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상사

 

實相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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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3. 실상사 목탑과 발굴
4. 실상사 고려시대 정원시설 발굴
5. 소장 문화재
5.1.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
5.2.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비
5.3. 남원 실상사 석등
5.4. 남원 실상사 승탑
5.5. 남원 실상사 동서삼층석탑
5.6. 남원 실상사 증각대사탑
5.7. 남원 실상사 증각대사탑비
5.8. 남원 실상사 철조여래좌상
6. 암자들
6.1. 백장암(百丈庵)
6.1.1. 남원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
6.1.1.1. 바깥고리
6.1.1.2. 국보 제10호
6.1.2. 남원 실상사 백장암 석등
6.2. 약수암(藥水庵)
6.2.1. 남원 실상사 약수암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


1. 개요


지리산 북쪽 남원시에 위치한 신라시대의 사찰. 호국사찰로 잘 알려져 있다.[1] 현재는 매우 아담한 절로, 쌍 석탑과 하나의 석등과 조그마한 전각들이 있을 뿐이지만, 과거에는 상당히 규모가 컸던 절로 추정된다. 심지어는 2000년 즈음에야 국내에서 흔치않은 규모의 목탑지가 발견되었다.
실상사 권역이 사적 제309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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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각 옆의 거대한 목탑지에 주목하자.

2. 역사


신라 흥덕왕 3년(828)에 지장대사의 제자인 증각대사가 당나라에서 돌아와 그의 고향이었던 지금의 자리에 실상사를 건립했다. 증각은 선종의 승려로, 그가 세운 아홉개의 절인 구산선종(九山禪宗)의 첫번째가 이 실상사다.
흥덕왕은 이 절을 세울 수 있게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해줬고 왕은 태자인 선광(宣光)과 함께 이 절에 귀의했다. 이 때문인지 증각은 선종의 유행을 일으켰고, 실상사도 계속 번창했다. 이후 통일신라 시기에 쌍탑식의 가람을 받아들여 두 개의 석탑을 세우게 된다.
조선시대 이후로는 수난이 끊이질 않는데, 세조 때 1468년에 원인모를 화재로 전소되었다는 설과 그 뒤 정유재란 때 왜구에 의해 전소되었다는 설이 있다. 어느 것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
이후 숙종 5년(1680)까지 실상사의 승려들은 실상사 안의 백장암이란 작은 전각에서 생활해야 했으며, 실상사 터에는 철불, 석탑, 석등 등만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숙종 때 왕에게 승려들이 상소문을 올려 36채의 건물을 중건하였고, 이후 순조 21년(1821)에 다시 중건을 하게 된다.
그러나 고종 19년(1882) 근처 유생들이 숭유억불과 절터를 가로챌 목적으로 방화를 해서 또 홀라당 타버리고, 결국 고종 21년(1884)에 조촐하게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참고로 조선시대에 이런 유생들의 방화는 그리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회암사 참고.
한국전쟁 당시에는 대한민국 국군공비들이 번갈아가며 점령하였지만, 다행히 월정사처럼 불타지는 않았다.
현재의 실상사는 지역사회 공동체의 구심점 역할에 주력하고 있다. 실상사를 중심으로 인드라망공동체를 만들어 대안학교(작은학교), 귀농자 마을 형성에 기여하고 있다.

