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밀로 카보우르

 



'''이탈리아 통일 삼걸'''
'''카밀로 카보우르'''
주세페 가리발디
주세페 마치니
[image]
'''카밀로 카보우르
Camillo Paolo Filippo Giulio Benso
'''
'''본명'''
카밀로 파올로 필리포 줄리오 벤소
'''출생'''
1810년 8월 10일 샤르데냐 왕국 토리노
'''사망'''
1861년 6월 6일
'''국적'''
이탈리아 왕국 [image]
'''직업'''
정치가, 외교관
1. 개요
2. 생애
3. 정치적 행보
4. 기타


1. 개요


카보우르·첼라렝고·이솔라벨라 백작 카밀로 벤소(Camillo Benso, conte di Cavour, di Cellarengo e di Isolabella, 1810년 8월 10일 ~ 1861년 6월 6일)는 이탈리아의 정치가이자 외교관이다. 본명은 '카밀로 파올로 필리포 줄리오 벤소(Camillo Paolo Filippo Giulio Benso)'이다. 카보우르는 피에몬테에 위치한 도시이자, 그의 작위를 상징하는 영지(領地)이다. 피에몬테어 사용 지역이라서 이래저래 표기에 혼란이 있다보니[1] 이탈리아어 치고 드물게 Cavour로 쓰고 '[kaˈvur\](카부르)'로 발음하는 예외적 사례인데, 외래어 표기법이 만들어질 때 이런 예외를 인지하지 못해 표기가 '카보우르'가 됐다.[2]

2. 생애


나폴레옹 치하의 이탈리아 왕국[3]토리노에서 제5대 카보우르 후작 미켈레 안토니오 벤소(Michele Antonio Benso, marchese di Cavour)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으며, 열살에 토리노 사관학교에 보내졌고, 1824년 6월에는 사르데냐의 왕, 카를로 알베르토의 시종이라는 칭호를 수여받았다. 그는 강한 고집으로 인해 사관학교의 규율에 잘 적응하지 못했으며, 한 번은 사관학교 내에서 금서로 지정된 책을 열람해 빵 하나와 물만으로 삼일을 버티도록 처벌받은 적도 있었다. 그래도 그는 수학 분야에 뚜렷한 재능을 보였기 때문에, 1827년에 사관학교를 성공적으로 수료하고 공병 장교로 사르데냐 왕국의 군대에 입대했으며, 1831년 11월 카를로 알베르토 국왕의 행보에 거부하고 사임할 때 까지 군에서 복무했다. 그는 이후 가족의 영지였던 그린자네(Grinzane)를 1848년, 혁명의 물결이 피아몬테 왕국에 미칠 때 까지 관리하였다. 그는 정치적인 변화에 경제적인 변화가 선행된다고 믿었기 때문에 철도, 운하등의 기반 시설과 농업 기술에 대한 투자에 적극적이었다. 그는 증기 기관의 열성적인 후원자였으며, 이탈리아인 지주로써는 최초로 화학 비료를 도입하기도 했다.

3. 정치적 행보


1847년에 《리소르지멘토》 지를 발간하여 사보이 가를 중심으로 하는 이탈리아의 통일을 제창하였다. 그 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눈에 들어 1852년 사르데냐 왕국 수상의 자리에 오르고 자신의 기량을 펼치기 시작한다.
크림 전쟁에 참전하여 훗날의 통일전쟁 수행에 있어 강대국인 영국과 프랑스의 도움을 받고자 했으며[4] 결국 이러한 외교전략은 성공을 거두어 나폴레옹 3세로부터 이탈리아 통일을 지원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리고 롬바르디아를 차지하고 있던 합스부르크 왕가를 몰아내기 위해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와 연합하여 1859년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이 발발, 프랑스군의 지원을 받으며 대(對) 오스트리아 전쟁에 나섰다. 사르데냐-프랑스 연합군은 오스트리아군을 완파하고 전면적 승리를 거두기 직전까지 나아갔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프랑스군이 빌라프랑카 강화 조약을 맺어 전쟁터에서 일제히 발을 빼는 배신을 행함과 동시에 나폴레옹 3세는 사르데냐 왕국에 여태까지 얻은 성과로 만족하고 전쟁을 멈추라는 권고를 했다. 프랑스의 배신에 격분한 카보우르는 단독으로라도 대 오스트리아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지금까지 얻은 성과조차 모두 날리고 프랑스까지 적대할 수는 없다는 판단에 나폴레옹 3세의 권유를 받아들여 전쟁을 멈추고 북이탈리아 일대에서 오스트리아 세력을 축출하는 데에 만족했다. 그러나 여전히 베네치아는 오스트리아가 지배하고 있었으며, 피렌체, 로마 등의 중부 이탈리아는 병합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1년 후 사르데냐 왕국은 중부 이탈리아를 병합하는 조건으로 니스와 사보이를 프랑스에 내주게 된다. 사르데냐 왕국은 사보이 왕가의 발원지인 사보이 지역까지 넘길 정도로 중부 이탈리아의 병합과, 나아가서는 이탈리아의 통일을 간절하게 원했던 것이다. 1860년에는 로마와 [5] 북부지방의 일부를 제외한 지역에서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중-북부 이탈리아를 장악한 대(大)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을 건설했다. 또한 그 해의 남부 이탈리아의 양시칠리아 왕국를 전복시키려는 가리발디의 원정을 원조하였고, 원정이 대성공으로 끝난 1861년 양시칠리아 왕국까지 사르네댜-피에몬테에게 합병되면서 로마와 베네치아를 제외한 이탈리아 전 지역을 통일하는데 성공하자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를 초대 국왕으로 한 통일 이탈리아 왕국을 수립한다. 카보우르는 통일 이탈리아 왕국의 초대 총리로 임명되었으나 신생 통일국가에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아직 회복하지 못한 로마와 베네치아를 수복해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격무에 시달리던 중 말라리아에 걸려 총리가 된 지 3달 만인 1861년 6월 6일 사망한다.

4. 기타


이탈리아 해군의 전함인 콘테 디 카보우르급 전함과 항공모함인 콘테 디 카보우르급이 이 사람의 이름을 따와서 명명되었다.
[1] 피에몬테어에서는 o가 /u/ 발음이라 Cavor로 쓰고 '카부르'로 읽는다.[2] 그런데 1980년대 말 계몽사 학습만화세계사(박흥용 그림,이원복)이 감수)에서는 '카밀로 카부르'라 표기했다. [3] 카밀로 카보우르가 건국에 있어 혁혁한 공을 세운 이탈리아 왕국과는 동명의 다른 국가이다. 나폴레옹이 세운 괴뢰국.[4] 특히 프랑스의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카보우르 백작 그 자신의 어머니가 프랑스인이었으며 게다가 자신의 대부모(代父母)가 무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동생 폴린(Pauline)과 그의 남편 카밀로 보르게세(Camillo Borghese)였기에 프랑스의 도움을 많이 받았던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이름인 카밀로도 대부의 이름을 따 온 것이다.[5] 이 당시 로마는 교황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