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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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忠州 塔坪里 七層石塔.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은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탑평리의 남한강 옆 강가 언덕 위에 위치한, 전체 높이 14.5m의 화강암제 칠층석탑으로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 후반 경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본 석탑은 일명 중앙탑(中央塔)이라는 명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데,[1]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신라 제38대 원성왕 때 신라 전국토를 기준으로 남북으로 사람이 동시에 출발하여 같은 보폭으로 걸어 만난 국토의 중앙지점에 세운 것이라고 한다. 지금도 남한의 정중앙이 충북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상당히 정확하게 위치를 파악한 듯 싶다.[2]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은 1962년 국보 제6호로 지정되었다.
2. 내용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은 현재 남아있는 신라시대 석탑 중 크기가 가장 크며,[3] 7층의 지붕돌[4] 이 균형미를 갖추고 14.5m 높이로 솟아 있다. 탑평리 칠층석탑은 세월의 흐름에 의해 기단과 몸돌에 금이 가거나 약간 깨진 부분이 있는 등 소실된 부분이 있으나, 대체적으로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하지만 본 석탑도 현전하는 대다수의 다른 탑들처럼 꼭대기 지붕돌 위의 머리장식은 이미 사라지고 없으며, 머리장식 받침 정도가 남아 있다.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은 2층으로 된 기단 위에 7층의 몸돌[5] 과 지붕돌로 구성되어 있다. 본 석탑은 워낙 크기도 크고 높이도 높은지라 보는 사람에게 웅장하다는 인상을 주는데, 탑 1층의 몸돌은 크게 해놨고, 위로 올라 갈수록 몸돌과 지붕돌의 크기가 차츰 줄어들어 비례감이 느껴진다.[6] 다만, 하단부에 비해 높이가 너무 높아서 탑의 전체적인 균형감과 안정감은 덜하다는 평가를 받는다.[7]
본 석탑은 신라의 다른 거탑들처럼 기단부와 각 층의 몸돌을 여러 개의 돌들로 조립해서 만들었다. 하지만 6층의 몸돌부터는 여러개의 돌을 짜맞춘 것이 아니라 하나의 돌로 만들었다.[8] 그리고 기단의 네 면과 각 층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형 장식[9] 을 양각으로 새겨놨다. 한편 지붕돌의 하단에는 5단으로 이루어진 역계단형 받침 장식이 있으며 지붕돌의 각 모서리는 위를 향하게 들려 있는데 이는 경쾌한 인상을 준다고 평가된다.[10] 또한 지붕돌을 자세히 보면 각 모서리에 구멍이 뚫려있는데, 이는 풍경#s-2을 매달았던 흔적이라고 한다.[11] 이상에서 드러나는 탑의 건축방식과 장식들로 미루어봤을 때, 본 석탑의 축조연대는 아마도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의 현재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지만, 일제시대인 1917년 당시에는 탑이 기울고 있다고 판단하여 전면적인 해체수리를 했던 바가 있다. 이때 탑의 기단과 6층 몸돌에서 청동거울, 나무함, 은제사리함 등의 사리장엄구 유물이 발견됐으며, 이 사리장엄구 가운데 청동거울 두 점은 고려시대의 것으로 보여서, 아마도 신라때 탑을 건립한 이후 고려에 들어서 다시 한 번 사리장엄구의 봉안이 있었으리라고 추정한다.[12] 그런데 일제가 수리를 한 것 까지는 좋은데, 기단과 탑신부에 부재들을 어긋나게 끼워넣는 등 복원을 잘못하는 바람에 탑의 원형이 다소 변형되어버렸다고 한다.[13]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이 서있는 곳에는 본래 큰 사찰이 있던 것으로 보이지만, 이와 관련해 지금까지 전해지는 기록이 전무하여 더 자세한 정보는 알 수 없다.[14] 하지만 충주는 현대의 광역시와 비슷한 통일신라의 5소경 중 하나인 중원경일 정도로 당시 전국에서 손꼽히는 중요 도시였기 때문에, 이만한 탑을 경내에 두었고 지금은 이름이 잊혀진 이 절은 당시 중원경의 신앙을 대표하는 사원이었을 것이고 규모와 역할도 상당히 컸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밖에 없다.[15]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은 대체적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여 그 자체의 형태와 아름다움이 잘 남아 있으며, 현전하는 통일신라의 가장 거대한 석탑이라는 점, 당대 석탑 양식을 잘 보여주면서도 신라 중원 지방의 문화를 대표할만한 작품이라는 점 등의 가치를 인정 받아 일찍이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6호로 지정되었다.