3. 실상사 목탑과 발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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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발굴로 추정복원된 실상사 대목탑[2]
발굴보고서 작성당시 추정한 실상사 대목탑
1996년부터 2005년까지 발굴이 실시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초석들의 한 변이 약 23.2m 정도의 크고 아름다운 목탑지가 발견되었다. 이 정도 크기의 초석 면적은 약간(1m 미만)이긴 하지만 황룡사 9층 목탑보다도 더 큰 정도라서 대단히 큰 목탑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거기다가 칸 수도 정면 7칸 측면 7칸으로 황룡사와 같다. 그러나 이와 관련된 기록은 전혀 없기 때문에 현재는 계속 연구중일 따름이다. 남원은 현대의 광역시와 비슷한 통일신라5소경 중 하나일 정도로 당시 호남지방에서 손꼽히는 중요 도시였기 때문에 그런 남원의 고찰 실상사의 규모와 역할도 현대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컸다고 추측할 수밖에 없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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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견 당시의 모습.
이 외에도 발굴조사 결과 현재까지 30여동의 건물이 발견되었으며, 고대 사찰 가람답게 회랑과 강당 등이 확인되었다. 그 중 승방으로 추정되는 건물은 남북 7칸, 동서 5칸에 면적이 714㎡이라는 큰 건물도 발견되었다. 참고로 경복궁 근정전이 630㎡.

4. 실상사 고려시대 정원시설 발굴


현재의 실상사는 매우 아담하고 작은 규모이지만 여러가지 발굴 조사 결과 예상을 뛰어넘는 비범한 면모가 속속들이 확인되고 있는데, 그러던 와중 정말 뜬금없이 거의 완벽에 가깝게 보존된 고려시대의 거대한 정원 유적이 발굴되었다. 이곳은 원래 최근에 실상사를 중건하기 위해 새로 건물을 지으려고 하던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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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크고 아름답다. 발굴 결과 강돌을 바닥에 촘촘히 깐 평면 타원형의 독특한 모습의 연못과 여기에 물을 끌어들이는 입수로(入水路)와 물을 빼내는 배수로, 그리고 이와 관련된 것으로 생각되는 건물터 2동을 비롯한 정원시설이 발견되었다.
특히 중앙의 연못인 원지(苑池)와 관련 수로 시설은 그 규모와 완벽한 상태, 그리고 아름다운 건축 양식이 단연 관심을 끈다. 길이 16.05m에 폭 8.06m인 연못은 바닥에 강돌을 대체로 한 줄씩 편평하게 깔아 처리하는 한편 주변 호안석축(湖岸石築) 또한 같은 종류의 강돌을 쌓아올려서 만들었다. 바닥 중앙에는 다른 강돌과는 달리 청색 빛이 도는 돌을 안치했다. 이는 아마도 원지를 만들 때 기준점을 표시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돌 사이에는 명황색 점토와 숯을 깔아 방수를 했고, 뻘층이 확인되지 않는 것을 보아 연꽃류는 기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42.6미터에 달하는 직선 입수로와 그것에 맞대어 만들어진 곡선형 수로는 마치 경주의 포석정처럼 술잔을 띄워놓고 풍류를 즐기는 용도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곡수 형태의 수로는 길이 13.8m에 폭 1.0m이다.
또한 이 일대에서 고려 초기 유물이 집중 출토하는 점으로 보아 이 정원시설은 실상사 경내 목탑과 거의 같은 시기에 만들어졌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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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서 보이는 담장 왼쪽이 현재의 실상사 영역이다.
게다가 이 연못은 현재의 실상사 강역 바깥(!)에서 발굴되었는데, 따라서 고려시대의 실상사 규모는 지금보다 훨씬 더 거대한 모습이었을 가능성이 더욱 높아졌다. 물론 이러한 추측은 거대한 목탑지의 발견으로 인해 어느 정도 예견되긴 했지만, 이번의 연못지 발굴로 인해 더욱 힘을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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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헤이조쿄에서 복원된 연못.[4] 실상사 연못 또한 이것과 유사한 모습이었으리라 추측된다. 이렇게 바닥에 강돌을 깔고 맑은 물이 흐르게 만들어진 연못은 특히 선종 불교에서 선호되던 양식인데, 한반도에서 선종 양식, 아니 전통 양식의 정원 조경 자체의 명맥이 거의 끊기다시피한 상황에서 발굴된 보기 드문 정원 유적이라는 점에서 이 연못의 학술적, 예술적 가치는 정말 대단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비슷한 선종식의 정원은 춘천 청평사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현재는 복원, 활용 방안을 검토하며 훼손을 막기 위해 비닐을 덮고 흙으로 복토해놓았다고 한다.

