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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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寬洙
1889년 ~ ?
1. 개요
대한민국의 정치가, 언론인, 교육자, 독립운동가이자 제헌 국회의원. 본관은 수원(水原)[1] , 호는 근촌(芹村).
2. 상세
1889년 전라북도 고창군 성내면 덕산리 도덕마을#에서 아버지 백도진(白道鎭)과 어머니 고왕림(高旺林)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래로 동생 백기수(白岐洙)가 있었다. 1915년,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동아일보 창업주이자 중앙학교 교원으로 있었던 인촌 김성수가 속한 중앙학교에 들어가 교원이 되었다. 인촌과는 동향인이자 친한 사이로 알려졌으며 전북 부안 청련암에서 송진우, 김성수와 함께 동문을 수학하였던 사이이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1918년 세이소쿠(正則)영어학교에 입학했다가 그해 12월 메이지대학 법과에 입학하였다. 이듬해인 1919년, 2.8 독립 선언에 참가했다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으며 그해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9개월을 언도받고 투옥되었다. 출옥 후 1924년 졸업하여 귀국하고 조선일보에 입사하여 상무를 지냈다.
1937년, 동향인이자 친구인 인촌 김성수가 설립한 동아일보에 들어가 당시 동아일보 사장이었다가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사장 자리에서 물러난 송진우의 후임으로 동아일보 사장이 되었다. 1940년 동아일보가 폐간되었을 때 조선총독부로부터 체포되어 1개월간 투옥되었다. 이후 고향 전북 고창으로 내려가 칩거생활 지냈다. 한편, 1937년~1940년 동아일보 사장 지내던 시기였더너 일제말기에 친일행위 관련 의혹이 제기(조선총독부가 만든 관제어용단체에 그의 명의로 기록된것등)되기도 했으나, 백관수는 조선총독부로부터 작위나 재산(반대급부)을 받는 것을 일체 거절하였고, 지속적,반복적인 활동했던것도 아니었으며 1940년대 이후 백관수는 모든 활동을 그만둔 채 시골로 은둔하여 ‘은둔’이라는 방식으로 일제 조선총독부에 소극적이나마 저항했었다. 그래서 사후 민족문제연구소 및 대통령직속 친일반민족행위자 진상규명위 보고서 발간위원 측은 '백관수는 친일행위자가 아님'을 확인했다.
1945년, 8.15 광복 후, 처음에 여운형으로부터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제의가 들어왔으나 거절했다.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건국준비위원회와 송진우 사이를 절충하려 노력하였다고 알려져있으나, 실패했다. 그리고 바로 9월초 한국민주당 창당때 한민당 총무가 되었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국민주당 후보로 고창군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하였다. 2년 후인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신용욱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전쟁 중 북한군에 의해 납북되었다. 이후 행적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일설로는 북한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재북인사릉에 안치되면서, 납북되어 인생의 말년을 북한에서 보내다 사망된 것이 확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