해 11월 임시의정원 경상도의원에 선임되었으며 1943년 4월 임시정부에서 구성한 선전위원회 위원 15인 중 한 사람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1944년 4월 임시정부 학무부 차장에 취임하였으며, 그해 6월부터는 학무부가 문화부로 개편되면서 문화부 차장에 취임하였다. 1945년 3월에는 문화부장에 취임하여 활동하던 중 8.15 광복을 맞았다. 그해 11월 23일 제1차 임시정부귀국단으로 귀국하였고, 이후 비상국민회의 대의원,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총무부장, 민족통일총본부 총무부장 등을 역임하였고, 1947년부터 1948년까지는 모교인 경신중학교 교장에 취임하기도 했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 민족통일본부 후보로 경상북도 고령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대한민국 국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는 민주국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곽태진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6.25 전쟁 때 납북되어 1956년 별세하였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1. 선거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2. 무한도전이 찾아헤맨 사람
외박 특집 오마이텐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