5. 소장 문화재



5.1.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


[image] '''대한민국의 보물'''
32호

'''33호'''

34호
남원 만복사지 당간지주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비
[image]
수철화상(秀澈和尙)은 신라 후기 승려로, 실상산문의 2번쨰 창건주이며, 진성여왕 7년(893) 입적하였다. 탑호는 능가보월이다.
승탑은 팔각원당형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높이는 2.42m로, 그 조각이 상당히 섬세하다. 하대석과 상대석에는 연꽃이 조각되었으며, 탑신에는 문비와 주악상이 새겨졌다. 특히 옥개석의 기와와 서까래가 잘 남아 있는데, 우동에는 잡상이 남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지금은 사라진 상태다.
극락전을 기준으로 오른쪽에 수철, 왼쪽에 홍척의 탑과 탑비가 놓여 있다.

5.2.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비


[image] '''대한민국의 보물'''
33호

'''34호'''

35호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비'''
남원 실상사 석등
[image]
수철의 출생, 입적 및 조탑 경위가 적혀 있는 비다. 전체 높이는 2.9m, 비신은 1.68m이며 서체는 해서다.
대개의 통일신라시대 탑비와는 달리 거북이 아니라 일반적인 비석처럼 안상이 새겨진 장방형 비부에 세웠다. 비좌에는 큰 복련이 둘러져 있다. 이수에는 두 마리의 반룡이 여의주를 다투는 모습이 새겨져 있으며, 가운데에는 전서로 '''능가보월탑비'''라 음각되어 있다.

5.3. 남원 실상사 석등




5.4. 남원 실상사 승탑


[image] '''대한민국의 보물'''
35호

'''36호'''

37호
남원 실상사 석등
'''남원 실상사 승탑'''
남원 실상사 동서삼층석탑
[image]
실상사 경내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있는 팔각원당형 승탑이다. 높이는 3.2m.
상대석과 하대석에는 연꽃이 새겨져 있으며, 지붕돌의 끝에도 귀꽃이 새겨져 있으나 대부분 훼손되었다. 탑신에는 문비 외에는 별다른 조각이 없다. 상륜부는 원형의 석재로 마무리되어 있다. 옆에 석종형 부도가 하나 더 있다. 조각이 그리 우수하지는 못하다.

5.5. 남원 실상사 동서삼층석탑


[image] '''대한민국의 보물'''
36호

'''37호'''

38호
남원 실상사 승탑
'''남원 실상사 동서삼층석탑'''
남원 실상사 증각대사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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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광전 앞마당에 서 있는 높이 3.2m의 쌍탑이다. 증각대사 홍척이 실상산문을 창건할 당시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실상사의 삼층석탑은 상륜부까지 온전하게 남아 있는 탑으로 유명하다. 이곳 실상사 외에는 문경 봉암사 삼층석탑 등이 전부다. 동탑은 노반 - 복발 - 양화 - 보륜 - 보개 - 수연 - 용차 - 보주 이 모두가 남아 있으며, 서탑 역시 수연을 제외하고는 모두 남아 있다.
불국사 삼층석탑의 상륜부를 복원할 때 이 삼층석탑을 참고했다. 다만, 상륜부가 다소 화려한 감이 없지 않아 석가탑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낙수면의 경사가 상당히 세어 다소 불안정해 보인다.