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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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지방이 고대로부터 한반도의 중요지역이자 요충지였던 것을 반영하듯,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주변으로 선사유적과 장미산성, 누암리 고분군을 비롯하여 여러 고대 유적들이 남아 있다. 또한 탑으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국보 제205호인 충주 고구려비가 위치하고 있기도 하다.
4. 바깥고리
5. 국보 제6호
남한강의 아름다운 경관과 잘 어우러져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으로, 당시에 세워진 석탑 중 가장 규모가 크며, 우리나라의 중앙부에 위치한다고 해서 중앙탑(中央塔)이라고도 부르는 이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7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높은 탑신을 받치기 위해 넓게 시작되는 기단은 각 면마다 여러 개의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고, 탑신부의 각 층 몸돌 역시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몸돌을 덮고 있는 지붕돌은 네 귀퉁이 끝이 경쾌하게 치켜올려 있어 자칫 무겁게 보일 수 있는 탑에 활기를 주고 있으며, 밑면에는 5단씩의 받침을 새겨 놓았다. 탑 정상의 머리장식은 보통 하나의 받침돌 위에 머리장식이 얹어지는 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에서 벗어나, 이중으로 포개어진 똑같은 모양의 받침돌이 머리장식을 받쳐주고 있다.
기단에서의 기둥조각 배치,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의 짜임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인 8세기 후반에 세웠을 것으로 추측된다. 1917년 탑을 보수할 때 6층 몸돌과 기단 밑에서 사리장치와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특히 6층 몸돌에서 발견된 거울이 고려시대의 것으로 밝혀져 탑 조성 이후 고려시대에 와서 2차 봉안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규모가 커서 웅장하기는 하나 너비에 비해 지나치게 높은 듯 하여 안정감은 덜하며, 세부수법이 약화되고 있어, 일제당시 보수하면서 일부 변형되었다는 논란이 있다.
[1] 소재지인 중앙탑면의 명칭은 본래 가금면이었는데, 이 탑에서 이름을 따서 2014년에 지명을 중앙탑면으로 바꿨다.[2] 물론 통일신라시대 당시 북쪽 경계는 지금의 휴전선 라인이 아니라 더 북쪽의 대동강과 원산만을 잇는 선이었다.[3] 신라시대 탑 중에서 현존하는 최대 탑은 17m인 안동 법흥사지 칠층전탑인데, 석탑이 아닌 전탑이다. 소실되어 현존하지 않는 것까지 포함하면 81m의 황룡사지 9층목탑이 가장 높았다.[4] 이를 옥개석(屋蓋石)이라고도 한다.[5] 이를 탑신(塔身)이라고도 한다.[6]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 -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7]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두산백과 - 중원 탑평리 칠층석탑[8] 출처 : 한국사전연구사 한국불교미술대전 - 중원탑평리칠층석탑[9] 이를 탱주(撑柱)라고 한다.[10]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11]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12]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13] 출처 : 한국사전연구사 한국불교미술대전 - 중원탑평리칠층석탑[14] 다만 중앙탑 주변에 기왓장이나 약간의 유구가 남아 있어서, 여기가 절터라는 것 정도는 추측 가능하다. 출처 : 문화재청 홈페이지 - 충주 탑평리 사지(忠州 塔坪里 寺址) 조사연구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15] 비슷한 예로 마찬가지로 5소경이었던 남원시에 있는 실상사 목탑지가 있다. 여기에서 백제나 신라의 수도 유적에서나 있을법한 거대한 통일신라 목탑의 흔적이 드러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