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세페 가리발디
1. 개요
이탈리아 통일의 영웅이자 혁명가, 군인, 정치가.
좀 과장해서 표현하면 이 사람이 역사에 등장하면서 사실상 이탈리아가 탄생한 것이나 다름없다. 로마제국이 붕괴하고 가리발디가 등장하기 전까지 이탈리아는 통일국가였던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 인명사전에서는 유리 가가린과 함께 맨 앞자리를 차지하던 인물이기도 하다.
2. 생애
사르데냐 왕국 니스에서 한 선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사르데냐 왕국은 나폴레옹한테 밀려 사르데냐 섬으로 도망친 상황이었고 니스를 비롯한 피에몬테 지방은 프랑스의 일부로 합병당한 상태였기에 출생 당시의 이름은 프랑스식인 조제프마리 가리발디(Joseph-Marie Garibaldi)였다. 사르데냐 왕국의 해군에 들어간 것이 그의 군인으로서 경력 첫 줄을 장식한다. 아직 국가로서의 이탈리아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 오스트리아 제국의 통치 하에 있던 조국 제노바의 독립을 추진하던 주세페 마치니에게 감화되어 청년 이탈리아당에 들어간 것이 혁명가로서의 경력 첫 줄이다. 이 때가 1834년, 당시 아직 강대했던 오스트리아 제국이 이러한 민족 운동을 내버려둘 리 없었고, 그는 주세페 마치니와 함께 프랑스로 망명하게 된다. 나폴레옹이 끌어내려지고 복고왕정이 세워진 어수선했던 프랑스에서도 그들은 청년 유럽당을 세워 활동했지만 실패해 스위스에서도 쫓겨나고 런던으로 향하게 된다.
이 와중에 가리발디는 1836년 대서양을 건너 미대륙으로 와 리오그란데와 우루과이의 혁명전쟁에 참전했다. 군인과 혁명가로서의 이름을 올리고 있던 가운데 그는 조국의 이탈리아 통일운동(Risorgimento, 1848)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고 귀국한다. 사르데냐-프랑스 연합군이 롬바르디아를 장악하는데 큰 힘이 되었으나 1860년 그의 고향이었던 니스와 사보이가 프랑스에 할양되자 이에 반발, 비정규군을 소집해 프랑스령 니스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이런 위험한 짓거리를 방관할 수 없었던 카밀로 카보우르는 가리발디의 측근들을 적극 이용해 남이탈리아행을 유도했다.
그러자 그는 냅다 나폴리와 시칠리아 지방을 점령한다. 그가 조직한 붉은 셔츠단의 위명이란 이루 말할 수 없어서 양시칠리아 왕국은 무혈개선을 했을 정도였다. 붉은 셔츠단은 민병대였음에도 불구하고 강철 같은 군기를 자랑했고 행군 도중 길가의 오렌지 나무에 열린 오렌지 1알조차 따먹지 않았을 만큼 대민피해 방지에 철저했다고 한다. 당시 남부 이탈리아에서 가리발디의 인기는 절대적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가 마음만 먹으면 남부 이탈리아의 독재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사르데냐 왕국의 카보우르 역시 가리발디가 직접 왕이 되려 하거나 최소한 기득권을 주장하지 않을까 염려하며 가리발디를 경계하기도 했다. '''그러나 가리발디는 두말 없이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를 이탈리아의 왕으로 인정하고 자신의 점령지 전체를 헌납했다.'''
이후 카프레라 섬으로 물러났으나, 로마 병합이 지지부진하자 1862년과 1867년에 팔레르모에서 냅다 군대를 만들어서 로마 탈취를 시도하였다가 실패, 카프레라섬에 다시 연금되었다.
사실 정치가로서의 역량은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지만,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시대의 영웅이자 애국자로 기억되고 있다. 정치가로서는 그다지 역량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군인으로서는 상당한 역량을 발휘해서 이탈리아 통일 이후에도 여러번 이탈리아 군을 지휘해서 승리했다. 그런데 이런 그의 군사적 승리는 그가 순수하게 군인으로서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기 보다는 병사들이 그를 너무나 존경해서 그가 지휘를 맡으면 평소보다 월등히 잘 싸웠던 이유가 크다.
가리발디에 대한 대중의 이런 존경은 단순히 이탈리아에서만 그치는 게 아니었다. 가리발디가 자신의 점령지를 사르데냐 왕국에 헌납하고 이탈리아 왕국을 세운 뒤로는 전 유럽을 넘어 아메리카 대륙에서도 엄청난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이 사람이 살아 있을 때 받은 경모의 감정은 21세기 현재 전 세계의 진보주의자들이 체 게바라에게 보내는 감정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유럽의 골수 왕당파나 극단적인 보수주의자를 제외하고 거의 전 유럽인과 아메리카 대륙인들이 그를 자유주의와 민족주의[1] 의 상징으로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으로 그를 존경했는데 실제로 에이브러햄 링컨은 남북전쟁이 일어났을 때 가리발디에게 북군의 총사령관 자리를 제안했지만 가리발디가 사절한 일도 있었다.[2] 이후 1864년 런던을 방문했을 때는 그의 얼굴이라도 한 번 보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는데 한 명의 외국인이 영국에서 이 정도로 국민적 환영을 받은 일은 역사적으로 거의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가리발디의 업적이 너무 큰 나머지, 이탈리아인 중에는 아직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날로 먹은 사람이고 진짜 왕 대우받을 사람은 가리발디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많이 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도 정치업적이 괜찮은 편인데도 말이다.[3]
3. 여담
다른 이탈리아 통일영웅인 카보우르를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그가 이탈리아 통일을 위해 가리발디의 고향인 니스를 프랑스에 팔아버렸기 때문. 카보우르는 프랑스의 도움을 얻기 위해 정치적으로 니스보다 훨씬 중요한 지역인 사보이아[4] 까지 팔 정도로 이탈리아 통일을 무엇보다도 우선시하고 있었다.
이탈리아 왕국 해군의 경순양함 주세페 가리발디는 그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탈리아 해군의 장갑순양함 주세페 가리발디급 장갑순양함, 항공모함 주세페 가리발디급 항공모함도 그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캡콤의 액션게임 나이츠 오브 더 라운드에서 가리발디에서 모티브를 얻은 걸로 보이는 최종 보스가 등장한다. 이름도 같은 가리발디.
멕시코의 수도인 멕시코 시티에 가면 가리발디 광장이 있는데 이 사람을 기린 것은 아니고 그의 손자인 주세페 가리발디 2세를 기리고자 만든 것이다. 멕시코 혁명 당시 프란시스코 마데로 휘하에서 혁명군을 도와 전투를 지휘한 주세페 가리발디 2세를 기리고자 1920년에 현재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1] 당시의 민족주의는 지금처럼 자민족 중심주의라기 보다는 이상적 민족 자결주의에 가깝다.[2] 미국에서 노예제를 완벽하게 폐지해준다면 북군에서 복무하겠다는 조건을 걸었는데 당시 사정상 완벽한 폐지는 불가능했다. 가리발디도 그걸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을 테니 완곡한 거절에 가까울 것이다.[3] 이건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친손자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파시즘과 베니토 무솔리니를 용인해 나라를 재앙에 빠뜨려서 그 할아버지에 대한 이미지도 같이 나빠진 게 크긴 하다.[4] 왕실의 본관이다!