5.6. 남원 실상사 증각대사탑


[image] '''대한민국의 보물'''
37호

'''38호'''

39호
남원 실상사 동서삼층석탑
'''남원 실상사 증각대사탑'''
남원 실상사 증각대사탑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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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산문의 창건주 증각대사(證覺大師) 홍척(洪陟)의 유골을 모신 승탑이다. 극락전의 왼쪽에 위치한다. 극락전 옆 문으로 들어가면 승탑이 있다.
팔각원당형으로, 상대석과 하대석에는 연꽃을 새겼으며, 중대석에는 안상을 새겼고 그 안에는 비천상을 새겼다. 탑신과 상대석 사이에는 난간을 새긴 석재가 끼여 있다. 탑신에는 문비와 사천왕을 새겼다.
탑신와 옥개석에는 목조건물과 같이 가구를 조각한 점이 눈에 띈다. 주두, 평방, 창방, 화반 등이 조각되었으며, 서까래와 기왓골도 새겼다.
상륜부는 앙화와 보륜, 보주가 남아 있다.

5.7. 남원 실상사 증각대사탑비


[image] '''대한민국의 보물'''
38호

'''39호'''

40호
남원 증각대사탑
'''남원 실상사 증각대사탑비'''
남원 실상사 백장암 석등
[image]
비는 상실되었으며 귀부와 이수만이 남아 있다. 귀부는 신라 말~고려 초 당시 정석인 귀두(거북머리) 대신 거북이 몸통에 머리만 용두(용머리) 모양으로 만드는 유행이 불어서 이름과 달리 귀두 대신 용두를 조각한 경우가 많았는데, 이 귀부는 귀두 자체에 충실한 작품으로, 그 생김이 태종무열왕릉비의 귀부와 유사하다.

5.8. 남원 실상사 철조여래좌상


[image] '''대한민국의 보물'''
40호

'''41호'''

42호
남원 실상사 백장암 석등
'''남원 실상사 철조여래좌상'''
남원 용담사지 석조여래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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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 2.66m의 철불로, 약사전 내부에 있다. 결가부좌한 상태로 사각대좌 위에 안자 있으며, 광배는 사라진 상태다.
불상의 양 손은 떨어져 나간 상태로, 불상 옆에 보관해 두고 있다. 오른손은 시무외인, 왼손은 하품중생인을 취하고 있다. 구품인 중 하나인 하품중생인을 취했으므로 아미타불로 추정된다. 현재는 손이 떨어져 나간 자리에 나무로 손을 만들어 끼워 넣었다.
얼굴은 정사각형에 가까워 다소 경직된 모습이다. 머리는 나발로 처리했으며 위에 높이 14cm의 육계가 올려져 있다.
전체적으로 철원 도피안사나 봉화 축서사의 불상과 비슷한 비율을 보이는 관계로 9세기 중엽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6. 암자들



6.1. 백장암(百丈庵)


실상사와 실상사 백장암은 5km가량 떨어져 있으며, 백장암까지 가는 길은 상당히 가파르다. 방문 시 참고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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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1. 남원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



[image] '''대한민국 국보 제10호'''
'''남원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
南原 實相寺 百丈庵 三增石塔


'''소재지'''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대정리 975
'''분류'''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탑
'''수량/면적'''
1기
'''지정연도'''
1962년 12월 20일
'''제작시기'''
통일신라시대 9세기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으로, 석등(보물 제40호)과 함께 상당히 정교한 통일신라 조각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일반인이 대충 보기에는 타 석탑과 다를 바가 없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통일신라기 이형탑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을 만큼 독특하다. 일반적으로 2층(혹은 단층)기단으로 이루어진 기단부가 단순히 받침돌 하나로 생략되었으며, 각 층에는 정교한 조각들이 새겨져 있다. 초층 탑신에는 보살(普薩)과 신장(神將)을, 2층과 3층의 탑신에는 천인(天人)[5]이 조각되었다.
지붕돌 밑면 층급받침이 위치해야 할 곳 역시 조각들로 채워져 있다. 1~2층에는 연화문이 새겨졌으며, 3층에는 삼존상이 새겨졌다. 각 층 탑신 하단에 새겨진 난간은 파만자(破卍字)난간으로, 신라만의 독특한 난간 양식이다.
상륜부 역시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수연과 용차만을 제외하고는 모두 완전히 남아있다.

1980년대 대한뉴스에 방영 된 모습(31초)

6.1.1.1. 바깥고리


6.1.1.2. 국보 제10호

실상사는 지리산 천왕봉 서편에 위치한 절로, 통일신라 흥덕왕 3년(828)에 홍척(洪陟)이 창건하였다. 이 곳에서 북쪽으로 얼마쯤 가다보면 백장암이 나타나는데, 실상사에 딸린 소박한 암자로, 그 아래 경작지에 이 탑이 세워져 있다.

낮은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각 부의 구조와 조각에서 특이한 양식과 수법을 보이고 있다. 즉, 일반적인 탑은 위로 올라갈수록 너비와 높이가 줄어드는데 비해 이 탑은 너비가 거의 일정하며, 2층과 3층은 높이도 비슷하다. 층을 이루지 않고 두툼한 한 단으로 표현된 지붕돌의 받침도 당시의 수법에서 벗어나 있다. 또한 탑 전체에 조각이 가득하여 기단은 물론 탑신에서 지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조각이 나타난다. 기단과 탑신괴임에는 난간모양을 새겨 멋을 내었고, 탑신의 1층에는 보살상(菩薩像)과 신장상(神將像)을, 2층에는 음악을 연주하는 천인상(天人像)을, 3층에는 천인좌상(天人坐像)을 새겼다. 지붕돌 밑면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는데 3층만은 삼존상(三尊像)이 새겨져 있다.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되는 이 탑은 갖가지 모습들의 조각으로 화려하게 장식하는 등 형식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구조가 돋보이고 있어, 당시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석탑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6.1.2. 남원 실상사 백장암 석등


[image] '''대한민국의 보물'''
39호

'''40호'''

41호
남원 실상사 증각대사탑비
'''남원 실상사 백장암 석등'''
남원 실상사 철조여래좌상
높이 2.5M로 국보 제10호인 백장암삼층석탑 뒤에 서 있다.
지대석에는 안상과 복련이 새겨졌고, 상대석에는 앙련이 새겨져 있다. 간주석에는 아무것도 새겨지지 않았다.
앞의 삼층석탑과 같이 파만자난간이 새겨졌다.

6.2. 약수암(藥水庵)


실상사와 마주보고 있는 지리산 자락에 위치한 작은 암자다.

6.2.1. 남원 실상사 약수암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


[image] '''대한민국의 보물'''
420호

'''421호'''

422호
백장암청동은입사향로
'''남원 실상사 약수암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
남원 선원사 철조여래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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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화를 조각처럼 나타낸 목각불탱으로, 국내에 6개만이 남아 있다.[6] 하단 중앙부의 아미타여래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팔대보살과 제자상을 배치했다.
목각불탱 중에서는 그 크기가 아담한 편이나, 조각된 불상의 수가 적어 각 불상의 크기는 큰 편이다.
현재는 금산사 성보박물관으로 이전되었다.

[1] 일본이 흥하면 실상사가 망하고 일본이 망하면 실상사가 흥한다라는 전설이 있다.[2] 목탑에 하양식으로 복원도를 그린것이 인상깊다.[3] 비슷한 예로 마찬가지로 5소경이었던 충주시에 있는 한국 최대의 석탑인 중앙탑이 있다.[4] 선종(禪宗) 양식의 정원이라는 말도 있는데, 일본 나라시대에는 아직 선종이 전래되지 않았고, 가마쿠라시대에나 선종이 전래되므로 선종 양식의 정원보다는, 경주 월지(안압지) 같은 정원이라고 보아야 한다.[5]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형태이며, 2층 탑신에 새겨진 것들은 입상으로 면당 2구씩 배치되었으며, 3층의 것들은 좌상으로 면당 1구씩 배치되었다.[6] 남원 실상사 약수암, 서울 경국사, 예천 용문사, 문경 대승사, 상주 남장사 보광전, 상주 남장사 관음선원. 일반적으로 불상 뒤에 불화를 배치하는 것처럼 불상의 뒤에 목각불탱을 세워 놓아 불화를 대체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